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9화. 돌파구 >
송제가 내뿜는 추위는 동굴 바깥보다 더했다.
아니, 실제로 몸은 얼지 않았지만 정신적으로 느껴지는 추위가 극심했다.
‘별 특이한 능력이군.’
몸에 영향은 가지 않았기에 움직일 수는 있었으나 여태껏 경험해보지 못한 압도적인 추위는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게 했다.
후웅-!
그 사이에 다가온 언데드 하나가 내게 검을 휘두르고 나는 가까스로 피해내며 몸을 굴렀다.
“호오, 꽤 하는군.”
구호영의 말이 들려왔다.
그리고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다른 언데드들이 날 공격하기 시작했다.
“시험은 일주일, 그 일주일 안에 내 수하들을 전부 쓰러트려라. 일주일이 지나면 시험은 끝.”
송제가 외쳤다.
“그 안에 통과하지 못한다면 그대는 이 한빙지옥에서 7년이라는 세월 동안 고통을 받을 것이다. 부디 날 놀라게 해주었으면 좋겠군.”
“대, 대왕님?”
시험의 내용과 함께 구호영의 당황한 목소리가 전해져왔다.
안 그래도 머리가 지끈거리는데 빡세게 몰아붙이네.
쓰러트려야 하는 전제라면 이대로 피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언데드의 수는 444구.’
더럽게 많군.
순식간에 적의 수를 파악한 나는 우선 무기가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추위가 느껴지는 것과 별개로 내 몸은 이미 자연스레 행동하고 있었다.
후웅!
스윽-
언데드가 든 검조차 금빛으로 빛나고 있었는데 나는 곧바로 상대의 검을 뺏었다.
그 과정이 너무나 자연스러워 마치 짜고 친 듯 보일 정도.
“허어!”
잊을만하면 추임새를 넣어주는 구호영의 목소리를 들으며 검을 휘둘렀다.
도산지옥을 거치며 정제된 내 움직임은 그 어느 때보다 날카롭고 예리했다.
콰창!
검을 빼앗긴 것과 별개로 언데드들은 강했다.
종류를 보면 스켈레톤 나이트나 미라 같았는데 그 강함은 그 수준의 언데드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강했다.
물론 스켈레톤 나이트나 미라 계열 언데드도 강한 언데드이긴 했지만 데스나이트 같은 최상위 언데드에 비하면 딸리는 건 확실했다.
그러나 사용하는 검법과 움직임들을 보면 그런 최상위 언데드를 웃돌았다.
‘사용된 시신이 평범하지 않은 건가.’
카앙!
검과 검이 얽혀들자 추위가 더 강렬해졌다.
머리가 지끈거리고 온몸에 오한이 들었지만 몸을 멈출 수는 없었다.
마나만 사용할 수 있었다면 지금보다 훨씬 나았을 텐데······.
‘마나?’
순간 의문이 생겼다.
이곳에서 나만 마나를 사용하지 못하는 건가?
만약 이 지옥이라는 동네 자체에 마나가 없는 거라면 저 송제 대왕은 이 언데드들을 어떻게 부리는 거지?
애초에 마나라는 건 육체에 깃드는 건가?
카가가각!
당연한 이야기였다.
기사의 경우 단전이라 불리는 배꼽 아래 부위가 다치면 마나를 다루지 못하고 심장이 약한 자는 마법사가 되지 못한다.
결국 마나도 실존하는 에너지.
육체가 없으면 다루지 못한다.
하지만 여기 있는 자들도 결국 영혼들.
게다가 육체가 없는 벤시나 고스트도 마나를 다룬다.
‘방법을······.’
언데드들은 차륜전으로 나를 괴롭혔다.
마치 장난감처럼 갖고 놀 듯이 번갈아 가며 나를 상대했는데 한 번에 덤볐으면 애초에 버티지도 못했을 싸움이었다.
그러니 돌파구를 찾으려면 오직 지금만이 기회.
스르릉--!
“오오! 뛰어난 검술!”
구호영의 말이 뇌리에 꽂혔다.
‘검술, 검법, 동작?’
남궁일영이 말하기를 무림에는 내공심법(內功心法)이라는 마나를 강제로 저장하는 기술이 있다고 했다.
그에 반해 우리는 그저 육체를 수련하다가 자연스럽게 마나를 익히게 되는 경우.
