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3화. 탑의 증명 >
살렘의 연구실에 도착하자 오랜만에 얼굴을 보는 메마른 인상의 소녀가 나를 응시했다.
모르는 척하는 것도 어색하니 가볍게 고개를 까딱이자 상대는 이내 시선을 돌려버렸다.
여전하군.
“자, 이제 설명해봐라.”
다짜고짜 나를 자리에 앉히고 설명해보라는 살렘의 말에 나는 항상 가지고 다니던 논문을 건넸다.
“그건 이미 나도 가지고 있어. 그것보다 어떻게 이런 걸 발견했냐고 묻는 거야.”
“우연입니다.”
“그놈의 우연은 지겹지도 않게 너만 찾는군, 그래?”
뭐, 솔직히 크게 할 말은 없다.
그래도 그에게 도움을 받아야하는 처지이기에 넌지시 말했다.
“살렘이 연구하고 있는 조화. 거기서 파생됐습니다.”
“난 너에게 조화를 알려준 적이 없다. 알려주고 싶었지만 너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서로 간의 시간이 없었지.”
“왜 살렘이 알려줘야 제가 안다고 생각합니까?”
내가 의미심장하게 웃어주자 살렘의 미간에 고랑이 파였다.
“음흉한 새끼.”
“그런 소리 자주 듣습니다.”
“그렇다면 조화에 대한 연구도 병행했다는 소리냐?”
“아니요, 그건 아닙니다. 조화에 대한 개념만 익혔을 뿐이고 아는 건 거의 없어요.”
“넌 정말 알 수가 없는 놈이야.”
살렘은 투덜거리며 내가 건넨 논문을 받았다.
이미 있다고 하지 않았나?
그가 논문을 살피는 사이 노아를 살펴보았다.
그녀는 나름 잘 지내고 있는지 안색은 좋아보였는데 내 시선을 느꼈는지 뭘 쳐다보냐는 듯 내게 눈길을 주었다.
“노아는 좀 어떻습니까?”
“내가 누구냐? 나름 성과는 있다. 하지만 거기서 욕심을 더 내고 있는 중이지.”
“욕심?”
“단순히 치료에서 끝내지 않고 저걸 이용해먹는 방법을 연구하고 있다. 포기하기에는 아쉬운 힘이야.”
하긴 살렘이라면 충분히 해봄직한 생각이었다.
이 분야에 있어서는 베리얼을 제외하고는 그를 따라갈 이가 없으니 믿고 기다려야겠지.
“혹시나 하고 묻는 건데 노아도 알고 있는 거죠?”
“당연하지. 오히려 본인이 부탁할 정도다. 무뚝뚝한 거랑 다르게 강함에 대한 열망은 미친놈 수준이더라고.”
아이비가 알면 또 한 소리하겠군.
“아, 그리고 이미 내 정체는 알려줬다.”
“하아, 제가 말해주지 않았습니까? 숨겨야 한다고 했을 텐데요.”
“이것도 저 녀석이 먼저 짐작했을 뿐이야. 애초에 흑마법으로 인해 부작용을 치료하는데 당연히 내가 흑마법사일 거라 생각하겠지.”
그때 우리의 대화를 듣고 있던 노아가 다가왔다.
그리고는 여전히 썩은 동태 눈깔을 하고는 내게 말했다.
“난 언니랑 달라. 언니는 마음이 약해서 죄책감을 흑마법사에게 푸는 것뿐이니까.”
“당신은 상관없다는 겁니까?”
“흑마법사라고 다 같은 흑마법사는 아니잖아.”
너무나 상식적인 말에 도리어 할 말이 없어졌다.
그러나 이 땅에는 저런 상식조차 모르는 사람들이 과반수였다.
제국 사람이 아니라서 그런가. 편견이 없는 모양이네.
“애초에 언니가 제국에 있는 것도 그거 때문이니까.”
“그거?”
“흑마법사 사냥. 죄책감을 덜어내려는 행동이겠지만 동생을 내버려 둘 정도로 좋은 거봐. 어쨌든 제국에서는 흑마법사를 잡으면 현상금도 벌 수 있으니까 언니한테는 제격이었겠지.”
“글쎄요. 그럴 거면 차라리 용병으로 활동하지 굳이 아카데미 조수로 있을까요.”
“나라고 언니에 대한 모든 걸 아는 건 아니니까. 그것보다 너도 흑마법사야?”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질문에 헛웃음이 나왔다.
“그럴 리가요.”
“흑마법사도 아닌데 그 유명한 방랑자를 데리고 있다고? 그것도 제국의 백작이?”
“제가 백작인 건 지각하고 계시는군요.”
“지금이라도 대우해줄까?”
“됐습니다.”
하여간 내 주변에는 정상인이 드문 느낌이다.
어쨌든 마침 노아도 있으니 본론으로 들어가야지.
“어떻습니까?”
“뭐가 어때. 내가 읽은 거랑 똑같다.”
“어차피 노아도 다 아는 이야기니까 하는 말인데, 그녀의 치료에 제 논문을 사용해보는 건 어떻습니까?”
