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0화. 시스템의 정체 >
지하 도시 전체가 지진이 일어난 듯 흔들리며 사람들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쿠구구궁!
으적!
-그어어어!
동시에 시끌벅적한 소음이 귀를 두드렸다. 나는 멍하니 내 두 팔을 내려다보고 이내 몸을 살폈다. 머리가 망가진 기분이었다.
“아, 아.”
목소리를 내보고 눈앞에서 벌어지는 전투를 지켜보았다. 아, 나 움직일 수 있지?
몸을 움직여 보았다. 하지만 후유증이 심해 갓난아이와 같이 어색한 몸동작이었다.
“아, 아, 아.”
돌아······온 건가.
이건 현실인가, 아니면 환상인가.
아니, 그 전에 확인할 게 있었다.
“원죄.”
어색해진 목소리가 뭔가를 불렀다.
“네브로.”
이내 정정하고 다시 부르자 내 안에 있던 무언가가 고개를 슬쩍 들어올렸다.
[“다 보고 왔냐.”]
“그래.”
사마엘의 등장, 그리고 그 이후의 일어나는 일들까지 전부.
너무나 끔찍했던지라 차마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들이었다. 그러나 내게는 바로 조금 전에 겪은 일이기도 했다.
[“일리아스는 아직도 회귀를 반복하고 있을까.”]
네브로의 물음에 난 답하지 못했다.
아마 내가 여기 이렇게 존재하는 걸 보면 그녀는······.
[“흐흐, 알고 있다. 지금도 죽지 못해 살아나기를 반복하고 있겠지.”]
“······.”
씨발.
할 말이 없었다.
사마엘이 등장한 뒤 일리아스는 죽었다. 나는 지켜보는 것 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지.
라플라스의 악마와 맺은 계약은 그 이후의 일이었다. 그러나 시간선이 꼬인 탓인지 계약이 이미 된 상태로 있었지.
[“결국 모두 행복하지 못한 결말이었어. 너도 결국 라플라스의 악마와 계약을 하게 됐으니까. 그게 얼마나 개 같은 일인지 짐작하고 있다.”]
“네브로.”
[“······널 원망하지만, 그렇다고 탓하지도 않는다. 네가 그 계약을 받아들인 것도 후회와 참회의 감정에서 비롯되었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이해한다는 듯이 말하는 네브로의 감정이 더욱 뼈저리게 느껴졌다.
[“라플라스의 악마와 맺어지는 계약은 평범한 것이 아니지. 네가 얼마나 무모한 계약을 맺은 건지 알고는 있냐?”]
“그래. 이제는 다 알아.”
시스템의 정체는 바로 라플라스의 악마였다.
시스템 덕분에 이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지만 역설적이게도 시스템이 아니었으면 내가 이 세상에 올 일도 없었겠지.
라플라스의 악마는 초월자였으나 일반적인 초월자와 달리 개념적인 초월자였다. 그러니 초월자라는 단어보다 ‘초월 개념’이라는 명칭이 더 어울릴 수도 있겠다.
‘너무 복잡해서 어디부터 풀어야할지 모르게 꼬였네.’
이번 과거 경험을 통해 내 정체도 어렴풋이 짐작하게 되었다.
난, 김진환이기 이전에 초월자였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는 문제처럼 의미가 없는 일이긴 했다.
김진환이 먼저였을 수도 있고, 초월자였던 내가 먼저였을 수도 있고, 어쩌면 아드리아스인 지금이 가장 먼저일 수도 있었다.
‘기억을 모두 잃고 윤회를 반복하라는 게 라플라스의 악마와 맺은 계약의 내용. 목표는 죄악의 수집.’
일리아스의 회귀와는 조금 다른 형태였다.
그리고 나는 몇 번의 윤회인지도 모를 정도로 삶을 반복해왔다. 기억을 잃으니 목표가 있는지도 모른 채 살아왔겠지.
특이점이 생긴 것은 바로 이번 삶.
김진환의 기억을 잃지 않고 아드리아스로 살게 된 것. 아마 원죄, 아니 네브로의 힘 덕분이겠지.
일리아스를 잃은 네브로는······끝내 샤이야를 멸망시켰고 인과율마저 부수었던 괴물이니까.
[“나도 예전의 너처럼 널 도왔다. 결국 이번 목표인 죄악의 수집도 끝에 다다르고 있지.”]
“그래.”
[“궁금해. 과연 목표 달성 이후의 삶은 어떻게 될까.”]
네브로가 씁쓸하게 웃었다.
아무것도 남지 않은 자의 쓸쓸한 자조였다.
[“넌, 나와 달리 모두를 지켰으니까. 행복하게 살 수 있겠지?”]
“네브로.”
그러나 그런 네브로조차 모르는 게 하나있었다. 그것은 바로 목표 달성의 보상.
일리아스와 달리 기억을 잃는 제약까지 더해진 나는 라플라스의 악마와 맺은 계약에서 추가로 보상을 얻기로 했다.
‘말할 수 없지만······.’
