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0화. 염라(閻羅) >
송제는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온갖 사술을 보아왔지만 말 한마디에 자신의 수하들을 모두 멈추게 만든 것은 아드리아스 크롬웰이 처음이었다.
아니, 강력한 기를 이용해 억지로 굴복시키는 것은 그도 가능했다.
그러나 아드리아스가 사용한 기술이 그러한 종류의 것이 아님을 알기에 송제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야말로 황제의 기술.’
이보다 더 제왕다운 기술이 있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감탄은 곧 인정으로 변했다.
서걱!
움직이지 못하는 자신의 수하들이 무참히 썰리는 것을 본 송제는 이내 손을 저었다.
“그만! 시험은 통과다!”
더 이상 볼 것도 없었다.
저 힘이 얼마나 지속되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어차피 시험을 주관하는 것은 송제 본인.
그러니 통과와 실패의 여부도 그의 마음대로 정할 수 있었다.
이런 그를 보고 지옥에서는 꽤 말이 많았지만 송제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런 자잘한 구설수보다는 눈앞에 선 아드리아스가 더 흥미로웠으니까.
‘처음에는 짐의 한파를 견뎌내는 걸 보며 놀랐지.’
송제가 내뿜는 한파는 다른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오로지 지옥에서만 느낄 수 없는 최악의 차가움이었다.
수하들을 쓰러트린 것보다 그 사실에 더욱 주목한 송제는 지금껏 자신의 한파를 견딘 자가 있었는지 떠올려보았다.
‘있긴 있군.’
염라.
그가 이곳을 처음 방문했을 때가 떠올랐다.
당당하게 제 발로 지옥에 걸어 들어와 모든 걸 깨부쉈던 자.
이전의 염라를 집어 삼키고 종의 초월을 이룬 자.
다섯 번째 지옥인 발설지옥(拔舌地獄)을 지금처럼 바꾼 것도 현 염라였다.
짝짝짝-
“수고했다.”
검을 갈무리하는 아드리아스를 보며 송제가 짧게 박수를 쳐줬다.
그런 그를 향해 아드리아스가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
“바로 다음으로 넘어가보겠습니다.”
“벌써 가려는 게냐? 지쳤을 터인데?”
“육신이 없어서 지치지는 않는군요.”
아드리아스의 말에 송제가 눈썹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정신적인 피로가 극심할 터다. 또한 영혼이라고 안 지치는 건 아니야. 그대는 짐의 한파를 겪었다.”
송제가 대전 뒤편을 가리켰다.
“안쪽에 들어가면 편히 쉴 수 있는 공간이 있다. 비록 포만감을 채워주지는 못해도 온갖 맛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산해진미도 있지. 며칠만 쉬었다가 가는 게 좋을 거다.”
“전 괜찮습니다.”
“어허! 전하께서 친히 자비를 베푸시거늘 어째서 거절한단 말인가!”
구호영이 옆에서 소리치자 송제가 괜찮다는 듯 손을 저었다.
오히려 그는 지금 아드리아스의 고집에 의문을 느낄 따름이었다.
“하루나 이틀쯤 쉬었다가 간다고 하더라도 무슨 일이 생기지는 않는다. 어째서 그리 급하게 가려고 하는 게냐?”
“저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드리아스가 위쪽을 보며 말했다.
그 말에 송제는 감탄을 터트렸다.
“이제 보니 그대는 다른 이들의 역경까지 짊어진 모양이군. 하하! 알고 그런 것인가, 아니면 몰라도 무턱대고 짊어진 것인가?”
송제가 잠시 웃음을 터트리더니 돌연 싸늘하게 굳은 표정으로 충고했다.
“일곱 번째 지옥인 거해지옥(鋸骸地獄) 이후의 지옥들은 시험이 아니라 그저 고통이다. 시험 따위는 없고 도착한 이들에게 그저 고통만을 주기 위한 끔찍한 장소들이지.”
“그렇게 말씀하시는 걸 보니 여기와는 비교도 되지 않나보군요.”
“다시 말하지만 짐이 그대에게 행했던 것들은 시험이다. 그곳들은 시험을 위한 장소들이 아니야. 이건 큰 차이지.”
송제는 그리 말하며 허공에서 내려와 골치 아프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미 그대가 다른 이들의 업보마저 짊어지고 들어온 이상 피할 수는 없겠지. 그렇다면······.”
잠시 생각을 하던 송제는 구호영에게 시선을 돌렸다.
“호영, 지금 당장 태산에게 연락하게. 그를 짐이 직접 만나야겠네.”
“알겠습니다!”
일곱 번째 지옥의 대왕은 태산.
그리고 일곱 번째 지옥은 육도윤회를 결정하는 곳이었다.
여기서 수를 써보면 그 이후의 지옥으로 넘어가지 않아도 되었기에 송제는 자신의 감탄을 자아낸 아드리아스를 위해 힘을 써줄 생각이 들었다.
