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6화. 멸망급 에피소드 >
“무사히 복귀하신 것을 경하 드립니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바하트가 퉁명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걸었다. 포트리온에서 있었던 일을 증언하느라 황궁까지 갔다 온 상태라 귀찮기만 한 환대였다.
“당신!”
“아버지!”
그러나 그런 바하트도 가족의 마중 앞에서는 녹아내릴 수밖에 없었다.
“다행이에요. 무사해서 정말 다행이에요.”
“아버지, 일단 들어가시죠.”
“그래.”
가문에 돌아온 바하트는 부쩍 늙은 모습이었다. 실제로 늙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었기에 그는 피곤한 얼굴로 자리에 앉았다.
“대충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무사하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내가 할 말이다. 가문이 무사하니 다행이지 설마 이런 난장판이 되어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이런 말을 하기는 조금 뭣하지만 아버지께서 부재중이신 덕분에 전쟁의 물결을 조금 피할 수 있었습니다.”
둘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바깥에서 소란이 일어나더니 누군가가 격하게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아빠!”
“디에네!”
3년의 시간이 지나 외견은 더욱 어른스러워진 디에네였지만 오랜만에 보는 바하트 앞에서는 아이와 같은 모습을 보였다.
“어디 다친 데는 없어요? 몸은 괜찮으신 거예요? 아픈 데는요?”
“난 괜찮아. 그보다 너도 무사해보이니 정말 다행이구나.”
다시 한동안 서로의 안부를 나누게 된 가족들은 이내 서로가 무사하다는 것을 확인한 뒤에 다음 이야기로 넘어갔다.
“생각보다 치열합니다. 아직 초인들이 직접적으로 부딪힌 적은 없지만 간당간당한 마지노선까지 치고 박고 있어요.”
아들인 카를로스의 말에 바하트가 미간을 좁혔다.
“나도 느꼈다. 아주 난리도 아니더군. 그동안 모두가 벼려왔다는 걸 제대로 느꼈다. 단지 의문인 건 성국이야. 왜 우리를 적대하려고 하는 거지?”
“저희도 아직 파악 중에 있습니다만 단순히 기류에 편승하려는 것 아닐까 싶습니다.”
“하긴, 말만 성국일 뿐이지 성스러운 부분은 하나도 없는 곳이니······.”
사방에서 공격을 받는 제국이었다.
게다가 내부에서는 네 개의 기중 중 하나로 평가받는 모하임의 반란까지 일어나니 전황은 팽팽해질 수밖에 없었다.
“미누스, 그 놈이 제대로 준비를 해왔던 모양이구나.”
“그렇습니다. 제국 측에서도 내란을 가장 먼저 처리하려고 애썼지만 예상 외로 고전을 하며 전황이 고착된 상황입니다. 게다가 남부 연합에서도 이미 제국의 영토에 들어와 있는 상황이라 서로 긴밀하게 연계를 하는 듯합니다.”
카를로스와 이야기를 나누던 바하트는 이내 옆에서 우물쭈물하는 디에네의 모습을 발견했다.
“왜 그러느냐?”
“네, 네?”
“아드리아스는 무사해. 오히려 나보다 멀쩡하니 신경 쓸 필요 없어.”
속마음을 눈치 챘다는 얼굴로 말한 바하트에게 디에네가 애써 고개를 흔들었다.
“저, 전 신경 쓴 적 없어요.”
“루시아 에버라스트도 무사하다. 지금쯤 홀링턴에 복귀를 했겠군. 그러고 보니 홀링턴은 어느 쪽에 붙었지?”
“그게······홀링턴 측에서는 제국의 편을 들려고 했지만 황제가 이를 거절했습니다. 이미 모하임이나 크롬웰과의 긴밀한 연락이 오고 갔던 가문이라 신용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울며 겨자 먹기로 반대편에 붙었겠군.”
“맞습니다. 조금 안타깝죠.”
잠시 생각에 잠긴 바하트가 침묵하자 방 안에 적막이 흘렀다. 모두 말은 하지 않았지만 바하트가 돌아온 이상 혼란의 소용돌이에 한 걸음 다가섰다는 걸 깨닫고 있었다.
“우리도 결정을 내려야겠군.”
드디어 입을 연 바하트였지만 카를로스는 그의 말에 의문을 제기했다.
“결정······말씀이십니까?”
“그래.”
“어디를 상대할지 결정하신다는 말씀이십니까?”
“글쎄.”
바하트의 말에 긴장된 분위기가 감싸 안았다.
상대를 결정한다는 것이 남부 연합일지 아니면 반란군일지, 어쩌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는 동부 왕국들인지는 알 수 없었다.
“차라리 남부 연합을 상대하는 게······.”
디에네가 조심스럽게 의견을 내자 바하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남부?”
