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재력을 보는 은행원 022화
차원 관문을 비집고 나오자 33차원의 유일한 국가인 에탈로이 연방의 시가지가 눈앞에 펼쳐졌다.
높게 뜬 태양이 흩뿌리는 찬란한 햇빛.
곳곳에 보이는 오래된 건물과 동상에는 비둘기들이 머물러 있다.
키키와이만큼은 아니어도 포근한 바람이 부는 도시.
지중해 연안 국가를 방불케 하는 기후를 지닌 공기에는 기묘한 활력이 떠돌고 있다.
이곳은 에탈로이 연방을 대표하는 경제의 중심이자 문화 수도라고 불리는 라이노밀.
북부에서 가장 많은 인구가 집중된 국제 도시 한복판에 자리 잡은 차원 관문 근처에선 다양한 종족들이 바쁘게 오가고 있었다.
33차원 하면 다들 떠올리는 지중해 연안 국가의 이미지와 조금 동떨어져 있는 분위기.
오래된 종교 건축 사이에 들어선 고층 빌딩. 사람들이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이 도시를 찾는 목적은 그야말로 다양했다.
리조트와 무역항으로 유명한 남부의 연안 도시들과 달리 내륙에 위치한 라이노밀은 다양한 명품을 제작하는 산업 지구로 유명했다.
가죽 제품, 유리 공예, 고급 의류, 그리고 원목 가구까지.
최고의 수출품이 ‘트렌드’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로 라이노밀은 사치품의 고향과도 같은 곳이었다.
‘부러워 부러워 부러워… 나도 라이노밀 출장 가고 싶은데.’
출장 이야기를 들은 밀라가 전화로 중얼중얼 떠들던 게 생각났다.
디자이너들이 가장 일하고 싶은 도시. 패션 업계의 최전방.
어지간한 유명 패션 브랜드 본사는 죄다 이곳에 모여 있다던데.
어째 길거리에 보이는 사람들의 옷 입는 센스가 심상치 않다.
심지어 구걸하는 거지조차 구제 옷으로 개성 있게 꾸미고 다니는 마당.
저번에 출장소를 찾아온 카펠리노 디 드리아데의 엘프들도 수트 핏이 장난 아니더니 역시 출신은 속이지 못하나 보다.
시가지를 둘러본 것도 잠시.
우린 따뜻한 커피를 한 잔 마신 다음 택시를 잡아 북쪽으로 향했다.
“산탄초넬로 죠사벨라까지 부탁드립니다.”
카펠리노 디 드리아데 본사 사옥이 위치한 곳은 교외의 숲이었다.
산탄초넬로 죠사벨라Sant'Anzonello Giosabella.
왠지 모르게 강렬해 보이는 이미지의 이름을 지닌 숲에 도착하기까진 채 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흔히 지구에서 거목이라고 불리는 나무들보다 몇 배는 큰 나무들이 울창하게 자라고 있는 이곳이야말로 카펠리노 디 드리아데의 본사가 위치한 곳이었다.
행정 구역상 라이노밀에 속해 있긴 하지만 시내에서 한 시간 넘게 떨어져 있어서 그런 걸까, 아니면 단순히 그린벨트로 지정된 장소라 그런 걸까.
숲에 들어선 지 조금 지났는데 사람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하긴, 평일 점심부터 멀쩡한 도심부 놔두고 숲으로 놀러 나온 사람들이 몇이나 될까.
숲속에 본사 건물이 있는 카펠리노 디 드리아데가 특이한 회사일 뿐이다.
하늘을 가린 거목들이 줄지어 선 광활한 삼림. 그 가운데에 난 2차선 도로를 30분 정도 더 달린 즈음, 택시 기사의 스마트폰이 안내 음성을 토해냈다.
<목적지까지 남은 거리 500미터.>
“거의 다 왔네요.”
“그걸 알면 슬슬 정신 똑바로 차려라. 고대 엘프에 관한 정보가 없는 한 어떤 행동이 결례에 해당할지 알 수 없으니까.”
