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재력을 보는 은행원 030화
키키와이 공항으로 은행장을 만나러 갔던 엘라마가 출장소로 돌아오기까진 채 한 시간 반도 걸리지 않았다.
긴급상황이어서 그런지 정말로 은행장과 별 대화를 나누는 일도 없이 필요한 것만 받아온 모양이었다.
“상황은?”
“아직 어떻게든 버티고 있는 모양입니다.”
조금 전까지 난 팔르리 경리부장과 영상통화를 하고 있었다.
카메라가 포착한 툴레아 대표는 1층에서 한창 물과 바위의 정령을 대동하고 주교와 싸움을 벌이는 중이었다.
자연의 원소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정령술사 간의 싸움.
주위의 엘프들은 간신히 휘말리지 않을 정도의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들의 손바닥에서 흘러나온 황금색 빛무리가 정령들의 몸에 흡수되고 있는 걸 보니 저렇게 기력을 공급하는 듯했다.
엘프의 머릿수는 툴레아 측이 더 많았지만, 불의 정령이 가장 강력하다는 이야기는 사실이었는지 조금씩 툴레아가 밀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우리가 도착할 때까지 피로에 절은 툴레아가 버텨 줬으면 좋을 텐데.
“꾸잇꾸잇.”
정장 재킷의 가슴 주머니에 손수건 대신 들어간 에코가 몸을 부르르 진동시키며 힘차게 소리를 발했다.
어서 가자고 재촉하는 걸까.
물론 그럴 생각이다.
“서두르죠.”
“알아, 인마.”
-퐁
이번엔 엘라마에게 등을 떠밀리는 일 없이 먼저 내 의지로 다차원 출입구에 몸을 던졌다.
* * *
드넓은 쇼핑몰을 방불케 하는 세계수 1층.
5층까지 탁 트여 있던 중앙 천장, 그 공간을 가로막은 거대한 바위 아래에서.
자일리니 주교와 툴레아는 격렬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화아악!!
빠른 속도로 공기 중의 산소를 소모해 타오르는 불길.
세계수의 내벽이 그을리고 있었지만, 자일리니는 불의 정령의 힘을 최대한으로 끌어내 툴레아와 그를 따르는 엘프들을 위협했다.
불꽃은 살아 있는 것처럼 사방으로 퍼져갔다가 다시 한곳에 모이길 반복하며 적을 농락한다.
정령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태고의 계약에 따라서.
“자일리니 주교! 이런 싸움은 잘못되어 있습니다!!”
“닥쳐라!! 네놈에게서 세계수를 지키는 게 나의 사명이다!!”
“그걸 말이라고…!!”
툴레아는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을 토대로 반박할까 고민했지만 이내 입을 꾹 다물었다.
여기서 소리쳐 봤자 주교를 따르는 추종자들의 믿음은 흔들리지 않는다.
지금은 반격의 기회를 엿보며 최대한 버티는 것 말곤 할 수 있는 게 없다.
“하여튼 당신이란 사람은!!”
가차 없는 주교의 공세. 하지만 툴레아는 낭패하는 일 없이 한쪽 무릎을 꿇고 앉은 자세 그대로 바닥을 내리쳤다.
-쾅!
“지금…!”
툴레아의 좌우에 진을 친 물과 땅의 정령이 힘을 발했다.
-콰아아아아!!
허공에서 나타난 진흙이 저절로 항아리 모양의 구조물로 변해 주교를 가두었다.
거대한 구조물 안에서 주교의 고함 소리가 메아리치고 있었다.
“이걸로 시간을 벌 수 있다면….”
맹렬한 불꽃이 정령의 힘이 깃든 진흙을 태웠지만, 구조물은 시간이 지날수록 단단히 굳어가기 시작했다.
성공이다.
이것이 바로 툴레아가 아껴 두고 있던 반격 수단.
불의 정령이 발하는 화력이 거셀수록 진흙은 단단히 굳어가고 있었다.
가마의 화염 속에서 도자기가 완성되는 것과 같은 원리.
게다가 밀폐된 공간 안에서 계속해서 산소를 소모하는 건 주교에게도 부담일 것이다.
아마 지금쯤 역으로 자신이 정령의 불에 타 죽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힘을 거두고 있을지도 모른다.
-휘청
“대표님…!”
극심한 기력 소모에 쓰러지려 한 툴레아의 몸을 달려온 직원들이 부축했다.
툴레아는 열기를 쐰 탓에 현기증을 견딜 수 없었다.
단순히 하룻밤을 지새웠기에 컨디션이 나빠진 건 아니었다.
차원신용금고의 은행원들이 찾아왔을 땐 애써 티를 내지 않으려 했지만, 더는 버틸 수 없었다.
“그러니까 제가 무리라고 했지 않았습니까….”
숯덩이처럼 전신의 피부가 그을린 툴레아.