“저를 위해 움직이시는 겁니까?”
“그러하다.”
“감사합니다.”
“아니. 이건 짐이 그대에게 감사를 받을 일이 아니다. 짐은 그저 짐이 인정한 자가 망가지는 것을 보기 싫을 뿐.”
“······그 이후의 지옥들이 그 정도입니까?”
“짐이 장담하지. 아마 다른 지옥의 대왕들조차 제대로 견디지 못할 것이야. 짐도 솔직히 말하면 버틸 자신이 없다.”
대왕들조차 버티지 못할 거라는 말에 아드리아스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가 풀어졌다.
그리고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나중에 다시 뵐 수도 있겠군요.”
“거해지옥에서 먼저 기다리고 있으마.”
송제는 그 말을 끝으로 구호영이 사라진 곳을 향해 바삐 움직였다.
대전에 남게 된 아드리아스는 잠시 그 뒷모습을 보다 생불에게 말했다.
“출발하죠.”
“정말 쉬지 않으셔도 괜찮으십니까?”
“예, 괜찮습니다.”
아드리아스의 고집을 이미 조금 전의 대화로 느꼈던 터라 생불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앞장섰다.
동굴 밖으로 나가자 다시 쏟아지는 폭설과 바람에 시야가 좁아졌다.
“다음 지옥은 오관대왕(五官大王)께서 계시는 검수지옥(劍樹地獄)입니다!”
목소리조차 제대로 들리지 않는 상황에서 생불이 크게 소리쳤다.
아드리아스는 알아들었다는 듯 두어 번 고개를 주억이며 묵묵히 걸어 나갔다.
“도산지옥과 비슷하면서도 색다른 곳이죠! 아마 아드리아스 님의 능력을 발휘하기 제격인 곳일 겁니다!”
“생불, 이제 소리치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느새 눈발이 잦아들었다.
그들이 밟고 있는 땅도 어느새 푸릇푸릇한 풀들이 새하얀 눈 사이로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아하하, 제가 귀가 없다보니 바람이 그친 줄도 몰랐습니다.”
“제 말은 잘 들으시네요.”
“그럼요!”
맥락이 맞지 않는 생불의 말을 들으며 아드리아스가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앞에는 어느새 울창한 대나무 숲이 보였다.
“도착했군요. 이곳이 검수지옥입니다.”
“생불, 혹시나하고 물어보는 건데 이렇게 빨리 도착하는 게 생불 덕분입니까?”
“그럼요! 제가 괜히 안내자를 자처하는 건 아니죠.”
어쩐지 넓어 보이는 지형에 비해 지옥들을 터무니없이 빨리 오간다 싶었던 아드리아스였다.
생불의 능력 덕분임을 알게 되자 새삼 그의 되도 않는 말들과 배려 없는 말도 괜찮게 느껴졌다.
“음?”
그때 대나무 숲으로 먼저 발을 디디던 생불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멈췄다.
그리고는 다급히 아드리아스를 멈춰 세웠다.
“잠시만 가만히 계십시오.”
생불의 제지에 아드리아스는 영문을 알 수 없었지만 일단 멈췄다.
그리고 그가 경계하는 숲의 안쪽을 함께 유심히 지켜봤다.
“불?”
그것은 하얀 불이었다.
처음에는 잘못 본 줄 알았으나 이곳까지 느껴지는 열기로 단번에 짐작할 수 있었다.
“이런, 이런, 이런, 이런!”
생불이 뭔가 잘못됐다는 듯 크게 중얼거리며 아드리아스에게 손짓했다.
“왔던 길로 돌아가세요! 일단! 일단 돌아가세요!”
“하아, 눈치 빠른 녀석.”
그때 제 3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생불아, 왜 보자마자 도망칠 궁리부터 하냐. 우리 대화를 좀 나눠보자고.”
“염라!”
새하얀 불의 주인.
염라의 등장이었다.
**
시뻘건 피부와 비대칭으로 달린 외뿔.
머리카락 대신에 하얗게 타오르는 불길이 인상적이었다.
말 그대로 염라라는 이름값을 제대로 하고 있다고 해야 하나.
‘화신체.’
눈앞에 있는 염라는 다른 대왕들과 달랐다.
그는 초월자의 화신체였다.
화신체는 본신의 전력을 사용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느껴지는 기운은 지금껏 만난 세 대왕들보다 거대했다.
“네가 아드리아스 크롬웰이구나?”
염라가 나를 보며 미소 지었다.
나한테 용건이 있는 건가?
“저를 찾아오신 겁니까?”
“그래, 맞다.”
“아드리아스 님, 지금은 그와 대화를 나눠선 안 됩니다. 질서가 어긋나는 순간 인과율이 비틀어질 거예요.”
