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재력을 보는 은행원 021화
6-2차원의 경제 강국 그레이트후리텐의 수도 린딘, 그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퀸 누투리어스 스트리트 8508번지.
인사부 행원들은 이곳 차원신용금고 본점 6층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상상하는 저승사자 같은 이미지와 달리 차분하고 평화로운 분위기의 오피스.
하지만 근무자들의 데스크 위에 놓인 서류에 적힌 내용은 하나같이 다른 부서의 행원들이 알아선 안 되는 기밀뿐이었다.
“이번 주는 이상할 정도로 불륜 제보가 많네요.”
“크리스마스 지난 지 얼마 안 돼서 그래.”
지금은 본점 행원의 대다수가 퇴근한 저녁 8시.
외근을 마치고 온 인사부 막내 밀라는 사수 폴로미 대리와 함께 금일 접수된 메시지를 확인하고 있었다.
“아… 크리스마스는 가족이랑 보내고 신년에 불륜 상대 만나고 다니는 거군요.”
“뭐 그렇지. 승진한 동기 중에 맘에 안 드는 사람 날려 버리기 딱 좋은 구실이잖아. 그보다 오헤어 지점 조사 결과는?”
“아, 지점 금고에서 돈 꺼내서 주식 산 계장 말이죠? 아까 정리 끝내 뒀어요. 사수가 같이 시재 확인 안 하는 틈을 타 저질렀나 봐요.”
“일한 지 몇 달이나 됐다고 벌써 횡령인지. 하여튼 이번 기수 신입들은 간도 크다니까.”
밀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전에도 시재함에서 현금을 꺼내 쓴 신입 행원이 적발당한 적이 있다.
행원 중엔 이득에 눈이 멀어 은행의 돈을 멋대로 가져가 투기에 사용하는 사람들이 이따금씩 있었다.
들키기 전에 돈을 불려 돌려놓는 경우도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운이 좋은 극소수의 케이스.
대부분은 발각되어 예외 없이 강도 높은 처벌을 받았다.
은행원이라고 해서 모두가 고결한 건 아니다.
인사부에서 근무하는 밀라는 그 사실을 뼛속 깊이 느끼고 있었다.
“신입들이 모두 지안 씨 같았으면 이런 일도 없었을 텐데. 그치?”
“언니 보통 이럴 땐 부사수 칭찬부터 하지 않나요?”
“우리 밀라가 일 잘하는 거야 다들 알고 있는데 뭐.”
밀라는 일부러 뾰로통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맞다. 상관없는 얘기긴 한데, 지안 씨 디게 괜찮게 생겼지 않아?”
“…네?”
생각지도 못한 폴로미의 말에 밀라가 노골적으로 당황한 티를 냈다.
“솔직히 그렇잖아. 사령식 때 본 신입 중에서도 제일 눈에 띄던데.”
“오빠가 원판이 괜찮긴 해요.”
밀라는 이내 침착함을 되찾고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김지안의 외모는 본점의 여성 행원들 사이에서도 화제가 되고 있었다.
딱히 차원신용금고의 신입 행원의 종족 분포 중 인간이 극도로 소수여서 그런 건 아니었다.
밀라가 생각하기에 김지안은 주관적으로, 그리고 객관적으로 꾸미면 인기 많을 타입의 남자였다.
그의 얼굴에 대한 이야기는 신입 행원 사령식 때부터 종종 나오고 있었지만 요즘 들어 더욱 화제가 된 건 뉴스에 그에 관한 이야기가 보도된 다음이었다.
무려 천재 아역에서 완성된 미남으로 성장한 플랫 샤펜도라의 복귀에 결정적인 도움을 준 게 차원신용금고의 행원이라는 소식이 알려진 직후, 사람들은 깨달았다.
플랫 샤펜도라와 함께 사진에 찍힌 은행원이 전혀 존재감을 잃지 않고 있다는 것을.
“돌아온 플랫 샤펜도라도 잘생겼다고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난리였는데 지안 씨 언급하는 사람들이 꽤 있더라고.”
“역시… 다들 생각하는 건 비슷한가 보네요.”
“응. 아무래도 일반인치고 괜찮게 생겼다, 그런 수준이 아니었으니까.”
손바닥에 턱을 괴고 웃는 폴로미는 퍽이나 즐거워 보였다.
“근데 전 연예인도 아닌 사람한테 괜히 부담 주는 게 아닌가 싶어서 걱정이네요.”