“······그니까 이 제어의 기원을 한 번 써보자는 얘기지?”
“그렇습니다. 노아는 어때요?”
“난 강해질 수만 있다면 상관없어.”
노아는 어차피 할 게 없으니 상관없고 중요한 건 살렘이었다.
그는 내 말에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다가 말했다.
“하루 이틀 만에 가능한 일이 아니야. 내가 알기로 넌 곧 탑에 들어가야 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
“거창한 건 아닙니다. 그저 개념을 좀 심어주는 거지요.”
“약간만 첨가하자는 말이냐?”
“예. 제어는 어디까지나 조연이고 조화가 주인공이어야 하죠.”
“그래. 네가 자신만만하게 말하는 걸 보니 뭔가 준비한 게 있겠지. 어차피 내 몸도 아니고.”
당사자가 바로 옆에 있는데 말 좀 조심했으면 하는데.
그래도 노아는 예상했던 대로 아무 반응이 없었다.
“시간이 없으니 바로 하죠.”
“그러자고.”
**
탑에 들어가기 전까지 남은 시간은 전부 살렘과 연구를 하는데 보냈다.
틈틈이 영지의 일과 상단의 일도 봐주고 비비안과 함께 검을 수련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시간을 연구에 쏟았다는 걸 부정할 수는 없었다.
“미친놈.”
함께 연구를 하고 있던 살렘이 돌연 헛소리를 내뱉었다.
“저 말입니까?”
“잘 아네.”
“갑자기 또 왜 그러십니까.”
“기가 막혀서 그런다. 내가 살다 살다 이런 형태의 마법을 볼 줄이야.”
처음 목표는 제어의 기원을 노아에게 이식하는 것이었지만 그를 위해서는 기본적인 제어의 이해가 필요했다.
그를 핑계로 살렘에게 제어를 알려주고 함께 연구를 했는데 덕분에 그의 지식을 뽑아먹을 수 있던 건 물론이고 내 마법에 대한 구체적인 진로를 잡을 수 있었다.
“감당 가능하냐?”
“해야죠.”
“아직 불완전한 마법이라 안전장치가 없어. 까딱하다가는 시전자인 네가 말라비틀어져 죽을 거다.”
내가 만들어낸 오리지널 마법.
나는 딱히 살렘에게 숨기지 않았다.
어차피 살렘도 원리만 짐작할 뿐 술식이나 배열은 알지 못하니까.
“자신 있습니다.”
“네가 멍청한 녀석이 아니라는 건 안다. 하지만 무모하다는 것도 알고 있지. 어떻게 된 게 지랑 꼭 닮은 마법을 만들어서 나대는지 모르겠구나.”
“칭찬 감사합니다.”
“칭찬? 내가 볼 때 그 마법을 남발하는 순간 넌 이미 죽은 거나 마찬가지야. 위력도 애매하고 마나만 무식하게 잡아먹어.”
답지 않게 걱정을 많이 해주네.
그래도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나도 살렘이 뭘 걱정하는지는 알지만 애초에 원죄와 죄악들의 효과를 믿고 만든 마법이라 문제없었다.
게다가 그릇의 특성으로 범인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많은 마나를 소유하고 있었기에 그야말로 나만을 위한 마법이었다.
“걱정해주시는 겁니까?”
“징그럽게 뭐라는 거야, 이 새끼가.”
질색을 하며 말하는 살렘을 보자 웃음이 나왔다.
종종 놀려 먹어야겠군.
“내일이면 떠날 겁니다.”
“이 새끼, 결국 지 좋을 대로만 연구하고 치료에는 도움을 하나도 안줬네.”
“제어에 대한 연구는 충분히 했으니 살렘이라면 써먹을 수 있잖아요.”
“정성의 문제다, 이놈아. 당연히 나 혼자서도 할 수 있지만 먼저 말을 꺼낸 놈이 그냥 가니까 한 소리지.”
“그건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노아한테도 대신 사과 좀 전해주세요.”
“일 없다. 꺼져라.”
그렇게 살렘의 연구실에서 나온 나는 크롬웰에서의 마지막 잠을 청했다.
탑에 들어가기 위한 준비는 이걸로 끝.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과연 이번에는······.’
탑의 끝을 본 자는 아무도 없었고, 수십, 수백 번을 플레이했던 나조차도 59층이 한계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 어느 때보다 강한 상태.
불안정하기는 하지만 무려 오리지널 마법이 있었다.
전설 및 신화급 언데드들도 있었고 천재 재능의 검술까지 가지고 있는, 그야말로 역대급 스펙.
게임에서도 깨지 못한 모드라스의 탑을 최초로 완전 정복했던 것처럼 이번에도······.
“끝을 본다.”
**
수도 로들렌.
현재 그 어느 때보다 활발한 도시는 축제 분위기로 연신 들떠 있었다.
연례행사인 ‘탑의 증명’은 황제가 공식적으로 선포하는 일종의 축제가 되어 모두가 먹고 즐기는 날이었다.
“이번에 보르기옌의 주인이 된 매그너 백작도 참가한다지?”
