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9화. 천사와 악마의 계약 >
고통과 인내의 시간이 지나갔다.
괴로워하던 네브로는 흔들리는 눈으로 토르를 바라보다 이내 곁에 있는 일행들을 보았다.
유약한 성정과는 달리 네브로는 바보가 아니었다. 자신이 지금 무엇을 해야 할지 떨리는 몸으로도 냉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토, 토르를······.”
자신의 품에서 싸늘하게 식어가는 토르를 지켜보던 네브로는 이내 주위를 둘러보았다. 언제 공격해올지 모르는 주변의 상황을 자연스럽게 파악했다.
“걱정말거라.”
천마가 네브로를 향해 말을 걸어왔다.
그를 향한 네브로의 증오가 들끓었지만 간신히 참아내는 와중에 천마가 다시 말했다.
“분한가?”
“······.”
“어쩔 수 없다. 이 세상은 오직 강자만이 정의이고 곧 법칙이지. 넌 약했다. 그러니 악이지.”
“내가 악······.”
“강해지고 싶으면 토르와 네 안에 든 녀석의 조언을 들어라.”
천마가 검을 들어보였다.
마치 네브로가 토르를 흡수할 때까지 지켜주겠다는 의미 같았다.
“우욱.”
네브로의 입안에서 비릿한 맛이 느껴졌다. 감각이 공유되는 난 그의 오감과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내 지우가 한 것처럼 무식하게 쳐먹으려고 하지 마라.”
“그, 그럼······?”
“그의 시체를 안고 있으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땅거미와 같이 내려앉은 눈이 방황하는 네브로를 바라봤다. 그것은 어둡지만 선명하게 빛나는 등불이었다.
“네가 그를 먹을 수 있다는 것을 느껴라.”
“하아, 하아.”
네브로의 숨이 거칠어졌다. 그와 동시에 천마의 말대로 토르의 시신에서 간질간질한 무언가가 느껴졌다.
‘갈등.’
네브로도 분명 그 감각을 느끼고 있을 터.
하지만 그는 눈물을 쏟아내며 못견뎌하고 있었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일 수도 있다.”]
“예?”
[“일리아스의 회귀도 완벽한 건 아니야. 결국 일리아스의 정신은 회귀로 점차 오염되겠지. 너라면 수백 번의 회귀를 반복할 자신이 있는 거냐?”]
“이, 일리아스······.”
흔들리는 눈이 일리아스를 쫓았다.
그러나 의외인 것은 일리아스의 반응이었다.
탁!
“아?”
일리아스는 천천히 손을 뻗어 네브로의 뺨을 감쌌다. 부드럽게 느껴지지만 차가운 그녀의 손길이 머리를 틔었다.
“네브로.”
“예, 예.”
“힘들면 굳이 아파할 필요 없어.”
“예?”
“일리아스는 버틸 수 있어. 50번으로 안되면 100번, 100번으로 안되면 1,000번.”
나조차 예상 못한 일리아스의 말에 네브로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일리아스한테서 가장 소중한 건 네브로야.”
“아, 아니······예?”
“지난 50번. 네브로는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우리는 수많은 추억을 쌓아왔어.”
일리아스가 아련하게 미소를 지었다. 표정의 변화가 거의 없었던 그녀의 미소에는 켜켜이 쌓인 낙엽과 같은 시간이 존재했다.
“갈락슈르? 사실 의미 없어. 일리아스가 이 임무를 포기할 수 없는 건, 애초에 회귀를 할 수 있는 조건이 이거니까 어쩔 수 없을 뿐이야.”
“이, 일리아스.”
“일리아스는 네브로를 위해서라면 몇 번이든 죽어줄 수 있어.”
······화가 났다.
이 상황에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무력한 자신이.
분명 내게 있어서 과거임이 확실한, 실제인지 환상인지도 모를, 그런 일행들이었지만 상관없었다.
환상이어도 상관없다.
어느새 이들은 내게 큰 울림을 주고 있었다.
[“네브로, 도망치지 마라.”]
“······.”
[“이 모든 걸 잊을 거냐? 프레위르, 일리아스, 그린나래와 함께 했던 시간들, 그리고 우리를 위해 죽은 토르까지 다 잊을 거냔 말이다.”]
우드득!
네브로의 이가 갈렸다. 터져버린 실핏줄로 인해 어느새 그의 눈물은 떨어지는 장미꽃이 되어 있었다.
비유가 아닌 정말 꽃잎이었다.
그는 더 이상 필멸자가 아닌 무언가를 초월한 상태였다.
“네브로.”
내 의지에 일리아스가 걱정스런 표정을 지어보였지만 네브로는 결국 날 선택했다.
“잃지 않을 겁니다. 더 이상은 없어요.”
그는 토르가 억지로 입에 쑤셔 넣었던 잘린 팔을 자신의 손으로 들었다.
“전 도망치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는 게걸스럽게 뜯어먹기 시작했다. 분명 직접 먹을 필요가 없다고 했지만 그의 행동은 일종의 의식과 같았다.
“우웨엑!”