“누가 채갈까 걱정되는 게 아니라?”
“에이. 제가 왜요. 그냥 친한 오빤데.”
사실 밀라는 김지안을 보고 난리법석을 떠는 사람들의 심정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었다.
연수원에서 오래 보고 지낸 덕에 내성이 생기긴 했지만 처음엔 말을 거는 것조차 어려울 정도였으니까.
부담을 주지 않는 부드러운 인상의 골격. 반듯한 이마와 높은 코.
눈은 과하지 않을 정도로 컸는데 웃을 때 보는 사람을 포근한 마음이 들게 만든다.
“그냥, 사람들이 괜히 집적대지 않았으면 해요. 오빠가 자기 일에 집중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해야 하나.”
“하긴, 지안 씨가 어지간히 유망주여야지.”
폴로미가 말한 대로였다.
플랫 샤펜도라에게 도움을 준 것 외에도 계획 도산을 꾸미던 회사에서 15억을 회수한 김지안은 가장 주목받는 신입이었다.
실제로 윗분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아 한 달 먼저 대리로 승진하기도 했고.
“그것도 있는데 딱 봐도 좀 친한 사람 말고는 마음 안 열어 주는 느낌이지 않아요? 괜히 사람들이 가만히 놔두지 않을까 걱정돼서….”
밀라는 김지안과 나란히 앉아 대화할 때 그의 옆얼굴을 보고 느낀 감상을 떠올리며 말했다.
“그건 살짝 오지랖 같긴 한데, 지안 씨가 사연 있는 얼굴이라 그런지 친하지도 않은 사람들이 몰려들면 싫어할 거 같은 관상이긴 해.”
폴로미와 대화하던 밀라는 문득 김지안이 술김에 꺼낸 이야기를 떠올렸다.
김지안은 입행 전엔 직접 그린 그림을 팔아 생계를 유지했다고 한다.
당시엔 머리카락이 길었다고 하는데 아무리 사진을 보여 달라고 해도 김지안은 응하지 않았다.
긴 머리로 가려 두기 아까운 얼굴이지만 그래도 한번 보고 싶었는데.
밀라는 여태껏 보아온 김지안의 모습을 떠올렸다.
자신에게 보이던 부드러운 미소, 계획 도산을 꾸미는 악인들에 분노하며 보이던 얼굴.
어째서일까, 아직 본 적 없는 김지안의 다양한 표정을 머릿속에 그리게 되는 건.
그 남자에겐 타인의 상상력과 호기심을 자극하는 구석이 있었다.
직장인답게 청결감이 느껴지는 길이를 유지한 반곱슬 머리를 쓰다듬으면 어떤 느낌이 들까.
어떤 눈으로 이쪽을 볼까.
자꾸만 궁금하게 만드는 무언가가.
“후응….”
폴로미는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눈웃음을 지으며 밀라의 주위를 빙글빙글 날아다녔다.
입가를 가리고 있는 그녀의 시선은 평소 이상의 장난기를 품고 있었다.
“가, 갑자기 왜 그래요 언니.”
밀라가 정색하자 폴로미는 수상할 정도로 밝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지안 씨, 앞으로 엄청 빨리 출세할 거 같은데 미리 침 발라 놓을까 싶어서. 괜찮으면 밀라가 다리 좀 놔줄래?”
“…….”
농담인지 진담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 말에 밀라는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걱정 마, 그냥 해 본 소리였어.”
폴로미가 킥킥대며 덧붙인 다음에야 밀라의 안면 근육이 정상적으로 기능하기 시작했다.
“놀랐잖아요 언니, 갑자기 이상한 말 해서.”
“진짜 얘 거울 한 번 보여 주고 싶네.”
“그건 또 왜요?”
“됐어. 아무것도 아니야.”
아까보다 한층 밝은 미소를 짓고 있는 밀라를 보며 폴로미는 쓰게 웃었다.
“하여튼 진짜 티 난다니까.”
“뭐라고요?”
“우리 밀라가 제일 귀여워. 하고 싶은 거 다 해.”
“흐흥….”
정수리 위로 날아가 머리카락을 쓰다듬자 밀라가 특유의 바보 같은 웃음소리를 발했다.
책상 위에 두었던 밀라의 스마트폰이 진동하기 시작한 건 바로 그 직후에 일어난 일이었다.
“아, 지안 오빠….”
업무 중에 전화가 온 탓에 슬금슬금 사수의 눈치를 보는 밀라.
