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재력을 보는 은행원 019화
귀빈들을 배웅했을 때 시계는 이미 오전 8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어제 퇴근 전에 해 둔 게 있어 어떻게든 영업 개시 15분 전까지 오픈 준비를 마친 우린 한 가지 문제점을 발견했다.
“지점에서 지원 오는 거 아니었어요?”
대출 상담을 진행하는 5번 창구는 내가, 상품 판매 담당 6번 창구는 비슈티 과장이, 부자들 상대하는 프라이빗 뱅킹 섹터를 라즈마 과장이 맡는다 쳐도 인원이 부족하다.
수신, 공과금 창구가 네 개 더 있는데 남은 인원은 아이작과 아직 출근하지 않은 단발머리 비정규직 여성 텔러 말고는 없다.
엘라마 소장은 창구에 앉을 생각은 없어 보이니 제외.
예금 계좌 개설 같은 수신 업무야 나와 비슈티 과장의 창구에서도 맡을 예정이긴 하다.
이렇게 창구가 많은 걸 보니 여러 차원의 고객이 몰려들 거라 예상하고 있고 실제로 그럴 것 같은데, 오픈 첫날부터 담당자 없이 빈 창구를 그대로 고객 눈에 들이는 건 좀―
“좋은 아침입니다.”
직원용 통로에서 아담한 키의 여자가 얼굴을 내밀었다.
어제 내게 반말했던 분홍 머리 보브컷 텔러. 어째선지 오늘은 정상적으로 존댓말을 쓰고 있다.
“지각이다 비정규직! 당장 창구로!”
“네에.”
실명이 ‘비정규직’이 아닌 사람을 저렇게 부르다니.
충격을 받을 만도 한데 명찰에 플루토라는 이름이 적힌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3번 창구에 앉아 세팅을 마쳤다.
“영업 개시 5분 전이다. 김지안 대리, 당장 위치로.”
“소장님 잠시만요.”
“왜?”
“창구가 아직 비는 것 같습니다만.”
“대체 어디가 비어 있다는 거지? 네놈의 눈은 옹이구멍이냐.”
무슨 소리인가 싶어 다시 창구로 고개를 돌렸다.
비어 있던 창구는 네 곳. 플루토와 아이작이 하나씩 맡으면 두 곳이 남는다.
그런데.
“…….”
어째서인지 비어 있어야 할 1, 2번 창구에 텔러가 앉아 있었다.
딱히 처음 보는 사람들은 아니었다.
둘의 얼굴은 3번 창구에 앉은 플루토와 완벽하게 같았으니까.
“…세쌍둥이?”
“분신이다.”
엘라마 소장은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고는 사무실로 들어가 앉았다.
문을 열어 두고 이쪽을 계속 주시하고 있는 중.
“분신이라….”
유용한 능력이다.
배지가 없는 비정규직이 어떻게 직무 권능을 사용할 수 있는 건진 모르겠지만 혼자서 창구 세 개를 맡을 수 있다는 건 굉장한 메리트다.
어쩌면 나보다 연봉이 높은 게 아닐까? 업무 스트레스 역시 세 배로 받겠지만.
어쨌든 타 점포의 지원 없이도 곧 들이닥칠 고객의 파도를 받아 낼 수 있다는 건 기뻐할 일이다.
나는 최고 금리 정기 예금 특판 정보가 적힌 입간판을 잘 보이는 위치에 둔 다음 5번 창구에 앉았다.
그리고 시계가 9시를 가리킨 순간.
-파아앗
옷깃에 찬 은행 배지가 환한 빛을 내뿜었다.
“…뭐야.”
마치 처음으로 직무권능을 각성한 날과도 같은 광경.
“김지안.”
멍하니 앉아 있던 날 옆 창구의 아이작이 불렀다. 평소의 모습 그대로 침착한 표정.
어찌 된 일인지 배지가 흩뿌린 광채를 본 건 나 혼자였던 모양이었다.
“첫날이다. 집중해라.”
“알아, 인마.”
방금 일어난 현상에 관해선 조금 있다 생각해 보자. 지금은 업무에 집중할 때다.
-위이이잉!
로비의 높은 천장에 매달린 샹들리에형 차원 역장 상쇄 장치가 미미한 소음을 발하기 시작했다.
다차원 출장소의 출입구는 두 개였는데 왼쪽은 현지 고객용이고 오른쪽은 다른 차원에서 소형 관문을 통해 넘어온 고객을 위한 것이었다.
나이가 지긋한 백발의 경비가 출입구의 잠금을 해제하자 우대 금리 정기 예금 특판 행사 소식을 접한 키키와이섬의 고객들이 앞다퉈 안으로 들어왔다.
“특판 가입 말씀이시군요 고객님. 여기 신청서를―”
차례차례 번호표를 뽑는 고객들을 맞이한 수신 창구는 본격적으로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아직 대출 상담을 하러 온 고객은 없었기에 나도 아이작과 플루토를 도와 특판 가입 업무를 돕기로 했다.
당연한 얘기지만 몰려든 손님은 비단 키키와이 현지인만이 아니었다.
