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재력을 보는 은행원 032화
진실을 접한 나이 든 엘프들의 반응은 두 가지로 갈렸다.
주교의 배신을 믿지 못하고 현실을 부정하는 자들.
그리고 대정령의 출현에 마침내 자신들이 속고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분노를 표출하기 시작한 이들로.
“주교님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사채? 도박 빚?!”
“당신 사제잖아!! 제일 올바르게 살아야 할 사람이 그래도 되는 거냐고?! 어?”
대성통곡을 하며 바닥에 드러눕는 노파들은 그나마 얌전한 편이었다.
상당수의 노인들은 이미 험악한 얼굴로 주교를 둘러싸고 그를 위협하는 중이었다.
“모, 모함이다. 이건 내 영적인 권위를 실추시키려 하는 툴레아와 수하들의 사악한 계획―”
주교는 뒷걸음치며 자신의 몸을 지키기 위해 불의 정령을 불러냈다.
-피슉
하지만 불의 정령은 앙증맞은 날개를 펄럭이며 미약한 숨결을 토해낼 뿐,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거짓말을 반복하며 연결 고리가 약해진 데에다 추종자들이 주교에게 등을 돌려 기력을 빌려주지 않는 지금, 정령은 제대로 힘을 발휘할 수 없었다.
“세계수 반상회장의 권한으로 표결을 제안한다. 의제는 자일리니 밤비노의 추방.”
그의 이름에 주교라는 호칭조차 붙이지 않는 장로들의 눈에 존중과 존경의 빛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신목의 주교다!! 별의 신령이 인정한 나의 무슨 권리로 나를 추방하겠다는 거냐!!!”
주교가 목소리를 높였지만 사람들은 말이 없었다.
그저 입을 다문 채 자일리니를 향해 한 걸음씩 다가올 뿐.
“감히… 내가 누군 줄 알고!! 오지 마!!! 오지 말란 말이다아!!!!!”
주교는 새빨개진 얼굴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다가 예고도 없이 돌아서서 전력으로 도망쳤다.
“허억… 허억!!”
자일리니는 늙은 몸을 채찍질하며 뛰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앞으로 앞으로.
“빌어먹을 은행원들, 어떻게, 어떻게 놈들이 대정령을…!!”
가쁜 숨을 몰아쉬며 달리는 내내 뒤통수에서 박동 소리가 들려 왔다. 마치 심장이 그곳에 있는 것처럼.
그렇기에, 아무도 자신을 쫓아오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주교는 계속해서 앞을 향해 달렸다.
성난 민중들에게 잡혔다간 무슨 꼴을 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계속 그의 등을 떠밀었다.
기나긴 일생의 대부분을 특권 계층으로 살아온 그의 자존심과 비대한 자아는 눈앞의 현실을 버텨 낼 수 없었다.
잘못을 인정하고 무릎을 꿇거나 추종자들의 용서를 구한다면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은 애초에 머릿속에 없었다.
세계수 안에서 잠들지 못하면 수명이 줄어들겠지만 치욕을 버티는 것보단 낫다.
자일리니는 도로가 아닌 비가 내리는 숲속으로, 깊게 더욱 깊숙이 들어갔다.
이 울창한 산탄초넬로 죠사벨라의 삼림이라면 누구도 자신의 비참한 모습을 볼 수 없을 거라 생각하면서.
-투둑
-투두둑
어느샌가 내리기 시작한 가랑비는 시간이 지나면서 호우로 변했다.
시야는 흐려지고 옷은 젖어만 간다. 안경을 닦을 틈도 없다. 입과 코로 흘러들어 오는 빗물.
그리고.
“…하아, 하아.”
한참을 달린 다음에야 주교는 멈춰 섰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더는 움직일 수가 없다.
노구를 이끌고 여기까지 뛰어온 사실 자체가 기적.
“돈의 망령 같은 자식들, 빌어먹을 은행원 나부랭이가 어떻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주교 자신조차 이해할 수 없었다.
오랫동안 정령을 사역해 온 세계수의 엘프라면 모를까.
정령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평범한 인간에게 대정령이 힘을 보태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있어선 안 되는 일이다.
전쟁의 시대 이후로 단 한 번도 나타난 적이 없던 존재가 나타나 진실을 드러냈다.
이렇게 된 이상 자신을 따르던 노인들의 마음을 돌리는 건 불가능하다.
“방법이 없군.”
주교는 품에서 USB를 꺼내 들었다.
다른 차원의 은행에서 발급한 역외 은행의 계좌 정보가 담긴 물건이었다.
