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 특성으로 최강 네크로맨서 (266)
탑의 보상
은발의 소녀가 쪼르르 달렸다.
그녀가 달리고 있는 곳은 어둡고 기다란 복도.
그러나 소녀가 지나가자 그 주위가 밝게 빛나는 것만 같았다.
소녀는 그 어두침침한 복도가 무섭지도 않은지 만면에 희미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그녀가 도착한 곳은 어느 방이었다.
방문을 벌컥 열고 들어간 소녀는 오팔빛의 눈망울을 빛내며 소리쳤다.
“손님 왔어!”
방은 공허했다.
가구라고는 의자 하나와 책장 하나가 전부인 장소.
그곳에서 조용히 책을 읽고 있던 노인은 돋보기안경을 코밑으로 내리며 소녀를 보았다.
“손님?”
“응!”
“허허. 손님이라…….”
노인은 책을 덮으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노인을 향해 소녀가 재잘댔다.
“파이시야!”
“정말 별일이군.”
“응! 오랜만이야! 나 이번이 두 번째 보는 거다?”
변절자 파이시.
그녀의 수식어인 변절자는 단순히 배신했다는 의미가 아닌 다양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다.
“일단 나가 보지.”
“응! 내가 문 앞에서 조금만 기다리라고 했어!”
마치 잘하지 않았냐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소녀의 눈빛에 노인은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잘했다. 역시 우리 루나구나.”
“히히.”
둘은 이내 천천히 복도를 걸어 이 거대한 저택의 입구로 향했다.
이들이 지내는 곳은 마경 중 하나로 불리는 안개 섬.
마나를 머금은 뿌연 안개가 섬 전체와 주변 해역까지 뒤덮고 있었다.
“살아 있는 모습을 보니 유감이야.”
뿌연 안개 속에서 파이시라 불린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노인, 모른 드왈스키는 문 앞에서 저택 안을 가리켰다.
“일단 들어와서 이야기를 나누지.”
“너답지 않게 센스가 있네.”
파이시는 로브에 달린 후드를 깊게 눌러쓴 채 다가왔다.
그 모습을 루나가 오오오 하고 감탄을 하며 바라보고 있었다.
“이 꼬맹이랑 같이 지내는지는 몰랐는데.”
“허허. 좀 되었지. 그나저나 그대가 이렇게 찾아온 연유가 궁금하구먼.”
안으로 들어간 그들은 응접실로 향했다.
그러나 응접실의 풍경을 맞이한 파이시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무것도 없군.”
“한참 이사를 준비 중이었다네.”
“이사?”
“머무를 만한 곳이 생겨서 말일세. 노년에 운이 좋았지.”
“여기도 그리 나쁘지는 않은 것 같다만.”
“늙다 보니 사람들과 북적이며 지내고 싶다네.”
자리에 앉은 파이시는 맞은편에 앉는 모른을 보며 코웃음을 쳤다.
“늙긴 늙었군. 그딴 되도 않는 소리를 하는 걸 보면.”
“제스터와 비슷한 연령대인 자네가 할 말인가?”
“그래서 더 웃기다는 거야. 너보다 나이가 많은 나도 웬만해서는 변하지 않는데 네가 벌써부터 그러면 되겠어?”
말을 하던 파이시는 어느새 자신의 옆에 딱 달라 앉은 루나를 바라봤다.
루나는 뭐가 그리 신기한지 계속해서 파이시를 쳐다보고 있었다.
“뭐가 그리 재밌니, 꼬마야?”
“변절자 파이시. 대단해.”
“너, 바보니?”
“아니. 난 천재야.”
둘의 대화를 지켜보던 모른이 탁자를 두드렸다.
“자, 이제 이 먼 곳까지 굳이 찾아온 용건을 들어 보도록 할까.”
“제파르 교단, 샤히 샤마드, 씬, 루시펠 가문.”
파이시의 입에서 나온 조직들의 이름은 일반인은 알 수 없는 음지의 세력들이었다.
그녀의 말에도 모른은 그저 가만히 기다렸다.
“그리고 트루번 제도 키네인 용병단도 움직이고 있지.”
“허허. 말세로군.”
“맞아. 말세야.”