우측 출입구 너머로 보이던 바닷가의 풍경이 일그러지더니 공간이 갈라지며 다른 차원에서 온 고객들이 차례차례 모습을 드러냈다.
키키와이 현지인들이 반팔 차림인 데에 반해 관문을 통해 6-2차원을 방문한 이들의 복장과 종족은 무척이나 다양했다.
“환영합니다, 고객님. 괜찮으시면 외투 보관해 드리겠습니다.”
키키와이와 기후가 정반대인 곳에서 온 이들의 두꺼운 털옷을 전용 로커로 가져가는 건 어느샌가 생겨난 플루토의 분신들이었다.
본체와 함께 창구를 맡은 둘 외에도 플루토와 똑같이 생긴 분신들이 거동이 불편한 고객을 안내하거나 기념품을 나눠 주는 광경은 상당히 경이로운 것이었다.
“은퇴하면 여기서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그러려면 지금 벌이론 턱도 없을 텐데?”
개중엔 차원 도약이 처음인지 키키와이의 아름다운 바다에 매료되어 멍하니 창문 너머의 경치를 감상하는 이들도 있었다.
다만, 저들이 다차원 출장소 밖으로 나가는 건 허락되지 않았다.
“어차피 한참 기다려야 하는데 산책 정도는 다녀올 수 있는 거 아니에요?”
“죄송합니다, 고객님. 출장소 밖으로 가시려면 키키와이 출입국관리소의 허가가 따로 필요합니다.”
나이 든 베테랑 경비원과 왼쪽 출구의 마법공학 장벽은 차원을 넘어온 고객이 섬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막고 있었다.
“다음에 차원 항공기를 타고 놀러 오시죠. 여기서 보이는 바닷가만큼이나 멋진 장소가 많답니다.”
“정말인가요?”
나는 정기 예금 가입 신청서에 사인한 젊은 부부에게 창구에 비치된 관광 팸플릿을 건넸다.
이 소책자는 키키와이 관광공사와 제작한 것으로 은행 이용객의 키키와이 관광을 유도하기 위한 것이었다.
“참고로 당행에서 예금 계좌를 개설하신 고객님은 항공권과 숙박 요금을 할인받을 수 있습니다.”
“잘됐네요! 마침 다음 달이 결혼 5주년이거든요. 참, 이것도 가져가도 될까요?”
“물론이죠!”
부부가 집어 든 건 관광 팸플릿 옆에 놓인 투자 이민 가이드북이었다. 당연히 이쪽은 키키와이 이민국의 작품이다.
“여행을 고려하신다면 정기 예금 가입하시는 김에 카드 발급도 하고 가시는 건 어떨까요?”
“신용카드는 이미 두어 개 갖고 있는데….”
“키키와이에서 차원금융지주의 체크카드나 신용 카드를 사용하시면 수수료가 대폭 할인됩니다.”
“가입할게요.”
내 설명을 들은 부부는 겸사겸사 신용 카드 회원 가입 신청서에도 사인한 다음 사이좋게 손잡고 출장소를 떠났다.
모르긴 몰라도 저들은 조만간 차원 항공기를 타고 키키와이를 다시 방문할 것이다. 지갑에는 차원금융지주의 카드가 들어 있겠지.
“C-008고객님, 5번 창구로 모시겠습니다.”
다음 손님을 부르며 로비의 대기자 수를 살펴보니 아까보단 많이 줄어 있었다.
딱히 줄 서다 질린 고객이 돌아가거나 수신 창구에서 말도 안 되는 속도로 업무를 처리한 덕에 회전율이 무지막지하게 빨라진 건 아니었다.
미어터지기 일보 직전이었던 로비를 구한 건 비슈티 과장이 아까 주차장 대신 쓰던 아공간 격납고였다.
행사에 참석한 귀빈들의 차가 떠나자마자 비슈티는 미리 대기하고 있던 용역 업체 직원들을 시켜 격납고를 깔끔하게 청소했다.
고출력 공기 청정기와 푹신한 소파가 배치된 격납고는 꽤나 쾌적한 공간으로 변해 있었다. 그야말로 제2의 로비라고 해도 될 수준.
“지극정성이네.”
저게 25차원의 고객 서비스인가.
“미리 격납고 벽에 고객용 화장실까지 따로 만들어 둘 줄이야. 현장에서 오래 구른 베테랑은 다르다 이건가.”
“그러게. 단순히 주차장 대신 써먹으려고 가져온 줄만 알았는데 상상 이상으로 철저한 사람이었어.”
나와 아이작은 업무에 치이는 동안에도 비슈티 과장의 준비성과 수완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뇌까지 근섬유로 이루어져 있을 것만 같은 비주얼을 가진 주제에 고객이 무엇을 필요로 할지 철두철미하게 고려하고 있다.
혼자 실적을 내는 것 이상으로 출장소를 방문한 손님에게 좋은 인상을 줄 수 있도록 배려하는 자세.
차원신용금고의 핵심 가치인 고객 중심의 서비스와 일맥상통하는 마음가짐이었다.
