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5화. 마력 결투 그리고 조그만 일탈 >
이제는 고문서로 밖에 남아있지 않은 둠 브링어의 경우 네크로맨서가 아니면 알아보지 못하는 언데드였다.
반대로 그림 리퍼는 현재에도 여전히 존재했지만 데스나이트를 만들 재료로 그림리퍼를 만든다는 것은 사치에 가깝기에 보기 힘든 종류지.
“전투 준비!”
키네인 용병단은 베테랑들답게 곧바로 경계 자세를 취했다.
하지만 그들의 표정이 잔뜩 굳은 게 여실히 느껴져왔다.
“제기랄······.”
“갑자기 이게 뭔 날벼락이냐.”
그도 그럴 것이 상대는 리치.
리치의 악명은 너무도 널리 알려졌고 강한 개체는 개인의 힘으로 중소왕국조차 넘볼 수 있다는 괴물이었다.
-그냥 죽고 싶다는 건가.
“우린 네가 뭔 소리하는지 몰라. 애초에 포상을 받으러 온 거지 드잡이질을 하러 온 게 아니란 말이다.”
무토가 소리치다가 문득 무언가를 떠올린 듯 말했다.
“우리랑 같이 하지 않는 패거리가 하나 더 있다. 그 중 한 녀석이 이상한 유물로 보이는 상자를 들고 있더군. 네가 말하는 보물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녀석들이 건드린 거 아니야?”
우우웅---
대답대신 주변이 울리며 또다른 언데드들이 차례로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주변을 장악한 마나에 더불어 강력한 언데드들이 공간에 가득 차기 시작하자 분위기가 어두워져만 갔다.
“정말 이렇게 나올 거냐?”
-탈리스만은 소멸했다. 어차피 범인을 죽일 생각이었으니 귀찮게 캐묻지 않고 다 죽여도 되겠지.
그 말이 결정적이었다.
콰아아앙--------!
선공은 의외로 가만히 있던 라고로부터 시작됐다. 그는 곧바로 자신의 근처에 있던 언데드를 향해 돌진했다.
라고는 극한의 신체 개조 마법을 통해 자신의 몸을 키메라로 만든 워록이었다.
‘저 마법을 완성하기 위해 수많은 실험체가 희생됐다지.’
비인간적인 마법이었지만 당장은 우리 편이라고 생각되니 든든하군.
그 악명만큼이나 위력은 보장이 되었으니.
“그어어어!”
괴물과 같은 외형으로 변한 라고가 리치킹이 소환한 데스나이트 한 구와 맞붙자 주변은 순식간에 전장으로 변했다.
콰가가각!
“3인 1조! 혼자 감당할 수 없다! 나머지는 다른 사람들에게 맡기고 무조건 3인 1조로 하나만 노려!”
곧 파이시의 언데드도 소환되고 우리 모두에게 루나의 강림 버프가 일일이 새겨졌다.
콰앙!
“아드리아스!”
비비안이 돌진해온 본 골렘을 막아내며 외쳤다.
“전 리치를 맡겠습니다. 다른 언데드들을 부탁합니다.”
나는 그대로 비비안과 본 골렘을 일별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내가 노리는 건 다름 아닌 리치킹.
메쥬르를 통해 구입한 주문서를 곧바로 쓸 시간이 왔다.
-가소롭구나.
본인을 노린다는 걸 눈치 챈 녀석이 마치 인간이 웃는 듯한 제스처를 취하며 들고 있던 왕홀(王笏)을 휘둘렀다.
순식간에 바닥에서는 가시가 튀어나오고 천장에서는 번개가 내리쳤다.
스릉--
서걱!
꽤 고위 마법이었는지 강한 반발이 느껴졌지만 결국 갈락슈르로 벨 수 있었다.
우우웅--
예상했던 대로 새로운 언데드가 등장했다.
리치킹, 레긴의 호위병들.
-불경한 녀석.
거대한 대검을 든 검은 기사.
둠 브링어.
-샤아아.
검은 그림자 형체의 언데드.
다크 위스퍼.
레긴이 보유한 가장 강한 개체들이었다.
“이타야! 구뉴! 마탐!”
나는 곧바로 북부인들을 불렀다.
이 녀석들이 나올 줄 알고 북부인들을 고용한 거였지.
내 외침에 뒤에서 몰려온 왕궁 기사단 언데드들과 싸우던 북부인들이 다가왔다.
“엄호를 부탁드립니다. 저와 리치에게 아무도 다가가지 못하게 해주세요.”
곧이어 이어진 내 말에 북부인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새로 소환된 둠 브링어와 다크 위스퍼를 막았다.
-필멸자 따위가 나를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그 모습을 본 리치킹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웅----!
