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화 (20/200)

잠재력을 보는 은행원 020화

“…세계수를 담보로 대출을 원하신다는 말씀이시군요.”

“네.”

잘못 들은 게 아닌가 싶어 재차 물어봤지만 엘프는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세계수, 담보, 대출.

처음 듣는 단어의 조합이다.

세계수란 무엇일까.

지구에서 자란 평범한 인간인 나로선 흔히 소설이나 만화, 아니면 게임 등에 등장하는 거대한 나무밖엔 떠올릴 수 없었다.

신화에선 아예 통째로 우주 자체를 지탱하는 초거대 수목으로 등장하던 것 같은데.

그걸 담보로 삼아 돈을 빌리겠다는 건 대체 무슨 소리일까.

집안의 기둥뿌리를 뽑으면 한 가정이 불행해진다.

그렇다면 세계수의 뿌리를 뽑으면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날까.

내 부족한 머리로는 도저히 상상이 가지 않았다.

엘프가 빌린 돈 못 갚고 은행이 담보로 잡은 세계수를 처분하면 그대로 우주가 멸망하거나 그러는 건 아니겠지.

애초에 세계수라는 거창한 이름이 붙은 나무를 담보로 설정한다는 건 어마어마한 액수의 돈을 빌리겠다는 뜻일 터.

그런 규모의 자금을 은행이 융통할 수 있긴 한가.

“…….”

말도 안 되는 얘기다.

상식적으로 생각한다면 저들이 말한 세계수는 이름만 거창하고 좀 크고 희소한 나무일 가능성이 크다.

“대출, 가능한가요?”

내가 혼자 감당할 수 있는 사이즈의 안건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야기를 더 들어 봐야겠다.

“…2층으로 모시겠습니다.”

나는 엘프들과 함께 승강기를 타고 출장소 2층의 상담실로 향했다.

아직 대출을 받는 게 개인인지 법인인지조차 알지 못하지만 담보 대출이라면 어느 정도 큰 규모의 자금을 필요로 하고 있을 터.

이럴 땐 의자가 두 개밖에 없는 상담 창구가 아니라 2층의 널찍한 상담실에서 푹신한 소파에 앉아 대화하는 게 낫다.

다른 차원에서 찾아온 만큼 일반적인 상담보다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기도 하고, 무엇보다 이번에 찾아온 건 혼자가 아니라 일행이 여럿이니까.

“김지안 대리님, 까까.”

자리에 앉아 상담 내용을 메모할 종이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플루토의 분신 둘이 상담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어어, 고마워요, 플루토 씨.”

그녀들은 무표정한 얼굴로 엘프들의 자리에 간단한 다과와 음료를 두더니 꾸벅 인사만 하고 다시 나갔다.

…내 몫은 없는 거냐.

그나저나 창구를 담당하는 분신과는 별개로 두 명을 더 만들어 낸 모양인데 볼수록 신기한 능력이다.

생성 가능한 분신의 숫자에 제한이 없는 건지 궁금해졌지만 그건 나중에 생각해야겠다.

“금일 대출 상담을 담당하게 될 김지안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유한 회사 카펠리노 디 드리아데Cappellino di Driade의 경리부장 돈쥬바라 팔르리입니다.”

나와 엘프는 각자 명함을 꺼내 교환했다.

얇게 슬라이스한 고급 원목엔 황금색 로고와 이름, 그리고 연락처가 인쇄되어 있었다.

“명함이 참 예쁘네요.”

나무로 만든 명함을 처음 보는 건 아니었다.

목재를 취급하는 회사나 친환경을 슬로건으로 내건 기업 중엔 이런 명함을 사용하는 곳이 꽤 있었으니까.

다만, 이렇게 감촉이 고급스럽고 기분 좋은 향기가 나는 명함은 처음 본다.

“상품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남게 되는 재료를 재활용했습니다.”

“그렇군요, 참고로 어떤 제품을….”

“저희 카펠리노 디 드리아데는 역사 깊은 장인 집단으로 엄선된 목재를 재료로 만든 원목 가구를 주력으로 판매하고 있습니다.”

“멋지군요.”

가구 제작 회사였구나. 어쩐지.

왠지 모르게 엘프들은 자연을 소중히 여기는 이미지라서 그런지 원목 가구를 제작한다는 얘길 들어도 위화감이 들지 않았다.