부들부들 떨리는 몸을 견뎌내며, 그는 억지로 토르의 팔을 씹어 먹었다. 그 광경은 광기가 가득한 것만으로 모자라 검붉은 기운이 주변으로 피어오를 정도였다.
“토르가 기대했던 이유가 이건가.”
천마가 그런 네브로를 보며 나직이 말했다. 사방을 잠식해가는 네브로의 기운은 결코 평범한 것이 아니었다.
스으으-
토르의 시신이 점차 뿌옇게 흩어지며 네브로에게 흡수되었다. 직접 씹어 삼킨 팔을 제외하면 토르의 육신은 뼈를 제외하고 전부 먼지처럼 변해갔다.
그와 동시에 익숙한 소리가 울렸다.
-띠링!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진화가 가능한 개체가 탐색되었습니다.]
[네브로의 진화가 가능#%#$%!]
진화.
하필 지금?
[진화 즉시 완료가 가능합니다.]
그리고 이전에는 본 적 없던 문구가 떠올랐다. 마치 나를 유혹하듯 흔들리는 시스템창은 곧 있으면 사라질 것처럼 희미했다.
[“네브로.”]
“크윽.”
[“강해지고 싶나.”]
“강해지고 싶어.”
물어볼 필요도 없었지만, 난 다시 한 번 네브로의 의식을 확인하고 시스템창을 보았다.
[“진화.”]
수락.
꽈드드드득!
순간 뼈가 뒤틀리는 소리와 함께 네브로의 전신에서 피가 뿜었다. 갑작스런 사태에 일리아스가 기겁을 하며 네브로를 끌어안았다.
“네브로!”
네브로가 겪는 고통이 내게도 여실히 느껴졌다. 차마 비명도 지르지 못하는 그의 심경이 세상을 뒤흔들었다.
‘어쩌면······.’
잘못된 선택을 했을 수도 있다고 느꼈다.
하지만 후회하지 않는다.
이 일로 인해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나는 온전히 지켜볼 것이다.
“그으으윽.”
[진화 완료]
시야가 천천히 암전되었다.
**
[“흐억!”]
내가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는 주변이 온통 붉게 물들어있었다. 정신을 잃는 감각만 느꼈을 뿐, 얼마나 시간이 흐른 지 모르기에 급하게 네브로의 상태부터 살폈다.
[“네브로?”]
네브로는······네브로가 아니었다.
“그으윽.”
그는 언젠가 내가 본 적이 있었던 원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잿빛으로 물든 피부색과 기묘한 문양들이 전신을 뒤덮고 있었다. 그때의 원죄와 다른 점이라면 팔이 네 개라는 점과 타버린 듯한 흔적이 없다는 것.
“대단한 일을 벌였구나.”
그때 천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떻게 된 거지?”]
“그걸 본좌에게 묻는 건가.”
천마의 상태도 멀쩡하지 않았다. 묵빛의 도복은 갈가리 찢겨있었고 검에 당한 듯 난도질당한 흔적이 여기저기 보였다.
“저 녀석에게 뭔 짓을 한 거냐.”
뭔 짓을 했다니 난 그저 진화를······.
아니, 그 전에 일리아스랑 그린나래는?
‘무사하다.’
다행히 둘은 무사했다. 그러나 두려움에 젖은 눈길로 이쪽을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크윽.”]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이제 보니 네브로의 정신 상태가 멀쩡하지 않았다. 이건 내가 알고 있던 초월자의 정신 상태와 비슷했다.
한낱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복잡하고 고차원적인 정신세계. 그 안에서 유유히 표류하고 있는 네브로가 느껴졌다.
“대부분 죽고, 나머지 대부분은 도망쳤다.”
내 반응을 보고 상태를 짐작한 듯 천마가 설명해주었다. 그의 말대로 주변에 남은 초월자는 몇 없었는데, 그들의 신위는 천마와 동급이거나 그 이상이었다.
“목적은 달성했군. 만족했나?”
[“목적?”]
“갈락슈르와 네 일행들을 무사히 지키지 않았나.”
갈락슈르를 무사히 넘긴 건가?
다시 일리아스를 확인하자 그녀의 품에 있던 갈락슈르가 없었다.
“이런 걸 원하지 않았어.”
그런 천마의 말을 듣고 일리아스가 눈물을 흘리며 소리를 질렀다.
“네브로를 돌려내!”
난 네브로의 모습을 다시 확인했다.
네브로는 마왕이라는 호칭이 어울리는 장대한 기골을 지닌 잿빛 괴물이 되어있었다. 네 개의 팔에는 각각 처음 보는 검들이 들려있었는데 아무래도 적들의 검을 빼앗은 모양이었다.
“천사라며! 어째서, 어째서 네브로를······.”
[“난······.”]
난······내가 저지른 짓인가.
네브로는 이제 네브로가 아니었다. 거대한 의지 속에 파묻힌 무언가가 되어 버렸다.
[“네브로.”]
하지만 난 느낄 수 있었다. 나라면 그를 돌려낼 수 있다는 걸. 왜냐하면 표류하는 그의 의지를 느낄 수 있었거든.
오직 그의 안에 있는 나만이 가능한 일. 나는 토할 것 같은 멀미를 참으며 거대한 의지 속으로 파고 들었다.
