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3화. 천마(天魔) >
우뚝!
반쯤 파고 들어간 천마의 손이 멈췄다. 네브로가 급히 몸을 비틀어 뒤로 물러나자 손이 뽑히며 피가 적셔 나왔다.
“으윽.”
정확히 심장을 노리고 들어온 손이었다. 그러나 간발의 차로 심장에 닿지 못했다.
“갈락슈르를 본좌에게 사용해도 괜찮은 거냐.”
몸이 멈춘 천마가 슬쩍 시선을 돌려 말했다.
그의 시선이 닿은 곳에는 일리아스가 갈락슈르를 사용하고 있었다.
항상 무표정했던 그녀의 얼굴이 일그러져 있었다. 계획이 틀어져 버렸다.
[“네브로, 정신 차려라.”]
“크읍.”
심장에 닿지만 않았을 뿐 네브로의 부상은 꽤 심각했다. 하지만 내 의지를 전해들은 네브로는 이를 물고 마법을 사용했다.
사방에서 그림자가 뻗어 나와 천마를 묶었다. 동시에 땅이 늪지로 변하며 그의 몸을 천천히 빠져들게 만들었다.
-분쇄해라.
이어서 세 번째 마법인 언령 마법이 캐스팅되자 천마를 묶고 있던 모든 것들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역시나 특이한 능력. 하지만 본좌는······.”
우드득!
급하게 만든 것치고 뛰어난 완성도를 보였던 네브로의 마법이 천마의 손아귀에서 산산이 부서져 내렸다.
“천마이니라.”
“멈춰.”
어느새 다가온 프레위르가 그런 천마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그 검에는 어색하지만 내가 알려주었던 무결이 섞여있었다.
촤륵!
묵색 도복이 베이며 천마가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어설픈 것치고 주제에 맞지 않는 검을 휘두르는군.”
“감당 가능해? 이 녀석은 아이온의 아들이자 사마엘의 동생이다.”
프레위르가 이글거리는 눈으로 천마를 바라봤다. 그러나 천마는 전혀 감흥 없는 기색으로 네브로만 노렸다.
“오히려 의문이군. 아이온과 사마엘은 왜 저걸 그냥 놔둔 거지? 본좌였으면 진즉에 먹었을 텐데 말이야.”
후웅-
천마의 모습이 흐릿해지며 어느새 네브로의 옆에 나타났다.
“혹시 상한 건가?”
스릉!
천마의 허리춤에 달린 묵빛 검이 뽑혔다.
그러나 그것은 천마가 뽑은 게 아니었다.
검은 순식간에 네브로에게 날아와 손에 착 감겼다. 잠시 저항하듯 부르르 떨렸지만 이내 잠잠해졌다.
“검을 다룰 줄 아는 건가?”
천마는 그 모습에도 전혀 당황하지 않고 오히려 팔짱까지 끼며 네브로가 하는 행동을 지켜보았다.
[“네브로.”]
나는 검을 집어든 네브로에게 최대한 내 의지를 이미지로 구체화하여 전했다. 지금껏 내가 익혀온 온갖 검술과 경험들, 그리고 그동안 보았던 오러 비기들까지.
[“보여줘라.”]
네브로의 눈이 검게 빛났다.
그의 손이 기묘한 경로를 그리며 일순 공간이 멈춘 듯한 착시를 만들어냈다.
“······!”
천마가 이상을 느끼고 행동을 취했을 때는 이미 네브로가 검을 휘두른 뒤였다.
쩌적!
공간이 갈렸다.
아니, 열렸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까.
그것은 단순한 검의 휘두름이 아닌 또 하나의 마법이었다.
검은색이 엷게 번져나가며 마치 일출의 수평선처럼 선이 그어졌다. 그 선에 한가운데에 있던 천마는 흐릿한 미소를 지으며 몸이 허물어졌다.
“꽤 하는구나. 본좌를 놀라게 하는 이가 많지 않은데 그대는 여러모로 놀라워.”
허물어진 줄 알았던 천마의 형상이 가볍게 흩어졌다. 그 대신 검은 내공을 온몸에 두른 천마가 반대편 허공에 떠있었다.
“감히 본좌로 하여금 군림보를 사용하게 할 줄이야.”
방금은 나도 좀 놀랐는데.
전혀 예상도 못한 네브로의 검술은 나에게도 스며들었다. 그가 사용하는 마법이나 검술은 전부 내게도 각인이 되고 있었다.
그리고 매번 느끼는 거지만 그 수준이 나를 상회하고도 남았다.
[“천마라고 했나.”]
“그래, 그대가 저 자에게 실시간으로 검을 알려주고 있었군. 확실히 평범한 자는 아니구나.”