그를 보고 울음을 참지 못한 비서가 굵직한 눈물을 떨어뜨렸다.
툴레아는 그동안 다른 젊은 동포들에게 조금이라도 많이 생명력이 돌아가도록 세계수 바깥에서 잠드는 생활을 이어왔다.
그런 상황에서 정령을 다루기 위한 기력이 부족해지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게다가 계속 무리를 했으니 수명 역시 적잖게 줄어들었을 터.
하지만 무모한 짓을 벌인 대가로 툴레아는 주교의 진격을 잠시나마 막을 수 있었다.
“항아리를 부숴!!!”
문제는, 지도자인 자일리니가 도자기에 갇힌 걸 목격한 노인들이 벌써 쇠로 만든 무기를 들고 달려들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그들 중 일부는 주교가 당했다고 생각했는지 복수심에 가득 찬 얼굴로 쓰러진 툴레아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비서는 축 늘어진 사장의 몸을 부축해 안전한 곳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아직 쓰러지시면 안 됩니다.”
약해져 가는 사장의 심장 박동을 느끼며 비서는 짓이기듯 중얼댔다.
툴레아는 비서를 포함한 젊은 세대를 위해 모든 것을 내어주었다.
그렇다면, 이번엔 자신들이 툴레아를 지켜 줄 차례.
“그럼, 부탁한다.”
비서의 뒤에 툴레아를 따르는 젊은 엘프들이 모였다.
절반은 주교를 가둔 항아리가 부서지지 않도록 지키기 위해, 나머지 절반은 툴레아의 퇴로를 확보하기 위해.
“맡겨 주세요.”
“은행원분들이 도착하기 전까진 어떻게든 버텨 보겠습니다.”
“사장님이랑 묘목만 무사하면 됩니다.”
고된 업무로 단련된 장인들과 사원들은 자신 있게 웃으며 비서와 사장에게 도망칠 길을 만들어 주었다.
묘목은 장시간 세계수 밖의 공기에 노출되면 시들게 된다.
그러니까. 툴레아와 그를 따르는 엘프들은 주교에게 승리할 때까지 묘목을 이 안에서 지켜 내야만 한다.
그리고 그동안 자신들을 지켜 준 툴레아 역시도.
“이번에는 우리가 지켜.”
엘프들은 툴레아를 돕던 두 정령을 불러내 다시 기력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들의 미래를 쟁취하기 위해.
* * *
툴레아가 주교를 가두고 30분가량이 지났다.
과거 전쟁을 겪은 늙은 엘프들은 자신들의 자식 세대를 크게 다치게 하는 일 없이 제압할 수 있었다.
젊은 엘프들 중 절반가량이 툴레아를 붙잡으려 하는 노인들을 막기 위해 동원된 까닭에 머릿수로 우위를 점할 수 있던 덕이었다.
“우릴 늙었다고 무시하니까 이런 꼴이 나는 거다.”
오만방자한 태도 탓에 젊은 세대에게 늘 좋지 않은 눈초리를 받아오던 노인들은 코앞까지 다가온 승리를 만끽하며 자일리니가 갇힌 도자기를 파괴했다.
-콰드득….
-콰아앙!!!
항아리 주위에 오래된 폭약을 설치하고 터뜨리자, 굉음과 함께 진흙이 구워져 만들어진 구조물에 거대한 구멍이 생겨났다.
“자일리니 주교! 무사하십니까!!”
연기가 자욱한 도자기 안쪽에서 누군가가 손사래를 치며 밖으로 걸어 나왔다.
“…쿨럭.”
검댕이 묻은 얼굴.
자일리니 주교는 상한 곳 하나 없이 멀쩡했다.
“툴레아는.”
“쓰러졌습니다.”
“…그런가.”
주교는 흡족한 미소를 띤 채 천장을 봉쇄한 바위벽을 올려다보았다.
저것을 부수고 옥상으로 올라가 묘목을 불태우면 모든 빚에서 해방될 수 있다.
세계수의 소유권이 그 남자에게 넘어가겠지만, 딱히 상관은 없다.
어차피 자신은 계속 이곳에서 편안한 노후를 보낼 수 있을 테니까.
종족의 번영을 위해 여태껏 많은 공헌을 한 자신에겐 그럴 권리가 있다.
고작 몇 푼 도박하다 진 빚이 운 나쁘게 부풀어 오르고 말았다고 해서 모든 것을 잃을 수는 없다.
“그럼, 올라가 봅세.”
주교와 그 추종자들은 젊은 엘프들을 몰아붙이며 앞으로 나아갔다.
저기 남은 소수만 제압하면 땅의 정령의 명령권을 가져올 수 있다.
이번 기회에 담보로 세계수를 넘겨준 다음 사사건건 자신의 행실을 문제 삼던 툴레아를 정리할 수 있다면.
