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5화. 협상 그리고 이어지는 인연 >
지하도시 자카르는 생각보다 규모가 컸다.
‘확실히 게임하고는 체감이 다르네.’
애초에 몇 번 방문하지도 않았던 장소라 더 그렇게 느껴질 수도 있었다.
“크르르······.”
“끼잉!”
우리가 자카르에 입성하자 도시 내부의 수인들이 털을 바짝 세우고 우리를 경계했다. 그들 중에서는 노예 생활을 하다 풀려난 이들도 있었는지 노예의 낙인을 애써 가린 게 눈에 보였다.
“스렌달한테 가는 거냐?”
“아마 스렌달 님께서도 마중 나오고 있을 겁니다.”
꽤 공손해진 크랙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그리고 그런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우리를 맞이했던 멧돼지 수인, 보코가 인상을 썼다.
“자카르에 들어올 수 있는 것만으로 감사해라.”
“야, 멧돼지. 구워먹어 줄까?”
살렘이 두 눈을 번들거리며 말하자 보코의 어깨가 움츠려들었다. 아무래도 살렘한테 당한 게 좀 있는 모양이었다.
“흥! 여기는 자카르다. 여기서 당장 날 죽일 수는 있어도······.”
“그만해라, 보코. 손님들과 기싸움을 할 생각이냐.”
크랙이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아주 인간들의 개가 되었구나, 크랙.”
“너처럼 무식한 게 아니라 처세를 잘할 뿐이다. 닥치고 입구나 다시 가서 지켜. 이분들은 내가 안내할 테니.”
저 모습을 보면 그냥 원래부터 사이가 안 좋았던 거 같은데?
‘실력은 나쁘지 않네.’
오러 마스터급은 아니지만 어디 가서 꿇리는 실력들도 아니었다. 아마 내가 초창기에 만났던 적 중 하나인 제파르 교단의 간부, 파야트와 비슷하지 않을까.
······그때는 나태를 사용해서 간신히 잡았던 적인데 어느새 나도 이만큼 강해졌구나.
“많이 컸구나, 아드리아스.”
함께 길을 걷던 데슈른이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말을 걸어왔다.
“시간이 꽤 지났네요. 스승님은 여전하시니 마음이 좀 놓입니다.”
“하하! 나는 항상 건강하게 사니 아마 오래오래 살 것 같구나. 손주들은 보고 가야지.”
“손주? 자식이 있었습니까?”
“음? 네가 곧 내 자식이지 무슨 소리를 하는 게냐. 네 자식새끼들을 보고 간다는 말이다. 허허.”
나를 그렇게까지 생각하는 줄 몰랐는데······.
꽤나 낯부끄러운 말을 하는 탓에 나도 모르게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나저나 여기서 마주치게 될 줄은 몰랐다. 자세한 사정은 따로 자리를 잡고 이야기하겠지만 대충 전해들을 수 있겠느냐?”
데슈른의 시선이 나와 함께하는 이들에게 향했다. 딱히 적대적인 시선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호의적으로 보이진 않았다.
“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아십니까?”
“자세히는 몰라도 개판이 난 건 알고 있지. 덕분에 요즘 꽤 바쁘게 지내고 있어.”
“그 제국의 황제가 제 적입니다.”
내 말에 앞서 걷던 데슈른이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황제는······정상이 아니지.”
“알고 계셨습니까.”
“물론이지. 나도 한 때는 근위기사였으니, 정확히는 단장이었지. 하하.”
데슈른이 근위기사였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꽤나 먼 과거의 일로 현재는 사람들에게 잊혀진지 오래된 사실이었다.
‘나야 게임을 수십 번이나 했으니 외웠다만······.’
어느새 우리는 누가 보아도 이 도시의 주인이 지낼 법한 건물 앞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 앞에는 이전에 본 적 있었던 흑호 수인인 울루그와 한쪽 눈에 안대를 쓴 쥐 수인이 서있었다.
“쥐새끼, 오랜만이군.”
살렘이 안대를 쓴 수인을 향해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그러나 상대는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살렘을 바라보기만 했다.
“어이, 스렌달. 인사 정도는 받아주지?”
“뻔뻔하구나, 살렘 예디디아. 아직도 난 비가 오는 날이면 이 눈이 따끔거린다.”
왜 안대를 썼나 했더니 살렘이 저지른 짓이었나? 너무 뻔뻔하게 인사를 하기에 짐작도 못했다.
그것보다 스렌달도 오랜만이네.
쥐의 외형을 한 서(鼠)족 수인이었는데 쟁쟁한 수인들을 제치고 씬의 수장이 된 강자 중 하나였다.
‘대륙 10인에 버금가는 실력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역시 대륙 10인도 다 같은 실력이 아니었다.
살렘은 그 중에서도 특히나 강하겠지.
“무슨 용건이냐. 크랙이 데려온 걸 보면 뭔가가 있는 건 확실한데.”
