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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화 (31/200)

잠재력을 보는 은행원 031화

자리아니 주교는 생각했다.

분명 이건 툴레아가 저들에게 부탁한 방해 공작이다.

뭘 꾸미고 있는진 알 수 없지만 시간을 끌 생각일 터.

교리문답은 단순히 종교 지도자에게 가르침을 구하는 행위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같은 종교 지도자 간에서 진행되는 교리문답은 자신의 지위를 걸고 하는 생사결과도 같은 대결.

한마디로 교리문답이 아닌 교리 논쟁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툴레아의 편에 선 은행원이 교리문답을 신청했다는 건 자신을 논파해 권위를 실추시키겠다는 뜻이다.

그런 일이 정말로 가능할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지금은 먼저 해야 할 일이 따로 있었다.

“지금은 바쁘니까 나중에 상대해 주마. 거절하는 게 아니다. 그쪽이 준비할 시간을 주겠다는 뜻이지.”

감히 주교와 교리로 겨루려는 용기를 높게 사 충분히 준비할 수 있도록 시간을 주겠다.

자비를 포장해 승부를 뒤로 미루려 했지만―

“도망치시는 겁니까?”

엘라마는 무릎에 묻은 흙을 털어내며 일어나더니 생글생글 웃으며 주교에게 물었다.

“…….”

-빠직

모자로 반쯤 가려진 주교의 이마에 뚜렷하게 혈관이 불거졌다.

“…방금 뭐라 했나.”

“경전 어제 처음 읽은 사람의 질문에 대답할 자신이 없는 건가? 신목주교씩이나 되시는 분이?”

그렇게 대답하는 엘라마의 얼굴엔 주교를 도발하는 사나운 미소가 달라붙어 있었다.

주교는 자신을 따라온 추종자들에게 시선을 던졌다.

하지만 그들이 주교를 바라보는 시선엔 생각지도 못한 감정이 담겨 있었다.

엘프의 경전을 처음 접한 이가 감히 교리문답을 청했으니 가만두지 말고 뭉개 달라는 기대감.

이를 배신하고 문답을 거부하는 건 절대 현명한 판단이 아니다.

교리에도 대중의 기대에도 반하는 행동.

그동안 쌓아 온 정통성에 흠집이 생기게 두어선 안 된다.

“…….”

자일리니 주교는 생각했다.

어서 묘목을 태우고 싶긴 하지만 이미 툴레아가 쓰러져 실려 나간 이상 이긴 건 확실하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승리를 축하하는 퍼포먼스 삼아 교리문답으로 이자를 철저히 굴복시키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다른 누구도 아닌 신목교주인 자신이 교리문답에서 패배할 리는 없으니까.

“교리문답을 받아들인다. 먼 곳에서 건너온 그대에게 귀한 가르침을 내리도록 하지.”

“연차 써서 왔으니까 만족할 때까지 얘기 나눠 봅시다.”

계속 엘라마를 노려보던 탓에 자일리니 주교는 눈치채지 못했다.

김지안과 바람의 정령이 추종자들 사이를 지나 세계수 안으로 향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들이 향하고 있는 곳이 묘목이 있는 꼭대기 층이 아닌 지하라는 것도.

* * *

나와 에코는 주교의 추종자들이 자리를 비운 틈을 타 세계수 1층의 중심으로 냅다 달렸다.

“큐우! 큐워우워우!!”

세계수 안으로 들어온 에코는 다시 힘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내가 1층을 달리는 동안 사전에 툴레아 사장이 지시해 둔 대로 젊은 엘프들이 이쪽을 향해 손을 뻗어 기력을 더해 주고 있는 게 보였다.

-휘오오오오!!!!

에코는 그것을 남김없이 빨아들인 다음 강풍을 일으켰다.

그 바람은 내가 안으로 들어온 걸 확인하고 포위하려 하던 주교의 추종자들을 밀어냈다.

엘프들은 초속 몇 미터인지 짐작도 가지 않는 풍속의 바람에 눈도 뜨지 못하고 뒤로 물러났다.

“툴레아 씨가 말한 입구는….”

방해가 되는 사람들은 치웠는데 지하로 통하는 통로는 대체 어딨는 걸까.

1층 중앙에 있다고 들었는데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여기에는 주교가 기도하는 제단밖에―

-콰득

그때였다.

제단 바닥을 고정하던 기둥이 바람에 들려 올라간 건.