공기가 무거워졌다.
그저 분위기 따위가 아니라 실제로 중력에 영향을 끼친 듯 몸도 무거워졌다.
위이이잉---!
리치킹이 든 왕홀이 빛을 발했다.
-불멸자의 마법은 그대들과 같은 필멸자가 감당할 수 없다!
쿠우우웅-----------!
적과 아군 가릴 것 없이 모두가 강력한 중력 마법에 걸려들었다.
상대적으로 약했던 키네인 용병단원들이 그 틈에 목숨을 내어주고 말았다.
퍼억-!
서겅!
“이, 괴물 같은······.”
“말도 안 되는 마력······!”
오러 마스터에게도 영향을 끼칠 정도의 대단위 마법.
무토가 죽어나간 수하들의 시신을 보며 이를 갈았고, 파이시는 경악한 음성으로 몸을 떨었다.
-감히 짐의 옥체를 노리다니. 넌 특히나 고통스럽게 죽여주마.
리치킹의 왕홀이 나를 가리켰다.
나는 중력 마법에 의해 무릎을 꿇은 채 말없이 품에 손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주문을 발동했다.
[필 무버의 주문서 발동]
일단 베이스를 깔아두고,
찌이익-
[마력 결투의 주문서 발동]
[대상 : 아드리아스 크롬웰 vs 메쉬오 플라그람 레긴 후닐케스 2세]
[상대가 마력으로 저항합니다.]
지지지직-----!
나와 리치킹 사이에서 불똥이 튀며 주문서가 취소되려고 했다.
-이딴 하찮은 주문서로 짐을 어떻게 하려고 했던 것이냐? 이제 보니 마력 결투 주문서구나. 하하하!
웃음소리를 직접 소리 낸 리치킹은 이내 결투를 받아들였다.
[결투 성립!]
-감히 짐을 상대로 마력 결투라······. 네놈이 미쳤구나. 하하하.
다행이다.
취소가 될 수 있다는 건 예상하지 못했기에 하마터면 계획이 어긋날 뻔했다.
“그거 알아?”
-음?
“네 탈리스만 맛있더라.”
중력 마법이 풀린 내가 일어서며 웃어줬다.
“네크로맨서의 돌이라지?”
-······.
차마 말도 꺼내지 못하는 리치킹을 보며 나는 마력을 밀어 넣기 시작했다.
“네가 만든 탈리스만 힘 좀 맛봐봐라. 나만 알고 있기 아쉽네. 끝내주거든.”
-네놈이 감히!
괴성에 가까운 소리를 지르며 리치킹이 분노를 토해냈다.
곧이어 그의 마력도 밀려들어오며 본격적인 마력 결투가 진행되었다.
‘우리 쪽이 밀리면 내가 위험하다.’
이제 나와 리치킹은 마력 결투가 끝나기 전까지 다른 행동을 할 수 없었다.
만약 이 상태에서 제 3자가 개입하면 그대로 죽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슬쩍 곁눈질하자 전황은 팽팽했다.
라고가 미친 듯이 날뛰고 파이시의 언데드가 어느 정도 숫자를 맞춰준 덕분에 비등해보였지만 역시나 대전으로 몰려온 언데드의 숫자가 너무 많았다.
-널 갈아 마셔버리겠다!
리치킹은 여전히 분노를 표출하며 마력을 뿜어댔지만 나도 한 마력하거든.
결국 결투도 길어진 기미가 보였다.
-······어째서?
눈에 뵈는 게 없어보였던 리치킹도 곧 의문을 느끼고 중얼거렸다.
“내가 말했잖아. 탈리스만 맛 좀 봐보라고.”
-탈리스만이 대단한 물건임은 맞지만 불완전한 상태였다. 아니, 완전한 물건을 네 녀석이 흡수했다고 해도 짐과의 마력 결투를 버틴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리치킹이 냉정을 되찾아갔다.
-애초에 의문이군. 어떻게 필멸자의 몸으로 탈리스만을 품을 수 있었지? 짐이 리치가 된 이유도 필멸자의 몸으로 감당할 수 없었기에 행한 선택이었다.
대답해줄 생각은 없었다.
그것보다 리치킹의 마력이 내 예상을 훨씬 웃돌았다.
‘이거 조금 위험하겠는데.’
당연히 이길 거라 생각했지만 오히려 내가 조금씩 밀리는 상황.
뒤에서 싸우고 있는 동료들이 이기지 못한다면 위험할 수도 있었다.
-흐흐. 느껴지나 보군. 아무리 네가 필멸자치고 말도 안 되는 마력을 보유했어도 짐은 인간이기조차 포기한 존재. 그런 짐을 마력으로 이길 수 있을 거라 생각했나?