이에 대해 물어보니 이렇게 수련만으로 마나를 깨닫고 쌓는 것을 무림에서는 동공(動功)이라고 한다 했다.
‘움직임으로서 마나를 깨우친다.’
남궁일영은 동공이 비효율의 극치라 칭했지만 우리로서는 그 방법 밖에 없었다.
꼬우면 심법을 알려 달라 했지만 무림에서의 심법이란 비전과 같은 기술이라 안 된다고 했었지.
그러니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건······.
후우웅-
검을 휘두른다.
그리고 느껴야했다.
처음 기사의 마나를 느꼈을 때와 같이, 다시 한 번 마나를 깨달아야했다.
초심으로 돌아가서 그때, 그 감각을 익힌다.
나라는 영혼의 그릇에 마나를 담아야했다.
“하아아.”
온몸이 부서질 정도로 엄청난 추위였지만 집중하기 시작하자 그도 이내 사라져갔다.
오로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나와 검, 그리고 내 상대뿐.
휘익-
슥--!
실력 있는 상대였기에 다행이었다.
덕분에 긴박해지는 상황 속에서도 집중력이 흩어지지 않았다.
“@^[email protected]#&*@!”
누군가가 또 옆에서 뭐라 하는 것 같았지만 들리지도 않았다.
주변이 하얗게 잊히고 있었다.
두근!
끝내는 상대도 잊고 검도 잊었다.
그렇게 내 존재조차 희미해지는 가운데······.
무아(無我).
|
|
|
|
|
|
|
|
|
“일#@&(*@!”
······.
“일어나거라!”
피시이이잉------!
송제의 목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동시에 내 검날은 나를 상대하던 언데드의 목을 베어 넘기고 있었다.
주변은 온통 상하가 분리된 언데드의 잔해들.
도대체 그 짧은 시간 동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오러?”
그리고 내 검에는 익숙한 흑빛의 오러가 넘실거리고 있었다.
“시험은 끝이다.”
송제의 말에 나는 다시 한 번 주변을 둘러봤다.
아직 쓰러지지 않은 언데드가 100구 정도가 남아있었다.
그러고 보니 어느새 추위도 사라졌네.
“통과입니까?”
“아니, 넌 통과하지 못했다.”
이건 또 뭔 소리냐.
내가 가만히 그를 보고 있자 저 옆에 있던 구호영이 입을 열었다.
“일주일이 지났는데 통과는 무슨 통과냐?”
“일주일?”
송제의 말도 그렇지만 구호영의 말은 더욱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런 내 기색을 눈치 챘는지 생불이 말해줬다.
“아드리아스 님, 벌써 일주일이 지났습니다.”
날 놀리는 건가 싶어서 다시 모두를 확인했지만 정말인 모양이었다.
정신을 놓고 싸운 건 알고 있는데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고?
“그렇게 시간이 흐른 줄 모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건 내 잘못이지 이들의 잘못이 아니었다.
난, 시험을 통과하지 못했다.
“실패했군요.”
조금 씁쓸했다.
기껏 마나를 깨우쳤더니 시간문제로 실패할 줄이야.
“아니, 넌 실패하지 않았다.”
그때 송제가 영문을 알 수 없는 말을 했다.
그는 묘한 미소를 지으며 왕좌에서 일어난 상태였는데 뭔가 만족스러워하는 듯했다.
“이미 일주일이 지났다고 들었습니다. 일주일 안에 모두 쓰러트려야하는 것 아니었습니까?”
“그래. 그렇기에 통과하지도 못했지.”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송제는 어느새 왕좌가 있는 단에서 내려와 나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곧 내 앞까지 다가온 그는 미소 지으며 말했다.
“도산지옥을 최단 기록으로 통과하고 초강이 그냥 지나치게 해준 이유를 알겠어.”
“······.”
“그대는 짐을 충분히 놀라게 했다. 애초에 이 한빙지옥의 시험은 이런 것이 아니었다. 그대에게 내린 시험은 짐이 즉흥적으로 지어낸 것이었지.”
그래서 본론이 뭔데?
“다시 기회를 주마.”
“감사히 받죠.”
실패했다고 말한다면 인정할 수밖에 없지만 기회를 다시 준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나도 미쳤다고 이런 곳에서 7년을 썩고 싶지는 않았다.
우르르르-
어느새 나타난 건지 이전보다 많은 양의 언데드가 쏟아져 나왔다.
