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4화. 리치킹 >
이전에는 몰랐지만 이제는 그 정체를 알게 된 현자의 돌.
메쥬르가 우리에게 건넨 말은 현자의 돌을 그냥 뒀으면 나오지 않는 제안이었다.
“여기 국왕도 저런 유령인가? 나는 일단 가본다에 한 표.”
메쥬르의 제안을 받은 우리는 동그랗게 모여 앉아 대화부터 나누기 시작했다.
키네인 용병단은 혹시 모를 보상을 위해서라도 국왕을 알현하는 것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언데드는 많이 봤지만 언데드와 연관된 물건이나 유물은 아직까지 하나도 발견하지 못했다. 난 무조건 갈 거야.”
파이시도 무토와 같은 의견을 내자 결국 시선은 내게로 쏠렸다.
“저희도 가겠습니다. 대신 메쥬르에게 장비 몇 가지만 교환하고 출발하죠.”
“그건 우리도 마찬가지야. 꽤 모았으니 하나쯤은 사도 되겠지.”
무토가 고개를 끄덕였다.
덕분에 우리는 약간의 정비 시간을 가지기로 하고 각자의 일행끼리 뭉쳤다.
“느낌이 좋지 않습니다.”
나는 앞으로 일어날 일을 미리 알기에 먼저 운을 띄웠다.
“지금까지는 아무 생각 없이 이곳에서 사냥을 해왔지만 원인 없는 결과란 없는 법입니다. 이 왕국의 사람들이 전부 언데드인 점이나 계속해서 발생하는 이상 현상들은 분명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 고용주께서는 그 원인이 저 자가 말한 국왕이란 뜻인가?”
“그건 모르죠.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보면 밑에서 문제가 생겼을 확률보다 위에서 문제가 발생했을 확률이 높습니다. 권력과 힘을 가진 자가 벌인 일일수록 터무니없는 결과가 나오니까요.”
내 말을 들은 북부인들이 고개를 갸우뚱거리자 아가타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아드리아스 님께서는 그러면 왜 가겠다고 하신 걸까요?”
“원인을 해결하면 큰 보상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게 왕가의 보물이 되었든 고대 유적의 유물이 되었든.”
어느새 라고에게 달려가 공포검을 자랑하고 있는 루나를 제외하면 모두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모르니 우선은 전력 보강을 위해 돌조각으로 장비를 교환하겠습니다. 아가타?”
“네?”
“루엘라의 진심을 살만한 돌조각은 모았습니까?”
“아직 1,000개 정도 모자라요.”
“그 1,000개, 일단 제가 가불해주죠.”
난 품에서 돌조각 1,000개치를 꺼내 아가타에게 건넸다. 그녀는 얼떨결에 돌조각을 받아들며 내게 물었다.
“이러면 아드리아스 님께서 사실 물건은······.”
“전 필요한 장비가 딱히 없습니다. 자잘한 소모품은 살 수도 있겠지만 장비보다 값이 비싸지는 않으니 괜찮아요.”
물론 돌조각이 무제한으로 있다면 모든 아이템들을 다 쓸어 담고 싶었지만 우선은 아가타를 향한 호감작이 먼저였다.
그녀가 완전히 내 편으로 돌아설 때까지 노력해봐야지.
‘플레이어블이니까.’
아가타로도 이 세상의 끝을 클리어해본 경험이 있는 만큼 그녀를 포기하기 어려웠다.
그만큼의 잠재력을 가진 인물을 감히 어떻게 함부로 포기하나.
“······감사합니다.”
“더 필요하면 말씀해주세요. 공짜라는 말은 아니지만 전력을 높인 다음에 사냥을 하는 게 가불한 걸 갚기도 쉬울 거예요.”
아가타는 고개를 끄덕이고 메쥬르에게서 루엘라의 진심을 구입했다.
이제 마나만 충분하다면 화살의 구애를 받지 않게 된 아가타는 꽤 쓸 만한 전력이 되었다.
‘원래는 네임드 활도 구해야하는데······.’
그건 지금 구할 수 있는 게 아니니 넘어가야지.
이후 나는 비비안과 함께 물건들을 구경하며 자잘한 물품들을 구입했다.
[풀스 견갑]
[내구도 1,547/1,800]
[견갑 부위 타격을 20% 흡수]
[벤데온 해독제]
[384가지 독을 해독 가능]
[필 무버의 주문서]
[지정한 위치에 상태 고정 마법을 작용]
견갑은 비비안의 물건이고 나는 해독제와 주문서를 하나 더 샀다.
조금만 더 돌조각이 많았다면 ‘미틸의 벨트’라는 아공간 아이템을 사고 싶었는데 아공간 아이템인 만큼 가격이 꽤 비쌌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사야지.’
