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9화 (29/200)

잠재력을 보는 은행원 029화

귓속에서 울리는 목소리가 그친 다음, 나는 다시 스마트폰의 통화 볼륨을 올렸다.

<…김지안 대리님의 귀엔 들리고 있는 겁니까?>

툴레아의 질문에 담긴 의도는 파악했다.

그는 방금 전 정령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건, 오래된 신들에게만 허락된 일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나는 평범한 인간.

지구가 아닌 다른 차원에서 일하고 있다는 거 말곤 평범한 대한민국 출신의 20대 후반 남성이다.

“김지안 대리… 놈의 눈은 대체 어떻게 된 거냐.”

“제 눈이 왜요.”

“괴상한 광채를 발하고 있었다.”

“…….”

나는 남은 힘을 쥐어짜 낸 결과 책상에 뻗어 버린 정령의 몸을 쓰다듬었다.

눈이 아파진 건 아까 에코가 능력을 사용한 것과 같은 타이밍이었다.

“어떻게 된 거지….”

눈에 뭔가 문제라도 생긴 걸까.

무언가 떠오를 것 같은데.

뭘까, 무언가 중요한 걸 잊고 있는 기분이 든다.

뭐였더라.

아니, 지금 그런 걸 고민하고 있을 시간은 없다.

방금 내가 들은 것을 엘라마와 툴레아와 공유해야만 한다.

이게 사실이라면, 이번 위기를 충분히 뒤집을 수 있을 테니까.

“…믿기 힘드실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일단은 방금 제 귀에 들린 걸 빠짐없이 말씀드리겠습니다.”

굳은 표정으로 이쪽을 보는 두 사람에게, 나는 환청과도 같았던 두 목소리가 나눈 대화를 그대로 읊어 주었다.

“…….”

그리고 잠시 후.

해결의 실마리가 손에 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 엘라마는 한층 더 심각한 표정으로 날 노려보고 있었다.

“네 말과 툴레아 대표님의 의견을 종합하자면, 여기 이 에코인가 하는 바람의 정령이….”

“큐?”

“체내에 기록해 둔 공기의 진동을 그대로 레코드판처럼 재생했고, 네가 그걸 들었다는 거군.”

“아무래도 그리된 것 같습니다.”

“정령의 소리가 대주주님이나 행장님 같은 신이 아닌, 인간인 너의 귀에 들렸다 이 말인가.”

“지금 그게 중요한가요?”

“…아니.”

말은 아니라고 하고 있었지만, 엘라마는 납득이 가지 않는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마 그의 눈에 비친 나 역시 같을 것이다.

<주교가 먼저 세계수를 담보로 잡았을 줄이야. 먼저 알아채지 못한 제 잘못입니다. 불법 도박장에 드나드는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 사채업자에게 돈을 꾸고 세계수를 팔아넘기려 하다니….>

자일리니 주교가 상상했던 이상으로 타락해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툴레아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이마를 짚었다.

하지만 아까와 달리 그의 눈엔 한 줄기 희망의 빛이 보이고 있었다.

<용서할 수 없습니다. 주교라는 자가 오로지 보신을 위해 세계수를 넘기려 하다니.>

매일같이 세계수야말로 생명의 근원이라고 성토하던 이가 바로 주교였다.

그런 그가 자신의 빚을 갚기 위해 종족 전체의 보물을 다른 이에게 넘기려 하고 있다.

용납할 수 없다. 용납해선 안 된다.

자일리니 주교를 향한 분노는 비단 툴레아만의 것이 아니다.

나와 엘라마 역시 화면 너머에서 말하고 있는 툴레아의 모든 감정에 공감하고 있었다.

“대표님께선 저희에게 1,300억 굴덴의 대출을 부탁하셨습니다.”

손등 위에 올라탄 에코를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궁지에 처한 종족이, 다시 한번 번영할 기회를 얻을 수 있도록. 대표님은 노력해 왔습니다.

수천 년의 시간 동안 엘프들의 삶을 지탱해 온 자랑스러운 역사이자 생명의 근원인 나무를 조각내는 업을 짊어짐은 물론 동포들의 손가락질까지 감수하셨습니다.”

<…….>

“대표님께선 세계수를 베고, 조각내, 모양을 다듬어 엘프가 아닌 이들의 집에 전시하려 하고 계십니다.”