그녀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칠흑같이 검은 하늘. 어느 순간 갑자기 시작된 일식이 벌써 한 달이나 이어지고 있었다.
“혼란은 곧 기회이기도 하지.”
“그 좋은 기회를 굳이 노부에게 알려 주러 온 겐가?”
“시치미 떼지 마. 네가 요즘 일을 꾸미고 있다는 건 다 알고 왔으니까.”
후드 안에 숨겨진 파이시의 한쪽 눈이 예리하게 빛났다.
그리고 옆에서 지켜보던 루나가 다시 한 번 오오오! 하며 소리를 냈다.
“일을 꾸미다니. 그저 마지막 여생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고민 중일 뿐이라네.”
“제국이 북부와 전쟁을 치를 당시에, 본 드래곤이 나타났다는 소문을 들었다.”
파이시는 거기까지 말하고 마치 모른을 추궁하듯 침묵했다.
하지만 모른은 그저 여유롭게 미소 지으며 할 말이 있으면 더 해 보라는 듯 입을 다물었다.
“하아. 네가 입을 열지 않아도 상관없어. 어차피 그 정도의 언데드를 사역할 실력자는 정해져 있으니까. 내가 딱히 본 드래곤에 욕심을 내고 있는 것도 아니고.”
“허허.”
파이시는 어깨를 으쓱하며 이내 자신의 진짜 용무를 말했다.
“신의 흔적이 드러났다. 근데 혼자 먹기에는 조금 덩어리가 커서 말이야.”
“방금 나열한 녀석들도 엮여 있는 모양이군?”
모른의 말에 파이시가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고민하던 모른은 이내 능글맞게 미소 지었다.
“독불장군처럼 혼자서 잘 나돌아 다니던 자네가 굳이 이렇게 찾아온 이유가 있었군. 제안은 고맙지만 사양하겠네.”
“……단순한 신의 흔적이 아니야. 유적이 발견됐다.”
“호오. 그렇다면 더욱 위험하겠군. 우리를 미끼로 쓸 작정인가?”
“내가 그렇게 못 미덥나?”
파이시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목소리를 내리 깔았다.
동시에 암울한 마나가 그녀의 곁으로 점점이 떠다니기 시작했다.
사뭇 위협적인 모습이었지만 모른은 그런 얕은수에 넘어가지 않았다.
“파이시, 나와 거래를 하고 싶으면 그런 같잖은 짓보다 좀 더 확실한 제안을 건네야 할 게다.”
“하아, 개같은 놈. 넌 언제나 이랬지. 이 능구렁이 같은 자식.”
“개나 뱀, 둘 중에 하나만 하거라.”
파이시의 마나가 순식간에 흩어졌다.
그리고는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키네인 용병단은 내가 고용했어. 이 정도면 됐지?”
“오호. 그 사실을 숨기고 있었다는 건 언제든 용병들로 뒤통수를 칠 생각이었겠군.”
“그럴 리가. 그래서 할래, 말래?”
“분배는?”
“7대 3. 많이 양보한 거야. 위치랑 정보도 내가 알고 있는 걸 전부 공유하는 것치고는.”
모른은 잠시 뜸을 들였다.
곧바로 제안을 받아들일 수도 있었지만 사안이 큰 만큼 신중할 필요가 있었다.
“할아버지.”
“음?”
“아드리아스가 신이랑 관련된 걸 찾고 있었어.”
“으음…….”
루나의 말에 모른의 고민이 한층 깊어졌다.
파이시는 갑자기 거론된 아드리아스라는 이름에 관심을 보였다.
“그러고 보니 네가 노망이 나서 후계자 자리를 그 아드리아슨인가 뭔가한테 넘겼다며?”
“그랬지.”
모른은 덤덤하게 넘겼다.
하지만 그 말에 반발한 건 오히려 루나였다.
“아드리아스는 대단해! 할아버지는 노망난 게 아니야!”
“흐음, 그래?”
“아드리아스는 신이야!”
파이시는 도저히 이야기를 들어 주지 못하겠다는 몸짓을 하며 모른에게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루나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아드리아스는 신이 될 거야.”
오팔빛의 눈동자가 기묘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하지만 파이시와 모른은 그 기색을 발견하지 못하고 무시한 채 대화를 이어 갔다.
