소설리스트

34화 (34/200)

잠재력을 보는 은행원 034화

산탄초넬로 죠사벨라 숲의 세계수.

33차원에 남아 있던 마지막 신목.

이 거대한 나무가 유사 이래 처음으로 엘프의 손에 의해 잘려 나간 결과,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 일어났다.

세계수에 살고 있던 네 정령들은 나무가 잘려 나감으로써 분열되었고, 각각의 분열체는 독립된 영혼으로 다시 태어났다.

주교를 섬기던 불의 정령과 물, 땅의 정령, 그리고 대정령으로 진화한 바람의 정령 에코까지.

네 정령에서 쪼개져 나온 분신들은 세계수의 조각에 깃든 채 김지안의 독신 숙소에 오게 되었다.

“규규(반갑다 제군들, 준비는 되었나).”

“삐뀨(구원자를 위해서라면 무얼 못할까).”

정령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작게 인사를 나누었다.

세계수는 원시 엘프들과 정령들에게 있어 세상의 전부.

그들은 자신의 세계를 구해 낸 사내에게 작은 선물을 하기로 결심했다.

-화아악!

정령들의 몸에서 흘러나온 기운이 스마트폰 케이스와 책상을 뒤덮었다.

무에서 유를 만들어 내 33차원의 자연을 운행하는 네 가지 정령의 협력 아래 세계수가 품은 생명력이 각성했다.

-고고고고…!!!

텅 비어 있던 책상 위에 두꺼운 토양이 쌓였다.

그 위에 스며드는 촉촉한 밤안개.

6-2차원에는 존재하지 않는 난쟁이 잔디가 자라나고 자그마한 새싹들이 움텄다.

책상 위에 엎어 둔 스마트폰 케이스 위에 나타난 건 이글거리는 손톱만 한 불덩이.

불의 정령이 지닌 태양의 온기가 비옥한 흙을 뚫고 나온 새로운 생명들에게 빛의 세례를 내렸다.

과도한 열기를 식히는 건 정령이 일으킨 바람.

순식간에 자라난 손바닥만 한 나무 위에 생겨난 구름이 천천히 움직이며 가랑비를 내렸다.

책상 위의 시간은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태엽을 빠르게 감은 것처럼 흘러간다.

풍성하게 우거진 나뭇잎 사이에서, 나무가 만든 그늘 아래에서.

각양각색의 꽃이 차례차례 피어나며 화사한 색채를 뽐내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단연 눈길을 끄는 건 스마트폰 케이스 위에 뿌리를 내린 굵직한 나무.

실제 높이는 사람의 상반신 정도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 아래에 자란 다른 나무나 꽃이 너무나도 작은 탓에 세계수처럼 보일 정도였다.

“맞아. 미쳤다니까. 자일리니 주교가 아예 묘목을 태우려 하더라고. 그거 막으려고 내가―”

통화하느라 여념이 없는 김지안의 책상 위에 완성된 것은 어느 봄날의 풍경.

세계수와 그 주위를 에워싼 산탄초넬로 죠사벨라 숲을 담아낸 조그마한 디오라마가 방 안에 싱그러운 풀 내음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창문 열어 뒀나. 왜 바람이….”

그리고 마침내, 전화기를 귀에서 뗀 김지안이 고개를 돌려 책상을 보았다.

바로 그 순간.

“…….”

산들바람이 김지안을 휩쓸고 지나갔다.

흐드러지게 피어난 보랏빛 꽃잎이 흩날린다.

한 폭의 그림과도 같은 광경.

새로운 봄을 맞이하기도 전에 가지가 잘려 나가 꽃을 피울 수 없었던, 자신이 품어 온 이들의 새로운 미래를 축복할 수 없었던 위대한 나무가.

정령들의 힘을 빌려 잘려 나간 육신의 파편을 통해 메시지를 던지려 하고 있었다.

[고마워요―]

바람에 휘날린 작고 작은 꽃잎들이 허공에서 마찰하며 소리를 발했다.

본래는 사람에게 닿을 수 없는 목소리.

나이테의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어 평생 밖으로 꺼낼 일이 없는 세계수의 외침은, 그 영혼의 울림은 김지안에게 닿았다.

-휘익

한 줄기 꽃바람이 얼굴을 쓰다듬고 지나간 직후, 김지안은 자신의 볼을 타고 따뜻한 무언가가 흐르는 것을 깨달았다.

“…….”

이유를 알 수 없는 눈물에 당황하면서도 김지안은 침착하게 자신의 책상 위에 펼쳐진 또 하나의 산탄초넬로 죠사벨라 숲을 바라보았다.

그곳에선 세계수의 조각으로 만든 스마트폰 케이스 주위를 자그마한 정령들이 떠돌면서 형형색색의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 모습은 김지안의 눈에 마치 정령들이 자신들은 괜찮다고, 세계수 역시 베여 없어진다고 사라지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비쳤다.

“그런 거였구나.”

김지안은 깨달았다.

툴레아의 선물은 가지에서 잘려 가공되어도 여전히 나무의 일부로서 살아 있었다.