“어?”

방금 잠깐이었지만 아래에 어두운 구멍 같은 게 뚫려 있던 것 같은데.

“저거다.”

나는 사람 키 두 배는 되는 제단이 들려 올라간 틈을 타 옆에 달라붙어 밀었다.

-쿵!

기울기 시작한 제단은 10초도 지나지 않아 옆으로 쓰러졌고, 그 아래에 숨겨져 있던 계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게 바로 툴레아 씨가 말한 지하로 이어진 통로인 모양이다.

어두워서 보이는 건 없었지만, 스마트폰의 플래시를 비추며 전진.

촉촉한 공기가 얼굴에 닿았다.

물과 흙의 냄새.

신경을 곤두세우자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지하 수맥…?”

이만한 거목이 자라려면 분명 풍부한 물과 영양분이 있는 비옥한 땅일 거라곤 생각하긴 했는데 아예 아래로 통하는 계단까지 만들어 놨을 줄은 몰랐다.

세계수의 뿌리가 건강한지 확인하려고 만든 걸까. 그게 아니면―

“여긴가.”

한참을 어두운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는데 서서히 시야가 밝아졌다.

나타난 건 호수와 이어진 거대한 동굴.

마치 사진이나 다큐멘터리에서만 보아온 태국의 사원처럼, 돌로 만든 구조물을 거대한 나무의 뿌리가 감싸고 있다.

세계수의 뿌리는 지하를 흐르는 강에 닿아 있었는데, 조명처럼 빛을 발하고 있는 건 물에 잠긴 뿌리의 선단이었다.

-꿀꺽

세계는 엘프들에게 생명력을 공급하고 기나긴 수명을 허락하며, 정령의 거처가 되어 그들이 자연의 힘을 다룰 수 있도록 권능을 내린다.

평범한 땅에 뿌리를 내린 나무가 물과 지력, 태양광만을 토대로 이러한 기적 같은 일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건 나무에 깃든 신의 축복 덕이라고 한다.

그것은 별과 달을 순환하게 하며 순리에 따라 만물을 운행하는 거대한 흐름

“이게 되려나.”

지구에서 살다 온 내겐 익숙하지 않은 개념이니 지금은 내가 해야 하는 일에만 집중해 보자.

나의 임무는, 지상에 있는 주교의 추종자들에게 자일리니와 정체불명의 사채업자가 나눈 대화를 들려 주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오로지 하나.

에코가 자신의 체내에 기록한 공기의 진동을 극대화시켜 음량을 수천수만 배로 키우는 것이다.

정령은 엘프를 위해 사역하는 존재로서 지음을 받은 존재다.

그들은 우리가 알아들을 수 없는 울음소리를 발하며 살지만, 실은 사람의 언어 역시 구사할 수 있다.

우리가 그것을 듣지 못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정령의 존재 자체가 노역을 위해 지음받은지라 신이 아니면 들을 수 없을 정도로 작은 소리밖에 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중에도 예외는 있다.

정령 중에서도 강대한 힘을 지니며 신이 아닌 대상에게 자신의 의지와 목소리를 똑바로 전할 수 있는 정령.

유일한 예외가 되는 존재인 그것은 바로―

“자, 여기 올라가 있어.”

나는 근처에 뻗어 있던 세계수의 뿌리 위에 에코를 놓았다. 그리고 주머니에 있던 만년필을 꺼내 인정사정없이 뿌리를 쑤셨다.

상처 난 뿌리에서 새어 나오는 수액.

에코는 잠시 망설이다 그것에 입을 댔다.

신의 총애를 받은 거대한 피조물인 나무에게서 생명력의 근원을 섭취하는 행동.

에코의 몸은 물에 잠긴 세계수의 뿌리처럼 환한 빛을 발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이제 남은 건―

“그럼, 부탁할게.”

에코가 고개를 끄덕이는 걸 확인한 나는 재킷 안주머니에서 반으로 접힌 메모 용지를 꺼냈다.

엘라마가 공항에서 행장님께 받아온 물건이 바로 이것이었다.

메모지를 펼치면 오래된 신 중 하나인 그분의 친필이 적혀 있을 것이다.

천지를 창조한 이들이 세상을 움직이는 수단이자 절대자들의 권능이 내포된 언어, 신언神言.

“스읍.”

숨을 크게 들이쉬고 쪽지를 열었다.