“네. 반란을 진압하는 건 여러모로 득이 되지 않으니까요. 차라리 남부를 상대하면 남부 연합의 땅이나 재화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요?”
“아무래도 오해를 한 모양이군.”
바하트가 피식하고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내가 결정을 내린다고 한 건 시기의 문제였다. 상대할 건 이미 정해져있어.”
“어디를 상대할지 이미 결정을 내렸다는 겁니까? 혹시 어디를······?”
“그건 조만간 말해주마. 일단은 휴식부터 취하겠다. 혹시 황궁이나 다른 가문에서 사람이 오면 정중히 거절하고 돌려보내라.”
“알겠습니다, 아버지.”
바하트는 그 말을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다 문득 고개를 돌려 디에네를 바라봤다.
“실력은 좀 늘었느냐?”
“네.”
덤덤하게 대답하는 그녀를 보며 바하트가 미소를 지었다. 웬만한 일이 아니고서는 스스로에게 실력이 늘었다는 표현을 하지 않는 그녀이기에 그 대답만으로 믿음직스러웠다.
“혹시 확인하러 가고 싶으면 가도 된다.”
“확인이요?”
“루시아나 아드리아스 말이다.”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말에 디에네는 물론이고 카를로스도 당황했다.
“하지만 지금 찾아간다면 황궁에서 분명······.”
“황궁? 황궁 따위가 날 핍박할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난 바하트 알븐이다.”
짧지만 강렬한 말에 모두가 납득을 하고 말았다. 대륙 10인 중 하나이자 대륙 최고의 마탑이라 불리는 로들렌 마탑의 마탑주인 바하트 알븐, 이보다 더한 설명은 없었다.
“고작 아는 사람 안부도 못 물어보게 한다면 그건 녀석들이 멍청한 거지. 감히 내 심기를 거스르는 일이니.”
“생각해둘게요.”
디에네가 고개를 끄덕이자 바하트는 그제야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 바하트의 뒤를 무린 부인이 따라가자 방에는 카를로스와 디에네만 남았다.
“갈 거야?”
카를로스의 물음에 디에네는 입술에 손가락을 얹으며 고민에 잠겼다.
“보고는 싶은데 글쎄.”
“한 번 가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
“아빠는 저렇게 말씀하셨지만 괜히 논란거리를 만들고 싶지는 않아.”
“디에네.”
카를로스의 부름에 디에네가 고개를 돌렸다.
“아버지께서 괜찮다고 하면 괜찮은 거야. 넌 너무 고민이 많아.”
“······응. 그러면 홀링턴에 먼저 가볼게.”
“그래. 갈 때는 그래도 말하고 가.”
“알았어. 고마워, 오빠.”
카를로스가 미소 지으며 방을 나갔다.
혼자 남게 된 디에네는 방에 있는 창문 쪽으로 걸어가 밖을 바라봤다. 전란의 기운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평화로운 풍경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선택······.”
바하트가 괜히 둘을 찾아가도 된다고 한 건 아닐 터였다. 머리가 좋은 디에네는 그 말 속에 숨은 의미를 단숨에 눈치 챌 수 있었다.
“정해진 상대라는 게 황궁이라는 이야기인가.”
어째서 제국을 적으로 돌리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알븐 가의 가주는 바하트였다. 그만한 선택을 내린 것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걸 알기에 그녀는 자신의 아버지를 믿기로 했다.
“아드리아스나 루시아라면 그 이유를 알고 있겠지.”
바하트가 찾아가보라는 의미로 넌지시 말한 것이 분명하기에 그녀는 당장 홀링턴에 갈 준비를 하기로 했다.
**
3년 만에 돌아온 크롬웰의 분위기는 썩 좋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 군대가 몰려왔던 것도 한몫했지만 애초에 제국을 적으로 둔 입장이니 당연한 분위기였다.
“비비안, 이만 방으로 들어가 봐도 돼요.”
“······.”
오자마자 그간 포트리온에서 있었던 일을 설명하고 주변 정세에 대해 듣느라 날이 어두워져 버렸다.
피곤하지는 않았지만 오랜만에 느껴보는 어색한 안락함에 휴식을 조금 취하고 싶었으나 비비안이 계속 곁에 붙어있었다.
“아드리아스.”
“예.”
“나 강해졌어.”
뜬금없는 그녀의 말에 고개가 갸웃거려졌지만 일단은 칭찬했다.
“고생하셨어요. 저 없는 동안에도 노력하셨네요.”
“아드리아스.”
“예.”
“······.”
괜히 불러놓고는 말이 없는 그녀를 보니 마음고생이 심했던 것 같아 괜히 미안해졌다. 솔직히 포트리온에서 있었던 일은 나조차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기에 이리 될 줄은 몰랐었지.
‘얻은 것도 있지만 잃은 것도 있고······.’
플러스 마이너스를 하면 0인가.