기고만장하군.
하지만 내겐 아직 비장의 수가 남아있었다.
‘정 안 되면 특수 기술을······.’
움직일 수는 없지만 나태나 탐욕, 분노를 사용함에는 지장이 없었다.
분노는 육체능력이니 제외하고 탐욕이나 나태 둘 중 하나만 사용해도 충분히 판을 엎을 수 있겠지.
씨익.
내가 흔들리지 않고 오히려 웃자 리치킹은 속임수라 생각했는지 나를 나무랐다.
-필멸자의 몸으로 여기까지 버틴 것도 용하다. 네놈은 내가 반드시 실험용으로 써주마. 탈리스만의 기운도 뽑아낼 겸 말이지.
갑자기 리치킹의 마력이 전보다 세졌다.
뜬금없는 변화에 리치킹의 주변을 확인해보자 검은 형태의 마력이 상대에게 계속 흘러들어가는 게 눈에 띄었다.
“생명 흡수?”
-리치의 특권이지.
뒤에서 싸우고 전투불능이 된 언데드들이 리치킹에게 힘이 되어주고 있었다.
안 그래도 우리 쪽이 밀리고 있었는데 이러면 완전 나가리였다.
“크억!”
기척을 느껴보니 다구리에 장사는 없다고 키네인 용병단이 전멸했다.
무토만 살아남은 듯했는데 기척으로 느껴지는 전황이 내 예상보다 힘겨워보였다.
[특수 기술 ‘나태’를 사용하시겠습니까?]
탑에서 얻은 보상으로 부작용이 줄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치명적이었다.
하지만 더 이상 아낄 수는 없지.
굳이 내 상황 때문이 아니라 비비안이나 루나를 살리기 위해서라도 사용해야했다.
[특수 기술 ‘나태’를 사용합니다.]
왕관을 소환할 수 있었으면 탐욕을 사용했을 텐데······.
“하아.”
모든 게 귀찮아졌다.
**
꿈틀!
사방이 암흑인 공간에서 등을 돌린 채 누워있던 누군가가 움직였다.
“음?”
그 존재는 이내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주변을 살폈다.
“없다?”
항상 자신을 옥죄고 있던 존재의 부재를 느끼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신이 이곳에 온 이후 이런 일은 한, 두 번 밖에 없었기에 기회라 생각한 남자는 슬쩍 미소 지었다.
“자, 나들이를 가볼까.”
주인이 없는 틈을 타 이곳저곳을 살펴볼 생각에 신이 난 남자가 중얼거리자 어디선가 갑자기 호통이 들려왔다.
크라하!
그리고 그 소리를 들은 남자, 하룬겔은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또 시작이네.”
“이놈! 위대한 존재께서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무슨 짓을 하려는 것이냐!”
알-구르드의 외침에 하룬겔은 시끄럽다는 듯 고막을 막으며 중얼거렸다.
“그냥 마실 좀 나가려고 그런다. 너도 같이 가련?”
“으, 음?”
갑작스런 제안에 알-구르드가 혹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고개를 저으며 이내 소리쳤다.
“네놈 따위가 건네는 현혹에 이 대전사 알-구르드가 넘어갈 거라 생각하느냐!”
“너, 계속 이런 곳에만 있다 보니까 점점 어눌해지고 멍청해지는 것 같아. 너도 느끼고 있지 않아?”
“무, 무슨 그런 명예롭지 못한 망발을!”
말을 더듬는 알-구르드의 반응에서 이미 낌새를 느낀 하룬겔이 다시 한 번 미끼를 던졌다.
“잠깐이야, 잠깐. 그동안 아드리아스, 이 개새끼가 널 불러주지도 않았는데 바람 쐬는 것 정도는 괜찮지 않냐?”
“그는 위대한 전사이자 역사를 개변할 자. 그런 욕을 붙일 인물이 아니다.”
“하여간 지를 죽인 놈이 뭐가 좋다고 그렇게 떠받드는 지. 그래서 갈 거야, 말 거야?”
“잠깐이라면······.”
결국 유혹을 참지 못한 알-구르드가 중얼거리자 하룬겔이 박수를 쳤다.
짝!
“좋아! 그럼 잠깐 바람만 좀 쐬자고!”
하룬겔이 삼안(三眼)을 개안했다.
이 공간의 주인이 잠시 자리를 비운 이상 능력의 사용도 자유로웠다.
“음?”
세 번째 눈으로 바깥의 상황을 살핀 하룬겔이 슬쩍 미소 지었다.
‘이거 어쩌면······.’
그의 시야에 강력한 리치킹의 모습이 비쳤다.
< 305화. 마력 결투 그리고 조그만 일탈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