엘프들이 세계수가 생명의 근원이라고 경전에 적어 둔 건 거짓이 아니었다.

나무는 충분히 그렇게 불릴 만한 무언가를 지니고 있었고, 그에 더해 자아까지 가지고 있었다.

33차원에 자생하는 신성한 나무.

그것이 지닌 강인한 생명력은 나무토막이 되어도 여전히 그 안에서 살아 숨 쉬고 있다.

자신에게 의지하는 모든 이들에게 거처를 나눠 주는 자애로운 거목은 수천수만 조각으로 잘려 나갔지만 그 힘을 잃지 않았다.

비록 정령의 손길을 통해 새로운 형태를 갖추게 되었어도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토막이 나 가공된 세계수의 일부는 여전히 땅에 굳건히 뿌리를 내린 본체와 이어져 있는 것처럼 여전히 자신의 본분을 다하고 있었다.

과거 33차원에 세계수가 몇 그루가 있든, 똑같이 그 안에 거하는 이들에게 생명의 축복이 임하던 것처럼.

나무가 수천수만 조각으로 쪼개지더라도 그 조각 역시 같은 힘을 지니고 있다.

이는 세계수가 자신에게 의지해 살아가는 존재들과 묘목을 위해 목숨을 내려놓기로 결심한 결과였다.

나무는 스스로를 생명력이라는 개념 자체로 승화시켰다.

생과 사의 거대한 고리에서 벗어나 그 주위를 순환하는 초월적인 무언가가 되어, 실체에 구속받는 일 없이 존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한 번 불멸성을 획득한 이상 그 껍질과 섬유질이 쪼개지고 조각낸다 해도 달라지는 건 없다.

가구의 모습이든, 아니면 전화기를 담아 두는 용기든, 어떠한 형상을 취하든 간에.

산탄초넬로 죠사벨라의 세계수는 영원히 살아갈 것이다.

“하여튼… 툴레아 대표님도 통이 크시다니까.”

모두가 필요한 것을 하나씩 갖게 되었다.

은행원은 실적을.

엘프는 미래를.

정령은 동포를.

그리고 나무는 영원을 손에 넣었다.

이 이상 만족스러운 결말은 없을 터.

“다들 키키와이가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어.”

자신의 주위를 빙글빙글 날아다니는 새로운 룸메이트들을 바라보며, 김지안은 작게 웃었다.

* * *

차원신용금고의 행원들에게 키키와이 다차원 출장소가 어떤 곳인지 묻는다면 대부분은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키키와이 출장소요? 완전 꿈의 직장 아닌가요?’

‘공기 좋지, 물 좋지, 선남선녀 많지….’

‘승진 코스라잖아요. 본점 엘리트 중의 엘리트만 들어갈 수 있다던데.’

키키와이와 그곳에 자리 잡은 다차원 출장소에 관한 소문은 대부분 사실이었다.

구D의 제안에 구C와 구E의 중진들까지 합세하는 형태로 만들어지는 차원신용금고의 세 파벌이 힘을 모아 설립한 점포.

안전한 다차원 도약 기술이 적용된 출입구가 최초로 도입되어 그동안 영업점을 전개하지 않았던 차원의 고객들을 끌어모을 수 있을 거라고 기대받는 업계의 최전선이다.

…라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 이는 어디까지나 표면적인 정보에 지나지 않는다.

그 실상은 구D, 즉 행장이 이끄는 파벌이 행 내 갈등을 없애기 위해 깔아 둔 판에 다른 두 파벌이 숟가락을 얹은 것에 지나지 않았다.

애초에 이것은 구C와 구E에도 존재하는 극소수의 비둘기파의 협력 덕에 시작할 수 있던 계획.

당연히 그 두 파벌을 지배하는 대다수의 매파들은 이를 탐탁지 않게 여기고 있었다.

‘처음에만 협력하는 척하면 됩니다. 최대한의 이득을 취할 수 있을 때를 노려 배신하는 거죠.’

그들이 협조한 건 어디까지나 새로운 비즈니스 찬스를 활용해 심어 둔 에이스가 타 파벌의 행원보다 큰 실적을 내게 하기 위함이다.

말하자면 적과의 동침.

주도권을 잡은 순간 다른 두 파벌을 출장소에서 밀어내고 모든 이득을 독점하려는 것이 구E와 구C 출신 간부들의 계획이었다.

만일 그게 어렵다면 점포 운영을 방해해 제대로 된 실적을 올릴 수 없도록 만들면 된다.

출장소를 책임지고 있는 건 구D의 실세인 슬리크 엘라마.

그가 책임을 지고 좌천당한다면 자신들의 파벌이 더욱 좋은 위치를 차지할 수 있다.

게다가 추가로 점포의 상황이 악화된 다음 재건에 성공한다면.

심어 둔 과장을 출장소장으로 추천한다면.

그 후로는 자신들의 입맛에 따라 혁신 점포의 운영 방침을 마음대로 바꿀 수 있을 게 분명하다.