<제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는 저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습니다. 어떤 비판과 결과가 따라오더라도 후회하지 않을 겁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 속에서 형형하게 타오르는 각오를 받아들였다.

내게 깃든 직무권능, 여신판단이 내린 결론은 옳았다.

“좋습니다. 대표님께서 원하신다면―”

엘라마와 과장들의 눈에 비춘 나는 입행 1년 차 대리 나부랭이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차원신용금고는 그 헌신에 동참하겠습니다.”

하지만 이런 최악의 상황에서 역전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는 게 나뿐이라면.

“세계수의 엘프와 정령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지 않도록, 전력으로 돕겠습니다.”

어떤 인연인진 몰라도 내가 가진 것을 올바르게 사용해 이 일을 끝마칠 수 있다면.

“1,300억 굴덴, 반드시 빌려드리겠습니다.”

기꺼이, 은행원의 사명을 다할 뿐이다.

* * *

우린 추가로 10분 정도 더 화상통화로 머리를 맞대고 아이디어를 쥐어짰다.

이번 사태를 해결할 방법은 하나뿐이었고 무척이나 단순했다.

바로, 내가 들은 대화를 주교를 따르는 나이 든 엘프들에게도 들려 주는 것.

주교가 사적으로 진 빚을 갚기 위해 세계수를 담보로 잡으려 한 사실이 알려진다면, 더는 무력시위를 이어갈 수 없을 터.

다만 문제는 아직 남아 있었다.

<제 동포들에게 에코가 기록한 대화를 들려 줘야만 합니다. 하지만 에코의 속삭임을, 바람의 소리를 듣는 건 저희에게도 불가능한 일입니다. 정령과 세계수를 창조한 이가 아니고서야….>

그렇다.

정령의 작고 작은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건 오직 같은 정령과 신들뿐.

올림포스에 사시는 대주주님들을 당장 모셔올 수 없는 한 상황을 역전시키는 건 불가능하다.

“뭔가 방법이 없을까요. 소리를 무지막지하게 크게 키운다든지.”

<그게 가능하다면 좋겠습니다만.>

무언가 좋은 수가 없을까 고민하던 그때, 툴레아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딱 하나, 방법이 있습니다. 도박 같은 거라서 성공할지는 잘….>

그가 머뭇거리며 꺼낸 솔루션은.

“―네? 제가요?”

…왜 안 어울리게 이러실까. 진짜 도박수잖아?

<그럼, 김지안 대리님. 모쪼록 잘 부탁드립니다.>

“아뇨아뇨 잠깐만요! 제가 그걸 어떻게 합니까! 저 그냥 사람이라고요! 네?!?! 대표님? 대표니임!!! 전화 끊지 말고 제 얘기 좀 들어 달라니까요!!”

<잘 부탁드립니다!!>

-뚜우

“야!!!!!!”

아니 왜 나한테 그런 일을 시키는 건데요!!!!!!

“…….”

“포기해라. 네놈만 똑바로 움직이면 모두가 편해져.”

“…아, 네.”

반박할 기운도 나지 않았다.

그래, 내가 하면 되지 뭐.

이유는 몰라도 정령의 소리도 들었으니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빠악!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엘라마가 내 뒤통수를 힘껏 후려쳤다.

“하여튼 네 녀석은 은행원으로서 하면 안 되는 말만 골라 하고.”

“으윽, 폭행으로 고소하겠습니다….”

그런 소릴 하면서 엘라마의 안색을 살폈는데,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무서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소장님?”

“…….”

아, 이건 좀.

“니가 누군데 감히 은행을 대표해서 발언을 해? 행장이라도 된 셈이냐? 오만한 자식 같으니라고.”

“…죄송합니다.”

잘 생각해 보니 내 잘못이 맞는 것 같아서 곧바로 대가리를 박았다.

나도 알고 있다.

방금 혼자 벅차서 오글대는 소리 해 댔다는 거.

근데 이렇게 면박 줄 필요가 있나?

엘라마의 성격을 생각하면 영상 통화가 끝나기 전에 때리지 않은 게 그나마 다행이라고 여겨야 할지도 모르겠다.

“큐우우….”

한편 에코는 아까보다 한결 평온한 얼굴로 내 소매에 몸을 비비적대고 있었다.

엘라마에게 혼나는 걸 보고 걱정해 주는 걸까.

대화를 엿듣고 전해 준 것도 그렇고, 햄스터처럼 생긴 주제에 지능이 상당히 높은 모양이다.

