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3화. 정리 그리고 출발 >
“뭔 일이여. 오늘따라 억수로 많이 오네.”
어구의 정리가 끝난 한스 노인이 허리를 펴며 말했다.
그의 시선은 저 멀리서 천천히 걸어 들어오는 새로운 이방인들에게 향해 있었다.
“무슨 일이 생기는 건 아니겠지요?”
“우린 그냥 조용히 찌그라져 있으면 되는기라.”
한스가 아무렇지도 않게 정리된 어구를 등에 짊어지며 창고로 향하자 청년들은 불안한 눈으로 이방인들을 바라보며 한스를 따랐다.
이내 한스가 창고에 어구를 내려놓고 뒤따라서 어구를 놔두는 청년들을 보며 말했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웬만하면 나서지 말고. 알았제?”
“알겠습니다, 어르신.”
그때 한스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외지인들이 있는 곳에서 소란스러움이 들려왔다.
갑작스러운 소음에 어구를 창고에서 정리하던 청년들이 다급히 창고 밖으로 나와 동태를 살폈다.
“왜, 왜 저래 갑자기!”
“야, 한스 영감님 말대로 그냥 무시하고 창고에나 들어가 있자.”
“아니, 야. 저 사람들 싸울 것 같은데? 마을 다 박살나는 거 아니야?”
“그럼 어쩔 건데! 네가 가서 말릴래?”
청년들이 우왕좌왕하는 사이 한스가 조용히 나섰다.
“다들 창고에 짜져 있그라. 내 함 가보마.”
“영감님!”
청년들이 다급히 막으려고 했지만 한스는 당당한 보무로 소란이 일어난 장소로 향했다.
이내 소란이 일어난 장소에 도착한 한스는 의외로 조용한 상황에 어리둥절한 모습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크.”
싸늘한 한기가 올라왔다.
조용한 것이 아니라 냉전 상태임을 확인한 한스는 조용히 건물 구석으로 걸어가 상황을 지켜보았다.
“우리를 왜 막았는지 설명을 해줬으면 하는데.”
먼저 입을 연 것은 이제 막 도착한 이방인들이었다.
그들은 가장 먼저 도착했던 용병 차림새의 인물들에게 가로 막힌 상황이었는데 용병들은 애써 손을 저으며 밝은 표정을 지으려 노력했다.
“우리가 먼저 도착해서 축하연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너무 빨리 와버렸네! 이야, 이렇게 빨리 올 줄 몰랐어. 오느라 고생했다.”
오히려 싸늘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왜 우리를 막았지. 계획이 잘못된 건가. 아니면 우리를 배제하기로 결정했나.”
“아니야, 아니야! 이야, 이거 설명하기가 참 힘든데 일단 여기서 조금만 기다려주지 않을래? 곧 단장님께서 오실 거야.”
점차 험악해져가는 분위기 속에서 드디어 누군가가 다가왔다.
그는 조금 전에 길을 물어보고 돈을 건넸던 사내였다.
“어이, 왔어?”
“무토 키네인.”
싸늘한 음성이 다가온 사내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사내, 무토는 자신의 부하들을 걷어찼다.
퍼억!
“커억! 단장님?”
“이 놈들아, 왜 우리 귀한 원정대 동료들의 길을 막고 있는 거냐. 빨리 길을 터드려라!”
무토가 자신의 수하들을 뻥뻥 걷어차기 시작하자 상대편도 더 이상 뭐라하지 못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수하들을 걷어차던 무토는 이내 한쪽 건물 구석에 숨어있던 한스를 발견했다.
“형씨, 거기서 뭐하쇼?”
“사달이 일어나는지 알고 구경 왔다오. 허허.”
“에이, 우리가 양아치도 아니고. 구경 다했으면 그만 물러가쇼.”
“그려, 그려.”
한스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뒤돌아섰다.
그러나 그의 안도는 얼마 지나지 않아 무너졌다.
콰작!
무언가가 요란스레 부서지는 소리에 한스가 다시 뒤를 돌아봤다.