계좌에는 그동안 횡령해 온 돈이 일부 남아 있다.
이대로 무사히 33차원을 빠져나갈 수 있다면 나쁘지 않은 노후를 보낼 수 있을 것이다.
수명이 줄어들 테지만 그동안 체면과 세계수를 떠날 수 없는 제약 탓에 시도하지 못한 갖은 유흥을 즐기다 죽는 여생도 나쁘지 않아 보였다.
“마지막은 즐기다 가야지, 별수 있나.”
자일리니는 옷으로 안경을 닦고 다시 걸쳤다.
조금은 뚜렷해진 시야.
그 끝에, 기괴한 광경이 보였다.
멀리서 한 명의 사내가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는 게 보였다.
고급 원단으로 만든 멋들어진 스리피스 슈트를 입은 남자는 재킷만 벗어 흔들며 웃고 있었다.
옷에 관해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호우 속에서 우산도 없이 입고 돌아다니기 아깝다고 생각할 법한 옷.
하지만 떨어지는 빗방울은 단 한 방울도 사내의 머리카락이나 옷을 적시지 못하고 있었다.
-쩌어억
-투두둑
물방울은 사내의 몸에 닿기도 전에 보이지 않는 기운에 가로막혀 둥근 아치를 그리듯이 좌우로 갈라지며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그러고는 흘러내리던 중 허공에서 냉기를 쐬어 딱딱하게 굳었다.
마치 사내가 이쪽으로 다가올 때마다 그의 앞에 얇은 얼음으로 만들어진 터널이 완성되어 가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우산도 없이 어딜 그리 서둘러 가십니까, 자일리니 주교님.”
생글생글 웃는 사채업자가 다가오고 있었지만 자일리니는 제자리에서 움직일 수 없었다.
겁을 먹은 건 사실이었지만 그게 직접적인 원인은 아니었다.
“무슨―”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리자 바닥에서 신발을 타고 올라온 서리가 발목을 붙들어 매고 있는 게 보였다.
주교가 아무리 힘을 주어도 단단하게 굳은 얼음은 그럴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
“담보, 은행이 가져가게 생겼네요.”
교주가 당황하던 사이 어느샌가 눈앞까지 다가온 사채업자의 영업용 미소엔 이렇다 할 감정이 깃들어 있지 않았다.
“내 잘못이 아니다…! 정령이 말도 안 되는 짓을 저질렀을 뿐이야. 갑자기 대정령이 나타나는 건 계획에 없었다고!!”
사채업자는 뜻밖에도 자일리니의 말을 부정하지 않고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고. 주교님께 무슨 잘못이 있겠습니까. 할 만큼 하셨잖아요? 그 나이에 싸우는 게 쉬운 일도 아닐 테고요.”
“그래. 알면 됐어. 그러니까 이거, 발 얼은 거 어떻게 좀 해 보란 말이야.”
“죄송하지만 불가능합니다.”
“…뭐?”
-카득
주교가 말을 잇기도 전에 발목을 뒤덮고 있던 얼음이 빠르게 다리를 타고 그의 몸을 뒤덮기 시작했다.
“대정령이 나타난 게 주교님 잘못은 아니긴 해요. 저도 예상하지 못한 일인데 누가 알았겠어요.”
“아아… 안 돼…!”
몸의 절반 이상이 얼음에 갇혔지만 주교는 아무 저항도 할 수 없었다.
그의 몸은 서서히 굳어가더니 결국엔 얼음에 완전히 봉인되고 말았다.
“단지, 저는 손해 보고는 못 사는 성격이라서요.”
-툭
-퍼펑!
사내가 손끝으로 건드리자 얼어붙은 주교의 몸이 가루가 되어 터져나갔다.
모든 수분이 얼어붙어 동결건조 상태가 된 채 바스러진 육체.
피 한 방울 흐르지 않는 살해의 흔적을 내려다보며 사내는 천천히 눈앞을 떠다니는 탁하고 희끄무레한 연기를 향해 손을 뻗었다.
-까득
-까드득
사내의 손에서 뿜어져 나온 냉기는 그것을 감싸 빗물과 함께 동결시켰다.
완성된 건 자그마한 보석과도 같은 모양을 한 투명한 얼음 구슬이었다.
“어쩔 수 없습니다. 담보가 날아갔으니 이거라도 받아 가는 수밖에요.”
사내는 주교의 영혼이 담긴 구슬을 집어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비가 그친 하늘에서 쏟아지는 햇살이 울창한 나무를 뚫고 사내와 구슬을 비추고 있었다.