깨알만 한 크기로 가지런히 적힌 예쁜 글씨체. 여자가 쓴 것이었다.

그렇구나. 행장님 성별은 여자였구나.

…그런 생각을 할 틈도 없이 입이 먼저 완성된 문장을 읊기 시작했다.

“임명장. 에코.”

호흡을 가다듬고, 발음 하나하나를 뚜렷하게.

“귀하는 오랜 기간 동안 엘프들에게 봉사해 왔으며―”

이곳에 오는 동안 엘라마는 말했다.

만난 적도 본 적도 없는 행장이 날 은행으로 데려오려 한 건 단순히 내 잠재력이 높아서 그랬던 게 아닐지도 모른다고.

요약하자면 잠재력보단, 그녀가 먼 옛날 잃어버린 무언가가 내 안에 깃들어 있기에 그것을 다시 되찾기 위해 곁에 두고 있는 듯하다는 이야기.

어쩌다 그런 일이 내게 일어났는진 모르겠다.

당연하지만 언제 일어난 건지도.

물론 추측 가는 구석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누군가가 내 안구를 적출하고 다른 이의 것으로 갈아 끼운 악몽.

그 꿈을 꾼 이후로 난 제대로 된 그림을 그리지 못하게 되었다.

내가 화가의 길을 포기하게 된 원인은 정말로 신의 조각이 내 안에 깃든 탓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게 어쨌다는 건가.

지금의 나는 은행원이고.

고객을 도와 대출을 성사시켜야만 한다.

“…존재의 사명을 충실히 수행한 공로가 크므로―”

마음을 가다듬고 뜻을 가다듬으며 신이 적은 글자를 읽는다.

발음을 마칠 때마다 은행장이 메모지에 볼펜으로 적은 글자가 황금색으로 색깔을 바꿔갔다.

세상을 만든 이들의 권능이 담긴 글자.

무에서 유를 창조해 낸 기적의 언령이 이곳에 있다.

원한 적도 감당할 수도 없는 힘이, 인간이 아닌 존재의 파편이 한정적으로 그들의 업業을 재현할 수 있도록 내 숨에 권한을 부여한다.

“뀨- 으!!!”

-고오오오!!!

에코의 주위에서 강렬한 바람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나는 메모를 놓치지 않도록 손가락으로 단단히 붙잡고, 마지막 줄을 읽어 신언神言을 맺었다.

“이에 귀하를 대정령으로 임명합니다.”

-파앗!!

퍼져나가는 빛무리.

오래된 신의 이름으로 내려진 축복이 에코의 몸에 깃든 순간이었다.

* * *

김지안이 지하에서 계획을 실행하는 동안 세계수 1층에선 상황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젊은 엘프들은 에코가 일으킨 강풍에 쓰러진 노인들을 다른 곳으로 데려가 포박하고 제단을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덕분에 자일리니 주교는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엘라마와 이곳으로 돌아와 모두가 보는 앞에서 교리문답, 아니, 교리 논쟁을 시작하고 있었다.

모두가 예상하지 못했던 점이 하나 있다면, 교리를 공부한 지 하루밖에 되지 않은 은행원이 던진 질문에 주교가 쉽사리 대답하지 못하고 쩔쩔매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어째서 바깥 놈들이 이 정도로 교리를 연구해 올 수 있는 거지….’

처음엔 대답하기 쉬운 문제 몇 가지로 시작된 대화.

주교는 자신이 외부인에게 논파당할 리 없다고 생각하며 계속해서 수월하게 질문을 받아쳤다.

하지만 그건 전부 정교하게 설계된 함정이었다.

시작은 행성에 아직 세계수가 여럿 존재하던 시절에 관한 이야기였다.

여러 나무에 엘프들이 나뉘어 살던 평온한 시대.

수많은 교리가 발전하고 연구가 진행되던 신학의 황금기.

논쟁을 빠르게 끝내고 싶었던 자일리니 주교는 자신의 정통성을 강조하고 모든 반박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가장 쉬운 노선을 택했다.

“몇 번이든 말했지만 우리가 신봉하는 교리와 현존하는 경전만이 진리라고 할 수 있다. 다른 엘프들은 별의 신령과 세계수의 인정을 받지 못하고 도태되었지.”

그것은 바로 앞서 사라진 나무에 거하던 엘프들의 신앙과 다양하던 교리를 전부 부정하는 것이었다.