폴로미는 애써 웃음을 참으며 연락받고 오라고 승낙했다.
“금방 다녀올게욧!”
전화기를 들고 종종걸음으로 탕비실로 향하는 밀라.
“직장에서 연애질이라니. 다른 행원들 흉볼 때가 아니었네.”
요정은 그 뒷모습과 책상 위에 남아 있는 서류를 번갈아 보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러다 살포시.
“부럽다….”
자그마한 입 밖으로 진심이 튀어나오고 말았다.
“여보세요? 지안 오빠 키키와이 생활은 좀 어때요? 수영복 입은 예쁜 언니 많아요?”
폴로미는 닫힌 탕비실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밀라의 목소리를 달달한 다과 삼아 아직 따뜻한 홍차를 홀짝였다.
“헐, 오빠 저 방금 밖에 봤는데 눈 내리고 있어요. 대박이죠.”
밀라가 말한 대로 창밖에선 새해 처음으로 흰 눈이 쏟아지고 있었다.
차원신용금고 본점 6층.
인사부의 밤은 그렇게 저물어가고 있었다.
* * *
다크엘프도 엘프니까 33차원의 엘프와 세계수에 관해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한 나의 안이한 예상은 다행히도 적중해 주었다.
‘33차원의 엘프… 알기야 알죠. 좋게도 나쁘게도 시조 같은 취급 받는 분들이다 보니.’
‘왜 그리 목소리가 들떠 있냐고요? 제가요? 아닌데? 잠시만요, 물 좀 마시고 올게요. 큼큼.’
밀라의 말에 따르면 33차원은 모든 엘프들의 고향이라고 한다.
다크엘프는 다른 종족의 피가 섞인 혼혈의 후예지만 순혈 선조와 세계수에 관한 이야기는 어느 정도 연배가 있는 어른들에게 전해 들을 수 있는 모양이었다.
‘세계수는 굉장히 큰 나무예요. 이름만큼은 아니긴 하지만.’
‘예전엔 33차원 곳곳에서 세계수를 찾아볼 수 있었다네요. 엘프들은 씨족마다 나무를 한 그루씩 차지하고 안에 집을 만들어 살았다고, 고조할머니가 그랬어요.’
‘연세가 어떻게 되시냐고요? 여자 나이 물어보는 거 실례인데.’
‘네. 당연히 살아계시니까 이러죠. 고조할머니네 할머니도 멀쩡하신 마당에.’
밀라의 고조할머니네 할머니는 취미로 필라테스를 배우고 있는 모양이었다.
근데 고조할머니의 할머니는 대체 뭐라고 불러야 하는 걸까. 진조할머니? 아니면 최고조할머니?
어쨌든, 밀라의 이야기에 따르면 옛날 엘프들은 세계수 안에서 잠들지 못하면 천수를 다하지 못하고 시름시름 앓다 죽는 종족이었다고 한다.
당연히 미성년자와 성인을 따지지 않고 외박은 금지.
‘오래 사는 종족들이 왜 그리 연약하냐고요? 세계수를 통해 별의 정기를 공급받아야 해서 그렇다네요. 자세한 건 모르겠지만.’
그래서, 지금 밖에서 나와 사는 엘프들은 대체 어떻게 멀쩡히 생존해 있나 물었더니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아, 그건 돌연변이가 지배종이 된 케이스라고 할 수 있죠.’
나는 그제야 세계수의 엘프들이 일반적인 엘프나 다크엘프와 비교했을 때 어느 정도 외견상의 차이가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엘프는, 특히 다른 종족들과 피가 섞여 태어난 다크엘프들의 눈동자와 머리카락의 색은 상상 이상으로 다양했다.
하지만 은행을 찾아온 카펠리노 디 드리아데의 엘프들은 하나같이 금발과 녹안의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아마도 이쪽이 원조라서, 말 그대로 돌연변이를 일으키지 않은 최초의 엘프들이라서 그런 거겠지.
‘저희보다 훨씬 오래 살아도 여행을 갈 수 없는 걸 보면 썩 부럽진 않네요.’
세계수 없이도 살아갈 수 있는 돌연변이 엘프들은 인구수를 불려갔다.
반면, 기후 변화로 인해 세계수가 줄어들며 원종 엘프의 숫자는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우리에게 세계수 담보 대출을 신청하려는 이들은 멸종의 위기에 처한 원시 고대 엘프의 마지막 후예.
그들이 어쩌다 생명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는 세계수를 담보로 내놔야 하는 상황에 처한 걸까.
