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1화. 괴물의 군세 >
자카타를 나와 다시 지상에 올라서자 드넓은 사막과 모래바람이 우리를 반겼다. 나로서는 오래 전처럼 느껴지는 풍경이었지만 일행들은 익숙하다는 표정으로 얼굴을 가렸다.
“제 발로 걸어오다니, 흐흐흐.”
살렘이 재밌다는 표정을 지으며 나를 휙 돌아봤다.
“그래서 위치가 어디라고?”
황제가 오고 있는 방향은 아마 네브로의 육체가 봉인되어 있는 장소일 것이다. 오관에게 미리 들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남아있었다.
“아······.”
“뭐냐, 까먹었냐?”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문득 떠오른 것이 있었다. 오관이 일리아스보다 이전 태생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러면 네브로가 봉인된 장소를 알 수 가 없지.
‘닉스의 혈통들은 신들의 시대가 끝나고서도 갈락슈르와 네브로를 간수해온 모양이군.’
착각했던 것을 고쳐 넘기고 나는 시선을 북쪽으로 돌렸다. 오관이 말해주지 않았더라도 이제는 정확히 알고 있었다.
네브로가 봉인된 곳은 내가 라플라스의 악마와 계약을 맺었던 장소이기도 하니까 잊을 수가 없지.
여기서 대충 이틀거리. 그다지 멀지 않았다.
“컹! 컹!”
길을 떠나려는 우리를 붙잡는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견족 수인 하나가 급하게 자카르의 입구에서 나오고 있었다.
“무슨 일이냐.”
에반이 앞으로 나서며 묻자 견족 수인이 고개를 숙여오며 급하게 말했다.
“새로운 정보입니다!”
“역시 정보 조직답군. 정보의 순환이 빨라.”
살렘이 비웃는 건지 진짜로 감탄한 건지 모를 말을 했지만 수인은 별다른 내색 없이 내게 말했다.
“거대한 군세가 샤이야의 부족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습니다.”
“군세?”
제국인가?
나는 차분히 그의 말을 더 들어보았다.
“군세이긴 하나 그 정체가 인간들은 아니고 정체모를 괴물들이라고 합니다. 아무래도 황제와 관련된 게 아닌가하여 급히 전달합니다.”
견족 수인의 말에 일행들과 나는 잠시 생각에 빠졌다.
황제가 오고 있다는 소식과 함께 들려온 정체불명의 군세. 게다가 인간이 아닌 괴물들이라면 연관성이 애매했다.
“황제가 먼저다.”
고민하는 나를 향해 막시민이 말했다. 복수가 코앞인 그로서는 사막의 부족들 따위 어찌되든 상관없겠지.
하지만 정체불명의 군세가 나타난 것이 과연 우연일까?
게임에서 겪어본 정보를 생각해보면 이곳에서 일어날 수 있는 에피소드는 죄악인 폭식, 그 외에 자잘한 던전들, 그리고 사막의 부족들이 전부였다.
“전 그 군세가 의심스럽습니다.”
“아드리아스.”
막시민이 나직하게 내 이름을 불렀다. 그 안에 담긴 조급함이 느껴졌지만 그럴수록 난 냉정하게 말했다.
“우연일 리가 없습니다.”
“······.”
“하필 이 시기에, 마왕의 신체를 찾으러 간 황제와 괴물들의 군세가 겹치는 건 연관이 없을 수 없습니다.”
“마왕의 신체?”
아, 말하지 않았었나?
생각해보니 오관에게 네브로의 봉인 이야기만 듣고 곧바로 폭식이 깨어나는 바람에 말할 타이밍이 없었다.
“그렇습니다. 황제는 고대 시대에 존재했다는 마왕의 신체를 목표로 이곳에 왔습니다.”
“그걸 네가 어떻게 아는 거지?”
막시민이 의문스럽게 물었다. 그러자 나 대신 대답한 건 루나였다.
“할머니가 말해줬어!”
“할머니?”
“응!”
오관에 대해서는 일행들도 전부 알고 있었다. 루나는 이내 더 자세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방금 우리가 있었던 지하 도시 자카타는 우리 혈족이 살았던 도시래! 예에에엣날부터!”
“혈족이라······.”
“그리고 우리 혈족은 친구가 가진 검하고 마왕의 봉인을 지키는 일족이었데! 할머니가 말해줬어!”
“아까 전에 아드리아스와 네가 간 곳은 그럼······.”
“봉인이 무사한지 확인하러 갔는데, 짜잔! 봉인은 부서졌어!”
해맑게 설명하는 루나를 보며 막시민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는 팔짱을 끼더니 조용히 눈을 감았다.
“마왕이라······. 재미있는 걸 숨기고 있었군.”
