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재력을 보는 은행원 028화
“으음….”
출장소 영업 개시 30분 전.
나는 바닥에 널브러진 바람의 정령을 데려다 물수건으로 깨끗하게 닦고 자잘한 상처에 연고를 발라 주었다.
“어째서 정령이 여길 찾아온 거지.”
모르는 거라곤 없을 거 같이 굴던 엘라마가 상당히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의 책상 위에 뻗은 정령을 바라보고 있다.
평소였다면 그 모습을 보고 작은 희열이라도 느꼈겠지만.
세계수 담보 대출이 중대한 기로에 놓인 지금, 정령의 방문은 단순한 해프닝으로 보이지 않았다.
“절 따라온 거려나요.”
“평범한 인간을? 정령이 뭐가 아쉬워서.”
“아니, 그… 팔르리 경리부장도 그랬잖아요. 정령에게 환대받는 사람은 흔치 않다고.”
“스물아홉의 뇌라고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순수하군.”
“아, 그림을 그리다 와서 그런지 때 묻지 않았다는 소리는 자주 듣습니다. 그래서 정령도 절 좋아하는 걸까요―”
“접대용 멘트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다니 글러 먹었어.”
“아니, 그분이 왜 저한테 아부를 떨겠어요! 정령이 거짓말쟁이 싫어한다잖아요!”
“그 말 역시 거짓일지도 모르지.”
“…웃으면서 할 소립니까 그게.”
뭐랄까, 이 인간이랑 같이 있다 보면 사람의 진정성이나 진심 같은 걸 전부 의심하게 되어 버릴 것만 같다.
연기하다 온 인간이라 그런지 방심을 못 하겠네.
“뭐, 정령의 생태에 대해선 나도 얼마 지식이 없으니 단정할 순 없겠다만. 이 녀석이 그날 본 것과 같은 개체인지 아니면 모습만 닮은 상관없는 녀석인진 아무도 모르는 거 아닌가.”
“그건 불가능합니다. 경전 읽어 보셨으면 아시겠지만 세계수에 같은 정령은 하나 말곤 살지 못합니다.”
“33차원에 남아 있는 세계수는 한 그루밖에 없으니….”
“이 아이 말곤 바람의 정령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
잠깐의 적막이 소장실에 흘렀다.
새근새근, 기절한 정령이 숨을 쉬는 소리만이 들려 온다.
자그마한 털 뭉치 같은 몸이 부풀어 올랐다가 줄어드는 모양새는 가냘프다.
“어쩌다 여기까지 온 건지….”
어떻게, 무슨 수로 우리의 흔적을 따라왔는지는 알 수 없지만 팔다리도 없는 이 작은 몸으로 산탄초넬로 죠사벨라 숲에서 키키와이 출장소까지 오는 건 쉽지 않았을 거다.
몸 구석구석이 먼지와 상처로 뒤덮여 있던 걸 보니 세계수 안에서 날아다니던 것과 달리 밖에선 날아다닐 수도 없었을 텐데.
사력을 다해 이곳을 찾아온 데엔 분명 무언가 목적이 있었을 것이다.
내 눈엔 기절한 정령의 오밀조밀한 얼굴에 고결한 사명감이 깃들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부들
그때였다. 정령의 몸이 작게 경련한 건.
정신이 들어 깨어나려는 걸까.
“김지안 대리, 물.”
“알고 있습니다.”
엘라마가 말을 마치기 전에 나는 이미 정수기가 있는 쪽으로 뛰어가는 중이었다.
종이컵에 찬물을 받아 소장실로 복귀.
곧바로 잔을 기울여 뻐끔대기 시작한 정령의 입에 부어 주었다.
내용물 중 극히 일부만 녀석의 입안으로 들어갔지만, 덕분에 정신을 차린 듯 정령은 검은콩을 박아넣은 것처럼 생긴 눈을 뜨고 나를 올려다보았다.
“큐우….”
금방이라도 울음이 쏟아질 것만 같은 표정. 하지만 당연히 나는 녀석이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 알 수 없다.
다만, 분위기만으로 추측한 거지만 무언가 좋지 않은 일이 있던 모양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세계수의 엘프들이 아니라 날 찾아온 걸까.
“툴레아 대표에게 연락해 보죠.”
“상사에게 지시하지 마라. 그리고 이미 거는 중이다.”