오래 살아서 그런지 탁월한 실력의 장인이 많을 것 같기도 하고.

그나저나, 가구 회사가 나무를 담보로 잡는다면 그건 대체 어떤 상황인 걸까.

세계수라고 불릴 정도면 굉장한 나무일 것 같은데.

다만, 내가 세계수에 관해 알지 못하는 걸 굳이 티 냈다간 못 미덥다는 인상을 줄 수 있다.

물론 그렇다고 당장 스마트폰으로 세계수의 정보를 검색할 순 없다.

그러니까 일단은 이들이 질권 설정을 통해 대출받고 싶은 금액이 얼마나 되는지, 그 자금을 어디에 쓸 생각인지 등을 먼저 확인해 봐야겠다.

“담보 대출의 경우 어지간하면 기업심사부에서 거절하지 않을 겁니다. 괜찮으시다면 어느 정도의 자금이 필요하신지 먼저 알려 주시죠.”

출장소 오픈 후 첫 반년 동안은 기축 통화인 굴덴을 사용하는 차원의 고객만 받기로 되어 있으니 보유 중인 외환이 모자랄 일은 없다.

가구 회사라고 했으니 모르긴 몰라도 설비 확충 비용을 빌리러 온 거겠지. 크게 잡아도 대충 수억 굴덴 정도일 테니 충분히 내 선에서 상담을―

“1,300억 굴덴입니다.”

응, 안 되겠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나는 팔르리 경리부장에게 양해를 구하고 곧바로 소장실로 직행했다.

-쾅!

“상의드릴 게 있습니다.”

다짜고짜 테이블을 내려쳐 내 말에 집중시킨 다음 최대한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아니면 왠지 안 도와줄 거 같아서.

“네놈을 대출 창구에 앉힌 건 고객을 상담실에 방치하고 여기서 징징대라고 그런 게 아니었는데?”

“상의드리지 않으면 소장님께서 곤란해지실 것 같아서 말입니다.”

“무슨 소리인지 알아듣게 설명하도록.”

“가구 제조 업체가 1,300억을 빌려달라고 합니다.”

엘라마의 눈과 매끄러운 머리가 번쩍 빛을 발했다.

“1,300억을 대출하겠다고?”

“네.”

“처음 거래하는 고객에게 그만한 액수는 신용 대출로 빌려주는 건 힘들다는 건 저쪽도 알고 있겠지. 담보 대출인가.”

“그렇습니다.”

“담보는.”

“세계수라는데요?”

엘라마 소장은 한동안 팔짱을 끼고 가만히 고민하다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확실히 대리 혼자서 처리할 수 있는 사안은 아니야. 나도 가겠다. 그 전에―”

-드르륵

그는 사무실 구석에 있던 커다란 사물함을 열더니 안에서 매끄러운 금발 가발을 꺼내 머리에 얹었다.

“뭘 하고 있나. 어서 가지 않고.”

“…….”

진짜 믿고 따라가도 되는 건가, 이 인간.

* * *

결과부터 말하자면, 엘라마는 팔르리 부장이 가져온 서류를 검토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한 다음 정중히 돌려보냈다.

“1,300억 굴덴의 대출에 관해서입니다만, 오늘 바로 확답드릴 수 없는 점 양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당치 않습니다. 1,300억이 큰 금액이라는 사실은 잘 이해하고 있으니까요.”

“본점과 연락 후 가까운 시일 내에 담보의 현장 실사를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그때 나누는 거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팔르리를 비롯한 가구 회사의 엘프 직원들은 깍듯하게 고개를 숙이고 출장소 우측 출입구로 걸어갔다.

“김지안.”

“지금 하고 있습니다.”

회사 이름이 뭐였더라. 그래, 카펠리노 디 드리아데였다.

나는 멀어지는 팔르리의 뒤통수를 지켜보며 직무권능을 발동했다.

“…음?”

그의 머리 위에 나타난 건 여신판단을 발동할 때마다 보이던 여신상이었지만, 손에 들고 있는 저울의 재질이 평소와 달랐다.

저울은 매끄러운 은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원래는 청동이었을 텐데.

“…….”

이제야 알겠다. 아까 시계가 9시를 가리키자마자 뜬금없이 행원 배지가 빛난 이유를.