이 녀석이 제 한 몸 불살라 출장소까지 와 주지 않았더라면 우린 꼼짝없이 주교에게 당했을 것이다.

“다시는, 고객 앞에서 함부로 대출을 약속하지 마라. 심각한 규정 위반이다.”

“명심하겠습니다.”

“하여튼 말은… 너는 이번 일 끝나면 두고 보자.”

엘라마는 그렇게 말하더니 빙글 돌아 빠른 걸음으로 소장실을 나섰다.

“어디 가십니까?”

“본점.”

“바로 33차원으로 건너가시는 거 아니었어요?”

“행장님께서 전용기로 오고 계신다. 툴레아 대표의 아이디어는 불완전하니 약간의 도움을 구할 수밖에.”

“행장님께요?”

“뭔가 짚이는 구석이 있는 모양이시다. 보고드린 것도 없는데, 새벽에 출발하셨다고 그러더군.”

“…….”

이제야 떠올랐다.

한 번도 본 적 없긴 한데 우리 행장님 역시 12차원 올림포스에 사는 몇몇 대주주님들처럼 신이라고 들었다.

구D 시절부터 계속해서 은행을 이끌고 있는 초 거물 뱅커.

어떻게 이쪽 상황을 알고 전용기로 날아오는 건진 모르겠지만 일단은 엘라마가 시키는 대로 하는 수밖에.

“출발 준비하고 내가 돌아올 때까지 얌전히 기다리고 있도록. 툴레아 대표한테는 내가 연락 넣어 둘 테니.”

재킷을 껴입은 엘라마는 시간을 확인하곤 어플로 택시를 불렀다.

그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은행을 나섰다.

플루토와 아이작, 그리고 두 과장이 직원용 통로에서 모습을 나타낸 건 바로 그다음이었다.

“음? 정령?”

갑자기 불쑥 코앞까지 다가온 플루토가 내 손바닥 위에 엎드린 에코의 몸을 손가락으로 간지럽혔다.

처음 보는 표정.

플루토는 웃고 있었다.

“큐뀨웃…?!”

“왜 겁을 먹어. 나 그런 거 아니야.”

“규귯.”

“사실은 맞아. 절반만 그래.”

에코는 몸을 움츠린 채 황송하다는 듯 플루토의 손가락에 얼굴을 비볐다.

그러다 플루토와 눈이 마주쳤다.

“훗.”

“……?”

대체 왜 의기양양해하는 건데.

“잘 마치고 와, 대리님.”

“어어 다녀올게….”

그녀는 우쭐한 표정으로 창구 뒤로 걸어가 평소처럼 분신을 만들어 자리 세 개를 차지했다.

근데 왜 반말이지 자꾸.

비정규직 나부랭… 아니다. 나쁜 생각 그만.

* * *

“후우.”

택시 뒷좌석에 기댄 엘라마는 조용히 창밖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평소였다면 자기 차를 몰고 갔을 상황.

하지만 오늘 그는 자일리니 주교를 몰아붙일 방법을 찾으려고 밤을 지새웠다.

거사를 앞둔 날에 교통사고를 낼 순 없는 법.

행장과 공항에서 만나기 전에 잠시 눈을 붙여 두고 싶은 솔직한 심정이었지만, 머릿속에는 아까 본 광경이 계속 떠오르고 있었다.

“그 녀석이 열쇠가 될 줄이야….”

주어진 정보를 토대로 추측한 결과 어느 정도 사건의 윤곽이 보이기 시작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세계수 담보 대출에 관한 것이 아니라 부자연스러웠던 김지안의 입행 과정에 관하여.

“어쩐지.”

이젠 알 것 같다.

행장이 일면식도 없는 미개척 차원의 인간을 특채로 은행에 들이려 한 이유를.

“그런 거였군.”

김지안은 바람의 정령이 구사하는 언어를 이해하진 못했지만, 다른 이들이 듣지 못한 바람의 소리를 들었다.

“어쩌다 저런 말도 안 되는 직무권능을 각성했나 했더니….”

같은 정령 혹은 정령을 창조한 신들이 아닌 이상 불가능한 업적.

그것을 불완전하게나마 해냈다는 건 즉.

“저 녀석이 그릇이었나.”

행장은 마침내 찾아낸 것이 틀림없다.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로 먼 옛날에 잃어버렸던 자신의 조각이 숨겨진 곳을.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