살렘은 구미가 당긴다는 듯 사악하게 웃었고 에반은 반대로 잔뜩 굳은 얼굴로 나를 보았다.
“괜찮으시겠습니까?”
“글쎄요.”
보아하니 내 안부를 걱정하는 듯했다. 에반 본인은 대륙 10인 급의 강자이니 크게 두려워하는 기색은 없었다.
“제게 맡기시면 금방 처리하고 오겠습니다. 주군께서 직접 나서실 필요도 없이······.”
“황제는 내가 죽인다.”
막시민이 질 수 없다는 듯 감고 있던 눈을 떴다. 그러자 에반은 딱히 싸울 생각은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저와 막시민이 처리하겠습니다.”
“어이, 마왕의 신체는 내거다.”
“그렇다면 저희 셋이······.”
에반의 말이 점점 길어지는 가운데 우선은 에반에게 부탁을 하나 했다.
“에반은 그럼 황제의 정확한 위치를 파악해주기 바랍니다. 절대 혼다 나서지 마시고 위치만 파악하세요.”
“명을 받듭니다.”
“나머지 인원들은 저와 함께 괴물들을 확인하러 가죠. 그곳에 황제가 있을 수도 있으니.”
반론은 받지 않겠다는 태도를 보이자 살렘이 왜 그렇게 돌아가냐는 듯 말했다.
“위치를 대충 아는 거 아니었냐? 군세 따위 알 바 없고 황제만 처리하면 되는 문제다.”
“말씀하신대로 대충만 압니다. 정확히는 몰라요. 그리고 예상치 못한 위치에서 갑자기 순간 이동이라도 한 듯 군세가 나타났으니 황제도 그러지 말라는 법은 없겠죠.”
“그건 그렇군.”
살렘이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몸은 폭식을 때려잡은 것만으로는 부족했는지 아쉽다는 듯 꿈틀거렸다.
“나타났다는 괴물들도 마왕과 연관이 있을 수 있으니 연구해볼 가치가 있을 거예요.”
“알았다, 알았어.”
살렘이 잔소리는 그만하라는 제스쳐를 취하자 이내 에반이 고개를 꾸벅 숙이며 말했다.
“전 먼저 출발해보겠습니다.”
“저희는 괴물들의 군대가 있는 지역으로 가보겠습니다. 그쪽에서 만나죠.”
이내 에반이 바람에 섞여 사라지듯 움직이자 우리도 출발하기 시작했다. 목적지는 견족 수인이 말했던 방향이었다.
**
촤아악!
챙그랑!
““우아아아!””
거대한 함성소리와 함께 마지막 남은 적이 쓰러졌다. 온몸에 피 칠을 한 미누스는 그 모습을 보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이겼다.”
황제가 사라졌다는 소식은 알음알음 제국 전역에 퍼져나가 이내 전장에까지 영향을 끼쳤다.
수많은 초인들이 갖은 핑계를 대며 굳이 피를 볼 이유가 없는 전장을 벗어나기 시작했고, 이내 반란 토벌군으로 편성된 귀족들 사이에서도 불협화음이 일었다.
그와 반대로 소식을 접한 서부 귀족들은 승리의 희망에 더욱 단단히 뭉치며 끝내 마지막 남은 토벌군을 물리치고 후퇴하는 적들의 뒤를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설마 이것도 다 예상한 건가. 하지만 이상하군.”
이겼다는 안도감보다 약간의 의문이 느껴졌다. 내부에서 망가지기 시작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 시기가 너무 일렀다. 적어도 앞으로 6개월 이상은 보고 계획했었는데······.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은 당연히 아드리아스 크롬웰이었다. 아무래도 그가 또 무슨 짓을 한 건 아닌가 의심스럽기 시작할 때쯤,
“전하!”
모하임 기사단의 부기사단장인 대너드가 급하게 달려왔다. 그의 모습도 치열했던 전장의 현황을 보여주듯 넝마에 가까운 상태였는데 그보다 중요한 건 그의 표정이었다.
뭔가 문제가 발생했다는 표정. 미누스는 안색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무슨 일인데.”
“다른 영지의 전령으로부터 급하게 온 소식입니다!”
모두가 환호성을 지르며 자축을 하고 있는 시체 구덩이 한 가운데에서 미누스와 대너드의 표정만이 심각해졌다.
“말해봐.”
“블란드 영지 근처에서 알 수 없는 괴물들이 대량으로 발생! 그 수가 무려 수천을 넘는다고 합니다. 거기다 마치 군대처럼 움직인다고······.”
“괴물?”
괴물이라니? 갑자기 무슨 괴물을 말하는 것인가? 게다가 괴물의 정체를 콕 찝어서 말하지 못하는 것이 이상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괴물이라고 합니다. 그나마 비슷한 것을 찾으라면 마치 언데드와 비슷했다고······.”