보아하니, 대리 달고 정식으로 출근한 첫날이라 직무 권능이 강화된 모양이다.

“어때 보이나.”

“잠시만요.”

나는 엘프 일행이 차원을 완전히 넘어가기 전 직무권능이 표시해 준 정보를 완전히 파악하는 데에 성공했다.

처음 능력을 각성했을 때처럼 능력의 새로운 사용법이 저절로 머릿속에 떠오르고 있었으니까.

“확인했습니다.”

저울이 기존에 알려 주던 건 대상이 가까운 장래에 큰돈을 벌어들일 가능성과 수단의 도덕성 정도였다.

하지만 은색으로 변한 저울은 예전보다 더욱 많은 정보를 내게 주고 있었다.

예를 들자면.

“1,300억 굴덴, 충분히 갚을 수 있어 보입니다. 담보의 가치가 일단 굉장해 보이네요.”

오른쪽으로 기운 저울에 올라간 하얀 공에 날개가 돋아난 거로 미루어 보아 담보의 가치가 저들이 대출을 희망하는 금액보다 크다든지.

“확실한 거야?”

“네. 다만―”

공의 표면에 빨간 글씨로 SOS의 세 글자가 뚜렷하게 적혀 있다든지.

“저희의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았을 땐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겠어요.”

그런 것들 말이다.

* * *

나는 엘프들이 돌아간 다음에도 한동안 우대 금리 정기 예금 특판 행사에 참가한 고객들을 상대해야 했다.

결국 출장소가 준비한 특판 상품의 한도는 영업 시간이 끝이 나기 직전에 동이 나고 말았다.

한도가 다른 점포보다 꽤나 널널해서 며칠 동안 계속 가입 신청을 받을 줄 알았는데, 상상 이상의 인기였다.

“그래, 혁신 점포씩이나 돼서 이만큼 해내지 못하면 말이 안 되지.”

영업 종료 후.

집계된 실적을 확인한 엘라마는 감흥 없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엑톨프 라즈마와 불파사 비슈티 역시 딱히 들뜬 기색을 보이지 않았지만 전산 집계로 두 사람의 실적을 확인한 나는 저들이 얼마나 미친 짓을 해낸 건지 잘 알고 있었다.

잠시 후.

경비원 영감님과 우릴 제외하고 모두가 퇴근한 출장소.

“고작 7시간 동안 몇 명을 홀려 놓은 건지.”

“동감이야.”

정규 행원 중 직급이 제일 낮아 모출납 업무를 맡게 된 아이작은 시재함을 가득 채운 현금을 나르며 중얼거렸다.

나는 차마 동기가 혼자 고생하게 둘 수 없어 녀석을 돕는 중이었고.

“이거로 끝. 금고 닫고 퇴근하자.”

오늘 하루 동안 라즈마가 프라이빗 뱅킹 서비스에 가입시킨 고객의 숫자는 가공할 만한 것이었다.

그들이 이체한 자산 역시 일반적인 개인 고객과는 자릿수가 달랐다.

1,300억짜리 대출 얘길 진행하다 왔는데도 ‘이게 개인이 가질 수 있는 돈인가’ 싶어 놀랐을 정도니까.

“얼굴도 없는 은행원의 말 몇 마디에 넘어오는 걸 보면 진짜 부자인가 의심스러워. 좀 더 신중해야 하는 거 아닌가?”

어마어마한 실적을 내두고도 어떤 감정도 드러내지 않았던 걸 떠올리자 괜히 배알이 꼴려 마음에도 없는 말이 튀어나왔다.

“그러게 말이다. 다들 자산 규모가 생각보다 작더군. 프라이빗 뱅킹 가입자가 죄다 중산층일 줄은 몰랐는데.”

“…….”

맞다, 이 새끼 슈퍼 금수저였지.

“비슈티 과장 쪽도 굉장했어. 어떻게 한 건진 모르겠는데 특판 상품 가입한 고객들한테 죄다 몇 개씩 추가로 뭔가 팔아치우더라고.”

괜히 혼자 뻘쭘해진 나는 화제를 바꾸려 시도했는데, 이게 생각지도 못한 행운을 불러들였다.

“어떻게 한 건지 모르겠다면, 공부하면 되는 법이다.”

아이작이 품에서 볼펜을 꺼내더니 뚜껑 부분을 꾹 눌렀다.