이내 무토가 소리 지르며 뛰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아이씨! 내가 저럴 줄 알았다!”
쿠구구궁!
굉음과 함께 조금 전까지 멀쩡했던 주점 건물이 무너져 내렸다.
그 비현실적인 광경에 한스는 멍하니 서있었다.
“저게 뭐시여?”
건물 하나가 폭삭 주저앉았다.
그것도 모자라 폭음과 굉음은 여전했고, 땅까지 지진이 난 것처럼 흔들리기 시작했다.
“아아······.”
한스는 무너진 건물과 같이 주저앉는 수밖에 없었다.
**
“네놈이 우리 교단의 미래를!”
내가 이번 원정에 굳이 정체를 숨기지 않은 이유 중 하나.
그 하나는 바로 이 상황을 위해서였다.
콰과과광---------!
마법이 휘몰아치며 내 주변을 박살냈다.
하지만 그 어느 것 하나 내게 상처를 낼 수는 없었다.
제파르 교단의 간부로 보이는 사내는 꽤 실력 있는 마법사였지만 나는 웬만한 마법사의 대척점에 선 자.
-휘어져라.
의지가 존재하지 않는 발사체는 그저 자연스럽게 내 몸을 빗겨갈 뿐이었다.
스걱!
그 사이 눈이 뒤집힌 비비안이 미친 듯이 제파르 광신도들을 썰고 다녔다.
녀석들도 나름 저항했지만 오러 마스터가 나오지 않는 이상 비비안을 막을 수는 없을 거다.
“아드리아스 크롬웰!”
뒤늦게 달려온 무토가 눈에 불을 켜고 내 이름을 불렀다.
그의 호명에 나는 양손을 펼쳐든 채 어깨를 으쓱했다.
“전 아무것도 안하고 있습니다.”
“이 시부럴! 야! 너 이 새끼 당장 마법 그만 안 둬!”
무토의 타겟이 제파르 간부에게로 향했다.
하지만 간부는 내 정체를 파악한 순간부터 맛이 간 지 오래였다.
그저 분노에 휩싸여 제 한 몸 불태우고 있을 뿐.
“죽어! 죽어라, 아드리아스 크롬웰!”
“하아.”
서겅-
툭!
무토의 한숨과 함께 사방으로 쏟아지던 마법이 드디어 멈췄다.
그리고 어느새 휘두른 지 모를 무토의 대검은 피 한 방울 묻지 않은 채 시리도록 깨끗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결국 제파르 간부를 본인이 직접 처리한 무토가 내게 이를 갈며 말했다.
“좀 전에 내가 잠시 동안만 숨어있으라고 했을 텐데.”
“전 그 말에 대답한 적 없습니다. 제가 뭘 하든 제 마음이죠.”
“이제 보니까 일부러 그런 거구나. 하아, 미치겠네.”
원래는 내가 직접 죽이려 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같았다.
오히려 무토가 죽임으로서 한 배를 탄 셈인가.
무토가 허탈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바라봤다.
그가 한 말이 딱히 틀린 말도 아니었기에 나는 그저 조용히 비비안을 불렀다.
“비비안, 이제 그만 됐습니다.”
비비안은 내 말에 곧장 살육을 멈추고 내게 돌아왔다.
내 명령에는 따랐지만 그녀의 두 눈에는 여전히 핏빛 광기가 엿보였다.
난 비비안이 진정할 때까지 기다리며 무토에게 은근슬쩍 말을 걸었다.
“무토 키네인, 이제 어떡하실 겁니까?”
“이 개새끼가 지가 일을 꾸며놓고 뭘 어떡해. 쓰벌, 일이 이렇게 됐으니 어쩔 수 없이 싹 밀어버려야지.”
이제 막 도착한 제파르 교단 세력은 오자마자 갑작스런 전투를 치른 데다 비비안의 공격으로 그 수가 많이 줄어있었다.
이미 관계가 뒤틀려버린 걸 눈치 챈 무토는 곧바로 수하들에게 눈짓했다.
“걍 다 죽여.”
그의 명령이 떨어지자 용병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그 모습이 꼭 살인병기들처럼 보였다.
