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2화. 플레이어 >
“천수관음, 네가 드디어 미쳤구나.”
염라가 경악한 표정을 지으며 허공 어딘가를 응시했다. 그리고 다른 대왕들의 반응 또한 대부분 비슷했다.
“관음보살께서······.”
“곤란, 곤란, 곤란!”
말 한마디 했다고 너무 호들갑을 떠는 것 같았지만 저런 반응을 보이는 이유가 있겠지.
“말씀을 많이 하시는 게 곤란하신 거면 딱 하나만 말하겠습니다.”
대왕들이 그러든 말든 나는 입을 열어 요구사항을 말했다.
“당장 여기서 꺼내달라는 건 아니지만 거짓된 의도로 들어온 만큼 한 가지만 부탁하겠습니다. 일곱 번째 지옥까지만 통과하면 이 시험들을 끝내는 걸로 약조해주십시오.”
[“불가하다. 그것은 본인의 의지로도 어찌할 수 없음이야.”]
“그럼 해줄 수 있는 게 뭡니까? 뭐라도 제게 이득이 있어야 염라를 따르지 않을 것 아닙니까.”
내 말에 염라가 허탈하게 웃으며 나를 바라봤고 오관은 가려진 눈으로 내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불경!”
오도전륜이 뭉글거리며 유일하게 반응했다.
녀석은 마치 내 입을 막으려는 듯 몸집을 불리며 내게 다가왔다.
“넌 가만있어.”
염라가 불꽃을 더 크게 키우며 오도전륜을 압박했다. 그러자 오도전륜은 내게 뻗치던 손길을 되돌릴 수밖에 없었다.
염라의 도움 덕분에 나는 태연하게 내 할 말을 이어서 했다.
“보살님께서 부름에 응하신 시점부터 이미 이 상황은 제게 유리해졌습니다. 무슨 사정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애초에 저는 산 자. 이곳에 올 이유 따위는 없었을 겁니다.”
[“연자여, 그 이유가 곧 인연이다. 인연이자 곧 필연이지. 연자는 이곳에 올 수밖에 없었다.”]
“제가 염라를 따라가는 것도 필연입니까?”
[“······.”]
“제게 뭘 바라는지 모르겠지만 전 이런 곳에서 시간을 썩힐 수 없습니다. 정 내키지 않는다면 차라리 염라를 따라가는 게 낫다고 생각중이죠. 그러니 저를 설득해보십시오.”
관세음보살은 다시 침묵에 빠졌다.
그 사이 오도전륜은 마치 고장 난 것처럼 같은 소리만 내뱉어댔다.
“불경! 불경! 불경!”
아무래도 기계가 아닌가 싶을 정도의 반응이었다.
‘기계?’
혹시 이 지옥에서 부처나 보살들에 의해 만들어진 존재인가?
아무튼 오도전륜이 망가진 것처럼 말해도 여전히 염라에게 묶여있었다.
그렇게 관세음보살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자 지금까지 조용히 있던 오관이 내 곁에 다가와 입을 열었다.
“그대는 정말 불경하군. 한낱 인간 따위가 어찌 그리 겁이 없지?”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군요. 오히려 겁이 많기 때문에 발악하는 겁니다.”
난 소중한 사람들을 잃을 수 없었다.
내 자신이 망가지는 한이 있더라도 그것만은 용납 못한다.
어떻게 얻은 가족들인데 잃을 수 있겠나.
그리고 그런 가족들을 잃지 않으려면 난 여기 처박혀있을 수 없었다.
“전 반드시 해야 할 일이 바깥에 남아있습니다. 적어도 그 일을 해결하기 전까지는 어딘가에 메일 수 없어요.”
“반드시 해야 할 일······.”
오관이 중얼거리며 안대를 벗었다.
그러자 감춰져있던 그녀의 눈이 드러났다.
“어?”
나도 모르게 놀란 음성이 튀어나왔다.
그도 그럴 게 그녀의 눈은 굉장히 특이하면서도 익숙한 눈이었으니까.
“그대 영혼은, 굉장히 강렬하군.”
오관이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나 여전히 내가 반응하지 않고 그녀의 눈을 보자 그 시선이 익숙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내 눈이 신기한가?”
“아닙니다.”
“신기하지 않으면 왜 그리 바라보지?”
왜냐하면 루나의 눈과 똑같은 오팔색의 눈이었으니까.
하얗게 바랜 그녀의 머리색도 이제 보니 바랜 것이 아니라 원래 백발이었던 모양이다.
“오관, 당신과 같은 눈을 한 사람을 알고 있습니다.”
“같은 눈?”
“그 눈은 분명 영혼을 볼 수 있겠지요.”
“내 말로 넘겨짚은 듯하지만 그런 수작에는 넘어가지 않는다.”
“제가 왜 오관에게 수작을 부립니까.”
나는 어딘가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루나를 떠올리며 말했다.