스렌달이 살렘에게 차갑게 말했다.
그러나 살렘은 듣는 둥 마는 둥하며 내게 시선을 던졌다.
“음? 이제 보니 살렘 예디디아뿐만 아니라 괴물 같은 놈들이 한 번에 몰려왔군. 우리를 죽이러 왔나?”
“제안을 하러 왔습니다.”
내가 입을 열자 스렌달의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누구냐, 넌.”
“아드리아스 크롬웰이라고 합니다.”
“아아, 그랬군. 이야기는 들었다. 에반이 네 휘하에 속해있다는 정보를 들었을 때는 정말 놀랐었지.”
스렌달이 쥐 특유의 찍찍 소리를 내며 웃었다.
“실제로 보니 훨씬 어리군. 그렇다면 이 인원들을 데리고 온 건 너인가?”
“그렇습니다.”
“흠, 아무리 듀얼 마스터라고 해도 저만한 녀석들을 데리고 다니는 게 믿기지가 않는데······.”
“세워두실 겁니까?”
손님 대접을 안 할 거냐는 말을 돌려서 하자 스렌달이 찍하며 웃었다.
“어차피 수틀리면 뒤엎는 놈들이 몇 보이는데 괜한 기싸움을 할 필요는 없겠지. 들어가서 얘기하자고.”
스렌달이 몸을 돌려 건물로 향했다. 그 뒤를 울루그가 호위하듯 붙었다.
“음, 생각해보니 말하지 않았던 게 있었구나.”
둘의 뒤를 따라 건물로 향하려는데 돌연 데슈른이 내게 말했다.
“말씀하세요.”
“어떤 꼬맹이가 여기까지 날 찾아왔다. 도대체 내가 있는 곳은 어떻게 알았는지 신기한 녀석이지.”
“아, 설마······.”
나는 이전에 데슈른이 있을 법한 장소를 플레이어블들에게 알려준 적이 있었다. 아마 아카데미 교수로 검술을 가르치면서 말했던 것 같은데 여기까지 찾아올 녀석이라면······.
“벤자민?”
“그래, 벤자민 아니키우스. 알고 있구나?”
“지금 안에 있습니까?”
“내 밑에서 심부름을 좀 하고 있었지. 종종 검도 가르치면서 말이네. 딱히 배울 것도 없어보였지만.”
벤자민이 여기까지 왔을 줄이야.
의외의 소식을 들은 탓에 그를 보고 싶은 마음도 컸지만 일단은 협상이 먼저였다.
“얘기가 끝나는 대로 만나보고 싶군요.”
“너한테서 검을 배웠다고 들었다. 어느새 너도 가르칠 실력이 되었구나. 허허.”
“스승님만 하겠습니까.”
오랜만에 데슈른을 보니 나도 모르게 기분이 좋아졌다. 마음 한 구석에 항상 존재했던 비비안으로 인한 불안이 조금은 가시는 기분이었다.
“알고 있는 사이셨습니까?”
앞서 걷던 스렌달이 슬쩍 고개를 돌려 데슈른에게 물었다.
“내가 예전에 말한 제자가 바로 이 녀석이다.”
“설마 말씀하신 자가 아드리아스 크롬웰이라고는 생각도 못했습니다. 하긴, 영감님께 인정받고 제자까지 되려면 웬만한 녀석들로는 눈에도 차지 않겠죠.”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걷다보니 어느새 건물 안에 있는 응접실에 도착했다.
우리는 긴 테이블에 안내받아 차와 함께 간단한 간식을 대접받았다.
“오오, 이건 새로운 거다!”
루나가 처음 맛보는 음식이 꽤 마음에 들었는지 정신없이 흡입했다.
“썩 반가운 손님들은 아니지만 데슈른 님의 제자라고 하니 나름 신경 써주는 걸 알았으면 좋겠군.”
“호의에 감사합니다.”
“이제 슬슬 본론을 이야기해주었으면 하는데.”
스렌달의 말에 울루그를 비롯한 여러 수인들, 그리고 데슈른까지 궁금하다는 듯 날 바라봤다.
“여기 있는 크랙에겐 미리 말했지만 저희는 한 가지 목적을 가지고 이 사막에 왔습니다.”
“그게 우리는 아니라는 거지?”
“예. 저희의 목표는 황제입니다.”
“······황제?”
모두의 표정이 굳는 순간이었다.
**
대화가 끝나고 우리는 각자 쉴만한 방으로 안내받았다.
‘이야기는 나쁘지 않게 끝났지만······.’
사실 살렘이나 막시민 등, 다른 사람들을 데려오지 않았으면 협상 과정이 지지부진했을 것 같았다.
조금이라도 씬 측이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려고 할 때면 그 둘이 적절히 협박성 어린 기세를 드러낸 덕분에 결국 거저먹는 식으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할 수 있었다.
똑똑.
“예.”
데슈른이 벤자민을 데려온다고 했었는데 벌써 온 모양이네. 나는 곧바로 문을 열어주었다.