<고객님의 상황에 알맞은 퇴직 연금을 추천드리겠소. 금리가 낮고 적절한 인플레이션이 유지되는 지금은 DC형으로 더욱 높은 수익을―>

펜에 내장된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비슈티 과장의 목소리.

영업 테크닉의 정수가 담긴 귀중한 녹음 파일이었다.

“이거 위험한 거 아니야?”

물론 고객과 나눈 대화인지라 개인 정보 역시 들어 있었지만.

“네게 이걸 악용할 배짱은 없을 거란 생각이 들어서. 필요하다면 복사본을 빌려주지.”

“연수원 때 노트 빌려준 보람이 있네.”

“그런 일은 없었다만.”

“아닌데?”

경비에게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온 우린 자판기 커피를 뽑아 원샷한 다음 담배를 태웠다.

하루의 피로를 벗어던지는 고요한 시간.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역시 상사 욕이었다.

“잠깐 생각해 봤거든. 다른 두 명은 확실히 대단한 것 같은데 엘라마 소장은 하는 일도 없잖아. 구D의 에이스라는 거 생 구라가 아닌가 싶어.”

날 데려온 걸 보면 사람 보는 눈은 있는데 실무 쪽은 글쎄, 솔직히 말해서 잘 모르겠다.

승진이 빠른 구E 출신도 아닌데 최연소로 차장을 단 만큼 대단한 무언가를 감추고 있을 것 같긴 한데, 그게 뭔지 모르겠단 말이지.

“나는 다르게 생각한다.”

“뭘?”

“아무리 특수 점포라고 해도 저런 말도 안 되는 특판 상품 가입 한도를 본점이 허락할 리 없잖아.”

“…한도 끌어온 거, 소장이겠지?”

“아마도.”

거기까진 생각한 적 없었는데, 인제 와서 보니 아이작이 말한 대로였다.

엘라마의 주특기가 무엇인지 조금은 알 것 같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것. 그렇게 요약할 수 있으려나.

행내 융화를 목표로 둔 구D 파벌에 속한 주제에 다른 파벌의 에이스들과 적극적으로 신경전을 벌이는 괴인.

그가 무슨 꿍꿍이를 품고 있는지는 아직도 짐작이 가지 않았다.

뭐, 그런 복잡한 건 나중에 생각하면 된다.

지금은 내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게 우선이다.

파벌 싸움의 완충재고 자시고 일단은 대출 창구 담당자로서 맡은 업무를 완수해야 한다.

1,300억짜리 담보 대출은 흔히 찾아오는 기회가 아니다.

이만한 액수를 빌려주려면 당연히 본점 기업여신부와 이사회도 엮어야 하겠지만 내 실적으로 인정될 부분이 틀림없이 존재할 터.

이번 일을 성공시키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지는 너무나도 명백했다.

“오늘은 일찍 쉬어야겠다. 내일 봐.”

나는 아이작에게 작별을 고한 다음 서둘러 사택으로 향했다.

아이작에겐 일찍 쉬겠다고 말했지만 당연히 거짓말이다.

집에 도착해 옷을 갈아입은 다음 곧바로 컴퓨터 앞에 착석.

“출장 가기 전까지 자료 조사 끝내 둬야지….”

직무권능의 성능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담보로 설정할 물건에 관해 기본적인 지식도 갖추지 않고 현장 실사를 나가는 건 은행원 실격이다.

-타다다다다닥

검색창에 세계수를 입력한 나는 표시된 모든 문서를 하나하나 살펴보기 시작했고, 이내 실망했다.

“33차원은 뭐 이리 정보가 적냐….”

세계수에 관해 검색해 봤지만 인터넷에 나오는 건 엄청 멀리서 찍은 흐릿한 흑백 사진이 전부.

심지어 제대로 된 설명도 없어 사진에 비춘 게 세계수가 맞는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크기가 얼마나 되는지조차 감이 잡히지 않는 판이니.

인터넷이 도움이 되지 않는 상황을 겪는 건 흔치 않은 일이었지만 나는 이럴 때 누구에게 도움을 청해야 할지 잘 알고 있었다.

“다크엘프도 엘프니까.”

엘프에 관해 궁금한 게 있으면 엘프에게 물어야겠지.

엄지손가락은 이미 스마트폰 주소록에 표시된 밀라의 이름을 누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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