“알겠네. 대신 비율은 4가 어떻겠나?”
“헛소리 말고.”
“허어. 헛소리라니. 집회의 힘을 사용하는 게 그리 쉬운 줄 아나?”
“3할 5푼.”
“4할.”
“3할 6푼.”
“그걸로 하지.”
파이시는 뭔가 당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좋게 넘어갔다.
“그러면 상세한 일정이나 정보는 다음에 알려 줄게. 아직 이쪽도 준비가 안 끝나서 말이야. 너희도 준비는 미리 해 둬.”
“알겠네. 아, 한 가지 말해 둘 것이 있네.”
“뭔데.”
“말했듯이 이사를 가게 되었으니 이곳으로 사람을 보내도 아무도 없을 걸세.”
“그럼 어디로 보내면 되지?”
“제국의 크롬웰 영지.”
크롬웰이라…….
파이시는 이 노인이 과연 무얼 노리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설마 정말로 아드리아스 크롬웰이라는 청년을 후계자로 만들 리는 없을 테고.
혹시 아드리아스라는 녀석은 이미 꼭두각시인가?
“알았어.”
파이시는 고개를 끄덕이고 떠날 준비를 했다.
곧바로 나가려는 그녀를 향해 루나가 달라붙었다.
“배웅해 줄게.”
“마음대로 해라, 바보야.”
“난 천재라고 했잖아! 아까도 말했는데! 파이시 바보야?”
재잘대는 루나를 옆에 끼고 저택을 나온 파이시는 무언가 이상을 감지했다.
그리고 그건 루나도 마찬가지였는지 돌연 하늘을 올려다보며 외쳤다.
“태양이다!”
“진짜 영문을 모르겠네.”
일식이 걷히고 있었다.
* * *
내가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는 침대에 누워 있는 상태였다.
가장 먼저 들었던 생각은 어떻게 살아난 것인가 하는 의문.
이내 생각은 꼬리를 물고 가넷에게로 향했다.
“끄으으.”
말이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소리가 들렸는지 옆에 있던 비비안이 금세 알아차렸다.
“아드리아스!”
그녀는 깨어난 나를 보며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았다.
화신과의 전투에서는 강제로 그녀를 이곳에 남겨 두고 갔는데 미안한 감정이 샘솟았다.
“으으.”
“일단 물 좀 마셔.”
비비안은 떨리는 손길로 내게 물을 먹였다.
그 처량한 진동이 내 입술로 전해져 와 더욱 가슴이 아팠다.
“살아서 다행이야.”
끝내 울음을 터트린 비비안이 내 손을 붙잡았다.
뭔가 씁쓰름하면서도 뜨뜻한 감정이 차올랐다.
“그 자리에 살아남은 사람들은 남궁일영, 디에네, 차강제르, 그리고 중원 사람 두 명이 전부였어.”
시간이 지나고 조금 진정한 그녀는 내 마음을 읽었는지 곧바로 소식을 알려 주었다.
“미르바도 살았어. 근데 가넷은…….”
“가……넷.”
“조금 문제가 있었어.”
나 때문인가.
자책이 느껴졌다.
“기술을 무리하게 사용했나 봐.”
그 말에서 이미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내 마지막 기억도 가넷이 날 치료해 주던 모습이었으니까.
하나만 사용해도 오락가락하는 특수 기술을 중복 사용했다.
죽지 않으면 그게 더 비현실적인 상황.
그럼에도 사용한 것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미래의 나는 살아 있다.’
과연 얼마나 먼 미래인지는 알 수 없지만 미래의 디에네는 분명 내가 보내서 왔다고 했었다.
그 이야기는 곧 내가 이곳을 무사히 넘겼다는 소리.
뭔 짓을 해도 살아남았다는 걸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게 가넷의 희생으로 살아남은 거였다니.’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왜 미래의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거지?
만약 가넷이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난…….
“하아…….”
……알았으면 난 분노와 탐욕을 동시에 사용하지 않고 화신에게 그대로 죽었겠지.
결국 미래의 나는 냉정하고 합리적인 판단을 내린 것이다.
씁쓸해지는 마음을 애써 가다듬었다.
화신은 없앴지만 아직 탑을 탈출하지 않은 이상 끝난 게 아니었으니까.