한 가지 궁금한 점은 이곳의 보스이자 국왕인 네크로맨서를 잡아도 저 아이템들을 구입할 수 있는지의 여부였다.
아무래도 메쥬르가 그의 신하인 만큼 애매한 구석이 있었다.
“가자고.”
무토도 쇼핑을 끝냈는지 우리를 불렀다.
사실 국왕을 만나는 건 저 벨트를 사고 난 이후로 하고 싶었지만 파이시나 무토를 설득할 근거가 부족했다.
저 둘의 도움을 받아서 보스를 잡아야하는 만큼 아쉽지만 벨트는 일단 포기하는 수밖에.
“그럼 저를 따라오십시오.”
메쥬르가 건물에서 나와 앞장을 서며 왕궁을 향해 나아갔다.
앞으로 있을 전투를 직감하며 나는 전력을 다시 확인했다.
‘마나 재능이 진화 중이지만 후유증은 크지 않아. 마나도 충분하고 날개도 성장했다.’
거기다 이번에는 혼자가 아니라 무려 네 명의 오러 마스터에 파이시라는 훌륭한 네크로맨서, 그리고 사기급 서포터인 루나가 있었다.
최근 들어 검술 실력이 알-구르드의 실력을 뛰어넘었기에 소환할 일이 별로 없었는데 루나의 강림 마법이라면 또 얘기가 다르지.
-우으으.
왕궁으로 향하는 길에도 언데드들이 종종 눈에 띄었다.
그러나 왕궁 부지 바깥에 있는 녀석들과는 달리 공격적이지 않았다.
아마 모두 국왕의 통제를 받고 있는 언데드들이겠지.
“괴로워해.”
루나가 나란히 걷다가 중얼거렸다.
그녀의 시선은 그 언데드들을 향해 있었는데 이내 눈살을 찌푸리는 게 보였다.
“자연스러운 힘이 아니야.”
“평범한 언데드가 아닙니까?”
“응. 다른 힘이 섞여있어.”
루나는 빛나는 눈으로 그들을 살폈다.
국왕이 네크로맨시가 아닌 다른 힘을 사용한 건가?
솔직히 나도 국왕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지금 시점의 플레이어블은 게임에서 고작 4년차.
그런 힘으로 오러 마스터 여럿이 모여도 상대하기 힘든 보스몹을 잡아봤을 리는 없으니까.
잡고 나서의 보상이나 이 섬에 얽힌 이야기도 확인해볼 수가 없었다.
척척척척!
앞에서 오와 열을 맞춘 발걸음 소리들이 들려왔다.
“왕궁 기사단에서 마중을 나왔나보군요.”
메쥬르가 웃으며 말했다.
그런데 말이 좋아 마중이지 우리가 도망치지 못하게 퇴로를 막으려는 수작이었다.
저 녀석들도 결국에는 처리해야 하지.
-그르륵, 그륵.
목이 끓는 소리를 내는 녀석들은 귀기를 불태우는 혼 크러셔들이었다.
역시 왕궁 기사단급 언데드라고 할 정도로 수준 높은 언데드들이었다.
“호오?”
파이시가 고급스러운 갑주를 입은 혼 크러셔를 살폈다.
마치 도깨비불이 인간의 형상으로 변한 듯한 모습의 그 언데드는 파이시의 눈길에도 그르륵거리기만 할 뿐 반응하지 않았다.
“비효율적인 언데드로 이름 높지만 용케 만들어졌네.”
그녀의 말대로 혼 크러셔는 비효율적인 언데드였다.
일단 일정 수준 이상의 시신으로만 소환이 가능했고 들어가는 재료도 평범하지 않았으며, 막상 소환이 되어도 강력한 공격력에 비해 방어력이 약해 소멸되기 쉬운 언데드였다.
‘근데 벌써부터 놀라면 안 되지.’
보스가 다루는 언데드들은 하나하나가 초인에 필적하는 괴물들이었다.
아마 언데드 간의 대결로만 따지면 모른 대부님도 이기지 못할 거다.
“들어가시죠.”
혼 크러셔들의 살벌한 마중을 받으며 우리는 왕궁으로 향하는 계단을 올라갔다.
쓸데없이 긴 계단을 타고 올라가자 드디어 문 앞에 서게 된 우리는 천천히 열리기 시작하는 문을 바라봤다.
“오?”
문을 연 것은 다름 아닌 누더기 골렘 두 구.
완성도가 높아 악취가 전혀 나지 않고 생김새도 깔끔한 녀석들이었다.
다시 말하지만 지금까지 봐온 녀석들은 모두 적이 될 예정이었다.
“바로 알현하는 건가?”
붉은 카펫이 깔린 긴 복도를 지나며 무토가 물었다.
물으면서도 여기저기에 있는 그림이나 장식품들로 눈이 향하는 게 보였다.
“그렇습니다. 전하께서 여러분들을 빨리 보고 싶어 하십니다.”