“주의하겠습니다.”
엘라마의 말대로다. 아직 고객의 특징에 관해 아는 게 없으니 너무 많이 떠드는 건 피해야겠다.
그나저나 이상한 점이 하나 있다.
고대 엘프들은 세계수 안에서 자야 한다고 들었는데, 그런 것 치곤 사옥까지 거의 다 왔는데 아직 세계수라고 부를 만한 나무를 보지 못했다.
가구 회사가 어떻게 굴러가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예 야근하지 않는 일은 없을 터.
카펠리노 디 드리아데의 직원은 전부 고대 엘프라고 들었다.
근처에 세계수가 없다면 직원들의 건강에 문제가 생길 텐데.
“묘하군. 본사 건물 근처에 세계수가 보이지 않아.”
마침 엘라마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던 건지 전방을 주시하며 의문스러운 말투로 중얼대고 있었다.
“그러게요. 맨날 정시 퇴근 가능하고 도로 안 막히면 모를까. 주거지가 너무 멀면 건강에 지장이 생기는 사람들인데―”
그런 얘길 하던 와중, 나뭇가지와 잎사귀에 가려져 있던 하늘이 예고 없이 드러났다.
숲속에 존재하는 커다란 공터.
그리고 그 정중앙에는 하늘에 닿을 것처럼 솟아오른 거대한 나무가 한 그루 자리 잡고 있었다.
“…이런 거였나.”
구름 속으로 울창하게 뻗은 가지와 거기서 자란 나뭇잎이 우리 위에 거대한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잠실의 모 타워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굵기와 높이를 자랑하는 수목.
얼마나 긴 세월을 살아왔을지 짐작도 가지 않는 나무.
기둥에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구멍이 뚫려 있었고 하나같이 매끄러운 유리창이 그 안을 채우고 있다.
“이게 카펠리노 디 드리아데의―”
세계수 밖에서 잠들었다간 건강에 지장이 생기는 고대 엘프들이 출퇴근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간단했다.
“본사 사옥?”
주상 복합 빌딩으로 개조된 나무.
엘프들은 세계수를 사무실과 사택을 겸한 부동산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이 정도 크기의 나무는 처음 보는군.”
“그러게요. 아무래도 나무 하나를 통째로 사옥으로 쓰는 회사는 없을 테니.”
확실히, 자연 친화적이라는 의미에선 원목 가구를 만드는 회사답다.
세계수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살 수 없는 엘프들이 그 안에서 일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
빌딩이란 꼭 콘크리트와 철근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이 잘못된 고정관념이 틀림없다.
처음엔 나무를 담보로 삼는다고 해서 무슨 뜻인가 했지만 고대 엘프들이 세계수에 산다는 이야기를 듣고 부동산일 거라고 짐작은 했다.
그런데 설마 회사까지 이 안에 있을 줄이야.
본사 주소가 숲속인 걸 보고 눈치챘어야 했다.
“멍 때릴 시간은 없다. 뭘 하러 여기 왔는지 벌써 잊었나.”
“그럴 리가요.”
엘라마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다시 세계수를 주시했다.
현장 실사를 나온 이상 나는 나무를 현금화할 수 있는지, 현금화했을 경우 얼마만큼의 돈이 생길지 추측해야만 한다.
이곳에 사는 고대 엘프들이 빌리려 하는 돈은 총 1,300억 굴덴.
에탈로이 연방은 경제가 파탄 난 남부를 북부가 먹여 살리고 있는 상황인지라 이곳의 은행 여러 곳이 차관단을 형성해도 빌려주기 어려운 액수다.
만일 엘프들이 돈을 갚지 못할 경우 은행은 세계수를 팔아 손실을 보전해야 한다.
이 나무에 적어도 1,500~1,600억 굴덴의 가치가 있다고 판단될 경우에만 차원신용금고는 이를 담보로 받아들일 것이다.
