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6화. 등장 그리고 재회 >
깊은 숲속을 기이한 움직임으로 질주하던 무언가가 갑자기 멈춰 섰다.
그 앞에는 인자한 미소를 짓고 있는 한 노인이 기다렸다는 듯이 길가의 바위에 앉아있었다.
“어디를 그리 급하게 가나?”
모른이 웃는 낯으로 멈춰 선 누군가에게 말을 걸었다.
고깔모자를 어깨위로 덮은 괴한, 제스터였다.
“모른 드왈스키.”
“허허. 내가 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나?”
“······지금 자네와 자네의 그 알량한 애송이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건지 아나?”
“아니, 모른다네.”
모른은 뻔뻔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 모습에 제스터의 신형이 부르르 떨렸지만 이내 조용히 말을 이어갔다.
“죄악, 무려 죄악이라고. 우리가 왜 죄악을 모으고 있었는지 잊은 건가?”
“노부와는 상관없는 일일세. 우리를 그대나 몇몇 녀석들과 동급으로 취급하지 않아줬으면 하는군.”
“그래. 죄악이 상관없다고 치자. 하지만 분노가 이대로 황제의 손에 들어가면 그를 억제할 수단이 없어. 우리가 그의 신경을 거스른 건 같은 집회 소속인 자네에게 불똥이 튈 거라고.”
“그건 인정하지. 확실히 위험할 수도 있겠군.”
“그리 속 편히 말할 내용이 아닐 텐데?”
제스터는 모른의 태도를 보고 슬슬 마력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대화로서는 해결할 수 없음을 분위기로 깨닫는 중이었다.
“황제에게 뺏기지만 않으면 되는 문제 아닌가?”
“달그림자가 움직였다. 그런데도 뺏기지 않을 거라고? 자네가 직접 데리고 있다면 몰라도 아드리아스 크롬웰, 그 녀석이 지켜낼 수 있을 거라 보는 건가?”
“그건 모르는 일이지. 그리고 왜 아드리아스 혼자 지키고 있다고 생각하는 겐가?”
“······누가 또 있는 건가?”
거기까지 말한 제스터는 누군가의 얼굴이 번뜩였다.
“루나 펜드래곤?”
“마음대로 생각하게.”
“어쩐지 위치를 파악할 수 없더니 분노에게 가있는 모양이군. 하지만 루나 펜드래곤의 전투력은 달그림자를 따돌릴 수준이 못돼. 분노를 지켜야하는 상황이면 더욱 그렇지.”
“그건 자네가 알 바 아니네. 그만 간을 보고 슬슬 시작이나 해보지 않겠나? 자네와 붙어보는 것도 오랜만이군.”
백전불패의 암전, 제스터 르반.
그러나 그의 불패신화는 거짓이었다.
당시 떠오르는 신예였던 모른 드왈스키와 아무도 없는 장소에서 은밀히 치러진 전투.
그곳에서 그는 단 한 번의 패배를 겪어보았기에.
“세월이 야속하군. 그때는 자네가 까마득한 선배였는데 말일세.”
“지금도 마찬가지다. 외형이 늙는다고 후배가 아니게 되나?”
“자네가 그때 이후로 성장하지 못했으니 선배라 부르는 건 좀 아닌 듯싶군.”
“······모른. 날 너무 우습게 보는구나.”
“제스터여. 우리 마법사들은 세월이 곧 힘이야. 자네도 알고 있을 텐데? 그에 반해 자네는 성장할 수 없는 몸.”
모른의 주변 공간이 전부 시커멓게 물들어갔다.
아공간의 입구만으로 전 반경을 모두 물들일 정도의 압도적인 크기와 질량.
“모른, 그거 아나?”
“그렇게 말하면 내가 뭐라 답해야 하나?”
“흐흐흐. 넌 실수했다. 설마 아드리아스 크롬웰을 노리는 게 나 혼자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페이드?”
“그래.”
“어차피 페이드가 직접 나설 리는 없으니 노부는 자네만 신경 쓰면 되네.”
“믿음이 대단하군. 그 애송이가 암흑계의 특급 용병들을 상대로 버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모른은 제스터의 말에 도리어 웃음을 터트렸다.
“허허허허! 제스터여, 그대는 확실히 과거의 망령이구나!”
“갑자기 무슨 소리냐.”
“사람 보는 눈이 예전 같지 않다는 뜻일세. 아직도 모르겠나? 우리의 시대는 저물어가고 있어. 이제 새 시대가 열리게 될 게야. 그것도 우리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격동의 시대로!”
아공간에서 나오기 시작하는 죽음의 기사들이 흉흉한 기세를 흘렸다.
모른은 자신의 부대를 앞세우며 미소 지었다.
“아드리아스 크롬웰은 그 시대의 주역이 될게야.”
