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3화. 복귀 >
웅성웅성웅성--
귀에 이명이 찢어질 듯 울려 퍼지고 주변의 웅성거림이 느껴졌다.
“깜짝 놀랐네. 피인가?”
이내 또렷이 들려오는 누군가의 말소리에 정신을 차리자 무토가 땅에 흐르고 있는 붉은 액체를 만져보는 게 보였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아드리아스!”
그때 누군가가 내 몸을 격하게 끌어안으며 죄어왔다.
녹빛깔의 머리카락.
비비안.
“비비안.”
“내가 지금 착각하는 게 아니지? 우리 분명 방금까지······.”
비비안이 그녀답지 않게 횡설수설하며 내 눈을 마주봤다.
그러나 나도 제정신이 아니었던 터라 대답을 할 겨를이 없었다.
‘헛것은 아니었나.’
무토의 모습을 보고 처음에 들었던 생각은 내가 환상을 보았던 건가였다.
상황을 보니 우리가 지옥에 간 뒤로 전혀 시간이 흐른 것 같지 않았다.
“너네 뭐하냐?”
무토가 나와 비비안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른 이들의 반응도 대동소이했다.
“친구! 친구! 역시 친구야. 난 당연히 해낼 줄 알았지.”
그때 루나가 쫄래쫄래 다가오며 옆짐을 지었다. 그 기고만장한 모습을 보자 괜히 헛웃음이 나왔다.
“그건 뭐야?”
루나가 옆짐을 풀며 내 손에 들린 무언가를 가리켰다.
“아.”
나도 들고 있다는 걸 깨닫지 못한 물건이었는데 그건 다름 아닌 오관이 건넨 검이었다.
이걸로 환상이나 꿈같은 게 아닌 진짜였다는 게 확실해졌다.
[공포검(工布劍)]
[마나전도율 : 222%]
[물리 공격을 마법 공격으로 치환]
‘뭐냐, 이 사기급 검은.’
자연스레 떠오른 아이템창을 보며 나는 그대로 굳었다.
우선 저 말도 안 되는 마나전도율.
그동안 게임에서조차 이런 수치를 지닌 검은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다.
굳이 따지자면 벤자민의 루벤스가 광폭화되었을 때가 비등하지 않을까.
웃긴 건 이 검은 그 상태가 항시 유지된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물리 공격을 마법 공격으로 치환은 검을 휘두르면 마법 데미지 판정이라는 소리네.’
물리 공격이 통하지 않는 일부 유령 계열 몬스터나 환상 계열 몬스터에게도 공격이 통한다는 의미였다.
오관이 가지고 있던 검인만큼 평범하지는 않을 거라 생각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일단, 일단은 돌아가죠.”
나는 애써 말을 돌리며 모두에게 말했다.
이미 주변은 말끔히 정리가 된 상태.
조금 전까지 겪었던 지옥이니 보살이니 하는 것들은 현실 앞에서 잠시 잊어줄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시스템.’
그동안 아무 의심도 없이 봐왔던 시스템이었지만 관세음보살은 분명 시스템을 보고 ‘그 자’라는 표현을 했다.
어쩌면 시스템도 초월자와 관계된 것이 아닐까.
‘애초에 의심 없이 받아들인 게 바보 같은 짓이었어.’
시스템과 같은 초자연적인 현상이라면 당연히 초월자와 연관이 되어있다고 생각했어야했다.
모든 일에는 원인과 이유가 있는 법인데 그걸 간과하고 있었다.
‘머리가 아프다.’
일단은, 메쥬르에게 가보자.
**
손해 보는 것은 참지 못하는 성격이었기에 2차 시련으로 얻은 돌의 분배는 확실히 했다.
그렇게 각자에게 다시 돌을 배분하자 드디어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시간이 됐다.
“샤히 샤마드는 그놈 빼고 다 죽은 건가?”
“한 번 수색을 다녀와야겠어. 또 이상한 짓을 할지도 모르니까 경계해둬야지.”
키네인 용병단의 말소리를 들으며 건물 벽에 기대고 주저앉았다.
그런 내 옆으로 비비안과 루나가 쪼르르 다가왔다.
“아드리아스, 괜찮아?”
“예, 괜찮습니다. 그냥 생각할 게 많아져서 피곤하네요.”
그래도 내 예상보다 빨리 지옥을 빠져나왔기에 다행이었다.
사실 관세음보살을 만나서 치러야했던 자격 증명도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 일인지 몰랐는데 시스템 덕분에 무사히 탈출이 가능했다.
“하아.”
시스템이라······.
“친구, 나 이거 좀 봐도 돼?”