타락한 사제의 마지막 한 조각이 반짝임을 드러내는 아이러니한 광경이었다.
“이거라도 담보로 받아 두는 거로 하죠.”
오래된 엘프의 영혼.
이자까지 전부 포함한다면 모를까 빌려준 원금의 액수보단 훨씬 가치가 있는 ‘물건’이 틀림없었다.
“옛 직장 후배님들도 만만치 않군요. 선배로서 저는 기쁘답니다.”
사내는 넌지시 멀리 보이는 세계수로 시선을 던지며 작게 웃었다.
* * *
자일리니 주교의 추방 후 엘프들의 세대 갈등은 빠르게 해소되었다.
애초에 그들은 오랫동안 한곳에서 살아온 가족.
종교관과 정치관 등을 놓고 대립이 있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두 세대의 대립을 촉진하던 주교가 사라진 지금, 부모 세대와 자식 세대의 통합을 방해하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아버지는 사람이 너무 순수하시다니까요. 계속 저런 사기꾼한테 속고 계시니 제가 얼마나 답답했겠어요.”
“아비로서 부끄럽구나. 미안하다.”
핑계를 대는 이들은 소수였다.
대다수의 엘프들은 눈앞에서 자일리니 주교가 도망친 걸 목격함으로써 고집을 꺾고 현실을 받아들였다.
아이러니하게도 대정령이 만들어 준 강제 화합의 장.
정령들의 힘으로 난장판이 된 1층을 정리하는 엘프들의 얼굴은 제각기 다른 표정을 짓고 있었다.
새로운 두 그루의 세계수가 탄생하는 것을 기대하는 자들.
자신이 범한 실수에 대해 못내 착잡한 심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한숨을 쉬는 이들.
그리고 그들 모두가 자신들을 길러 주고 보호해 준 세계수가 사라지게 될 거란 사실을 아쉬워하고 슬퍼하는 중이었다.
새로운 미래를 쟁취하기 위해 나무를 희생시켜야만 한다는 어려운 결정은 모두의 것.
툴레아와 그를 따르는 이들만이 짊어지고 있던 마음의 짐을.
지금은 세계수에 사는 모든 엘프가 나누고 있었다.
“변할 때가 온 게야. 우리도, 이 나무도.”
오래된 세계수의 내벽을 어루만지며 한 늙은 엘프가 중얼거렸다.
그는 아집을 내려놓지 못하던 자신이 부끄러웠다.
이제라도 현실을 받아들이고 젊은 엘프들을 위해 옳은 일을 할 차례다.
그런 생각을 하다 문득 떠올랐다.
세계수 역시 자식이라고 할 수 있는 묘목들에게 미래를 주고 싶지 않을까.
묘목이 더욱 넓고 비옥한 땅에서 행복하게 모두의 축복 속에서 자라나길 바라진 않을까.
“이것도 나무가 바란 결말일지도 모르겠군. 아니, 시작인가.”
노인의 말에 공감이라도 하는 것처럼 미약한 진동이 손바닥을 타고 전해져 왔다.
“그동안 고마웠다.”
엘프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세계수에게 감사를 전했다.
그들 중 누구 하나도 나무를 가벼이 대하지 않았다.
* * *
1,300억 굴덴의 대출 승인은 유례가 없을 정도로 빠르게 진행되었다.
어째서 이만한 규모의 대출이 이 정도 속도로 통과되었는지 그 이유를 정확히 알 순 없었다.
단순히 윗분들을 구워삶은 엘라마의 수완이 대단했던 걸까.
아니면 차원신용금고 이사회 멤버의 상당수가 카펠리노 디 드리아데의 가구를 소장한 부유층이어서 신작 가구를 보고 싶었다거나.
그것도 아니면 세계수의 엘프라는 오래된 전통과 문화를 지닌 종족이, 모든 엘프들의 시조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두고 싶지 않았던 걸지도.
어쨌든 무사히 대출이 통과된 결과 엘프들은 자신들의 행성에 남은 두 영맥을 구입할 수 있었다.
장소는, 각각 산탄초넬로 죠사벨라에서 동쪽과 서쪽으로 어마어마하게 멀리 떨어진 곳.
사람의 발길이 거의 닿지 않은 오래된 숲.
그리고 호수에 인접한 버려진 마을이 바로 그들이 선정한 세계수 식목 부지였다.
툴레아와 그의 동포들은 경건한 마음을 담아 두 영맥에 나무를 심었다.
미래를 지켜 주지 못하는 역사에 가치는 없다.
엘프들의 모든 것이었던 세계수는 마침내 새로운 가치를 낳으려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