“그 이야기, 마지막으로 불타 없어진 나무의 엘프들도 똑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자, 여기 증거요.”

엘라마는 태블릿 PC 화면을 조작해 오래된 문서의 사본을 휴대용 빔프로젝터로 세계수의 내벽에 사출했다.

고고학자들이 잿더미 속에서 발견한 항아리 안에 담겨 있던 두루마리를 스캔한 물건.

흔히 죽은 나무에서 건져냈다 하여 사목문서死木文書라고 불리는 귀중한 연구 자료.

주교 역시 익히 그 존재를 알고 있는 물건이었다.

“자신의 정통성을 강조하려 하시는 건 괜찮습니다.

다만, 오직 본인만이 별의 신령에게 이끄심을 받는다는 주장은 조금 근거가 빈약한 게 아닌지.

그 교리적 설계는 이미 사라진 나무의 신목주교께서도 주장하시던 바라서 말이죠.”

“…….”

요약하자면, 너보다 먼저 그 소리 하던 자식은 나무가 불타면서 같이 뒈졌다는 뜻.

노골적인 도발에 자일리니 주교는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자신이 조금 전 은행원에게 한 이야기는 산업 혁명 이후 시작된 온난화로 각지의 나무들이 줄어들 때 여러 신목주교가 주장하던 논리를 차용한 것이었다.

살아남은 나무에 사는 엘프들은 별의 신령의 가르침을 충실히 따르는 옳은 자들이며 멸망한 이들은 잘못된 삶을 살았다고 모욕하는 논리.

슬리크 엘라마인가 하는 은행원은 이 주장이 오래전부터 존재해 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이에 대한 완벽한 반박을 준비해 왔다.

이에 맞서기 위해 주교는 계속해서 자신이 진정으로 믿지 않는 이야기를 이어나가야만 했다.

“결과부터 말하면 그렇게 주장한 동포들도 결국 별의 신령께서 보시기에 옳지 않아 멸망을 면치 못한 게 아닌가. 이 나무가 여태껏 아무 문제 없이 남아 있는 것이 우리들의 신앙의 순수함을 증명한다.”

“그래서 나무가 담보로 잡히는 걸 반대하시는 건가요?

만에 하나 대출이 성사되거나 세계수가 토막 났다간, 주교로서 이곳의 엘프들을 올바르게 인도하지 못했다는 뜻이 되니까?”

엉뚱한 소리를 하는 엘라마.

주교는 상대가 자신에게 유리한 질문을 던지는 걸 의아하게 여겼지만,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진 않았다.

“내 명성이 중요한 게 아니야. 나는 신목의 주교. 나무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내 사람들을 위해선 목숨조차 내줄 각오가 되어 있다 이 말이다!”

순수함을 의심하는 상대에게 주교로서 보여야 할 마음가짐을 어필하자 주위에서 우레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추종자들의 응원은 여전히 열렬하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고작 이 정도로 패배하지 않는다고 선언을 마친 자일리니 주교는 미세한 위화감을 눈치챘다.

언제부터인가 옆을 부유하던 불의 정령이 점점 자신과 거리를 벌리기 시작했다.

단순히 물리적 거리만이 벌어지고 있는 게 아니다.

그와 정령을 잇는 정신적인 연결 역시 실시간으로 약해지는 중이었다.

“…….”

잠시 생각해 본 결과 원인을 짐작한 주교가 작게 신음을 흘렸다.

정령은 거짓말을 싫어한다.

엘라마와의 교리문답에서 계속해서 거짓말을 반복한 결과 그는 평소 낼 수 있는 힘의 절반도 발휘할 수 없게 되었다.

‘설마, 처음부터 이걸 노린 건가.’

계속해서 힘이 깎여나갔는데 정통성에 도전받았다는 사실에 꼭지가 돌아 여태까지 눈치채지 못했다.

만약 지금 툴레아가 돌아온다면 자신은 무력에서 밀리게 된다.

“그만. 더는 네놈의 수작에 어울리지 않겠다.”

-화륵!!

주교는 대답 대신 일방적으로 교리문답을 종료하고 불의 정령을 시켜 허공에 다수의 화염을 출현시켰다.

이 남자는 위험하다.

죽이진 않더라도 여차하면 화상 몇 군데인가 만들어 쫓아내야 한다.