“집회인가?”
미누스의 상식으로 이런 짓을 벌일 집단은 흑마법사 집회 밖에 없었다. 그러나 최근 그의 측근으로부터 나온 정보에 의하면 세가 약해졌다고 했었는데······.
“혼란을 틈 타 발악을 하는 건가?”
“예?”
“언데드라면 흑마법사 집회 말고는 없잖냐.”
미누스의 말에 대너드가 납득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모, 모하임 전하!”
“전하! 파발입니다!”
그렇게 잠시 생각에 잠겨있는 미누스의 근처로 갑자기 수명의 전령들이 달려왔다. 그 모습을 본 미누스는 불길한 예감을 느끼며 대너드와 눈을 마주쳤다.
“서, 설마······.”
대너드가 흔들리는 눈빛으로 중얼거렸다.
달려오는 전령들은 각기 다른 지역을 담당하고 있는 이들이었다. 그런 이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왔다는 것은······.
“급보입니다, 전하! 베글랑 영지가 괴물들의 군세에 대항하여 농성을 치루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세, 세인 영지도 알 수 없는 괴물이 다량으로 발생하여 야전을 치르고 있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하지만 마지막 연락은 급히 두절되었습니다!”
“메페닌 영지도······.”
속속들이 전해져오는 급보에 미누스의 표정은 한없이 어두워졌다. 그리고 이내 이해를 했다는 듯 말했다.
“토벌군이 그냥 물러난 게 아니었군.”
“아! 그렇다면 저들도······!”
“자신의 영지가 털리면 토벌군이든 뭐든 아무 의미가 없으니 말이지.”
생각보다 거대한 스케일에 미누스가 한숨을 한 번 내쉬고 대너드에게 말했다.
“지금부터 정보 총력전이다. 먼저 괴물들이 발생한 지역을 모두 파악하고 모하임 근처를 확인해라. 모하임이 무사한 게 확인되면 여유가 되는 병력들을 우군들에게 파견해라.”
“확인했습니다, 전하!”
대너드가 급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동시에 전령들도 황급히 다른 정보를 파악하기 위해 뛰었다.
“난장판이군.”
수많은 시신이 산처럼 쌓인 광경을 바라보며 미누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래도 마음을 놓기에는 아직 한참이나 남은 듯했다.
**
“음?”
잠이든 듯 고요하게 숨을 고르고 있는 비비안을 살피던 이자벨이 문득 고개를 돌렸다. 그 모습에 함께 있던 루시아가 물었다.
“왜 그러세요?”
“뭔가가 오고 있어.”
이자벨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루시아도 함께 일어나려 하자 그녀는 차분히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으니 여기 있으렴.”
상냥하지만 거부할 수 없는 분위기에 루시아는 조용히 이자벨의 말에 따랐다.
방밖으로 나온 이자벨은 건물 내부를 바삐 움직이고 있는 하인들과 식솔들을 지나쳐 성벽이 있는 곳을 향해 나갔다.
“어? 이자벨 님.”
마침 저택 밖에서 물자들을 사이에 두고 논의를 하고 있던 에이미와 디에네가 이자벨을 보며 인사를 건넸다. 어느새 크롬웰에 눌러 살며 행정업무를 도와주던 디에네는 의아한 얼굴로 이자벨에게 물음을 던졌다.
“어쩐 일로 나오셨어요?”
“잠깐 확인할 것이 있단다.”
이자벨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차분히 말하자 디에네는 걱정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에이미와 디에네가 다시 바쁘게 물자들을 점검하고 이자벨은 성벽 위로 올라갔다.
“하아······.”
금방이라도 눈이 올 것처럼 하얀 입김이 춤추는 계절이었다. 남부 사막에 있을 이들을 생각하며 이자벨이 이내 혈마법을 사용하자,
투우웅-----!
숨겨져 있던 것들이 그녀의 두 눈에 비치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정말로 밥값을 할 때가 왔군요.”
갑작스런 정보에 의하면 오기로 했던 반란군이 무슨 이유에서인지 후퇴를 했다. 덕분에 여유가 생긴 크롬웰이었지만 이자벨은 자신의 시야에 드러난 광경을 보며 그들이 왜 후퇴를 했는지 깨달았다.
쿵쿵쿵!
그것은 군대였다.
다만 인간이 아닌 몸의 형태가 제각각인 키메라로 이루어진 군대였다.
크기도 모양도 모두 다른 괴물들은 천천히, 하지만 확실한 방향을 잡은 채 다가오고 있었다.
“누가 이런 짓을 벌인 걸까나.”
이자벨의 송곳니가 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냈다.
< 401화. 괴물의 군세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