천마가 뭔가 오해를 한 듯 했지만 굳이 풀어줄 생각도 시간도 없었다. 조금 전의 한 수로 네브로의 기력이 모두 빨려나간 기분이었고 나는 최대한 입을 털어서라도 상대를 막아야했다.
[“날 죽이면 날 먹을 수 있는 건가?”]
“일종의 제물 의식이지. 죽음이란 그 자체만으로 가치가 있는 것이니.”
[“이미 초월자가 된 네가 무슨 이유로 노리는 거냐.”]
“본좌도 한 때는 신선이 되면 모든 굴레를 벗어나 자유로워질 수 있을지 알았다. 그러나 막상 신선이 되고 보니 인과율이라는 강력한 제약이 몸을 옥죄는 구나.”
천마가 허공에서 천천히 걸어 내려왔다. 그 모습이 마치 무협 영화에서나 나오는 장면 같았다.
“힘이 강해질수록 인과율의 제약도 강해지지. 하지만 그건 힘이 부족한 것뿐이다. 진정으로 강하다면 인과율마저 무시할 수 있는 괴물이 될 수 있지. 진정한 의미의 초월자.”
[“날 먹으면 그리 될 수 있다는 거냐?”]
“하하. 부족하지. 고작 그대 따위가 뭐라고 그만한 힘을 얻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렇게 쌓다 보면 언젠가는 다다를 수 있지 아니하겠는가.”
감정이든 뭐든 전부 벗어버리고 욕망이라는 단어조차 없을 줄 알았던 초월자들이 오히려 저리 탐욕스러운 모습을 보이니 아이러니했다.
[“내가 생각했던 초월자들이랑은 완전 딴판이군. 욕심이나 힘에 갈망 따위는 없을 줄 알았는데.”]
“남 말하듯 말하지만 그대도 초월자다. 그리고 굳이 따지자면 그대가 말한 초월자는 형태조차 존재하지 않는 이들일 것이다. 아예 없는 건 아니지. 그러나 그들이 우리의 세상에 관여하는 일은 없다.”
친절하게 설명한 천마는 어느새 네브로에게서 검을 빼앗아 들고 있었다. 언제 넘어갔는지조차 확인할 수 없는 속도였다.
콰아앙-------!
“저쪽도 거의 끝이 나가는군. 역시 부족했나.”
천마가 폭음이 터져 나오는 방향을 돌아보며 말했다. 아마 토르가 조금 더 유리한 모양이었다.
“본좌는 저딴 검에 관심이 없다. 모든 신들의 기운이 모였다고 해도 결국 물건에 지나지 않지.”
[“나 때문에 왔다는 말이냐.”]
“그렇다.”
[“그렇게 초월자가 먹고 싶으면 다른 이들을 노려도 될 텐데?”]
“본좌는 호기심으로 살아간다. 여기에 굳이 온 이유는 그대 때문이기도 하지만 호기심이 컸던 게지.”
철컹!
천마가 검을 집어넣었다. 마치 싸울 생각이 없다는 듯한 행동에 희망 회로가 조금 돌아갔지만 긴장은 늦추지 않았다.
“아쉽군.”
[“뭐?”]
“인과율의 한계다. 첫 수, 아니 두 번째 수에는 그대를 먹었어야했어.”
천마가 털털하게 웃었다.
“그대들은 운이 좋구나.”
“하아······.”
긴장이 조금 풀렸는지 네브로가 숨을 깊게 내뱉었다. 긴장을 풀기에는 조금 일렀지만 저 말이 사실이라면 더 이상 우리에게 손을 쓸 수 없다는 말일 것이다.
‘더 손을 썼다가는 인과율에 걸리는 건가.’
초월자가 관여하기 위해서는 그만한 명분이 필요했다. 가령 같은 초월자급의 존재가 방해한다던가.
그것이 인과율.
아마 내가 존재하기 때문에 두 번 정도는 공격을 할 수 있었던 모양이었다. 진심은 아니었겠지. 검을 휘두르지도 않았으니까. 어쩌면 진심을 내는 것 자체만으로 인과율에 걸리는 걸 수도 있고.
“본좌는 이만 돌아가겠다. 즐거운 경험이었어.”
[“전혀.”]
탑에서 만났을 때가 떠오른다.
우리를 가지고 놀면서도 합당한 보상을 챙겨주기도 했었지.
“하지만 그 전에······.”
갑자기 천마의 모습이 악귀의 형상으로 변했다. 강렬한 기파가 터져 나오며 그저 곁에 선 것만으로 심장이 멈출 것만 같은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꾸르릉---
검을 뽑는 소리가 마치 거대한 북을 울리는 소리처럼 울려 퍼졌다.
“크윽.”