질서가 어긋난다는 소리는 염라가 원래 장소에 있지 않음을 의미하는 거겠지.
원래였으면 검수지옥의 다음 지옥에 있어야할 염라가 여기에 있는 게 문제인 모양이었다.
“생불, 헛소리하지 마라. 네 속셈을 모를 줄 아냐?”
그런데 염라는 뜻밖의 말을 했다.
마치 생불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식으로 말하는 염라를 보며 나는 조용히 입을 다물고 상황을 지켜보았다.
“넌 그저 내가 두려운 것이겠지. 네가 따르는 건 그 잘난 보살들이니까 말이야.”
흐흐하며 웃는 염라의 입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내 말이 틀렸냐?”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지만 제자리로 돌아가시는 게 이로울 겁니다. 당신의 말대로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보살이 분명히 계십니다.”
“내가 보살들을 두려워할 것 같냐?”
염라가 다시 한 번 씨익 웃어 보이며 생불을 위협했다.
확실히 생김새 때문에 그런지 위압감이 장난 아니었다.
“나를 이길 만한 보살은 몇 없다. 게다가 난 나보다 강한 놈들도 두렵지 않아. 내가 어떤 놈인지 잊었나, 생불?”
“······부처께서······.”
콰아아앙--------!
생불이 부처라는 말을 꺼낸 순간 엄청난 화력이 터지더니 그대로 눈앞에서 사라졌다.
뒤늦게 살펴보자 온몸이 기괴한 방향으로 꺾인 생불이 고랑을 만든 채 쓰러져있었다.
“내 앞에서 그 이름은 꺼내지 말라고 했지.”
정말로 열이 받은 듯한 염라의 모습은 악귀와도 같았다.
그 모습에서 나는 어렴풋하게 염라의 정체가 짐작이 되었다.
“야차?”
“야차? 날 보고 말하는 거냐?”
구겨진 표정의 염라가 그대로 내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키도 거의 4m 가까이 되어 보이는 놈이 그러니 압박감이 있군.
“이곳에 대해 잘 모르는 것 같으니 넘어가주지. 굳이 말해주자면 난 수라였다.”
“아수라?”
“흐흐, 그래.”
아무리 봐도 야차같이 생겼는데?
아수라는 대가리가 세 개에 팔도 여섯 개 아니었나?
내가 여전히 의문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자 염라가 웃었다.
“넌 내가 겁나지도 않는 모양이야.”
“예.”
“건방진데 그냥 죽여 버릴까?”
웃으며 말하고 있었지만 진한 살기가 느껴졌다.
그럼에도 나는 태연하게 선 채 그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애초에 자리까지 이탈해서 날 찾아온 이유가 있을 텐데 그냥 죽이지는 않겠지.
그리고 이미 탑에서 화신체를 쓰러트리고 최근에는 제파르의 화신이 된 호넨도 손쉽게 처리했기에 겁 대가리가 없었다.
‘마나를 사용할 수 있는 지금은 날개도 소환할 수 있다.’
물론 마나의 양이 적어서 얼마 사용하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잠깐 동안은 버틸 수 있을 거다.
그 잠깐이면 충분히 상황을 바꿀 수 있겠지.
“역시 예삿놈은 아니야. 기대대로군. 흐흐.”
염라는 오히려 그런 내 반응이 좋았는지 혼자 낄낄대며 내 앞에 가부좌를 틀며 앉았다.
앉았음에도 나와 키가 비슷한 그를 보며 나도 덩달아 자리를 깔고 앉았다.
“이야기나 들어보죠.”
“호오? 생불이 나와 대화하는 건 위험하다고 했음에도 듣지 않는 거냐?”
“그 생불이 지금 저 모양이니 저에게는 선택지가 없지 않습니까.”
내가 구겨진 생불을 턱짓하자 염라가 다시 미소 지었다.
아마 죽지는 않았겠지.
애초에 얼굴도 없는 달걀귀신이 죽기야하겠어.
“그리고 들어보니 이 지옥이란 곳도 파벌 싸움이 있는 것 같더군요. 양측의 의견을 모두 들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옥? 하하하! 지옥이라······.”
뭐가 웃겼던 거지?
그런 내 의문을 해결해주듯 염라가 곧바로 말했다.
“여긴 지옥이라는 별칭만 붙었을 뿐이지 진짜 지옥은 따로 있다. 웃기는 일이지. 그 진짜 지옥에 비하면 여긴 천상이야.”
“이쪽 세계는 잘 모르겠습니다.”
“내가 널 왜 찾아왔는지 알아?”
갑작스런 물음에 내가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습니다.”
“그 진짜 지옥으로 보내려고 온 거야.”
“예?”
무슨 소리를 하나 싶던 사이 염라의 거대한 손아귀가 내 머리를 잡으러 다가왔다.
< 300화. 염라(閻羅)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