“음?”
“짠!”
그러나 문 밖에는 데슈른과 벤자민이 아닌 루나가 서있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나, 구경하고 싶어!”
루나가 밝게 웃으며 말했다.
으음, 데슈른을 기다리기로 했는데.
그러나 루나의 기대가 가득 찬 두 눈동자를 보고 있자니 실망시키고 싶지가 않았다.
“루나, 제가 만나기로 해야 할 사람이 있어서 그런데 조금만 있다가 나가도 될까요?”
그래도 선약은 선약이기에 조심히 말을 꺼냈다. 그러자 루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만날 사람? 여기에?”
“예. 아까 봤던 데슈른 님이 제 스승님이신데 마침 제가 검을 가르쳤던 아이가 그 분 곁에 있다고 해서요.”
“나도 볼래! 그러면 친구가 검술 스승?”
“그런 셈이죠.”
“오오!”
루나가 다시 봤다는 듯 초롱초롱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봤다.
“나도 검 알려줘!”
“루나는 심장의 마나 때문에 검을 배워도 효율이 떨어질 거예요.”
“아니야! 나도 기사의 마나 사용할 수 있어!”
엥? 이건 또 뭔 소리냐?
루나가 가끔 이상한 소리를 하기는 해도 나름 워록이었다. 그런 그녀가 기사의 마나와 마법사의 마나를 구분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우로보로스가 몸에 들어온 이후로 나도 쓸 수 있어!”
“그걸 왜 지금 말하는 겁니까.”
뭔가 이상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했다.
맥스웰, 아니 니바스의 실험이 나로 인해 결국 무산되기는 했어도 중간 과정까지 진행이 된 건 사실이니까.
“깜빡했어.”
“아니, 그런 걸 깜빡하시면······.”
말은 이렇게 했지만 그녀가 깜빡했을 리가 없었다. 아마 모종의 이유로 말하지 않다가 이제야 말하는 거겠지.
“제가 걱정할까봐 그랬습니까?”
“으, 응? 아, 아닌데······?”
루나가 어색하게 시선을 돌렸다.
너무나 거짓말이 티가 나는 그녀의 행동에 나도 모르게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하아, 따로 몸에 이상이 있는 건 아니죠? 부작용이라던가?”
“없어! 확실해!”
“한 번 살펴봐도 괜찮겠습니까?”
“어, 어? 으, 응······.”
루나가 우물쭈물하며 손목을 내밀었다.
역시 뭔가 더 숨기는 게 있는 건가? 하여간 걱정하게 만들고 말이야.
우웅-
조심스레 그녀의 몸으로 마나를 흘러 넣었다. 너무나 선명한 흑색의 마나가 루나의 몸을 타고 가기 시작했다.
‘이건······.’
순간 나도 모르게 당황하고 말았다.
단순히 기사의 마나를 사용할 수 있다기에 단전이 생긴 건가 싶었지만 그게 아니었다.
그게 아니라 이건 마치······.
‘나랑 같잖아.’
그릇 특성을 가진 덕분에 온몸이 마나 저장고가 된 나와 비슷했다. 아니, 거의 같았다.
조금 불균형하고 완벽하지는 않아도, 분명 이건 ‘그릇’이었다.
‘초월자를 담으려고 해서 그릇이 된 건가.’
잠시만.
그렇다는 말은 나도 초월자를 몸에 담을 수 있다는 뜻인가?
심지어 나는 루나보다 완벽한 형태의 그릇이었다.
“친구우?”
“아, 끝났습니다. 별 문제는 없네요. 다행이에요.”
다른 건 일단 제쳐두고 확실한 게 한 가지 있었다.
그건 루나도 나와 같이 검을 다룰 수 있는 몸이 되었다는 것. 게다가 마법사의 마나와 기사의 마나 같은 구분 없이 체내의 마나를 자유자재로 활용할 수 있을 듯싶었다.
‘검술만 익히면 꽤······.’
루나의 마나량은 원죄를 가진 나와 비슷할 정도였다. 아마 우로보로스를 흡수한 덕분이겠지.
“검술을 배우고 싶다고요?”
“응!”
이리 아까운 인재를 그냥 둘 수는 없지.
굳이 그런 이유가 아니라도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검술을 익힘이 바람직해보였다.
“마침 제 스승님도 계시니 한 번 해보죠.”
어차피 목적한 일이 있기에 길게 배우지는 못할 거다. 그래도 조금이라도 익혀놓으면 제 한 몸 지키는데 도움은 되겠지.
무엇보다도 그녀에게는 검술을 매일 알려줄 수 있는 좋은 스승이 곁에 있었다.
‘오관.’
저번에 말하기로 분명 샤이야 사막이 있던 장소에 루나의 혈족들이 살았었다고 했었지.
마침 사막에 왔으니 그녀도 불러볼 생각이었다.
< 375화. 협상 그리고 이어지는 인연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