“제가 알기로 당신의 혈족은 신의 사제들이라고 들었습니다. 설마 이런 곳에서 지옥의 대왕을 하고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군요.”
“······정말로 알고 있는 건가.”
크리브마허를 얻었던 ‘반복되는 악몽’에서 알게 된 정보.
고대의 대륙에도 신이라는 이름의 초월자들이 실존했으며 그를 섬기는 사제들의 혈통이 따로 있었다.
그리고 루나와 같은 은빛이 도는 백발과 오팔빛의 눈을 한 자들은 닉스의 사제들이라고 들었지.
‘닉스라면 불교랑 전혀 연관이 없는 거 아니야?’
정확히 어디서 나온 이름인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동양권의 문화는 아니었다.
그런데 왜 지금의 오관은 닉스의 사제인 거지?
생각해보면 예전에 경험했던 레테, 기억 끝에서 망각하는 자나 지금 겪는 지옥도 모두 지구에 있던 신화와 종교였다.
이 세상은 도대체 어떻게 돼먹은 거지?
왜 지구의 신화나 종교가 튀어나오는 거야.
여긴 정말로 실존하는 세상이 맞는······.
[“연자여.”]
내 생각을 끊고 의지가 전해졌다.
[“혼란스러운 표정이구나.”]
“결단은 내리셨습니까?”
궁금증은 접어두고 협상의 태도를 취했다.
그러자 관세음보살이 허허롭게 웃으며 말했다.
[“잠시 여러 이들과 대화를 나누고 돌아왔다. 그 결과 자네에게 한 가지 선택지를 더 주기로 했지.”]
“선택지?”
[“연자는 여기서 흑암지옥으로 직행하거나 염라를 따라가도 된다. 어떤 선택을 하던 연자의 자유지. 허나 우리는 여기서 하나의 선택지를 더 제시하겠다.”]
가만히 듣고 있자 오도전륜과 염라가 끼어드는 게 들려왔다.
“현혹되지 마라! 보살들이 생전에나 공덕을 쌓았지 위로 올라가고 나서는 그저 텅 빈 것들이다!”
“불경! 불경! 아드리아스, 흑암지옥, 직행.”
열렬한 러브콜이군.
이래서 인기가 많으면 피곤해진다고 하는 모양이었다.
“그 선택지가 그래서 뭡니까?”
[“올라오라.”]
“예?”
올라오라니? 어디로?
[“우리가 있는 곳으로 와서 직접 자격을 증명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주는 마지막 선택지다.”]
관세음보살이 있는 곳?
‘천상?’
스케일이 내 이해범주를 벗어났다.
초월자들을 직접 마주하라는 말에 숨이 턱 막혔다.
피시이익-
동시에 오도전륜과 염라의 싸움도 멈췄다.
“뭐, 뭐라고? 천수관음, 네놈이 정말로 미쳤구나!”
“비상! 비상!”
관세음보살의 파격적이다 못해 비상식적인 제안은 나를 비롯한 세 명의 대왕을 모두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결정할 시간을 잠시 주겠다.”]
이내 관세음보살의 기운이 흐려지고 정적이 우리를 감쌌다.
“나의 후손을 알고 있다고 했지.”
“예, 그 아이도 이곳에 함께 들어왔었습니다.”
“같이 왔다고?”
내 말에 오관의 눈빛이 흔들렸다.
내가 고개를 끄덕여주자 그녀는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그대는 그 아이의 시험까지 대신 치르고 있는 셈이군. 그렇지?”
“예.”
“하아, 원래는 개입하지 않으려했건만······.”
오관은 나직이 중얼거리며 허리춤에 묶인 검집을 풀었다.
“그대를 도와야할 이유가 생겼군.”
그러더니 내게 검을 건넸다.
흑백 태극 문양이 새겨진 그녀의 검은 한눈에 봐도 평범한 검이 아니었다.
“받아라.”
“주시는 겁니까?”
“그래. 그대가 무사히 나가야할 이유가 내게도 생겼으니까. 그리고 한 가지 더 충고하자면 부처, 아니 관세음보살의 말을 따르거라.”
그때 오관의 말을 함께 듣고 있던 염라가 툭하고 끼어들었다.
“천상에 올라오겠다고? 감당하겠냐?”
“염라, 당신을 따라 가는 것이나 흑암지옥에 가는 것보다는 빨리 벗어날 확률이 높겠죠.”
“고작 조금 더 빨리 벗어나겠다고 터무니없는 도전을 추천하겠다는 소리냐.”
의외로 염라는 전과 같이 나를 데려가려는 기색이 없었다. 그저 순수하게 호기심에 묻는 듯한 뉘앙스였다.
“기다리고 있는 자들이 있으니 당연한 추천이에요.”
“아드리아스 크롬웰, 네 생각은 어떻지?”
내 생각이 어떻냐고 물어도 솔직히 잘 모르겠다.
애초에 천상에 올라간다는 게 구체적으로 무슨 뜻인지 몰랐으니까.