**
페이드가 여기까지 직접 올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그야 그는 암흑가의 거물. 당연히 모습을 장막 뒤로 감추고 있는 게 당연하다는 인식이었으니까.
“페이드님께서 직접 오실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습니다. 옆에서 편히 보고 계시면 저희가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스스스.”
“······네? 도망이요?”
골라스가 믿기지 않는 이야기를 들은 것처럼 놀라움을 표했다.
저 이상한 소음을 알아듣는 건가? 무슨 뜻이었지?
나는 천천히 거리를 벌리며 페이드의 반응을 확인했다.
“스으으.”
이내 페이드의 시선이 우리 쪽을 향하고 내 옆에 있던 피오네가 말했다.
“전 피오네 아르디. 아르디 가문의 사람입니다. 페이드, 당신은 우리 가문과 거래를 하고 있을 텐데 어째서 저희를 공격하는지 모르겠군요.”
“스으. 스으. 스스스.”
페이드는 피오네의 말에 반응하지 않고 다시 시선을 골라스에게 주며 알 수 없는 소음을 냈다.
그러자 골라스가 당황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철수다! 지금 당장 떠난다!”
“에?”
피오네가 당황스러운 음성을 냈다.
그리고 다른 이들의 심정도 그리 다르지 않은 듯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째서······.”
찢어 죽이는 발란.
그가 의문을 토해내자 골라스가 호통을 쳤다.
“돈만 받으면 상관없잖나! 어서 철수!”
“돈만 받으면 상관없다고? 그런 거라면 차라리 부하들을 부려 용병단을 차렸을 거다. 나는 피맛을 보기 위해 직접 움직이는 거야.”
“이 미친놈아! 지금 그런 말을 할 때가 아니야! 죽고 싶지 않으면 어서 철수를······.”
뭐지? 골라스의 태도가 이상했다.
말은 철수라고 했지만 마치 어서 도망가기라도 해야 한다는 듯이······.
슈웅-
스걱!
“끄억!”
그리고 그 반응에 대한 답은 곧바로 드러났다.
갑자기 나타난 하얀 빛의 검이 우리를 둘러싼 용병 중 하나를 눈 깜작할 새에 처리했다.
“이런, 이런. 이런 곳에서 저희 왕을 뵙게 되다니······역시 우린 운명인가 봅니다.”
곧이어 들려온 목소리는 내게 익숙한 사람이었다.
그 누구보다 신실했던 빛의 신봉자.
항상 새하얀 갑옷만을 고수해왔던 것과 달리 이번에는 검은색 일색의 복장을 한 초로의 남성.
“에반.”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왕이시여.”
대륙 10인에 속하는 최강자가 밝게 웃으며 나타났다.
“스스스.”
“왕과의 기념비적인 만남을 방해할 생각이십니까? 무례한 분이시군요.”
헤어지기 직전부터 나를 왕이라고 부르던 그는 내가 들었던 마지막 소식에 의하면 성국에서 파면 당했다는 소문이었다.
그 후 행방이 묘연하다고 했었는데 어째서 여기에 있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그대를 쫓은 덕분에 왕과 운명적인 만남이 성사되었으니 보답으로······.”
에반의 곁으로 수십 개의 하얀 검이 떠올랐다.
“그 얼굴에서 가면만 뜯어내 주겠습니다.”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말하는 에반은 공포스러웠다.
내 옆에 있는 피오네는 이 상황을 따라가지 못하는 듯 검만 치켜든 채 갈피를 못 잡고 있었다.
“에반 폰 오를레옹? 저 사람이 여기에는 왜? 아드리아스 선배님도 알고 있다고?”
놀라고 있을 틈은 없었다.
에반의 오러 비기가 하늘을 수놓기 시작하자 페이드도 자신의 가면을 살짝 들어 올리더니 찢어진 입으로 벌레 떼를 토해내기 시작했다.
파르르륵-
티릭! 티릭!
이내 주변 공간이 페이드의 벌레 떼와 에반의 오러 비기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빨리 철수한다! 죽기 싫으면 알아서 뛰어!”
골라스가 마지막 말을 남기며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우리를 포위한 용병들도 사색이 된 채 도망치기 시작했다.
“선배님!”
“괜찮아. 오히려 잘됐어.”
피오네가 어쩌냐는 눈빛으로 나를 불렀지만 나는 침착했다.
아직까지 에반의 태도를 보면 그는 확실한 우리 편이었다.
그리고 페이드가 아무리 날고 기는 집회의 워록이라 하더라도 대륙 10인에 속하는 에반에 비할 수는 없었으니 도망칠 이유가 없었다.
“도망치실 생각입니까?”