이렇게 적극적으로 파벌 항쟁에 가담하는 간부라면 누구든 혁신 점포에서 얻을 수 있는 이득을 독점할 생각만 하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 생각대로 일이 흘러가지 않았다.

출장소는 영업을 개시한 지 단 하루 만에 괄목할 만한 성과를 올릴 기회를 붙잡았다.

문제는, 그 기회가 너무나도 컸다는 점이었다.

카펠리노 디 드리아데가 요청한 융자의 규모는 무려 1,300억 굴덴.

금리 역시 담보 대출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높다.

본점이 아닌 일개 출장소에서 처리할 수 없는 사이즈의 안건.

키키와이 출장소는 세 파벌의 이해관계는 물론 차원신용금고가 만들어 갈 새로운 미래의 초석이라 할 수 있는 전략 점포다.

다차원 출장소의 행보가 순조롭길 기대하는 건 모두가 같았지만, 다른 파벌이 먼저 큰 지분을 획득하게 두고 싶어 하는 이는 없었다.

바로 그렇기에, 처음엔 간부들도 심어 둔 과장들을 시켜 날름 대출 안건을 낚아채 본점 기업여신부의 공로로 삼으려 했다.

다만, 이번만큼은 그게 쉽지 않아 보였다.

카펠리노 디 드리아데는 명망 높은 장인들의 집단.

이들을 이끄는 툴레아 대표는 본점을 찾아오면 금리를 낮춰 주겠다는 타 파벌 간부의 회유에 응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이번 일은 주목도가 높은 키키와이 출장소의 첫 실적인 데에다 대출을 주도한 건 다름 아닌 구D의 실세 슬리크 엘라마.

심지어 이를 담당하는 실무자는 디스파테르 행장과 모종의 커넥션이 있다고 알려진 김지안 대리였다.

‘입행 1년 차인 대리가 맡기엔 너무나도 막중한 책임입니다. 이사님들의 재고를 부탁드립니다. 분명 훨씬 좋은 인선이―’

‘김지안의 실무 경험이 적은 건 사실입니다만 이번 대출에 관한 책임은 온전히 제가 질 예정입니다. 원금과 이자 모두, 반드시 전액 받아오겠습니다.’

김지안이 실수한다면 내 목을 날려라.

그렇게 말하는 엘라마의 기백 앞에서 어떻게든 김지안을 끌어내리려던 본점 간부들은 모두 입을 다물고 말았다.

김지안을 더 공격했다간 먼저 사표를 베팅한 엘라마가 그만한 판돈을 요구할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비단 엘라마의 엄포가 아니어도 김지안은 건드리기 껄끄러운 상대였다.

유명 영화배우의 재도약을 도운 이래 그는 12차원 올림포스에 거주하는 사외 이사들에게 눈도장을 찍게 되었다.

그의 공적을 함부로 가로채려 했다간 오히려 문제가 생길지도 모른다고 두려워한 타 파벌 간부들은 결국 계획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엘라마가 이번 대출의 공로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무엇을 걸었는지도 모르는 김지안은―

“본점에서 태클 거는 사람이 없어서 다행이었지 뭐야. 대리 주제에 이런 실적 챙겨도 되는 건지 모르겠네.”

“…아까부터 그 얘기 세 번은 한 것 같다만.”

싱글벙글 웃으며 입행 동기인 아이작에게 기만질을 시전하고 있었다.

-따악!!

“아!! 왜 때려요!!”

“너란 놈은 감사하는 법을 배워야 해.”

“감사는 무슨! 솔직히 이번 일은 제가 다 한 거 아닙니까? 어?”

그것만으론 모자라 참다못해 뒤통수를 한 대 때린 출장소장에게 버럭버럭 대들기까지.

“하아… 행장님은 어쩌자고 저런 놈을 데려오셔서.”

소장실로 돌아가며 엘라마는 씁쓸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반쯤 동기에게 장난치려고 저러는 거겠지만 기고만장해하는 꼴을 보고 있자니 답답해질 따름이었다.

“아예 못난 놈이었으면 버렸을 텐데 그것도 아니니….”

행장의 눈은 틀리지 않았다. 김지안은 분명 이쪽 업무에 뛰어난 재능을 보이고 있었고 이는 엘라마조차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다듬어져야 할 구석이 아직 많은 건 사실.

“초보자의 행운이 언제까지 따르려나.”

팔자에도 없는 보모 노릇을 하게 된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엘라마는 행장의 지시를 충실히 따르기로 했다.

은행원 김지안은 그가 보기에도 아예 싹수가 없다곤 생각이 들지 않았으니까.

그저 언젠가 적당한 시련이 김지안의 성장을 촉진시켜 주면 좋겠다고 바라는 게 그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기고만장해진 신입 행원이 초심을 되찾는 데에 적절한 위기와 스트레스만 한 건 없었으니까.

다만, 그 시련이 이미 찾아오고 있는 줄은 엘라마 자신도 알지 못했다.

“기야아아아악!!!!”

채 5분도 지나지 않아서 밖에서 들려 온 김지안의 비명 소리.

새로운 사건이 신입 은행원을 위협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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