세계수 없이는 생존할 수 없는 엘프들이 어쩌다 목숨과도 같은 나무를 담보로 내놓게 된 걸까.
그들은 1,300억 굴덴을 빌려 대체 무엇을 할 생각인 걸까.
아니, 애초에 ‘세계’라는 이름이 붙을 정도로 거대한 나무를, 위대하다는 수식어조차 어울리는 이 거목에 가치를 매길 자격이 우리에게 있는 걸까.
끊임없이 커져만 가는 의문.
“가자.”
엘라마는 생명 그 자체라고 부르고 싶은 나무를 눈앞에 두고도 압도당하는 일 없이 꿋꿋하게 정문으로 걸어갔다.
“예.”
군말 없이 그 뒤를 따랐다.
모든 의문을 해결할 방법은 역시 직접 저 안에 들어가 이야기를 들어 보는 거 말곤 없을 테니까.
* * *
자동문을 지나 들어간 세계수의 내부 구조는 여느 주상 복합 빌딩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층 중심부엔 천장이 없어 4층까지 도넛 구멍처럼 뚫려 있었는데 2~4층엔 식당가와 쇼핑몰 등이 배치되어 있었다.
1층에는 안내 데스크와 승강기가 있었는데 사무실과 작업실로 통하는 엘리베이터는 주거 층으로 연결된 것과 별도로 나뉘어져 있었다.
특이한 점이 있다면 건물 안에 존재하는 물건의 대부분이 나무와 유리만으로 만들어져 있다는 것을 꼽을 수 있었다.
그리고 1층 중앙에 거대한 제단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 정도일까.
저것이 쇼핑몰 중심에 으레 배치하곤 하는 조형물이 아니라고 추측할 수 있던 건 그 앞에 수많은 나이 든 엘프들이 고개를 조아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머니 되시는 나무여, 숲의 아이를 이끄사 쉴 만한 그늘 아래에서 눕게 하소서.”
제단 중앙에는 종교 지도자나 고위 사제처럼 보이는 화려한 복장을 착용한 노인이 보였다.
세계수를 숭배하는 이들을 거느리고 대표로 기도를 드리는 그의 표정은 몹시나 황홀해 보였다.
“몇천 년째 저러고 있다는 게 참 대단해.”
“세계수를 숭배하는 종교인가요?”
“정확히는 세계수에 깃들어 있다는 별의 신령을 숭배하는 집단이다. 씨족마다 한 명씩 존재하는 신목의 주교가 이끌고 있지.”
신목神木의 주교. 아무래도 저기 기도하는 모임의 중심에 있는 영감님의 얘긴가 보다.
“왜 그리 잘 아세요.”
“후리텐의 전통 연극 중엔 고대 엘프가 주인공인 이야기도 있어서 말이다.”
잊고 있었다. 이 사람 전직 카르부크 배우였지.
그레이트후리텐의 차원무형문화유산인 카르부크의 역사는 길다. 그만큼 세계수와 엘프를 다룬 연극이 있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관극이 취미신가요. 취향 고급지시네요.”
그나저나 이 나무, 밖에서 볼 땐 나무 모양이라 잘 몰랐는데 내부로 들어오니 어지간한 쇼핑몰 이상으로 크다.
종교 건축과 상업 시설 등을 합쳐 둔 것처럼 기괴한 아름다움을 지닌 인테리어.
미관상 좋은 건 사실이어도 화재에 무지막지하게 취약해 보이는데.
누전이라도 발생했다간 담보고 나발이고 싹 다 재가 되어 버리는 게 아닐까.
소방법과 건축법을 모두 무시하고 있는 것 같은데 대체 어떻게 여태껏 별일 없이 버틴 건지 궁금해질 따름이었다.
“왜 그리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거냐.”
“그, 혹시 여기 불나고 그러면 어떡하죠?”
“…….”
“괜한 걱정인가요?”
말없이 날 노려보던 엘라마의 고개가 다시 정면을 향했다.