[“네브로.”]
일어나라, 이 멍청아.
이제 와서 네가 원죄인지 뭔지는 상관없다. 아니, 오히려 원죄라면 좋겠다.
[“네브로!”]
그때는 내가 도움을 받았었지.
이제는 내가 도와줄 차례다.
“쿨럭!”
네브로가 몸을 흔들었다. 내 의지가 전해졌음이 느껴졌다. 지금 보니 싸우느라 속이 많이 상해있었군.
[“네브로, 정신 차려라.”]
“끄윽.”
쿵!
결국 네브로가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눈물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네브로?”
그 모습을 보고 변화를 느낀 일리아스의 목소리가 살짝 들떴다.
“······해냈습니다.”
[“네브로.”]
드디어 그의 의지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괴로운 상황 속에서도 간신히 붙잡고 있는 스스로의 의지가 아슬아슬하게 줄을 탔다.
“저 잘했죠?”
[“잘했다.”]
네브로는 들고 있던 검 중에 하나를 천천히 내려놓았다.
[“아?”]
지금 보니 그건 갈락슈르였다. 그것도 내가 처음 보았을 때와 같은 2차 봉인이 된 갈락슈르.
“네브로!”
일리아스가 달려와 무릎을 꿇은 네브로의 다리를 감싸 안았다. 몸의 크기가 너무 커진 탓에 이제 그녀의 포옹은 간신히 다리를 감쌀 수준이었다.
“일리아스.”
“네브로! 네브로!”
갈락슈르를 내려놓은 네브로의 손이 일리아스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마치 건드리면 깨질 듯 조심스레 행동하는 그 모습이 나로서는 자책감을 가지게 만들었다.
‘그래도 이제 다 끝난 건가.’
아직 주변에 있는 초월자가 조금 남아있었지만 적대적인 분위기를 풍기지는 않았다. 오히려 네브로가 또 언제 날뛸까 걱정하는 느낌이었다.
“수고했구나.”
딱!
안 그래도 붉었던 세상이 더욱 붉게 변했다. 마치 피로 물든 것처럼 세상이 빨갛게 변하며 시간이 멈췄다.
[“뭐지?”]
나를 제외한 모든 게 멈춘 듯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나와 또 하나의 인물만 움직이고 있었다.
“당신도 수고하셨습니다.”
[“······사마엘?”]
네브로의 형이자 네브로가 강해지기로 다짐했던 가장 근본적인 원인.
그의 힘으로 인해 네브로는 물론이고 다른 초월자들도 전부 멈춰버렸다. 그러나 의식은 있는지 눈동자를 조금씩 굴리는 게 보였다.
탁!
사마엘은 검은 날개를 펼친 채 사뿐히 바닥에 내려와 네브로를 향해 다가왔다.
[“뭘 하려는 거냐.”]
사마엘이 설마 이 정도로 강력한 신인지는 몰랐다. 아마 이 정도로 강했으면 처음부터 내 존재를 눈치 채고 있었겠지.
‘중요한 건 그가 지금 뭘 노리고 있느냐.’
드디어 모든 게 끝난 줄 알았는데 이런 의외의 변수라니.
[“날 노리는 건가?”]
“음······.”
사마엘은 속을 알 수 없는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러더니 뚜벅뚜벅 다가와 손을 뻗어왔다.
역시 나를 노리고 지금까지 묵혀온 건가······.
탁!
[“어?”]
그러나 내 추측은 대번에 부서졌다.
사마엘이 손을 뻗어 잡은 것은 다름 아닌 일리아스였다.
부들부들!
네브로의 몸이 격동에 찬 듯 떨리기 시작했다.
[“너, 뭐, 뭐하는 거야.”]
사마엘의 손에 들린 일리아스는 여전히 기쁜 표정을 지은 채 네브로를 안고 있던 모습 그대로 남아있었다.
[“뭐하려는 거야, 이 개새끼야!”]
“그때 했던 말을 당신도 들었을 거라 믿습니다.”
[“당장 내려놔, 이······.”]
“소중한 걸 지키려면 강해져야지.”
일리아스의 머리를 잡고 있는 사마엘이 무표정하게 말했다. 조금이라도 힘을 주면 일리아스가 죽을 듯 위태로웠다.
“그때는 작은 짐승이었지만 이제는 정말로 소중한 것이 되어버렸구나.”
안 돼. 안 돼. 안 돼.
네브로, 움직여! 당장 저 새끼를 막아!
“그래도 조금은 쓸 만해져서 다행이구나. 하지만······.”
사마엘의 손에 힘이 들어가고 있었다.
“아직 부족해.”
[“멈춰!”]
-띠링!
[계약이 발동됩니다.]
그 순간 나조차 알지 못했던 특성이 작동했다. 마치 이 순간만을 기다려왔다는 듯 시스템창이 시야를 가리며 사마엘조차 멈춰 세워버렸다.
[계약의 주최, 라플라스의 악마가 묻습니다.]
[이 이후의 일을 계속 확인하시겠습니까?]
< 399화. 천사와 악마의 계약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