엘라마는 벌써 스피커폰 모드로 영상통화를 걸고 있었다.
<여보세요.>
잠시 후 화면에 나타난 툴레아 대표의 얼굴은 하루 만에 말도 안 될 정도로 초췌해져 있었다.
나나 엘라마가 그런 것처럼 이쪽 역시 한숨도 쉬지 못한 모양이었다.
“엘라마입니다. 상황은 좀 어떻습니까, 툴레아 대표님.”
<주교의 추종자들이 폭동을 일으키려 하고 있습니다.>
“서둘러야겠군요. 경찰은 부르셨습니까?”
<세계수 안은 자치구로 취급됩니다. 그러니까 묘목은 저들이 보기엔 평범한 관상식물의 그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불태우니 마니 해도 경찰이 개입할 명분이 없는 겁니다.>
예상했던 이상으로 위급해진 상황.
더는 지체하고 있을 시간이 없다.
주교와 추종자들이 세계수의 묘목을 불태우는 순간, 우리의 모든 노력은 물거품이 되고 엘프들은 미래를 잃게 될 것이다.
“…알겠습니다. 어려운 부탁인 건 알고 있습니다만 저희도 서두르고 있으니 어떻게든 버텨 주십시오.”
<최선을 다하고는 있습니다만, 정령들의 힘으로 막아 보려 해도 불의 정령이 주교의 명령에만 따르는지라….>
화면 속 툴레아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나는 조사한 자료의 내용을 떠올렸다.
세계수에 머무는 네 정령들에 관한 기록.
불은 세계수에 가장 큰 위협이 될 수 있는 원소. 그리고 불의 정령은 네 정령 중 가장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다.
이런 이유로 불의 정령은 종교지도자인 신목주교神木主敎의 명령 외엔 따르지 않는다고 한다.
다른 정령들의 도움이 있더라도 주교가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다면 젊은 엘프들은 그를 막을 수 없을 터.
<비슷한 숫자의 엘프가 정령에게 힘을 공급한다고 가정했을 때, 다른 셋이 모여도 불의 정령을 이길 순 없습니다.>
정령이 자신의 힘을 온전히 발휘할 수 있는 조건은 두 가지라고 한다.
세계수의 비호와 자신에게 기력을 공급해 줄 엘프.
그러니까 바람의 정령은 세계수 밖에선 자유롭게 날아다닐 수 없다.
저렇게 상처투성이가 된 건 거친 숲길을 맨몸으로 굴러온 탓이겠지.
“추종자들이 주교를 따르는 한 꼭대기 층의 묘목은 계속 위험에 시달리겠군요.”
<자일리니 주교는 지금도 무력시위에 나설 기회만을 노리고 있습니다. 저희가 물러나면 다른 정령들도 굴복시켜 묘목을 태우러 갈 테죠.>
“주교를 따르는 노인들은 대표님과 뜻을 함께하는 분들의 부모 세대 아닌가요?”
<그렇습니다.>
“이번 대출에 자식 세대의 미래가 걸려 있는데 어째서 주교를 따르는 거죠?”
툴레아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화면 너머로도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는 자신과 같은 핏줄을 지닌 동포들, 개중에서도 연장자들의 비이성적인 행동을 보며 수치심과 분노를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사실 나에게는 퍽이나 친숙한 표정이었다.
이곳에 오기 전의 나는.
거울 속에 비치던 나는.
언제나 저런 표정을 짓고 있었다.
지구에서 살던 시절에도 몇 번이나 머릿속에 떠오르던 부정적인 생각.
모든 걸 차지하고 놓아주려 하지 않는 윗세대는 언제나 자신의 자식 세대를 벼랑으로 밀어냈다.
<그들에게 제대로 된 명분 따윈 없습니다. 세계수는 신성하고 오래되었고 모두가 살아온 터전이니까, 그런 소리를 기계처럼 반복할 뿐….>
‘기계처럼’.
생명을 가진 존재를 기계에 비유하는 건 엘프들 사이에서 혐오스럽고 모욕적인 발언으로 취급된다고 한다.
그 말을 들은 나는 툴레아의 분노에 깊게 공감할 수 있었다.
“…어리석군요. 전통과 역사를 지키겠다는 이유만으로 자식들을 죽음으로 내몰려 하다니.”
내 나라에서 난, 무력한 한 사람의 화가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내 위치는 이곳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나는 큰 권한 따윈 지니고 있지 않으며 경력 역시 일천한 신입 은행원.