비비안은 잠시 사람을 불러온다며 나갔다.
띠링!
그녀가 나가자 시야 한쪽에서 반짝이는 메시지가 보였다.
이건 탑의 메시지가 아닌 나만의 메시지.
몸을 움직일 수도 없으니 이거나 확인하자는 심정으로 메시지를 켰다.
[‘업적: 화신 사냥’을 달성했습니다.]
[특전이 부여됩니다.]
이것도 게임에서는 못 본 업적이었다.
나중에 가면 여러 화신들이 나타나고 대부분 잡게 되는데 왜 그때는 없던 업적이…….
‘그건 진짜 화신으로 취급하지 않는 건가.’
이번에 내가 잡은 건 초월자가 직접 현세에 강림한 화신이었다.
말 그대로 초월자를 죽인 셈.
인간의 몸을 빌렸던 게임 속 화신이랑 다른 취급인 모양이었다.
[특전을 확인하시겠습니까?]
어차피 업적 달성 보상은 랜덤 특성.
나는 곧바로 특전을 확인해 보았다.
[믿을 수 없는 성과로 인해 특전의 내용이 변경됩니다.]
뭐?
갑자기?
[자유 분배 포인트 1개를 획득하였습니다.]
자유 분배 포인트?
하여간 이 세상은 게임과 다르게 갈수록 내가 모르는 것들만 나온다.
나는 곧바로 자유 분배 포인트에 대한 설명을 읽어 보았다.
[자유 분배 포인트―원하는 특성 하나를 업그레이드합니다. 업그레이드의 방향은 무작위이며 때론 원치 않는 방향으로 변할 수도 있으니 주의하십시오.]
‘나쁘지 않네.’
예상치 못한 보상이었다.
적어도 랜덤 특성보다 훨씬 활용도가 높아 보였기에 마음에 들었다.
‘일단은 놔둬야겠다.’
포인트가 어디 가는 건 아니었기에 시간을 들여서 고민해 보기로 하고 일단은 몸부터 회복시키고 싶었다.
지금 당장 원하는 건 이런 포인트가 아닌 가넷의 상태를 살펴보는 거였으니까.
아마 짐작이 맞다면 가넷은 감정이 없는 인형이 되었겠지.
“씨발.”
……여전히 난 부족했다.
아무것도 잃지 않는 게 오히려 불가능에 가까운 일임을 알고는 있었지만 난 욕심쟁이였다.
난 적어도 내 곁에 있는 사람들만큼은 지키고 싶었다.
[“훌륭했다.”]
“크흡.”
갑작스러운 충격에 호흡이 막혔다.
[“하하하. 고작 이 정도에 죽는 것이냐? 쫓는 자를 없앤 것 치고는 하찮구나.”]
속삭이는 자.
그가 나를 찾아왔다.
이제 와서 날 죽이려는 건가.
[“죽이다니. 그런 재미없는 소릴.”]
속삭이는 자는 마치 나를 관찰하는 듯했다.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 그는 자신이 온 목적을 밝혔다.
[“이 탑은 쫓는 자를 위한 탑이었다. 녀석에게 끊임없이 희망을 주기 위해 설계했었지.”]
그러고 보니 그렇군.
그렇다면 이제 더 이상 탑을 유지할 이유가 없는 건가.
[“아니. 난 이 장소를 당분간 놔둘 생각이다. 당분간이라고는 해도 너와 같은 피조물의 시간으로 계산하면 꽤 길겠군.”]
‘하고 싶은 말이 뭐냐.’
[“보상을 주기 위해 왔다.”]
보상?
맥락 없는 말이었지만 일단은 잠자코 들었다.
[“맥락이 없다니. 이 탑은 시련을 극복하면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내리는 곳. 관찰자를 품은 아이야, 넌 훌륭하게 시련을 극복했단다. 죽음이라는 시련도 극복했지.”]
속삭이는 자는 내가 품고 있는 욕심의 열쇠도 꿰뚫어 본 듯했다.
그냥 그게 저절로 느껴졌다.
[“자, 관찰자를 품은 아이야.”]
속삭이는 자가 공허한 미소를 짓는 게 느껴졌다.
[“네 소원이 무엇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