“공을 세운 이들에게는 모두 기회를 주니까. 이름이 알려진 자들 중에 탑에 입장하지 않은 이들이 드물지.”
“지금 보르기옌 백작이 문제야? 올해 로들렌 아카데미 졸업생들은 역대급 라인업이라고!”
주점에 모여든 사람들이 축제 분위기를 즐기며 수다를 떨었다.
축제의 기간은 총 3일.
탑이 열리기 전날부터 시작되는 축제는 도전자들이 탑에 들어가는 날, 그리고 탑이 완전히 닫히는 그 다음날까지 이어졌다.
오직 정해진 날에만 열리는 탑의 특성 덕분에 오히려 기념일이 만들어진 셈이었다.
“가장 큰 기대주들은 역시 세 명인가.”
“디에네 알븐, 아드리아스 크롬웰, 그리고 비비안 벨로칸. 모두 토너먼트에서 우승 및 준우승 경험자들이지.”
“난 조금 뒤에 아드리아스 크롬웰한테 건다! 작년에 벌었던 모든 돈을 쏟아 붓겠어!”
“디에네 알븐도 쟁쟁하니 올해 도박판은 판돈이 크겠군.”
축제는 이미 전날 시작되었다.
오늘은 드디어 탑이 열리는 날.
모든 참가자들이 중앙광장에서 집결해 황궁까지 가는 행사가 곧이어 시작될 예정이었다.
“그러고 보니 지금 시간이 어떻게 되지?”
“야, 늦기 전에 미리 가서 자리 잡아놓자고!”
“이미 늦었어, 인마! 이미 전날부터 자리를 잡고 있던 정신 나간 놈들도 있었어.”
“하하하! 그건 그렇지! 우린 멀리서 적당히 구경하자고!”
왁자지껄한 분위기가 이어지는 가운데 누군가가 주점의 문을 박차고 열었다.
“행사 시작했다!”
“오오! 가자! 가자!”
“어이, 거기! 계산은 하고 가야지!”
거리는 온통 사람들로 몰렸다.
수도에 살고 있던 평민들부터 이번 축제를 위해 상경한 귀족들, 그리고 그런 이들을 노린 상인들과 호객꾼들이 뒤섞였다.
“클로슈 공작가도 왔어. 저기 깃발 문장 봐봐.”
“작년에는 안 왔던 것 같은데 별일이군. 내가 듣기로 모하임 공작가랑 알븐 공작가도 온다고 하니 모든 공작가가 수도에 모이게 생겼군.”
“그래서 누가 디에네 알븐이고 누가 아드리아스 크롬웰이야? 잘 안보여!”
“저기! 저기 나온다!”
중앙광장은 황궁에서 나온 근위병들이 둥글게 감싸고 있었다.
연례행사처럼 치러지는 일이나 탁 트인 공간인 만큼 보안에 신경 쓰는 모습이었다.
곧이어 사람들의 환호성이 울리며 ‘탑의 증명’에 참가하는 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대부분은 올해 졸업하게 된 아카데미 학생들이었고 몇몇은 황궁으로부터 탑에 입장권을 포상으로 받은 인물들이었다.
“와아아!”
“저 분이 디에네 알븐? 역시 공작가의 자제분이라 기품이 넘치시는군!”
“그래서 내가 돈을 건 아드리아스 크롬웰은 어디 있는데!”
“이번 도박의 승자는 아드리아스 크롬웰이다! 다들 알지? 이번에 마법학계가 아드리아스 크롬웰 때문에 난리가 났었다고!”
사람들의 연호 속에서 특히 자주 거론되는 아드리아스 크롬웰은 실제로 그를 보기 위해 타국에서 온 마법사들이 있을 정도였다.
그가 일체의 연락을 받지 않고 크롬웰 영지에 틀어박혀 있었기에 직접 찾아온 이들이었다.
“저기다! 저 사람이 아드리아스 크롬웰!”
“뭐야. 생각보다 약해 보이는데.”
“마법사가 그러면 다 저렇지 뭘 기대하는 거야. 두고 봐, 아드리아스 크롬웰이 이번 증명에서 가장 높은 층에 올라갈 거니까!”
“이동한다! 탑으로 간다!”
소란스러운 사람들의 외침 속에서 참가자들을 살펴보던 싱클레어 클로슈가 자신의 옆에 있는 인물에게 물었다.
“이번 참가자들에 대한 기대가 모두 크군요. 황녀께서는 누가 가장 높이 올라갈 것 같습니까?”
“글쎄요.”
치렁치렁한 머리카락, 로브와 어울리지 않는 검.
질문을 받은 미카엘라 황녀는 오직 한 명의 인물에게만 시선을 집중하며 대답했다.
“아마 모두 높이 올라가기는 힘들 거예요.”
“예?”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한 미카엘라는 슬쩍 졸업생들이 아닌 다른 참가자들을 곁눈질했다.
마침 그들도 미카엘라와 눈을 마주치며 무언의 신호를 보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조금 전에 한 말은 잊어주세요.”
< 243화. 탑의 증명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