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1화. 루시펠의 초대 >
“룰프!”
루나가 분위기를 깨뜨리며 드미트리에게 달려갔다.
드미트리의 어깨에는 루나가 맡겨놓은 작은 원숭이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히히, 잘 있었어? 난 재미있었어.”
‘반복하는 악몽’을 겪은 이후로 위험한 장소에는 데리고 가지 않겠다고 선언했던 루나였는데 열심히 그 말을 지키고 있는 모습이었다.
“할 말이 있다.”
분위기가 깨진 틈을 타 뱀파이어 하나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우리는 그대를 적대하기 위해 찾아온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지.”
“자세히 이야기 해보세요. 들어나 보죠.”
“우리는 안젤라 님의 휘하에 있는 자들이다.”
안젤라.
꽤 오랫동안 잊고 지내던 이름이 상대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아드리아스 크롬웰, 그대가 이번 원정에 참여한다는 것을 알고 계획이 급히 변경되었다. 원래는 우리도 저들처럼 습격을 감행할 생각이었지만 목표가 바뀌었지.”
“그 목표가 저입니까?”
“그렇다. 안젤라 님께서 그대를 친히 초대하셨다.”
안젤라가 이제 보니 꽤 높은 위치에 올라선 것 같았다.
세력이 하나도 없었을 텐데 내가 바쁘게 지내며 성장하는 동안 그녀도 나름 이루어낸 것이 있었던 모양이다.
“동생이 아드리아스 님을?”
그때 이자벨이 조곤하게 끼어들었다.
“그렇습니다, 이자벨 님.”
“흐응~”
이자벨이 묘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봤다.
고귀하면서도 장난기가 가득한 그 미소에 나는 괜히 불안해졌다.
“우리 아드리아스 님을 그런 험한 곳에 혼자 보낼 수는 없지. 나도 따라가겠다.”
이자벨의 말에 반응을 보인 건 대화를 나누던 뱀파이어가 아니라 막시민이었다.
그는 미묘하게 인상을 찌푸렸는데 차마 내색은 하지 못했지만 내키지 않는 눈치였다.
“반가운 소식입니다! 오히려 이자벨 님께서 언제 가문에 복귀하실까 항상 기다려왔습니다.”
“복귀는 아니란다. 난 지금 지내고 있는 곳이 마음에 들었거든.”
오랜만에 반가운 얼굴들을 보겠다며 고귀하게 웃는 이자벨이 든든했다.
“초대, 정확히 무엇을 위한 초대인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딱히 목적이 있는 건 아니다. 그저 안젤라 님께서 그대를 보고 싶어 할 뿐.”
조금 고민해봐야겠군.
그 전에 아직 해결해야 할 일이 있었다.
“크흥.”
에반의 오러 비기가 주변을 가득 메운 상태였다. 수인들은 그의 오러 비기에 꼼짝도 못한 채 자신들의 처분을 기다리고 있었다.
“울루그.”
“흐흐. 우리가 졌다. 깔끔하게 인정하지.”
“당연한 말을 그럴 듯하게 하는 재주가 있군요.”
“네 말이 맞다. 패자는 말이 없는 법이지.”
지금은 의식을 잃고 잠든 아가타에게 미리 씬이 이곳에 와있다는 걸 전해들었다.
애초에 나를 공격하기 위해 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내 말이 곱지는 않았다.
‘원래는 시체들의 왕국에 있는 배를 구해서 가려고 했지만 크리브마허로 계획을 바꾼 것도 그 덕분이지.’
그때 조용히 있던 또다른 뱀파이어 하나가 내게 말을 걸었다.
“선처를 부탁해도 되겠습니까.”
무덤덤한 목소리로 내게 말을 한 그를 향해 도리어 물었다.
“이 녀석들을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씬과 연관된 재앙급 시나리오는 이미 해결했다. 타락한 세계수 시나리오가 바로 그것.
그렇기 때문에 씬에 대한 관심도는 조금 떨어졌는데 그렇다고 나를 공격한 이들을 용서할 정도로 너그럽지는 못했다.
“농담이십니까.”
“저희가 지금 굳이 모습을 드러낸 이유도 중재를 위해서였습니다. 씬을 신경 쓰지 않았다면 모든 일이 끝난 뒤에 등장했겠죠.”
고분고분 자기 할 말을 다하는 그를 보며 나는 차갑게 얼굴을 굳혔다.
“제가 그 말을 들어야할 이유를 설명해주십시오.”
“저희 측에서 따로 보상을 해드리겠습니다. 물론 당신이 씬에게서 뜯어내는 보상과는 별개로 말입니다.”
보상이라······.
내용물이나 한 번 들어보자.
“들어보고 판단하죠.”
“안젤라 님의 초대를 승낙하시면 저희가 있는 땅에 방문하시게 될 겁니다. 보상은 안젤라 님께서 섭섭지 않게 챙겨주실 겁니다.”
“안젤라가 씬을 구하라고 명령한 겁니까?”
“둘 다 입니다. 만약 당신들이 위험했으면 반대로 씬을 설득했겠죠.”