겉으로는 곧 싸울 것만 같았는데 무언가를 느낀 모양인지 에반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실제로 페이드의 흑마법은 에반의 오러 비기와 충돌하지 않고 주변만 맴돌 뿐이었다.
“스스스스으.”
“뭐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워록이 되어 자존심도 없습니까? 그리고 도망쳐봤자 제가 다시 쫓을 겁니다.”
페이드는 대답 없이 마법을 사용했다.
그의 앞으로 거울과 같은 반투명한 무언가가 생성되고 그 주위를 벌레들이 감쌌다.
에반의 검들이 그를 공격했지만 까만 모래 폭풍처럼 보일 정도로 수많은 벌레들이 방어막이 되어주었다.
“스으.”
페이드가 내게 시선을 던졌다.
그리고 나도 그런 페이드를 보았다.
“페이드. 이번 일은 잊지 않고 나중에 뵙겠습니다.”
그때는 내가 직접 널 죽여주마.
내가 웃으며 배웅하자 그는 반투명한 거울에 그대로 몸을 던지며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이게 그니까······. 에?”
피오네가 당황하는 사이 에반이 천천히 내게 걸어왔다.
그리고는 대뜸 한쪽 무릎을 꿇었다.
“신 에반, 왕을 이렇게 뵙게 되어 기쁩니다.”
“에반. 저번보다 그 왕 놀이에 심취하신 것 같군요.”
“하하. 그렇죠. 지금은 이게 제 삶의 이유니까요.”
그래도 본인의 행동을 자각은 하고 있나보네.
미친 건 아니어서 다행이다.
“근데 정말 놀랐습니다. 페이드를 쫓아왔더니 그 장소에 왕께서 계실 줄이야.”
“전 에반이 절 찾아온 줄 알았습니다.”
“아닙니다. 녀석을 죽이기 위해 쫓다보니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쫓아오길 참 잘했군요. 오랜만에 뵈어 너무 좋습니다.”
도대체 뭘 하고 지내기에 페이드를 쫓고 있었던 걸까.
내가 그에 대해 물어보려는데 피오네가 내 옷소매를 붙잡고 흔들었다.
“이,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에요? 설명 좀 해주세요.”
“흐음? 그쪽의 아가씨께서는?”
에반이 묻자 피오네가 목울대를 넘겼다.
생각보다 많이 긴장한 모습에 내가 놀랄 정도였는데, 그녀는 용케 자기소개를 했다.
“아르디 후작가의 여식인 피오네 아르디라고 합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에반 경.”
“에반이라고 합니다. 저희의 왕, 아드리아스 크롬웰의 충실한 종복이죠.”
“어디까지가 농담인지 모르겠습니다, 에반.”
내가 끼어들자 에반은 웃음으로 화답했다.
“하하. 전 진심입니다. 제가 성국에서 파면당한 이유를 왕께서 가지고 계시거든요.”
“저 때문이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렇습니다. 빛나는 분이시여, 그대를 섬기기 위해 파면 당한 후, 진정한 왕으로 자립하실 수 있도록 세력을 만들고 있었습니다.”
“세력?”
뭔가 이야기가 갈수록 내 예상을 벗어나고 있었다.
농담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 에반은 진심으로 내게 충성하려는 것 같았다.
“왕께 힘이 되기 위해 계속해서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왕께서는 빛! 빛은 어둠 속에서 훨씬 빛나는 법이죠. 그래서 전 제가 직접 그 어둠이 되기로 했습니다.”
“잠시만.”
그 이상의 말은 여기서 하면 안됐다.
피오네에게 굳이 이런 정보들을 알려줄 필요는 없지.
“따로 이야기하죠.”
“이 아가씨 때문입니까? 왕께서 거두신 수하라고 생각했습니다만······.”
“동료는 맞습니다. 하지만 따로 이야기하고 싶군요.”
에반의 눈빛에 기묘한 빛이 서리는 걸 보자 급하게 동료라고 커버쳤다.
내 착각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빨리 말하지 않았으면 피오네가 죽었을 것 같았다.
피오네의 죽음은 내 계획에 큰 차질을 빚게 되니 만에 하나라도 그렇게 둘 수는 없었다.
“알겠습니다. 이왕 만난 김에 제가 잠시 동행하겠습니다. 아무래도 골치 아픈 일에 휘말리신 것 같군요.”
“예, 그렇게 하시죠······!”
티무르?
나는 말을 하다 말고 티무르의 신호에 집중했다.
이쪽도 이쪽이었지만 아무래도 티무르가 있는 곳도 문제가 터진 느낌이었다.
‘하지만 괜찮다.’
그곳에는 티무르와 무슈만 있는 게 아니었다.
쓸 수 있는 패는 모두 사용했지.
‘루나, 그리고······.’
그가 있는 이상,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 216화. 등장 그리고 재회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