그걸 알아보는 것도, 내가 해야 할 일이겠지.
* * *
본점 기업여신부의 회신은 채 사흘이 지나기도 전에 도착했다.
1,300억 굴덴이라는 큰 규모의 대출 심사를 진행하기 앞서 철저한 현장 실사로 담보의 가치를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 답변의 요지.
예상했던 대로 나는 엘라마와 함께 33차원으로 출장을 가게 되었다.
-달칵
오전 9시. 나는 지급받은 전용 회중시계의 용두를 돌려 다이얼에 표시된 숫자를 33에 맞추고 다차원 출입구 앞에 서 있었다.
“다녀오겠습니다.”
“대리님 잘 다녀와.”
죽을상을 하고 과장들에게 인사하던 내게 또 플루토가 평소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인사를 건넸다.
딱히 비정규직이라고 무시하는 건 아닌데 왜 며칠 보지도 않은 나한테 반말을 쓰는 거지.
그냥 서로 존댓말 쓰면 되는 거 아닌가.
“어, 응… 다녀올게.”
뭔가 존댓말 쓰면 지는 기분이라 이쪽도 반말로 대답했다.
“힛….”
플루토의 무표정한 얼굴이 잠시 표정을 띠었다. 워낙 순식간이라 판별할 수 없었지만 흥미와 놀라움이 섞여 있던 것 같았다.
대체 왜.
비정규직 텔러인데 직무권능 지닌 것도 처음 봤고 수수께끼가 많은 사람이다.
뭐, 지내다 보면 뭔가 알 수 있겠지.
“뭘 우물쭈물거리고 있나. 어서 들어가지 않고.”
다차원 출입구 앞에 우두커니 멈춰 있던 나를 엘라마가 다그쳤다.
“…고객님들 지나가는 거 볼 땐 괜찮았는데 막상 직접 들어가려 하니까 살짝 무섭네요.”
나는 눈앞에서 아지랑이처럼 일렁이는 차원의 경계를 가리키고 말했다.
내가 아까부터 죽을상을 짓고 있던 건 딱히 출장 가는 게 싫어서 그런 게 아니다.
그저, 이걸 정말 부작용 없이 통과할 수 있을지 갑자기 불안해졌을 뿐.
“네놈보다 똑똑한 사람들이 완성시킨 검증된 기술이다. 안심하고 들어가라.”
“진짜 괜찮은 거예요? 100% 안전하냐고요.”
“…….”
아무것도 모르고 있던 시절엔 차원 이동이 겁이 나지 않았다.
면접 붙고 6-2차원으로 건너올 때에도, 차원 항공기로 연수원이 있는 12차원이나 라라비아가 있는 8차원으로 갈 때에도 별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저번에 델 몬테 지점장에게 구C 행원들의 이야기를 들은 다음부턴 점점 차원 이동이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당장 부작용으로 육체를 잃은 사람이 저기 프라이빗 뱅킹 섹터에 앉아 있지 않은가.
라즈마 과장 말이다.
“이런 몸으로 살아가는 것도 나름 편리한 점이 많답니다. 김지안 대리도 한 번 체험해 봤으면 좋겠군요.”
“…….”
라즈마가 농담 같지 않은 농담을 던졌지만 내게 재치 있게 받아칠 여유는 없었다.
애초에 얼굴이랄 게 없는 사람이라 말투 말곤 추측할 수 있는 단서가 없어 농담인지조차 알 수가 없으니 원.
“3초 안에 출입구를 통과하지 않으면 장담하건대 라즈마처럼 만들어 주지. 맨몸에 밧줄만 매달아 차원의 틈새에 던지면 어렵지 않을 듯한데.”
“신고할 겁니다! 고용노동부 말고 경찰에요!”
“닥쳐.”
“으아아…!”
엘라마는 그런 내 걱정 따윈 아랑곳하지 않고 짜증 가득한 얼굴로 등을 떠밀었다.
-퐁!
다음 순간, 물에 빠진 것만 같은 감각이 전신을 덮쳤다.
“으읍!!”
매끄러운 비눗방울과 같은 막이 주위를 감싸나 싶더니 이내 시야가 검게 물들었다.
오직 관성만이 내가 빠른 속도로 어딘가를 향해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고 있었다.
호흡을 할 수 없는 상태가 이어지길 수 초.
-파아앗!
아무 예고도 없이 밝은 빛에 눈앞이 환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