나야 안젤라 때문에 살린다지만 씬을 구하려는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고민이네.’
구체적인 보상도 알 수 없었지만 어차피 루시펠 가문에는 한 번 쯤 방문을 해야 했다.
‘색욕의 페이지.’
죄악 시리즈 중 다섯 번째를 담당하는 물건이 그곳에 있었다.
“안젤라 님께서는 가문 내에서도 굳건한 입지를 다지고 계십니다. 제안하는 보상이 결코 실망시키지는 않을 겁니다.”
“흐음······.”
내 고민이 길어지자 누군가가 내 곁에 다가왔다.
“어이, 아드리아스.”
방랑자라는 이명을 이제는 떼야 되지 않을까 싶은 살렘이었다.
“예, 뭡니까.”
“하여간 말본새하고는. 그러지 말고 그냥 살려줘라.”
의외의 말이었다.
피도 눈물도 없는 살렘의 입에서 살려주라는 말이 나올 줄이야.
“이유를 들어도 되겠습니까?”
“저 깜장고양이를 죽이면 피곤해질 거다. 씬이 문제가 아니라 다른 문제 때문이지.”
다른 문제라······.
“저 놈이 저래보여도 데슈른의 제자다.”
“데슈른?”
의외의 이름이 튀어나왔다.
“데슈른이 누군지는 아냐?”
“제 스승님이십니다.”
“뭐?”
살렘한테는 내가 말을 하지 않았었나 보다.
따지고 보면 내가 데슈른의 제자인 걸 알고 있는 건 라스틸리아의 엘프들과 메르쿠르, 그리고 막시민이 전부였다.
“스승님? 뭔 개소리야?”
“말 그대로입니다.”
그것보다 내가 더 놀랐다.
지금까지 나는 데슈른이 제자를 들인 적이 없었다고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인간도 아닌 수인이 데슈른의 제자라니?
“웃기지 마라. 네가 영감님의 제자라고?”
울루그도 나와 비슷한 심정이었는지 나를 보며 소리쳤다.
“크라테스 산맥에서 직접 사사받았습니다. 저야말로 믿기지 않는군요. 스승님께서 당신에 대한 이야기를 한 적은 없습니다.”
“그건······.”
울루그는 머리를 긁적이더니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난 엄연히 말하면 제자가 아니다.”
역시 그럴 줄 알았다.
“난 영감님 손에서 자랐지.”
“예?”
아니, 잠깐만.
데슈른이 울루그를 키웠다고?
울루그는 씬의 간부였다.
게임에서 직접 만나보지는 못했지만 타락한 세계수 시나리오를 해결하며 이름은 듣게 되지.
“아니, 스승님의 손에서 자랐다면서 씬 소속이라고요?”
“크흠.”
저 배은망덕한 새끼가······.
인간 손에 자라놓고 인간 혐오 단체의 간부 노릇을 해?
“난 단지 고통 받는 수인들을 돕고 싶었을 뿐이다. 그리고 너도 뭔가 착각하는 모양인데 영감님도 종종 우리 일을 도와주신다.”
“허!”
믿기지 않을 소리만 해대는군.
“진짜라고! 인간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선에서 노예가 된 수인들을 구하거나, 수인 마을이 습격당하는 걸 막아주시기도 한다.”
“전 당신들이 하려던 짓을 알고 있습니다.”
세계수의 타락.
그건 단순히 수인들을 구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무슨 짓?”
“전 라스틸리아에 방문했던 적이 있습니다.”
“흥! 나도 알고 있다. 네가 거기서 우리 조직의 수백 년 된 계획을 무산으로 만든 것도 알고 있지.”
“그게 수인들을 위한 일이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수백 년 전 계획의 의도를 내가 어떻게 아나! 난 아직 50밖에 안된 나이라고.”
50밖에?
뭐, 그건 그렇다 치고 울루그의 말대로 세계수의 타락 자체는 씬의 모두가 연관된 일은 아닐 거다.
‘수백 년을 살 수 있는 존재.’
다크 엘프나 뱀파이어.
어쩌면 집회 소속의 몇몇도 연관되어 있을 수 있었다.
“네가 우리 조직에 대해 잘 모르나본데 애초에 조직 내부에서도 성향이 나뉜다. 종족끼리 파벌도 나뉘고 의견도 항상 같지는 않아.”
아니, 근데 아까부터 말이 많네?
“패자는 말이 없다면서 말이 많군요.”
“할 말은 해야지!”
“한입으로 두말도 하시고요.”
어쨌든 울루그는 살려줘야겠다.
우리를 습격한 건 괘씸하지만 다친 사람도 없었고 스승님의 낯을 봐서라도 한 번은 넘어가줘야지.
“살려는 드리겠습니다. 대신.”
“대신?”
“대가는 치러야죠.”
우리의 대화를 지켜보던 수인들이 침음했다.
“뭘 원하나.”
“정보.”
어차피 물질적으로 부족한 건 없었다.
지금 내게 필요한 건 정보.
비록 에반과 노아가 정보조직을 이끌고 있었지만 그건 별개의 이야기.
내가 원하는 건 씬의 내부 정보였다.