사실 니켈이 이 정도로 강해지지 않았다면 마이너스였을 거지만 니켈의 무력 덕분에 큰 걱정은 없었다.
종말급 에피소드를 미리 대비하지 못했지만 반대로 그걸 뛰어넘는 무력을 얻은 셈일까.
“비비안, 들어가기 싫은 거죠?”
“응.”
솔직하게 대답하는 비비안이 귀여우면서도 미안한 감정이 들었다.
“그러면 오늘은 그냥 밤새 이야기나 할까요?”
“응.”
어차피 체력적으로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루이스와 싸우며 사용한 날개의 부작용이 조금 있었지만 하루 정도 잠을 안 잔다고 문제가 될 만한 건 아니었다.
‘루이스가 내 도움 없이도 오러 마스터가 된 건 정말 다행이었지.’
사실 타락한 날개를 사용하지 않았으면 루이스를 검만으로 이기기는 힘들었을 거다.
플레이어블의 오러 비기는 게임에서도 무슨 경험을 했냐에 따라 매번 바뀌었는데 설마 ‘화안금정(火眼金睛)’을 얻었을 줄이야.
‘루이스를 가장 많이 플레이해봤지만 화안금정을 얻은 건 딱 한 번뿐이었지.’
겪어본 바로는 지금껏 루이스로 얻어본 오러 비기 중에서 최상위라고 생각하는 능력이었다.
“잠깐만 기다려봐.”
“예.”
어느새 내 방 앞까지 도착하자 비비안이 잠시만 기다려보라며 어디론가 급히 사라졌다. 그리고는 얼마 있지 않아 무언가를 손에 들며 나타났다.
“들어가자.”
“그건 뭐에요?”
“······과자.”
과자?
3년 만에 본, 바하트 덕분에 나한테는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비비안은 뭔가 좀 달라진 것 같았다.
“과자 좋아하셨어요?”
“아니.”
뭐야 그럼.
어쨌든 방에 들어가자 싸늘한 공기가 우리를 반겨주었다. 그동안 아무도 쓰지 않고 청소만 해 와서 그런지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 방이었다.
찰그락-
방에 들어오자마자 비비안이 방 한 쪽에 있는 식기도구를 만지더니 차를 우리기 시작했다.
“비비안, 차도 우릴 줄 알아요?”
“배웠어.”
정말 3년이라는 시간이 길긴 했구나.
비비안이 차도 우릴 줄이야.
뭔가 색다른 모습에 놀라움을 느끼고 있을 때쯤 그녀가 가져왔던 과자의 봉지를 풀었다.
“이거 먹어도 되는 거죠?”
“······응.”
한 입 크기의 과자를 입에 넣으며 루나를 떠올렸다. 루나가 딱 좋아할 느낌인데.
“어때?”
차를 가져온 비비안한테 아무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맛있네요. 이런 과자는 수도에서 팔 텐데······.”
말을 하다가 뭔가 이상해서 멈췄다.
전쟁이 한참인 지금, 수도에서 과자를 사온다는 게 말도 안 되는 일이지.
“어디서 구한 거예요?”
“만들었어.”
“예? 누가요?”
“내가.”
아니, 3년 동안 대체 뭘 하고 있었던 거야.
예상하지 못한 대답이 계속 나오자 나는 당황해서 할 말을 잃었다.
그때 비비안이 내 얼굴에 다가오더니 흉터를 만졌다.
“이제 다시는 잃지 않을 거야.”
조금 무섭게 느껴지는 말투였지만 그녀가 걱정했다는 걸 알기에 가볍게 웃으며 그녀의 손을 쥐었다.
“예.”
“과자 더 먹어.”
비비안이 한 움큼 과자를 움켜쥐더니 내 입 앞에 가져다주었다. 그 모습에 정말로 집에 돌아온 기분이 들어 나도 모르게 실실 웃게 됐다.
“너무 많은데요.”
부랴부랴 과자를 내려놓고 하나만 집어드는 비비안을 보며 다시 한 번 느꼈다.
내가 이 세상을 멸망으로부터 지키려는 이유.
그리고 당장 해야 할 일도.
‘우선은 헤이겔부터 찾아야겠군.’
이번 포트리온의 일로 알게 된 멸망급 에피소드 하나의 흑막. 그게 바로 헤이겔이었다.
게임을 하면서도 몰랐던 사실인데 루나를 포트리온으로 불러들인 것과 포트리온의 사건이 일어나자마자 전쟁이 벌어진 걸 보고 짐작할 수 있었다.
이미 늦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이라도 그를 찾는다면 조금 더 쉽게 풀어나갈 수 있겠지.
대혼란 에피소드에 이어서 벌어지는 멸망급 에피소드, 그건 바로 묵시록의 4기사였다.
< 346화. 멸망급 에피소드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