루나가 꼼지락거리며 오관이 준 공포검을 가리켰다. 난 오히려 그녀가 봐주었으면 했기에 냉큼 검을 건넸다.
“이 검을 준 사람이 루나의 조상입니다.”
“응?”
너무 갑작스러운 이야기였는지 루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검을 받아들었다.
그렇게 루나가 잠시 공포검을 살피는 사이 나는 슬쩍 내 상태창을 열어보았다.
띠링! 띠링! 띠링! 띠링!······.
무수히 많은 알림음이 동시에 터져 나오고 이내 메시지가 하나 떠올랐다.
[수신 제한지역으로 인해 확인하지 못한 중요 알림이 5건 있습니다.]
태연하게 나오는 시스템창이 얄미웠다.
쌍방향 소통이 아닌 일방적인 고지.
초월자와 시스템이 연관되어있다는 내 짐작이 맞을지 궁금했다.
띠링!
[‘업적 : 시왕지옥(十王地獄)’을 달성했습니다.]
업적이라니 참······.
내게 이득인 부분이라 당연히 좋았지만 지옥에서 사용도 되지 않았던 시스템 주제에 업적은 또 만들어놓은 모양이다.
아니면 내가 시왕지옥을 가게 되니 급하게 만든 건가?
‘별 의심을 다 하게 되네.’
일단 자연스레 업적은 넘겼다.
랜덤 특성은 나중에 까봐야지.
띠링!
[영혼의 마나를 각성하셨습니다.]
[마나 효율이 100%증가합니다.]
미쳤구나.
안 그래도 마나통만 따지면 세계관 최강급인 내가 효율까지 좋아졌네.
띠링!
다시 들려오는 알림음이 대단하다고 느껴졌다.
아직도 3개나 더 남았지?
[격이 상승했습니다.]
끝?
격이 상승했다는 문구가 끝이었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무슨 효과를 지녔는지 아무것도 뜨지 않았다.
띠링!
[??의 날개가 성장 조건을 충족했습니다.]
[성장이 자동적으로 시행됩니다.]
[성장이 완료되어 한 쌍이 되었습니다.]
[여전히 성장의 여지가 남았습니다.]
날개가 성장했다는 건 좋은 정보였다.
여전히 물음표 부분이 의문이었지만 이제 두개가 된 날개는 내게 더 큰 힘이 되어줄 거다.
특히 최근 들어 초월자와 관련한 싸움이 잦다 보니 더욱 크게 느껴지는 힘이었다.
‘이제 마지막 알림.’
띠링!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진화가 가능한 개체가 탐색되었습니다.]
[아드리아스 크롬웰 : 검술(천재) 재능의 진화 가능성 30%]
[진화를 하시겠습니까?]
[아드리아스 크롬웰 : 마나(수재) 재능의 진화 가능성 100%]
[진화를 하시겠습니까?]
마지막은 반쯤은 예상했던 진화 문구였다.
그런데······.
‘천재보다 위가 있어?’
검술 재능의 진화 문구는 정말로 뜻밖이었다.
그리고 천재보다 위의 재능이 있다는 사실 또한 처음 알았다.
일단 나는 무지성으로 마나 재능의 진화를 눌러놓았다.
이제 진화의 후유증 따위는 아무렇지도 않게 느껴질 정도로 고통에 대한 내성을 쌓았기에 별 걱정도 없었다.
[남은 시간 : 330시간 21분 1초]
매번 시간으로 떠서 계산하기 귀찮았지만 대충 2주정도인 것 같았다.
그동안 마나를 사용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기에 마음 편히 기다리기로 했다.
“저······.”
진화까지 확인하고 나자 누군가가 우리를 향해 다가왔다.
“제 대신에도 고생하셨다는 걸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아가타가 내 앞에서 허리를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우연히 겹쳤을 뿐입니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던 거나 마찬가지이니 괜찮아요.”
“이미 들으셨는지 모르겠지만 저희는 핏빛 공간에서 아드리아스 님의 모습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뭐야, 보고 있었던 거야?
“그 모습을 보고 제가 그런 시련들을 겪었을 거라 생각하니 도저히 감사를 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다 봤던 거군요.”
내가 시선을 비비안에게 돌리자 비비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아가타.”
“네, 말씀하세요.”
“그렇다면 제 편이 되어주실 생각은 없습니까?”
나는 은근슬쩍 직구를 날려봤다.
판단하기에 따라서 다르게 해석할 수 있는 제안.
아가타는 내 말을 듣고 잠시 멍하니 있다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전 아드리아스 님의 편입니다. 이미 고용된 몸이기도 하고요.”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아가타.”
“네.”