“뭘 그리 경계하십니까. ‘저는’ 평범한 인간일 뿐인데.”

여전히 여유롭게 웃으며 이쪽을 도발하는 은행원.

“…음?”

그제야 주교는 깨달았다.

이곳을 찾아온 은행원은 두 명이다.

나머지 한 명은 대체 언제 사라진 걸까.

-고오오!!

바로 그때, 세계수 1층에 강렬한 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진동하는 공기.

귓가를 스치는 바람 소리 사이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 오기 시작했다.

‘…조금만 더 시간을 주었으면 하네.’

‘에이, 주교님도 참. 저희가 어떤 사이인데 그러세요. 당연히 기다려 드려야죠.’

‘그렇게 말해 주니 고맙네….’

‘이미 15년도 넘게 기다렸는데 며칠 더 기다린다고 달라지는 건 없잖아요?’

익숙한 목소리에 주교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이것은 자신과 사채업자가 나눈 대화.

심지어 자신만이 아닌 다른 엘프들의 귀에도 들리고 있는 듯 주위의 동포들의 표정이 빠르게 일그러지고 있었다.

“아, 안 돼…!!”

‘은행이 나무를 담보로 잡았다간 곤란해집니다. 알고 계시죠?’

‘아무리 전산에 기록되지 않는다 해도 먼저 세계수에 질권을 설정한 건 접니다.’

‘그렇지. 상환이 불가능해진 지금, 이 나무는 자네의 것일세.’

‘잘 기억하고 계셔서 정말로 다행이에요. 잊어버리셨으면 어떡하나 싶었는데.’

점점 커져만 가는 음량.

이젠 귓가에 속삭이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두 사람의 목소리가 세계수 전체에 방송되듯 메아리치고 있었다.

‘제때 돈을 갚지 못하셨지만 괜찮아요. 충분한 가치를 지닌 담보를 내놓으셨으니. 다만, 은행이 손을 댔다간 제가 몹시 곤란해진다는 거, 알고 계시죠?’

‘안심하세요. 제가 세계수의 권리를 가져간다고 해서 여러분을 당장 나무에서 내쫓을 생각은 없어요.’

자신을 적대시하던 젊은 엘프들은 물론 얌전히 시키는 대로 움직이던 추종자들조차 분노한 눈으로 이쪽을 보기 시작했다.

“가짜다!! 조작이다!! 나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없다!!! 어느 놈이냐, 이딴 수작을 꾸민 건!! 그래!! 증거!! 증거를 가져와!!!”

불의 정령과의 연결 고리가 끊어지기 직전이어서 무력으로 타인을 위협할 수도 없었지만, 주교는 목이 터져라 소리쳤다.

대체 언제 녹음당한 건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세계수의 엘프들은 화재를 두려워해 전자 기기조차 거의 사용하지 않는데, 은행원들이 수작을 부려 도청기나 녹음기를 설치한 게 분명하다.

추종자들은 기계에 관해 좋지 않은 인상을 지니고 있으니 조작된 거로 몰아간다면 아직 희망은 있을 터.

“증거, 보여 드리죠.”

그때, 넘어진 제단 아래에서 또 하나의 은행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째서 지하에 다녀온 건지 짐작도 가지 않았지만, 채 5초도 지나기 전에 주교는 자신의 발밑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깨닫게 되었다.

[규우우!!!]

1층에서 불던 바람이 멎나 싶더니 허공에 거대하고 하얀 털 뭉치가 나타났다.

승강기를 움직이는 역할을 맡고 있던 마지막 바람의 정령 에코가, 위엄 넘치는 표정으로 귀엽고 동글동글한 몸뚱이를 흔들며 공중을 부유하고 있었다.

“법정이 증거로 채택하지 않는 불법 녹음이나 딥 페이크가 아닙니다. 정령이 배 속에 전부 기록으로 남겨 둔 공기의 진동을 재생했을 뿐이죠.”

거대해진 정령.

저 모습이 어떤 것인지, 전쟁을 겪은 늙은 세대의 엘프들은 익히 알고 있었다.

“다 아시죠? 정령은 거짓말 싫어하는 거.”

저것은 이 별 전체를 통틀어 속성별로 하나씩만 존재하는 강력한 신령의 사도, 대정령.

[뀨뀨우~!!!]

500년 만에 등장한 전설의 존재 앞에서 방금 들은 음성의 진위를 의심하는 이는 누구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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