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4화. 망령의 섬 >
우리가 현재 위치한 곳은 대륙의 남서쪽 끝이었다.
제국에서 거리가 꽤 멀기에 특별히 연차까지 제출하고 나온 길이었다.
학기 초에는 내가 할 만한 일이 없을 것 같지만 그래도 교수의 신분으로서 최소한의 질서는 지켜야지.
‘실력만 있으면 장땡이지만······.’
살렘의 제자로 소문난 베리얼조차 마법 학부장으로 고용했던 로들렌 아카데미다.
실력만 증명이 되면 뭘 하든 간섭을 잘 안한다.
물론 강의가 배정이 된 교수들은 강의를 빼먹지 않는 선에서 자유가 보장되었다.
“친구! 안개! 물안개야!”
멍하니 수평선을 바라보고 있자 어디선가 달려온 루나가 내 옷깃을 붙잡았다.
그녀의 말에 선수(船首)를 바라보자 저 멀리 안개로 가려진 바다가 보이기 시작했다.
“짙네.”
게임에서는 그러려니 지나갔지만 실제로 보니까 앞이 하나도 분간이 되지 않아보였다.
만약 키네인 용병단과 함께 오지 않았으면 유적이 있는 섬에 가는 것도 쉽지 않았겠지.
키네인 용병단은 트루번 제도를 붙들어 매고 있는 단체인 만큼 바다에 능숙했다.
사실상 용병 겸 해적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지.
“중간 돛을 접어라!”
“우현으로 5도!”
슬슬 안개 속으로 진입하려는 가운데 선원 역할을 맡은 용병단원들이 바삐 움직이며 고함을 질러댔다.
“아드리아스 크롬웰.”
그 사이 어디선가 나타난 파이시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예.”
“네가 예상 외로 강한 마법사라는 사실은 알았지만 유적에서는 최대한 내 의견을 존중해줬으면 하는데 어떻게 생각해.”
아직도 기 싸움을 하려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저 유적의 원정이 순조로웠으면 하는 심정이 느껴졌다.
“알다시피 유적에 대한 지식은 모두 내 머릿속에 있어. 항로는 따와서 키네인에 줬지만 그 외에 정보들은 모두 불태우고 오직 나만 알고 있지.”
“방해할 생각 없습니다. 유적의 발굴은 우리 모두가 원하는 결과잖아요.”
“······명령권을 확실히 해줬으면 좋겠어. 급할 때는 네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권한.”
여전히 후드에 가려진 파이시가 겸손한 모습으로 내게 부탁을 해왔다.
비굴하다는 표현이 더 어울리겠지만 굳이 그리 깔볼 필요는 없겠지.
“좋습니다.”
“고맙다.”
그녀는 밝은 목소리로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자신의 일행이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돌리려했다. 그러다 문득 멈춰 서서는 들으라는 듯이 중얼거렸다.
“모른, 그 녀석이 왜 파격적인 선택을 했는지 이제는 이해했어. 처음에는 널 꼭두각시라고 생각했었다.”
“파이시뿐만 아니라 대부분이 그리 생각할 겁니다. 애초에 그걸 노리고 있고요.”
“······너랑은 웬만하면 척을 지기 싫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라고 파벌의 수장이 될 줄 알았겠나.
그래도 코에 걸면 코걸이고 귀에 걸면 귀걸이라는 말이 있듯 상황에 맞게 대처를 할 뿐이었다.
이왕 내가 수장이 되었으니 모두가 날 얕봤으면 좋겠네.
파이시에게 했던 것처럼 방심을 틈타서 단숨에 휘어잡을 수 있을 거다.
쿠구궁---
끼이익!
“이 씨발! 좌로 3도!”
“좌로 3도!”
나와 파이시의 대화가 이어지는 중에도 갑판 위는 전장을 방불케 했다.
사실 우리야 마법도 있고, 어떻게든 살아남을 방법이 있었지만 일반 용병단원들은 이 배의 생명이 본인들의 목숨이나 마찬가지인터라 필사적이었다.
“비비안, 노아.”
파이시가 물러나고 나는 곁에 있던 둘을 불렀다.
“슬슬 전투 준비하세요.”
“전투?”
노아가 죽은 눈깔을 하고 되물었다.
그에 반해 비비안은 반문 없이 검을 뽑아들었다.
“저희 쪽 용병분들과 루나한테도 혹시 모르니 준비하라고 하세요.”
“아니 무슨 일인지 알아야 준비를 하라고 말하지.”
노아가 투덜거리면서도 명령에 따라 몸을 움직일 때, 예상했던 습격이 시작됐다.