단지 초월자들을 직접 마주할 수 있지 않을까 싶을 뿐.
‘존재 자체만으로도 압박감을 주는데 바로 앞에서 마주하면······.’
조금 힘들 것 같기는 했다.
게다가 내 예상이 맞다면 위에는 관세음보살 뿐만 아니라 다른 초월자들도 존재하는 것 같았다.
“오관이 말씀하신대로 저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 때문이라도 전 여기에 오래 있을 수 없어요.”
“소멸할 수도 있어.”
“다른 선택을 하면 이곳을 벗어나는 게 얼마나 오래 걸릴지 모른다고 느꼈습니다. 차라리 위험하더라도 빨리 끝내는 게 낫겠죠.”
“아드리아스 크롬웰, 천상에 올라간다고 빨리 끝난다는 보장이 어디 있어서 그리 자신만만하게 말하지?”
염라의 말도 그럴싸했다.
관세음보살은 내게 직접 자격을 증명하라고 했었는데 그 일이 얼마나 오래 걸리는 일인지 알 수 없었다.
“내가 장담하지. 금방 끝날 거다.”
그러나 오관이 고개를 흔들며 염라의 의혹을 지워냈다.
“나도 경험해본 일이니까.”
“하하, 그러고 보니 그랬군. 오관, 네가 자신 있게 추천한 이유가 있었어.”
염라가 웃으며 결국 인정했다.
[“결정할 시간이다.”]
마치 우리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는 듯 의지가 전해져왔다.
나는 오관이 건넨 검을 받아들고 말했다.
“우리 직접 보죠.”
[“올라오겠다는 말이구나. 알겠다.”]
도대체 내게서 뭘 원하는 걸까.
오관도 겪어봤다고 하니 그녀의 이야기를 더 듣고 싶었지만 이미 밝은 빛이 내려오고 있었다.
“히야, 보살들이 아주 작정을 했구만. 지금까지의 대화와 이 힘으로 도대체 얼마만큼의 공덕이 지워져버린 거냐.”
염라가 중얼거리더니 내게 손을 흔들었다.
“잘 가라.”
“의외로 순순히 보내주시네요.”
“저 놈들이 작정을 했는데 어쩔 수 없지. 넌 지금 무슨 일인지 잘 모르겠지만 난 알 수 있어. 이게 얼마나 무리해서 성사되는 일인지.”
염라가 웃으며 말했다.
그렇게 나는 오관과 염라의 배웅을 받으며 자연스레 빛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러자 마치 공간이동 마법진을 밟은 것처럼 시야가 반전 되었다.
후우웅---
천상, 과연 어떤 곳일까.
눈앞이 새하얘지고 주변도 새하얘졌다.
띠링!
‘이 소리는?’
갑자기 들려오는 익숙한 소리에 정신이 번쩍 뜨였다.
희미하게 울린 소리는 내가 잘못 들은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희미했지만 이내 다시 한 번 소리가 울렸다.
띠링!
시스템 알림음.
분명 지옥에서는 사용하지 못했던 것이 이곳에서 울리고 있었다.
‘이곳?’
잠시만.
난 지금 어디 있는 거지?
천상에 도착한 건가?
감각이 희미했다.
여전히 시야는 하얗게 물든 상태였는데 꽤 시간이 흘렀음에도 변한 것은 없었다.
띠링!
[@$&%*#^(@$&@^*-]
그때 새하얗던 시야에 한 줄기 문자가 보였다.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뭉개진 글자였지만 일단은 시스템창이 보인다는 게 중요했다.
[PLAYER, 김진환]
‘······뭐?’
뭐지?
너무나 오랜만에 보는 내 이름이 보였다.
[관리 영역을 벗어났습니다. PLAYER, 모든 것을 내려다보시는 지배자의 영역에 들어서고 있습니다.]
‘플레이어 모든 것을 내려다보시는 지배자?’
잠시만.
잠시만 기다려봐.
저게 뭔 소리지?
[PLAYER, 김진환과 PLAYER, 모든 것을 내려다보시는 지배자의 연결을 차단 및 강제 이행이 실시됩니다.]
시스템이 문구를 내비치고 있을 때 문득 누군가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연자여, 설마 그 자와도 연관이 되었던 건가.”
관세음보살이었다.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의 말소리가 들린 것만으로 속이 울렁거리며 머리가 텅 비워졌다.
“그렇군. 그래서 그랬던 거였어. 모든 것은 공(空)이요. 연자와 우리의 인연도 공이로구나.”
이게 대체······.
새하얀 빛이 희미해졌다.
강력한 힘이 나를 반대로 잡아끄는 것이 느껴졌다.
“그럼에도 아직 우리의 연은 끊이지 않았다. 도리어 이제부터 시작일지니, 비록 지금은 이렇게 헤어질 지라도 언젠가 다시 이어지리라.”
거대한 비밀을 마주했다고 느낀 순간 내 의식은 곤두박질쳤다.
< 302화. 플레이어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