화가 나부랭이가 대한민국의 슬픈 현실을 바꿀 수 없던 것처럼, 은행원은 한 종족의 세대 대립을 해결할 힘을 지니지 못한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포기하지 않았다.
자신을 맹신하는 사람들을 이끌고 한 종의 미래에 파멸의 그림자를 드리우려 하는 어리석은 노인을 막아야 한다.
적어도 시도는 해 봐야 할 거 아닌가.
“큐우.”
“…….”
바람의 정령은 작은 몸을 꼬물대며 이쪽으로 기어 왔다.
나는 녀석의 말랑말랑한 등을 집어 스마트폰 앞으로 가져갔다.
“이 아이, 알고 계시죠?”
“에코가 어째서 거기에… 설마 혼자 키키와이로 건너간 겁니까?”
“아마도 그런 것 같습니다.”
에코라는 이름이 있었구나.
“저희 뒤를 따라온 것 같은데 무언가 전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저희는 정령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어서….”
손바닥에 올라탄 에코를 엘라마가 든 스마트폰 화면에 더욱 가까이 가져갔다.
“대표님이라면 이 아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아실 것 같아서요. 부탁드리겠습니다.”
하지만 툴레아는 슬픈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아쉽지만 그건 저희에게도 불가능한 일입니다. 정령은 엘프의 명령을 알아듣지만 저흰 그들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네?”
“에코는 총명한 아이니 분명 은행을 찾아간 데엔 이유가 있을 겁니다. 이번 사태를 해결할 열쇠가 되어 줄지도 모르죠. 무언가 단서가 있을 겁니다.”
하긴, 정령이 돈 빌리러 은행에 올 리는 없으니까.
“큐, 큐우우귯. 규웃.”
…귀여운 눈으로 이쪽을 올려다보고 있지만 나는 녀석이 무슨 말을 하는지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불가능합니다. 정령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건 오직 오래된 신들에게만 허락된―”
-고오오오!!!
그때였다.
한껏 몸을 움츠린 에코가 엄청난 기세로 진동하며 빛을 발한 건.
“이건… 대체….”
-지잉!!
그와 동시에, 바늘로 찌르는 듯한 격통이 오른쪽 눈을 덮쳤다.
“으아아아아!!!”
“김지안!!”
쓰러지려 하는 내 어깨를 엘라마가 부축했다.
바닥에 떨어진 스마트폰과 에코. 액정이 깨진 엘라마의 전화기에서 걱정 어린 툴레아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다.
“아악…!”
바닥에 부딪힌 충격으로 머리가 핑 돌았고, 오른손으로 눈두덩을 감싸자 엄청난 열기가 느껴졌다.
그리고 귀에는 이명. 아니. 바람이 분다. 바람이 부는 소리가 들린다. 귓구멍의 가장 깊은 구석에서, 고막을 간지럽히듯이.
“…어?”
문도 창문도 닫힌 사무실에서, 어째서 바람이―
‘은행이 나무를 담보로 잡았다간 곤란해집니다. 알고 계시죠?’
속삭이듯, 처음 듣는 목소리가 고막을 진동시켰다.
“김지안 대리? 정신 차려! 쓰러져 있을 여유는 없다고우브읍!”
나는 엘라마의 입을 강제로 틀어막고 상체를 일으켰다.
<김지안 대리님? 대체 무슨 일이―>
“쉿.”
“아브브우읍.”
“두 분 다 잠시만 닥치고 있어 주세요.”
약간의 소음이라도 들렸다간 놓칠 것만 같은 작은 목소리.
나는 눈을 감고 전 신경을 곤두세워 귓속에서 울리는 음성에 집중했다.
‘아무리 전산에 기록되지 않는다 해도 먼저 세계수에 질권을 설정한 건 접니다.’
‘그렇지. 상환이 불가능해진 지금, 이 나무는 자네의 것일세.’
‘안심하세요. 제가 세계수의 권리를 가져간다고 해서 여러분을 당장 나무에서 내쫓을 생각은 없어요.’
낯선 남자와 자일리니 주교의 목소리.
“……!!”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정확히 알 순 없다.
하지만 방금 들은 대화가 실제로 두 사람 사이에서 오간 거라면 이번 대출은.
“뒤집을 수 있습니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1,300억의 융자, 반드시 성공시키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