머리엔 어느샌가 기다란 황금색 장발 가발을 쓰고 있었다.
“고객님 앞이다. 똑바로 서라, 김지안.”
그의 시선 끝에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경리부장 돈쥬바라 팔르리가 있었다.
“…예.”
자세를 바르게 하고 엘라마와 타이밍을 맞춰 엘프들에게 인사를 했다.
부하 직원들을 데리고 온 팔르리 역시 정중히 허리를 숙여 우릴 맞이했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위층으로 모시겠습니다.”
화재에는 좋지 않은 기억이 있었지만 애써 티를 내지 않도록 노력하며 엘리베이터에 탑승.
그런데, 어째서인지 내부엔 버튼이 보이지 않았다.
“152층으로.”
승강기가 무슨 원리로 움직이는 건지 깨달은 건 팔르리가 말을 마친 직후의 일이었다.
-휘잉!
승강기 문이 닫히기 전 한 줄기 바람이 불어오더니 엘리베이터를 위로 밀어 올리기 시작했다.
“정령술… 실전되었다고 들었는데.”
엘라마의 혼잣말을 들은 팔르리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바깥세상에선 그렇게 알려졌지만 사실이 아닙니다.”
정령술, 판타지 소설에서나 보던 단어를 접하니 호기심이 동해 질문을 던지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그렇다면 혹시, 저희가 본 전등이나 자동문 같은 것도 전부….”
“예. 정령들의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가구 제작에도 그들의 협력이 필요불가결하죠.”
팔르리가 손바닥을 내밀자 허공에 말랑말랑해 보이는 솜털 덩어리가 나타났다.
“이 아이가 정령인가요?”
“바람의 정령입니다. 지금 엘리베이터를 움직여 주고 있습니다.”
새까맣고 동그란 눈코입이 달린 털 뭉치는 팔르리의 손바닥 위에서 통통 튀어 다니다 그의 팔을 타고 어깨로 올라가 앉았다.
키득키득 앙증맞은 웃음소리까지 내는 모양새가 한 마리 데려가서 키우고 싶은 기분이었다.
“모처럼 바깥에서 손님이 오셔서 신이 난 모양이군요.”
팔르리가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뽀얀 털 뭉치가 내 정수리 위로 도약해 몸을 비비적댔다.
조심스럽게 녀석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자 마치 더위에 퍼진 햄스터처럼 납작한 타원 모양으로 변해 몸을 꿈틀댔다.
“아….”
귀엽다. 미쳤다. 시발 존나게 사랑스러운 찹쌀떡이야.
“이곳 사람이 아닌 이상 정령에게 환대를 받는 사람은 흔치 않은데, 그만큼 두 분의 성품이 정직하다는 뜻이겠죠.”
“거짓말쟁이를 싫어하는 건가요?”
팔르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부드러운 찹쌀떡은 팔다리도 없는 주제에 말캉말캉한 몸으로 내 손바닥 위를 굴러다니고 있었다.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엘라마는 눈에서 레이저빔을 쏠 기세로 이쪽을 노려보는 중이었다.
“…….”
나는 하는 수 없이 정령을 엄지와 검지로 집어 팔르리에게 돌려주었다.
그나저나 정령들과 같이 만든 가구, 인가.
카펠리노 디 드리아데의 가구가 얼마에 팔렸는지는 인터넷 뉴스에서 찾을 수 있었지만 어째서인지 실물 사진만큼은 아무리 검색해도 나오지 않았다.
어쩌면 가구의 사진이 없는 건 특수한 제조 과정과 관계가 있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152층이면 상당한 높이다. 채 2분도 걸리지 않아 올라온 것 같은데 전혀 귀가 아프지 않다. 바람의 정령이 기압을 조절해 준 걸까.
“이쪽입니다.”
기나긴 복도를 걸어 도착한 거대한 나무문.
저절로 열린 문 너머로 걸어 들어가자 장년의 사내가 자리에서 일어나 이쪽을 향해 돌아섰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