“이 펀드를 권한 건 진심으로 은퇴 후의 생활에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한 까닭이오. 조금 더 자세히 들어 보시겠소?”
정기 예금만 가입하고 돌아가려 하던 고객들은 비슈티 과장의 말과 배려에 신뢰감을 느끼고 그가 권하는 상품의 가입 신청서에 차례차례 서명하고 있었다.
은행이 뿌리는 신뢰. 비슈티 과장은 자신이 쌓아 온 뱅커의 기본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었다.
다만, 오픈 첫날부터 에이스의 진면목을 드러내고 있는 건 비슈티 과장만이 아니었다.
“상속세 문제로 고민하고 계신다면 제게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자세히 알려 주시죠.”
라즈마 과장 역시 자산가를 전문으로 상대하는 프라이빗 뱅킹 섹터에서 상담을 진행 중이었는데 그가 제시한 솔루션은 상당히 흥미로웠다.
“먼저, 자제분을 대표로 컨설팅 전문 기업을 설립하셔야 합니다.”
“컨설팅 전문 기업… 입니까?”
“예. 그다음 고객님께선 곧바로 15차원과 16차원에서 복수 국적을 취득하십시오. 이로써 8차원의 국적법을 따라 원래 신분은 완전히 파기됩니다.”
“어째서 그런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하는 거죠.”
“15차원과 16차원의 신분을 동시에 지닌 자는 사망 신고 접수 후에도 강령술을 사용해 일정 기간 동안 경제 활동을 영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라즈마는 경악한 고객을 앞에 두고 태연하게 설명을 이어갔다.
“16차원에서 현지인의 명의로 회사를 설립한 다음 모든 자산을 자제분의 기업에 컨설팅 비용으로 지급하면 증여가 완료됩니다.”
“아들이 있는 8차원과 16차원 사이엔 금융정보자동교환제도가 없으니 국세청도 편법 증여라는 걸 증명할 수 없겠군요.”
“생전에도 사후에도 가족에게 물려준 게 없으니 증여세도 상속세도 발생하지 않습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기업 대 기업의 거래일뿐이니 법인세 말고는 낼 게 없습니다.”
“국세청의 조사원이 16차원까지 쫓아오면 어떡하죠.”
“증여를 마친 다음 바로 강령술을 중지하시면 그만입니다. 사자는 말이 없는 법이니까요.”
“훌륭해… 아주 훌륭합니다…!”
“당행의 프라이빗 뱅킹 서비스에 가입하신다면 유능한 변호사와 세무사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신청서는 어디 있죠? 당장 가입하겠습니다.”
탈법과 불법 사이에서 이뤄지는 아슬아슬한 줄타기.
8, 15, 16차원 모두 차원신용금고가 아직 진출하지 않은 곳인데 라즈마 과장은 세 차원의 법률을 줄줄이 꿰고 있었다.
은행원이 아니라 탈세 컨설턴트라고 해도 믿을 정도다.
강령술까지 사용하도록 조언하는 라즈마나 그 얘길 듣고 손뼉 치며 좋아하는 고객이나 둘 다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은행 다니는 사람이 해도 되는 이야기가 아니지 않나, 저거.”
“애초에 평범한 행원의 머리에선 저런 아이디어가 나올 수 없겠지.”
아이작이 단언했다.
확실히 저건 대가리의 나사가 여러 개 풀려 있지 않은 한 불가능한 발상이다.
죽음과 세금은 피할 수 없는 법인데 양쪽을 모두 속이려 들다니.
프라이빗 뱅킹은 부자들에게 자산 운용에 관련된 모든 도움을 제공하는 서비스.
담당하는 행원은 예금과 대출 외에도 투자, 법률, 세금 등 폭넓은 범위에 걸쳐 고객을 케어해야 한다.
라즈마가 귀띔한 우회 상속 방식이 법을 조롱하는 것이며 질타받아야 하는 금단의 지식인 건 사실이다.
하지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고객을 만족시킨다는 점만을 고려한다면 그 역시 은행원으로선 일류임이 틀림없다.
“왜 델 몬테 지점장이 여기서 일하면 많은 걸 배울 수 있을 거라고 말했는지 알 것 같아.”
“저 정도는 해내야 위로 올라갈 수 있다 이 말이군.”
군인 출신답게 기본에 충실한 사내와 실적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저지르는 미치광이.
비슈티와 라즈마는 두 파벌의 에이스에 걸맞은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노련한 당 대표 둘을 단 5초 만에 울게 만든 엘라마도 대단했지만 저 둘에게서도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정장을 입은 한 무리의 젊은 엘프가 출장소 우측 출입구를 지나 로비로 들어온 게 보였다.
“D-001번 고객님, 5번 창구에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그들이 뽑은 번호표는 대출 상담.
내가 나설 차례다.
“안녕하십니까, 고객님.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최고의 미소로 인사를 건네자 엘프들은 긴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대출이 필요합니다.”
“신용 대출인가요? 아니면….”
“담보 대출도 가능합니까?”
“물론입니다. 헌데, 어떤 담보를―”
“세계수를 담보로 대출받고 싶습니다.”
“…네?”
뭘 담보로 잡으시겠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