“많은 걸 바라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죽는 것보다는 나을 거예요.”
“크흐······.”
조직 내부의 정보 유출은 배신과도 같은 행위.
아무래도 선뜻 승낙하기에는 힘든 조건이었나 보다.
“받아들여라, 울루그.”
그때 가장 처음에 대화를 주도했던 조나단이라는 이름의 뱀파이어가 나섰다.
“이번 일에 대해서는 우리가 중재해주지.”
“누구의 이름으로?”
“알다시피 우리가 모시는 안젤라 님도 씬의 일원이시다. 그대가 말하는 정보의 중요성을 우리가 먼저 검수하고 저 자에게 알려주겠다.”
조나단이 그래도 되냐는 눈초리로 나를 돌아봤다.
“이 정도의 양보는 가능한가?”
“글쎄요.”
“그대가 현 상황을 주도하고 있는 건 안다. 하지만 울루그가 곤란해지면 우리 측도 곤란해져.”
“우리 측이라는 건 안젤라를 말하는 겁니까?”
“그렇다.”
이자벨에게 전해들은 바로는 안젤라가 내게 호의적인 흔적을 남겼다고 했다.
그리고 지금 찾아온 뱀파이어들의 반응도 내게 적대적이진 않지.
‘이왕 이렇게 된 거 안젤라한테 힘을 실어줄까.’
어차피 색욕의 페이지를 얻으려면 루시펠 가문 내의 항쟁에 끼어 들어야했다.
그리고 난 운 좋게 이자벨과 안젤라라는 연결고리가 생긴 상황.
“알겠습니다. 하지만 이후의 대가는 톡톡히 받아낼 겁니다.”
“안심하라. 우리가 가진 귀물과 재력은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니······.”
거래가 성립됐다.
**
조용한 학생회실.
회장의 자리에 앉아 결제할 서류들을 훑어보던 세레나가 잠시 눈을 비볐다.
“으음······.”
최근 들어 학생회의 일과 검술 수련을 동시에 하다 보니 아무리 세레나라도 지칠 수밖에 없었다.
똑똑!
“회장님, 계실까요?”
“어, 들어와.”
문이 열리며 7석의 마릴린이 들어왔다.
“우와, 서류가 이렇게 많아요?”
“개교기념일이 다가오니까 일이 많아지네. 그것보다 무슨 일이야?”
“그냥 놀러왔지요. 회장님 모습도 구경할 겸.”
“난 구경거리가 아니야.”
세레나가 피식 웃으며 다시 서류로 시선을 돌렸다. 그런 세레나의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던 마릴린은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카심을 이긴 그 신입 말이에요.”
“벤자민?”
“네. 그 벤자민이 아드리아스 교수님을 후견인으로 뒀다고 했죠?”
“어, 그렇게 들었어.”
마릴린이 볼을 만지작거리며 의문에 찬 표정을 지었다.
“아드리아스 교수님은 이미 예전부터 오러 마스터였던 것 아닐까요?”
“왜 갑자기?”
“벤자민의 재능을 알아봤다는 게 신기해서요.”
“벤자민 정도면 못 알아보는 게 더 이상하지 않을까.”
세레나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간 겪어본 벤자민의 재능은 절대 자신의 아래가 아니었고, 굳이 따지자면 루이스와 비견될만했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마릴린은 그런 세레나의 반응을 살피며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뭐,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그건 그렇고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엄청 후회돼요.”
“뭐가?”
“아드리아스 교수님 특별 강의요. 통과할 자신은 없지만 저도 시험을 한 번 쳐봤을 걸 그랬어요. 설마 최연소 오러 마스터이신 줄 누가 알았겠어요?”
토너먼트 사건 이후 아드리아스의 명성은 급속도로 퍼져나갔다.
기사학부장 수라한의 기록을 깨는 최연소 오러 마스터.
아직 황궁의 인정을 받지는 못했지만 모두들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나저나 외유가 기시네요. 언제쯤 돌아오시려나.”
“곧 오시겠지.”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지만 사실 아드리아스를 누구보다 기다리는 건 세레나 본인이었다.
토너먼트장에서 보았던 그 압도적인 무력.
자신은 차마 건드리지도 못할 적을 무참히 썰어버린 아드리아스의 모습은 그만큼 강렬했다.
“부럽다. 회장님은 특별 수업 받으실 수 있잖아요. 누구누구더라? 검룡 선배님하고 회장님, 그리고 벤자민이 끝인가?”
“크리스도 있어.”
“비검 선배님이요? 언제 또 시험을 받으셨대.”
타다다다닥!
한참 대화를 나누는 사이 복도에서 급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누가 뛰어오네요?”
동시에 문이 벌컥 열렸다.
“회장님.”
들어온 이는 디트리히 페더.
학생회 부회장이었다.
“무슨 일이야?”
“돌아오셨습니다.”
주어가 생략된 말.
그러나 그 말을 들은 세레나와 마릴린은 돌아왔다는 게 누군지 짐작할 수 있었다.
“아······.”
“아드리아스 교수님께서 아카데미에 복귀하셨습니다!”
< 311화. 루시펠의 초대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