역시 키네인 용병단인가?
“크악!”
“컥!”
“제파르 님께서 너희들을 용서치······크헉!”
마을은 순식간에 진한 혈향으로 범벅이 되었다.
무너진 건물 잔해와 수십에 달하는 시신들을 보면 전쟁이라도 치른 듯한 모양새였다.
“제발, 조용히 조용히 원정을 가려고 했는데 아주 동네방네 광고를 한 꼴이군. 이렇게 된 이상 최단 시간 내에 유적의 원정을 마친다.”
무토가 똥 씹은 표정으로 수하들에게 말했다.
그리고는 내게 다시 시선을 돌렸다.
“제국 백작 신분이라고 내가 무서워할 거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애송아. 난 트루번 제도의 주인이야. 한 번만 더 이딴 말도 안 되는 짓거리를 꾸미면 네 목을 가져가겠다. 알았냐?”
“명심하죠.”
내가 원하는 대로 됐으니 말이라도 곱게 해줘야지.
나는 죽은 광신도의 시체들을 보며 곁에서 구경하고 있던 루나를 불렀다.
“루나, 부탁할게요.”
“알았어!”
오기 전에 미리 말해두었던 대로 루나가 광신도들의 영혼을 모았다.
나와 루나의 갑작스런 행동에 무토가 유심히 살피더니 헛웃음을 흘렸다.
“크롬웰 백작, 이제 보니까 아예 작정을 했었구만?”
“전 저들의 화신을 죽였습니다. 이제 같은 하늘 아래에서 살 수 없는 처지죠.”
“그래서 저 놈들의 영혼을 모아다가 어쩌게? 어차피 놈들은 점조직이야.”
“점조직이면 점들을 다 부수면 되겠죠.”
나는 황당하다는 표정의 무토에게 웃어보였다.
“조금 귀찮지만 제게 그 정도 힘은 있습니다.”
“미쳤군.”
그때 소란이 있던 동안 잠시 떨어져있던 파이시 일행이 돌아왔다.
선착장에 배를 구하러 갔다가 급히 돌아온 모양인데 주변 꼬라지를 보고 기가 찬 모습이었다.
“이게 대체······.”
“예상하지 못했던 거냐, 파이시? 네가 데려온 인원들이잖아.”
무토가 비웃듯 말하자 파이시가 고개를 흔들었다.
“난 충분히 중재할 만한 교섭 물품이 있었어. 근데 일을 이렇게 만들어버리면······.”
“안타깝지만 우린 다 크롬웰 백작의 술수에 넘어간 셈이다. 이제 제파르 쪽은 이번 원정에 참가한 인원들을 모두 적으로 여기겠지.”
“왜 죽인 거야, 대체!”
“그러면 난리법석을 떠는 놈을 그대로 두라는 소리냐? 나한테는 제파르 따위보다 유적 원정이 더 중요해.”
무토가 번들거리는 눈으로 말했다.
“난 용병왕이다. 날 고용하려면 얼마나 큰 대가가 필요한 지 너도 잘 알 텐데? 그런 내가 유적의 지분 때문에 몸소 움직였는데 이깟 광신도놈들 때문에 일이 틀어지는 걸 보고 있어야한다고?”
“조금만 기다렸으면 내가 중재를······.”
“다시 말하지만 난 용병왕이다.”
쿵!
무토가 자신의 대검을 바닥에 내려찍었다.
그 살벌한 기세에 파이시도 입을 다물고 그를 노려보기만 했다.
“참는 것도 한계가 있지 감히 내 앞에서 날 무시하고 지랄을 떨어? 솔직히 말하면 그쪽에 있는 크롬웰 백작도 베어 넘기고 싶지만 참고 있는 중이라고.”
무토의 말에 비비안의 봉인이 다시 해제되려 하고 있었다.
나는 그런 비비안의 어깨를 조심스레 잡으며 말했다.
“사과의 의미로 제 유적 지분의 1할을 드리죠.”
“······말이 그래도 아예 안통하지는 않네.”