과연 내 말을 어떤 의미로 받아들였는지 몰라도 항상 경계는 늦추지 않을 거다.
단지 플레이어블인 이상 포기하지 않았을 뿐.
“조상님의 검!”
돌연 루나가 공포검을 머리 위로 들어 올리며 소리쳤다.
돌발적인 행동으로 모두의 시선을 집중시킨 루나는 나를 향해 말했다.
“친구, 이거 나 줘!”
“어어······.”
지금까지 값비싼 물건에는 꽂힌 적이 없어서 물욕이 없어보였던 루나였는데 처음으로 곤란한 부탁을 받아버렸다.
공포검의 스펙은 사실상 종결급 네임드템.
그런 아이템을 검을 사용하지도 못하는 루나에게 준다는 것은 너무나 아까운 일이었다.
“루나, 그 검을 사용할 수 있겠습니까?”
“응!”
자신있게 대답하는 루나를 보며 곤란함이 더욱 커졌다.
완전 꽂힌 모양인데.
사실 공포검은 내가 사용하거나 비비안에게 주려고 했다.
비비안도 나쁘지 않은 검이 있지만 공포검이 훨씬 좋았기에 당연한 생각이었다.
“주자.”
“예?”
그때 비비안이 생각지도 못한 말을 했다.
“루나는 바보가 아니야. 다 생각이 있으니까 달라고 했겠지.”
그건······맞는 말이다.
루나가 천진난만한 행동을 하기는 해도 베리얼의 기록을 갈아치운 비공식 최연소 워록이었다.
비록 이브 밀레니엄의 힘이 있었다지만 워록은 절대 바보가 될 수 없는 영역의 경지였다.
‘그래도······.’
마법 도구도 아닌 검이었다.
그것도 평범한 검이 아닌 종결급 검.
하지만 나는 쿨하게 말했다.
“알겠습니다. 루나의 조상님도 어쩌면 그걸 원하고 제게 준 걸지도 모르겠군요.”
어차피 내게는 갈락슈르가 있었다.
마나전도율로 보면 공포검보다 많이 딸리지만 온갖 옵션이 붙어 있고 아직 2차 봉인도 남아있는 상황.
또 루나가 저 검으로 나름 할 수 있는 게 있을 지도 몰랐다.
“고마워. 히히.”
루나가 검을 다시 머리 위로 들며 감사를 표했다.
그래, 네가 행복하다면 그걸로 됐다.
“아주 웃기고 있네. 딱 봐도 명검으로 보이는데 그걸 마법사가 가진다고?”
그때 무토가 우리를 향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차라리 나한테 팔아라. 얼마면 되나? 돌조각으로 원하면 돌조각으로 주지.”
“죄송하지만 이미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애초에 제가 사용했으면 사용했지, 팔 생각은 없었어요.”
“쯧, 낭비가 심하군. 그렇다면 루나 펜드래곤에게 돌조각이라도 받아라. 그걸 그냥 주겠다고?”
“루나는 제 가족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가족에게 돈을 받을 수는 없죠.”
내 말에 무토가 기가 찬다는 표정을 지었다.
“제국의 백작이 루나 펜드래곤과 그 정도의 사이일 줄은 몰랐군. 자네, 감당 가능해?”
“알아서 눈 감아 주시리라 믿습니다.”
무토가 말은 저리 했지만 그가 용병왕이라는 칭호를 얻은 것에는 무거운 입도 한몫했다.
용병의 특성상 비밀스러운 일이나 어둡고 더러운 일도 해야 할 때가 많았는데 그는 단 한 번도 의뢰자나 의뢰에 대한 내용을 발설한 적이 없었다.
“어떻게 인연이 된 건지는 몰라도 자네는 매번 놀라움의 연속이야. 아드리아스, 만약 이번 원정이 성공적으로 해결되면 자네와는 자주 볼 것 같아.”
무토는 내가 흑마법사와 어울린다는 사실이 오히려 호감으로 느껴진 모양이었다.
비밀을 공유할수록 관계가 단단해지긴 하지.
일방적으로 알려진 거지만······.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그때 메쥬르가 등장했다.
그는 우리가 처음에 도착했을 때 보이지도 않다가 나중에서야 나타나 잠시 기다리라는 말과 함께 사라졌었다.
“오, 이제야 물건들을 볼 수 있는 건가?”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 전에 한 가지 소식을 먼저 여러분께 전달하려고 합니다.”
“소식?”
“그렇습니다. 무려 우리 위대하신 전하께서 여러분들을 뵙고 싶다는 전언이 도착했습니다.”
시체들의 왕국의 국왕.
히든 보스이자 강력한 네크로맨서가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했다.
< 303화. 복귀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