쿠지직!
“어어?”
배가 마치 무언가에 잡힌 듯 기우뚱거렸다.
이내 배의 하부에서 자잘하게 부딪히는 소리가 들리더니 무언가가 갑판으로 기어 올라오기 시작했다.
-콰르륵?
-쿠악!
유적이 잠든 섬의 첫 번째 관문.
바다 속 언데드였다.
“전투 준비!”
언데드를 보자마자 곧바로 분위기가 급변했다.
역시 용병왕이 주인으로 있는 키네인 용병단다웠다.
단원들은 갑판으로 올라오기 시작하는 언데드를 보면서도 전혀 당황한 기색 없이 곧바로 대응하기 시작했다.
“하하! 좋아, 좋아!”
소란을 듣고 어느새 갑판에 나온 무토가 만면에 미소를 띤 채 소리쳤다.
“유적이 있다는 확실한 증거다! 다 뚫고 유적으로 향한다!”
““오오!””
아주 신났구만.
어쨌든 우리 쪽도 내가 미리 말해둔 탓에 당황하지 않고 대항할 수 있었다.
콰직!
-꾸륵!
-으어어!
비린내가 진동하는 언데드들은 수가 많았지만 그닥 강하지는 않았다.
덕분에 무리 없이 수를 줄여나가는 찰나에 누군가가 소리 질렀다.
“배, 배가 침몰하고 있습니다!”
“이 개 같은 놈들이 멀쩡한 배는 왜 부수고 지랄이야!”
단원의 외침대로 우리가 탄 배는 물이 들어오고 있는지 서서히 기울어지고 있었다.
언데드를 수월하게 막아내는 것과는 별개로 배에 타격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이건 좀 곤란한데······.”
무토가 언데드들을 베어 넘기다가 나와 파이시가 있는 쪽을 향해 외쳤다.
“배의 구멍을 막을 수 있나? 우리 쪽 애들이 수영은 할 있지만 물속에 빠지는 순간 언데드한테 다 죽을 거야.”
“구멍이 난 곳을 먼저 찾아야지.”
파이시가 언데드를 소환하며 말했다.
소환한 언데드는 곧바로 배에 난 구멍을 찾으러 물에 들어갔지만 곧 바다 속의 언데드들에게 뜯어 먹혔다.
“쯧.”
혀를 찬 파이시가 내게 시선을 돌렸다.
나보고 해결하라는 건가.
“무토.”
“왜! 아직 해결 안됐어?”
“제가 구해주면 아까 전에 주기로 했던 지분은 없던 일입니다.”
“뭐?”
무토가 이 상황에서 무슨 소리냐는 눈으로 나를 욕했지만 난 뻔뻔하게 말했다.
“샤히 샤마드 쪽 지분도 제가 가지겠습니다. 1할만 떼어주시면 모두 구하죠.”
“허허허. 그렇게 하지요.”
어차피 우리 쪽 일행 중에 물에 빠져 죽을 정도로 약한 사람들은 없었다.
내가 도와주지 않으면 샤히 샤마드나 키네인 용병단만 타격을 입겠지.
다행히 샤히 샤마드의 가르디온은 내 제안을 곧바로 승낙했다.
“누구 덕분에 배를 타고 바다에 나왔는데······!”
“그 대가로 처음 지분을 배분할 때 더 가져가시지 않았습니까.”
배는 이제 거의 30도 각도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곧 있으면 완전히 뒤집어질 상황.
“형님! 이러다 저랑 형님 빼고 우리 애들 다 죽습니다!”
때마침 부단장이자 동생인 스잔이 소리치자 무토가 손을 휘저었다.
“알았다고! 그니까 빨리 좀 해결해봐!”
“알겠습니다.”
이번 위기는 이렇게 넘어가지만 과연 이게 끝일까.
어쨌든 나로서도 유적 내에서 이들의 도움이 필요했기에 곧바로 마나를 굴렸다.
쩌저적!
내 주위를 시작으로 배가 천천히 얼어붙기 시작했다.
“미친······.”
“와아!”
파이시와 루나의 목소리가 들리고 나는 입안의 역천의 회로를 굴렸다.
바다를 얼리기 위해서는 단순한 마법으로는 힘들지.
-얼어라.
꽈드드득!
거의 모든 마나가 쏟아지며 배와 배 주위의 바다를 얼리기 시작했다.
덕분에 바다 속에서 올라오던 언데드도 끊기고 배의 침몰도 멈췄다.
“허허. 이건 대체······.”