“그러고 보니 만나자고 하는 이유가 뭐였지?”
“우리 왕국을 위해 활동해주시는 여러분들에게 포상하려는 것 아니겠습니까?”
메쥬르의 어감이 이상했지만 모두 포상이라는 단어에 정신이 팔려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한 듯 했다.
오직 비비안만이 나를 지키기 좋은 자리에서 굳은 표정을 유지했다.
“저기가 대전입니다. 여기서 잠시 옷매무새를 다듬죠.”
드디어 도착한 곳에는 대전으로 향하는 거대한 문이 있었다.
멸망한 고대 왕국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화려하고 깔끔한 모양새에 모두들 감탄했다.
“포상이 기대가 되는군. 흐흐.”
그래, 그 포상이 네 머리 위에 붙은 걸 떼버리려는 게 문제지.
키네인 용병단이 옷을 만지는 둥 마는 둥하며 낄낄대고 있을 때 메쥬르가 대전의 문 앞에 선 언데드에게 다가갔다.
“들어가도 되나?”
-우으으으아아아.
여전히 이해가 안 되는 둘의 대화를 보며 나는 이틈에 업적 보상을 까기로 했다.
시왕지옥을 빠져나온 업적인지 입장한 업적인지는 모르겠지만 잘 먹겠습니다.
띠링!
[특성 ‘영물 소통(레어)’을 획득하셨습니다.]
영물 소통?
[영물(靈物) 소통]
[영물과 대화를 할 여지가 생깁니다.]
아무래도 이번 특성은 꽝인 모양인데.
내가 고용한 플레이어블 소환술사인 드미트리에게 비슷한 상위호환 능력이 있는데 나로서는 그다지 필요가 없는 특성이었다.
게다가 대화가 가능한 것도 아니고 그냥 여지가 생긴다는 문구도 애매했다.
“모두 준비 되셨습니까?”
때마침 메쥬르가 우리의 주의를 끌었다.
우리는 전부 서로를 돌아보며 준비가 끝났음을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입장하겠습니다.”
긴장이 된다.
지금까지 한 번도 클리어 못한 보스.
그러나 이번에는 무조건 성공할 자신이 있었다.
이 정도의 전력을 가지고도 클리어 못하는 건 재앙급 시나리오의 보스 밖에 없다.
‘재앙급······. 아니겠지.’
대전의 문이 서서히 열리며 검붉은 색의 카펫이 눈에 띄었다. 대전의 내부는 다른 곳과 달리 어두침침한 색상과 분위기로 이루어져있었다.
무엇보다 밝혀놓은 등불이 푸른색이었기에 더욱 음침한 느낌을 주었다.
“쓰읍?”
무토가 차마 말은 하지 못하고 뭔가 이상하다는 신호를 보냈다.
그럼에도 돌아갈 수는 없었기에 모두가 대전의 안으로 들어가자······.
쿵!
우리가 들어왔던 문이 굉음을 일으키며 닫혔다.
“이쪽으로······.”
분위기가 점점 긴장으로 고조되는 사이, 메쥬르가 아무렇지도 않게 속삭이며 우리를 재촉했다.
그리고 마침내 저 앞에 왕좌에 앉은 거대한 형체가 보이기 시작했다.
“리치······.”
파이시가 떨리는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녀가 떠는 이유는 그가 리치라서가 아닌 주변을 잠식하는 엄청난 마력의 압박 때문이었다.
실제로 겪으니 진짜 괴물이 따로 없네.
일단 상대가 언데드든 뭐든 간에 우리는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렸다.
-환영한다, 여행자들이여.
마치 초월자의 그것처럼 말만으로 몸이 울렸다.
“레긴 전하, 제가 우선 소개를······.”
-되었다. 그것보다 먼저 묻고 싶은 게 있군.
메쥬르가 예법에 따라 진행하려고 했지만 리치, 레긴은 말을 끊어버렸다.
-그대들 중에 내 보물에 손 댄 자가 있을 것이다. 그 자만 제외하고 나머지는 살려주지. 그러니 너희들끼리 범인을 색출해라.
다른 사람들에겐 뜬금없게 느껴지는 말에 모두들 당황한 눈초리로 서로를 돌아보았다.
“보물?”
“뭔 소리야? 우리 포상 받으러 온 거 아니었어?”
웅성거리는 소음이 이어지자 대기 중의 마나가 우리를 짓눌렀다. 동시에 주변에서 흑빛의 아공간이 열리며 언데드가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범인을 내놓지 않으면 그대들은 여기서 모두 죽는다.
등장하는 언데드들을 보며 파이시가 경악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림 리퍼, 둠 브링어.”
데스나이트와 동급, 혹은 더 강력다고 전해지는 고대 언데드들의 등장이었다.
< 304화. 리치킹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