신목주교의 호칭에 더해 카펠리노 디 드리아데의 대표 자리까지 차지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번 무력시위로 인해 죽은 동포는 없었으니, 그동안 쌓아온 자신의 명성이 추락하진 않을 터.
이젠 진정한 의미로 엘프의 지도자가 될 수 있다.
그런 생각을 하며 궁지에 몰린 반대파를 향해 여유롭게 걸어가던 그때.
-두두두두두두두….
세계수 바깥에서 낯선 소음이 들려 오기 시작했다.
“이 소리는….”
주교는 추종자들과 함께 나무 밖으로 나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안에서 바위벽을 지키려 하던 젊은 엘프들 중 몇몇도 그 뒤를 따랐다.
“…헬기?”
누군가가, 헬리콥터를 타고 이쪽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헬기가 고도를 낮추자 바람에 잔디가 눕고 흙먼지가 날렸다.
주교와 늙은 엘프들은 팔로 얼굴을 가리며 방문자의 정체를 확인하기 위해 강풍에 맞서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헬기에서 내린 건―
“차원신용금고에서 왔습니다. 키키와이 다차원 출장소의 슬리크 엘라마입니다.”
“김지안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뀨우!”
정장을 입은 두 사내.
그리고 정장 가슴 주머니에서 얼굴을 내민 바람의 정령이었다.
“은행원이 이곳에 무슨 볼일이 있다고 찾아왔는가. 썩 꺼지지 못할까.”
그들의 방문은 주교에게 있어 썩 달가운 것이 아니었다.
옷에 불이 붙는 불상사를 겪고도 다시 찾아온 걸 보니 대출을 성사시키겠다는 의지가 엿보였다.
“은행원에게 볼일은 없다. 우린 절대 세계수를 담보로 내놓지 않을 것이다.”
-화륵!
무슨 일이 있어도 세계수가 은행에 담보로 잡히게 두어선 안 된다.
불의 정령을 불러내 위압적인 분위기를 만들려 했지만, 열기에 맞서는 대머리는 여유로운 얼굴로 주교를 쳐다보고 있었다.
“성격이 불같으시군요. 은행원에게 볼일이 없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말한 사내는 꼿꼿하게 치켜들고 말했다.
“저, 슬리크 엘라마가, 당신에게 용무가 있습니다. 주교님께, 개인적으로 말이죠.”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혀 알 수 없는 표정.
사내는 주교가 그의 의도를 추측하기도 전에 먼저 기세 좋게 바닥에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았다.
-쿵!
“갑자기 무슨―”
주교는 예상치 못한 사내의 행동에 한 걸음 뒤로 물러났고, 상대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세계수와 나무에 깃든 별의 영혼을 섬기는 고귀하신 사제, 자일리니 밤비노 주교님!!”
“……?!”
사내는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전통극 배우가 할 법한 과장된 표정과 대사, 그리고 동작.
사자처럼 부릅뜬 사내의 두 눈.
자일리니는 그 기백을 마주하고 나서야 깨달았다.
서둘러 자신의 귀를 막아야 한다.
아니면 저 은행원의 입을 다물게 하거나.
이대로 저자가 말을 잇게 했다간―
-화륵!
불의 정령이 주교의 의지를 따라 거대한 화염을 허공에 만들어 냈지만, 이미 늦었다.
“작고 작은 인간, 슬리크 엘라마가 청합니다. 길을 잃은 영혼을 주교님과 세계수 앞에 겸허히 내려놓고 가르침을 구합니다.”
엘라마는 경전이 정한 절차를 따라 무릎을 꿇고 황금과 순수한 소금 결정, 그리고 잎사귀가 달린 나뭇가지를 주교의 눈앞에 내려놓았다.
“작은 이의 청에 귀 기울이며 그에게 유익하도록 가르치라. 마땅히 행할 길로 인도하라.”
엘라마는 작은 목소리로 사제에게 교리문답을 권하는 경전의 글귀를 읊조렸다.
“지금은 그럴 상황이―”
“교리문답, 해 주실 거죠? 모두가 보는 앞에서, 정정당당하게.”
“…….”
“전례를 따라 문답을 청하는 이가 있다면 주교는 반드시 응해야 한다. 찾아보니 전쟁터에서도 교리문답이 오간 기록이 있더군요.”
젊은 엘프들은 존재조차 모르고 있지만, 교리에 통달한 추종자들은 물론 신목주교 자신도 그 강제력을 알고 있는 오래된 선지자의 금언金言.
“몰골이 말이 아니시긴 한데, 전쟁 터진 것도 아니니까 저녁까지 시간 좀 내주시죠. 싫으면 주교 때려치우든가.”
문답을 거부하는 순간 신목주교의 자격이 사라진다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
“…오만하군.”
강제로 시간을 빼앗기게 된 주교의 얼굴에 노골적인 분노가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