무토의 말에 분위기가 풀렸다.
그때까지도 전투 준비를 하고 있던 키네인 용병단원들을 보면 확실히 유명 용병단인 건 확실하네.
“잠시만. 지분 이야기가 나왔으니까 하는 말인데 제파르 쪽 지분은 누가 먹는 거지?”
“골고루 분배해야지. 제파르 쪽 지분은 15%니까 똑같이 나누면 돼.”
파이시는 대답을 하며 손을 휘저었다.
“그것보다 일이 이렇게 됐으니까 빨리 출발해야겠어.”
“씬이 아직 안 왔잖아.”
“네 말대로 지금 다른 세력을 생각할 때가 아니야. 그리고 씬은 원래 제파르랑 합류해서 오기로 했어. 근데도 안 왔다는 건 뭔가 수상해.”
씬이 도착하지 않았다는 말에 무토의 표정이 묘해졌다.
그리고 그 소식은 나한테도 의미가 있었고.
나는 티가 나지 않게 아가타를 살폈다.
그녀는 노아와 함께 있었는데 씬의 이야기 때문인지 묘하게 호흡이 불규칙했다.
‘아가타가 첩자일 수도 있겠군.’
처음 파이시가 접촉해왔을 때, 그녀는 분명 이 유적에 대한 정보를 루시펠 가문도 알고 있다고 했다.
루시펠은 하나하나가 네임드급 캐릭터의 강함을 지닌 뱀파이어들의 가문.
안젤라와 이자벨의 고향이기도 했다.
내가 알기로 씬의 상층부는 루시펠 가문과 연관되어 있다고 하니 씬과 루시펠, 둘 다 우리의 뒤통수를 노리고 있다고 가정해도 좋을 것 같았다.
“하여간 쉽게 풀리는 일이 없군. 유적 탐사 끝내고 나오는 길에 뒤통수 맞는 거 아니야?”
나와 같은 생각을 한 무토가 그대로 입밖으로 내뱉었다.
하지만 파이시도 딱히 그의 예상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가정하고 원정을 진행하는 게 좋겠지. 애초에 루시펠에도 내가 지분 분배로 제의했는데 거절당했거든. 어차피 루시펠도 정보를 알고 있는 김에 같이 들어가자고 했는데 아무래도 저쪽은 혼자 먹고 싶은 거봐.”
“루시펠은 조금 까다로운데······.”
“그래서 안 갈 거야?”
“뭔 소리냐. 여차하면 배타고 바다에서 싸우면 돼. 우린 트루번 제도의 주인이다.”
무토는 자신 있게 말하더니 수하 하나에게 턱짓했다.
“가서 샤히 샤마드 불러와라. 바로 출발한다고 말해.”
“옙!”
일이 복잡해졌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일단 유적 안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내가 절대적으로 유리하니까.
무토의 말대로 나올 때만 조심하면 괜찮았다.
“크롬웰 백작, 지금이라도 빠지는 게 신상에 이롭지 않을까?”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하면 좀 빠지라니까?”
“감사하니까 남아서 도와드려야죠.”
“거 참 마음에 안 드네.”
투덜대는 무토를 향해 나는 마침 그의 기를 누르기 위해 한 마디 더했다.
“아, 그러고 보니 막시민이 안부를 전해달라고 했었습니다.”
“······그 양반이 왜 너를 통해서 안부를?”
“자주 만나는 사이거든요.”
“······제국의 백작이 아주 가지가지 하는구만. 흑마법사랑 놀아나는 것도 모자라서 제국 수배범인 막시민하고도 자주 만난다라······.”
“그쪽 안부도 전해줄까요?”
“크흠, 됐다.”
무토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걸어가는 모습이 꽤 볼만 했다.
막시민이 안부를 전한 적은 없지만 둘이 아는 사이라는 건 알고 있지.
‘그나저나······.’
배를 타기 위해 움직이며 나는 조용히 아가타를 살폈다.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던 플레이어블 캐릭터의 변절.
나는 좀 더 고민할 시간이 필요했다.
< 283화. 정리 그리고 출발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