눈대중으로 짐작해보자 1,000구쯤은 되어보였다.
“다시 기회를 주도록 하지. 하지만 이번에는 봐주지 않을 것이야.”
송제가 허공을 걸어 올라가더니 위에서 나를 내려다봤다.
“이번에는 전과 같지 않을 게야. 모두가 동시에 너를 향해 달려들 터이니.”
“상관없습니다.”
나는 자신이 있었다.
이미 마나를 다시 사용할 수 있게 된 시점부터 비슷한 내용의 시험이라면 실패할 이유가 없었으니까.
“기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해서 과연 짐의 시험을 통과할 수 있을지 지켜보겠다. 기대하마.”
꾸드드득!
시험을 알리는 소리 대신에 주변이 다시 얼어붙었다.
그리고 전과는 달리 실제로 온몸이 얼기 시작했다.
-그어어어어!
또 바뀐 점이라면 황금갑주를 착용한 언데드들이 동시에 달려든다는 것.
‘하지만······.’
송제는 모르고 있겠지.
내게 있어서 마나라는 것은 검을 사용하기 위한 수단이지만 동시에 다른 방식으로도 사용할 수 있다는 걸.
-멈춰라.
내 입을 통해 언령 마법이 지옥에서 선을 보였다.
**
[“본인은 틀리지 않았다.”]
마치 미소가 느껴지는 의지였다.
그런 의지가 들려옴에도 비비안과 루나, 아가타는 반응조차 하지 않은 채 바닥만 바라보고 있었다.
서걱!
“아!”
마치 정신을 잃은 채 춤을 추는 듯한 아드리아스의 검에서 뿜어져 나오는 검은 오러를 보며 아가타가 감탄을 흘렸다.
이미 여기 있는 이들도 이곳에서 마나를 사용하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오러를 꺼낸 아드리아스의 모습에서 알 수 없는 전율을 느끼고 있었다.
“역시 아드리아스.”
비비안은 흐뭇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허공을 향해 물었다.
“우리도 마나를 사용할 수 있어?”
[“그대들의 의지에 달렸다.”]
“그래.”
비비안은 들려온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며 두 눈을 불태웠다.
아드리아스가 마나를 다시 사용할 수 있게 된 모습은 그녀에게 커다란 자극이 되었다.
“수련할 거야.”
[“그러나 그대는 연자가 어떻게 기를 깨우쳤는지 이해할 수 없을 것이야.”]
누구나 가능하다는 듯이 말해놓고 갑자기 초를 치는 듯한 말에 비비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나 루나도 의지의 말에 이해가 간다는 표정으로 허탈하게 말했다.
“저건 못 따라해.”
“무슨 뜻이야?”
“친구의 집중력은 사람의 집중력이 아니야. 난 볼 수 있어. 친구가 얼마나 괴로운 상황에서 저 언데드들과 싸웠는지.”
영혼을 볼 수 있는 눈.
루나는 송제가 사용한 엄청난 한파로 아드리아스를 공격하던 걸 실시간으로 확인했다.
그로 인해 얼마나 큰 고통을 경험했을 지조차 간접적으로 볼 수 있었다.
[“지옥의 시험이란 생각보다 고되다. 그대들이 보면서 짐작하는 것보다 더한 고통이지.”]
의지가 울리며 마음속에 스며들었다.
[“그가 겪고 있는 고통은 영혼에 가해지는 고통. 아마 시험을 내고 있는 자도 그 점에 놀라고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더 포기할 수 없어.”
비비안은 가부좌를 틀고 눈을 감았다.
“아무것도 안하고 아드리아스의 고통을 구경만 하는 건 마음에 들지 않아.”
그리고는 입을 닫은 채 명상에 잠겼다.
그런 비비안을 보며 루나도 앙증맞은 주먹을 불끈 쥐더니 말했다.
“나도!”
이내 나란히 비비안의 곁에 앉아서 눈을 감은 루나가 꼼지락거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아가타는 머리 위로 솟은 고양이귀를 긁적이며 바닥을 바라봤다.
그녀로서는 아드리아스의 모습을 구경하는 게 훨씬 나았다.
‘우리 대신에 모든 걸 짊어지고······.’
이해할 수 없는 사람.
그러나 그렇기에 더욱 호기심이 생겼다.
아가타는 씬의 명령도 잊은 채 그렇게 아드리아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 299화. 돌파구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