계약 위반이라 네브로에게 내용을 말해줄 수는 없었지만, 그렇기 때문에라도 더더욱 목표를 달성해야했다.
네브로가 행한 모든 일이 결코 쓸모없지 않았음을 증명해야했다.
콰과과과광!
“폭식이랑 싸우고 있었구나.”
저 멀리 보이는 여러 인물들이 마치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특히 루나의 경우 일리아스와 겹쳐 보여 혼란스러웠다.
[“환상이나 거짓이 아니야.”]
“네브로.”
[“현실이다.”]
그런 나를 향해 네브로가 강하게 말했다.
[“정신 차려라, 아드리아스.”]
맞아, 난 아드리아스였지.
지하 도시가 무너질 듯 흔들리는 상황 속에서 난 조용히 평정심을 되찾았다. 고민과 혼란은 지금 당장 필요한 감정이 아니었다.
“일단은 폭식부터.”
내 주위로 마법진이 생성되었다.
이전에는 꿈도 못 꾸었던 트리플 캐스팅을 넘어 쿼드러플 캐스팅까지.
‘꿈이 아니었어.’
네브로와 함께 했던 경험은 그 자체만으로도 나를 강하게 만들었다. 시간이 조금만 더 지나면 쿼드러플을 넘어 펜타, 아니 그 이상의 캐스팅을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쿠구구구!
네브로는 항상 이런 느낌이었던 건가.
직접 이런 식으로 마법을 사용해보니 급격한 마나의 소모로 인해 머리가 어지러웠다.
“이게 무슨!”
모른 대부님이 놀라는 게 보였다. 오랜만인데 여전히 정정하십니다.
도시 전체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쿼드러플 캐스팅으로 만들어낸 네 가지 마법진들은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며 하나의 거대한 마법으로 탈바꿈했다.
악신의 창.
퍼억! 쾅!
거대한 어둠의 빛이 폭식을 꿰뚫었다. 빛은 하나가 아니라 사방에서 창처럼 꽂아졌다.
퍼버버벅!
이내 꽂혀진 검은 빛이 사방으로 분할되며 폭식의 동체를 갈가리 찢었다.
“루도, 먹어치워라.”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거리였지만 내 의도를 파악한 루도가 사방으로 살점이 뜯겨나가는 폭식을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폭식은 뛰어난 재생능력을 지녔다. 하지만 그 재생력의 약점은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의 이름과 같은 행위였다.
폭식은 누군가에게 먹힌 부위를 재생할 수 없었다.
-그어어어!
-그그극!
이내 다른 언데드들도 사방으로 흩어져 폭식의 살점을 주워 먹기 시작했다. 무슨 공포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풍경이 이어지는 가운데 루나가 달려왔다.
“친구!”
그녀의 모습을 보자 두통이 일었다. 네브로가 황급히 의식을 꺼버리는 게 느껴지고 이내 루나가 내게 왔다.
“대단해!”
“루나.”
오랜만이다.
이건 정말 현실이 맞겠지?
“친구?”
루나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내게 손을 뻗어왔다. 어느새 얼굴을 만지는 그녀의 손길에 눈물이 적셔졌다.
“왜 울어?”
“루나, 한 번만 안아 봐도 됩니까?”
“그럼!”
루나가 활짝 웃으며 오히려 나를 안아왔다. 따뜻한 루나의 체온이 느껴지자 드디어 조금 실감할 수 있게 되었다.
“이기적인 말이지만······.”
“응?”
“여러분들만큼은 반드시 지켜낼 겁니다.”
죄책감이 생기지 않는다면 거짓이겠지. 실제로 내 잘못이 있었냐고 묻는다면 아니라고 대답할 수는 있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죄책감과 무릎을 꿇는 건 별개의 일이었다. 나는 다시 일어날 것이고, 지금의 내게 최선을 다할 것이다.
“이건 제 다짐입니다.”
“뭔 소리하는 거야, 친구! 머리가 돌아버린 거야?”
해맑게 물어보는 루나의 머리를 잠시 쓰다듬었다. 그래, 확실히 돌아온 게 맞네.
“여유가 넘치는군.”
어느새 막시민이 내 곁에 서있었다. 그는 나와 루나를 한심하다는 눈초리로 쳐다보더니 이내 반쯤 붕괴된 폭식을 눈짓했다.
“네가 한 거냐?”
“예.”
막시민은 말없이 죽어가는 폭식을 지켜보기만 했다. 아마 갑자기 강해진 내게 묻고 싶은 게 많겠지만 굳이 물어보지는 않는 눈치였다.
“괴, 괴물이 죽어간다!”
“살았어! 살았다고!”
“도시를 지탱해라! 무너지는 걸 막아!”
내 마법도 큰 역할을 했지만 결국 폭식을 마무리 지은 건 내 일행들과 언데드였다.
보통의 마법사에 비하면 마나가 많다고는 하지만 네브로와 달리 유한했기에 악신의 창과 언데드를 부리는 것만으로 내 마나는 바닥을 보였다.
-크하하하! 죽어라! 죽어라!