네브로가 결국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러나 전혀 굴하지 않겠다는 듯 고개를 들어올렸다.
“잘 보아라. 이것이 본좌의 진심.”
내공으로 이루어진 악귀 형상이 천마를 뒤덮어 본모습이 보이지도 않았다.
맹렬히 타오르는 불과 같은 묵빛 악귀의 형상이 곧이어 검을 휘둘렀다.
그 목표는 다름 아닌 토르가 있는 방향.
퍼억!
“흐음?!”
여동빈을 거의 다 이긴 토르가 미간을 좁혔다. 정말 약간의 차이로 이기고 있던 찰나였으나 그의 왼팔은 어느새 사라져있었다.
“으하하하하! 좋구나!”
콰르릉!
그러나 토르는 오히려 크게 기뻐하며 천둥 번개를 터트렸다. 잘려나간 왼쪽 팔이 무색하게 오히려 더욱 눈부신 번개로 물들어갔다.
“검선, 본좌는 이만 가보겠다.”
내공을 거둬들인 천마가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오며 검을 다시 집어넣었다. 마치 이것만으로 자신의 할일은 다했다는 태도였다.
그리고는 네브로와 내게 다시 시선을 돌리더니 씨익 웃어보였다.
“잘 보았느냐?”
“윽······.”
“굳이 대답하려고 할 필요 없다. 그저 보고 배웠으면 되었어.”
방금 그게 일부러 우리한테 보여주려고 한 공격이었던 건가? 도대체 왜?
[“왜지?”]
“겸사겸사. 여기까지 왔으니 검선은 도와야겠지. 이왕 도우는 것, 그대들에게 본좌를 막아낸 보상도 해주고.”
탑에서의 성격과 그대로군. 시련을 겪고 살아남은 자에게는 그만한 보상을 준다. 설마 이때도 그럴지는 몰랐지만.
“아마 그대는 새로운 신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본좌의 눈은 정확하거든.”
“······.”
네브로는 대답하지 못했다. 이미 천마가 헤치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그의 시선은 갈락슈르를 사용하고 쓰러진 일리아스와 그녀를 챙기는 프레위르에게 향해 있었다.
“그리고 그쪽은 조금 더 고생하겠어.”
[“날 말하는 거냐.”]
“그래. 골치 아픈 굴레군. 그 정도의 굴레는 거의 그리스도와 비슷해.”
[“그리스도? 예수?”]
“한 번 찾아가보는 것도 좋겠지. 아마 그대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자일 것이다.”
심상치 않은 이름이 나왔다.
하긴 석가모니가 존재하는 세상에 예수가 있어도 이상할 건 없지. 근데 이곳에 오고 나서 기독교와 관련된 건 본적이 없어 떠올리지도 못했다.
[“어디 있지?”]
“아무도 모른다. 하하.”
천마는 너털웃음을 흘리고는 그대로 연기처럼 흩어져 사라졌다. 결국 속 시원히 풀리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흐음, 싱겁게 끝났군.”
그때 어느새 다가왔는지 모를 토르가 김이 샜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는 왼팔이 잘린 상태였는데 번개로 지진 듯 검게 태운 흔적이 있었다.
[“그거, 괜찮은 거냐? 상대는?”]
“음? 으하하하! 광대가 나를 걱정하는 거냐? 음하하하하!”
재밌는 농담이라도 들었다는 토르의 반응에 내가 무안해질 정도였다.
“우리의 여정을 방해하던 놈은 부리나케 도망쳤다! 그것보다 네 상처를 보자꾸나!”
토르가 대뜸 네브로의 부상을 살폈다. 그러나 네브로의 상처는 어느새 아문 상태였다.
“역시 아이온의 아들다운 신체 능력이군! 내 광대로 딱이야!”
“이, 일리아스를······.”
네브로가 파리해진 안색으로 말하자 토르가 웃었다.
“으하하! 걱정마라! 저 요정 광대가 있는 한 웬만해서 누가 죽는 일은 없을 테니!”
그린나래가 알 수 없는 빛 가루를 혼절한 일리아스의 위에서 뿌리고 있었다. 저번에 갈락슈르를 사용했을 때도 저걸 사용했는데 아무래도 강력한 치유효과가 있는 듯했다.
“저 광대 녀석이 깨어나면 바로 출발하지!”
“저희를 노리는 자들이 더 없을까요.”
“어차피 상관없다!”
토르가 하나 밖에 남지 않은 팔을 들어 근육을 만들어보였다.
“바로 앞이거든!”
“바로 앞?”
네브로의 시선이 돌아갔다. 그리고 어느새 끝나 있는 무한의 땅이 보였다.
대체 언제 도착한 거지?
“샤이야가 바로 앞이다!”
임무의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
< 393화. 천마(天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