바다 한 가운데에서 일어난 진풍경.
주위에 퍼져 있던 안개까지 얼어붙어 얼음결정들이 흩날렸다.
“하아, 진짜 말이 안 나오네.”
무토가 중얼거리며 주변을 보더니 이내 시선을 내게 돌렸다.
“돈값은 하네!”
“만족했다니 다행입니다.”
“그런데 이제 어떻게 섬으로 가냐.”
“걸어가시면 됩니다.”
내가 대답하며 앞을 가리키자 얼어붙어서 흩어진 안개들 사이로 섬이 보였다.
그리고 배와 섬 사이로는 반짝이는 얼음길이 그대로 이어져있었다.
“크롬웰 백작, 워록이었어? 아니, 진즉에 마법을 사용하지······.”
“늦게 사용한 덕분에 제가 이득을 봤지 않습니까. 그것보다 어서 가시죠.”
내 뻔뻔한 말에 무토가 뭐 저런 놈이 다 있지 하는 표정으로 쳐다봤다.
나는 그런 무토를 무시하고 섬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역시 아드리아스.”
“와! 친구 대단해!”
비비안과 루나가 내 뒤를 쫓아왔고 곧이어 모두 내가 만든 얼음길을 걸어가기 시작했다.
“아드리아스 크롬웰! 네가 워록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건 단순히 워록이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야. 대체 네 마나량은 어떻게 돼먹은 거지?”
뒤에서 따라오던 파이시가 도저히 참을 수 없다는 음색으로 말을 걸어왔다.
이미 본인이 정답을 말했기에 나도 해줄 말은 없는데.
“말씀하신대로 제가 마나통이 조금 큽니다.”
“조금? 조금이라고?”
파이시가 여전히 흥분한 기색으로 말했다.
그런 그녀를 보며 비비안이 슬며시 다가와 경계했다.
“검과 마법 둘 다 다룰 수 있는 재능과 관계된 건가?”
“글쎄요.”
“연구해보고 싶어.”
대놓고 날 생체 실험해보고 싶다는 말에 어지간히 정신줄을 놨구나 싶었다.
하긴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여러 마법사들 중 가장 마나 소모량이 큰 건 네크로맨서였다.
주위에 시체가 있으면 그 숫자와 상관없이 마나량에 따라 소환이 결정되니까.
네크로맨서에게 마나는 다다익선을 넘어선 근본, 그 자체였다.
“물러나.”
비비안이 기세를 드러내며 사납게 말했다.
그러자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파이시가 뒤로 살짝 거리를 뒀다.
“흥분해서 추태를 보였네. 방금 한 말은 잊어줘.”
“평소에도 생체 실험을 자주 합니까?”
나는 앞서 걷고 있는 노아를 의식하며 물어봤다.
“당연하지. 네크로맨서에게 살아있는 것에 대한 연구는 죽은 것에 대한 연구보다 어쩌면 더 중요하니까.”
역시 의심이 생긴다.
아이비가 자신들을 붙잡은 흑마법사를 죽였다고는 했지만 실험을 당한 건 노아였다.
한 마디로 아이비가 죽인 흑마법사는 파이시의 부하고 실제로 실험을 했던 건 파이시였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
‘그런 것치고는 묘하게 못 알아본단 말이지.’
노아도 확실치 않아하는 모습이었고 무엇보다 파이시가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물론 실험체를 까먹었을 수도 있지만 파이시만큼 뛰어난 마법사의 기억력은 범인의 그것을 능가한다.
그런 파이시가 알아보지 못했다는 건 이해하기 어려운 일.
‘뭔가가 더 있거나 놓친 게 있는 건가.’
생각을 하는 사이 어느새 섬에 거의 도착했다.
고대 유적이 있는 숨겨진 섬.
게임에서도 이름이 없던 섬이라 난 편의상 망령의 섬이라 불렀다.
“저거 뭐야? 사람?”
“사람······이라고?”
그때 앞서 걷던 키네인 용병들이 술렁였다.
그들의 시선이 향하는 곳에는 정장을 잘 차려입은 남자가 해변에 서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여기에 사람이 산다고?”
“유적이 아닌 거야?”
그때 무토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사람이 아니야.”
이 망령의 섬에 처음 들어오면 겪는 에피소드가 있다.
그건 바로······.
“손님들이 오셨군요. 저희 왕국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가까이서 보니 확실해진 희끄무레한 외형.
누가 봐도 살아있지 않다는 걸 알 수 있는 자.
언데드 NPC의 환영인사였다.
< 284화. 망령의 섬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