신이 나서 색욕의 지팡이를 휘두르는 하룬겔을 거둬들이고 이내 남은 잔당들을 정리했다.
“······정말 알 수가 없군.”
이름이 뭐였더라? 이제는 이름마저 가물가물해진 씬의 수장인 서족 수인이 온몸에 폭식의 체액을 묻힌 채 걸어왔다.
“그대는 인간이 맞나?”
“지금은 그런 걸 궁금해 하는 것보다 다른 할 일이 있지 않을까요.”
“이 정도 일 따위는 그대에게 아무것도 아니라는 건가. 그 여유가 부럽군.”
스렌달은 그리 말하더니 여전히 자리를 지켰다. 용건이 따로 있는 모양이군.
“황제의 소식이다.”
“이렇게 빨리?”
내가 시간 개념이 무너진 건가? 네브로를 통해 과거에 갔다 온 탓에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우리도 이렇게 빨리 찾아낼 줄은 몰랐다. 아니지. 정확히는 황제 측에서 이곳에 일어난 일을 알아내고 다가오는 중이다.”
“그런 거군요.”
폭식의 기운을 느낀 거군. 네브로의 육체를 찾으러 갔다고는 해도 죄악을 아예 포기한 건 아니었겠지.
‘그러고 보니 네브로의 육체는······.’
네브로는 샤이야를 사막으로 만들고 인과율마저 깨부수어 신들의 시대를 끝내버렸다. 그러나 그도 멀쩡하지는 못했는데 뒤늦게 나타난 초월자 하나가 네브로를 봉인해버리고 말았다.
‘그리스도.’
설마 만나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초월자였다. 석가모니는 생각보다 평범한 노인의 느낌이었는데 그리스도는 속을 알 수 없었지.
그는 라플라스의 악마와 나 사이의 계약도 중재해주었다. 무슨 의도와 이유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쪼르르-
잠시 생각에 빠져있는 사이 갑자기 주변으로 수인들이 가득 에워쌌다. 공격하려는 건가 싶었지만 딱히 위협은 느껴지지 않아 가만히 지켜만 보았다.
“가, 감사합니다.”
그때 작은 다람쥐 외형의 수인 하나가 불쑥 고개를 숙여왔다. 그러자 이내 주변을 에워쌌던 이들이 모두 감사를 표하기 시작했다.
“인간이지만 감사한다.”
“고맙습니다!”
난 그저 내 목적을 위해 행동했을 뿐이었는데 오해를 산 듯했다. 나름 인간들을 싫어하기로 유명한 놈들인데 별일이군.
“당신이 시켰습니까, 스렌달?”
“그래.”
어쩐지 이상하더라. 덤덤하게 인정하는 스렌달이 도리어 신기하게 느껴졌다.
“그래도 진심이다. 그대들이 아니었으면 아마 모두 죽었겠지.”
“애초에 저희 때문에 강경파 쪽에서 일을 벌인 거지 않습니까.”
“원인이 그대들에게 있다고 말하는 건가? 겸손이 과하군.”
스렌달은 이내 몸을 돌려 몇몇 수인들에게 손짓했다. 그리고는 도시의 상태를 살피며 말했다.
“황제와의 싸움은 보다시피 도와줄 수 없게 되었다. 내게 있어서 중요한 건 씬이라는 단체의 목적보다 이 녀석들이거든.”
“씬의 수장치고 건전한 생각이네요.”
“모순처럼 느껴지나? 하하. 보았다시피 한 단체 안에서도 각자의 생각은 다른 법이라, 특히나 우리 쪽 애들은 인간에게 당한 녀석들이 많아서 성향이 조금 치우쳐졌지.”
스렌달은 그 말을 끝으로 전후처리를 위해 떠났다. 황제가 온다니 나도 대충 확인하고······.
“루나?”
“응?”
다람쥐 수인의 볼을 잡고 마구 가지고 놀던 루나가 고개를 돌렸다.
“오관은요?”
“준비 끝났대!”
제사의 준비를 하러 간다고 했었는데 그것도 잊고 있었다. 루나의 등장이 너무 자연스러웠어.
“루나, 오관한테는 죄송하지만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응! 알았어!”
갈락슈르가 무슨 물건인지 알게 되었다.
수천 년의 세월동안 모든 신들을 찾아다니며 그들의 기운을 담은 물건,
오관은 일리아스보다 훨씬 이전의 무녀였던 걸로 추정이 된다. 그녀는 아마 갈락슈르가 완성되는 걸 보지 못한 채 지옥의 대왕이 되었겠지.
‘갈락슈르는 위험해.’
굳이 필요할 것 같지도 않았다.
지금의 내 힘이라면 황제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지.
······변수라면 네브로의 육체정도.
“우와아아! 나도 터트릴래!”
다람쥐 수인에게 흥미를 잃고 이내 폭식의 새끼를 죽이러 가는 루나를 보며 나도 급히 따라나섰다.
아무래도 한동안 루나를 혼자 두지 못할 것 같았다.
< 400화. 시스템의 정체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