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5화. 좁혀오는 위기 >
클라우디아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약속 장소에서 모른을 만날 수 있었다.
당연히 피오네는 거래를 했던 대로 놔두고 온 상태였다.
그를 만난 곳은 주변에 아무도 없는 한 건물 안의 지하.
알고 보니 집회가 사들인 건물 중 하나라고 한다.
“자주 보는 것 같아 좋구나.”
“언제나 도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기껏해야 이 정도가지고. 노부가 할 수 있는 일은 이제 이런 잔심부름 밖에 없다네.”
모른이 저런 말을 하니 뭐라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다.
나는 인사를 마치고 시선을 돌려 그의 곁에 선 아이를 보았다.
후드 망토를 깊게 눌러쓴 아이는 아이답지 않게 침착한 모습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음! 음음음!”
“마법입니까?”
“그렇다네.”
“풀어줘도 됩니다.”
모른은 내 말에 곧바로 마법을 풀었다.
마법이 풀린 아이는 자신의 입을 확인해보며 천천히 소리를 내었다.
“아, 아! 당신들은 누구에요? 저를 데리고 뭘 할 생각인 거죠?”
“생각보다 멀쩡하군요.”
난 당연히 생체실험을 당했을 거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상태가 멀쩡했다.
야만족에게 돌려줄 생각인 내게는 호재였다.
“황제에게 넘겨야하니 어쩔 수 없었지. 덕분에 자네에게도 잘된 일이지 않나?”
“예.”
“대답해! 날 어떻게 할 속셈이야!”
꽥꽥 소리 지르는 아이에게 시선을 맞췄다.
나와 시선을 마주치자 녀석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누, 누구야, 넌.”
“걱정하지 마라. 널 다시 가족들에게 데려다 줄 테니까.”
“뭐?”
내 계획은 단순했다.
분노를 야만족들에게 다시 돌려주고 그들을 북부로 보내는 것.
누군가는 말처럼 쉽게 해결이 되겠냐고 하겠지만 난 할 수 있었다.
아니, 하게 만들어야겠지.
“아직 들키지는 않았지만 달그림자가 눈치 채는 건 시간문제일 게다. 그리고 자네가 직접 이 녀석을 데리고 다니면 하루도 안 되서 알아차리겠지.”
“저도 야만족의 진지로 가겠지만 이 녀석하고 같이 가는 건 제가 아닙니다.”
“언데드를 사용할 생각인가? 위험할 텐데.”
“전 저를 믿습니다.”
원래의 게임 역사에서 분노는 죽는다.
그것도 플레이어의 앞에서 죽게 되지.
분노가 죽음으로서 혼란은 돌이킬 수 없게 된다.
야만족들은 결사항전을 벌이고 제국도 그런 야만족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몰살.
뿐만 아니라 북부에 남아있을 잔당도 원정을 통해 전부 소탕한다.
그로 인해 파생되는 일들은 평범한 수준의 일이 아니었다.
“믿어보겠네. 부디 원하는 성과를 이뤘으면 좋겠군.”
“예, 감사합니다.”
“그럼 노부는 이만 가보겠네. 바쁘게 처리해야 할 일이 남아있어서 지금 당장 움직여야 하거든.”
“제가 바쁘신 분에게 괜한 부탁을 한 건 아닌가 싶습니다.”
“아닐세. 어차피 지금 처리할 일도 자네와 관련이 된 거라 별반 다를 게 없어.”
“저와 관련된 일이요?”
“허허. 나중에 소식을 전해주겠네. 그럼 이만 가보지.”
모른은 그 말을 끝으로 먼저 자리를 떠났다.
분위기를 보면 정말 바빠 보였는데 나와 관련된 일이라니 도대체 무슨 일인지 궁금해졌다.
“꼬마야, 이름이 뭐냐.”
“무슈.”
“아까도 말했지만 난 너를 원래 있던 곳으로 돌려보내 줄 거야. 그게 나한테 이득이거든. 그러니까 내 말만 잘 들으면 너도 다시 돌아갈 수 있어.”
“정말로 돌려보내 줄 거야?”
“그래.”
나는 티무르를 소환했다.
그러자 무슈가 놀란 눈으로 티무르를 바라봤다.
“수인?”
무슈가 놀라든 말든 나는 미리 준비해놓았던 옷을 티무르에게 입혔다.
옷을 두텁게 잘 입히자 겉으로 보기에는 그저 덩치 큰 용병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잘 부탁한다, 티무르.”
-크릉.
나는 티무르의 어깨를 한 번 두드리고 무슈에게 말했다.
“이 녀석이 너를 데리고 갈 거야. 나랑 연결이 되어있으니까 이 녀석한테 말하면 나도 들을 수 있어.”
“왜 네가 직접 데려가지 않는 거야?”
“네가 되돌아가는 걸 원치 않는 사람들이 많아. 내가 직접 데려다 주면 금방 들키게 될 거야.”
무슈는 내 말에 얼굴을 굳혔다.
“네 말을 들으면 정말 데려다 주는 거지?”
“다시 말하지만 나도 내 이득을 위해서 널 데려다주는 거야. 내 이득을 위해서라면 넌 반드시 무사히 돌아가야 해.”
“알았어. 믿을게.”
아직 어린 아이라 그런지 조금 순순한 모습이 보였다.
그래도 낯선 사람들에게 납치되어 온 것치고는 침착한 모습이 대견해보이기도 하고.
“그럼 위에서 보자.”
나도 가만히 있을 시간은 없었다.
대족장이 있을 최북단의 통곡의 협곡.
그곳이 목적지였다.
**
홀로 움직이기 위해 클라우디아 후작에게 이빨을 터는 건 쉬운 일이었다.
모하임의 이름을 팔면 간단히 해결.
이를 위해서 미누스에게 전후처리 도중에 미리 언질을 해두었다.
‘무사하군.’
먼저 출발한 티무르와 무슈는 아무 이상 없었다.
아이와 거대한 수인의 조합이었지만 그 모습을 꽁꽁 감싸기도 했고, 무엇보다 티무르의 덩치가 덩치다 보니 겁을 먹은 사람들이 눈길조차 주지 않으려 했다.
일단은 황제나 집회에게 걸리지 않게 신속하게 통공의 협곡으로 향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정말 무슨 계획인지 짐작도 안 돼요.”
옆에서 빠르게 따라오는 피오네가 중얼거렸다.
그녀를 바로 떼어놓으면 당연히 다른 사람들이 의심할 게 뻔했기에 중간까지만 같이 가기로한 상태였다.
“통곡의 협곡으로 갈 거다.”
“······예?”
“상대의 대장을 만나 직접 담판을 지을 거야.”
빠른 걸음으로 열심히 산을 건너던 피오네가 우뚝 멈춰 섰다.
말을 타고 대로로 다니면 위치가 노출되기에 걸어서 산을 넘어가는 중이었는데 한시라도 빨리 가는 게 목적이었다.
“미치셨어요?”
“뭐가?”
“뭐가? 뭐어가아? 지금 자살하러 간다는 말을 하는데 그러면 미쳤다고 말하죠! 제정신이세요?”
“난 미치지 않았어. 대충 계획을 말해 줄 테니까 멈추지 말고 걸어.”
내 말에 피오네가 마나까지 사용하며 냉큼 옆으로 붙었다.
나는 빠르게 걸으며 그녀에게 설명했다.
“이 전쟁이 난 원인부터 말해야겠지.”
“그러게요. 빨리 말씀해주세요.”
“이 전쟁은 대족장의 자식이 납치되면서 벌어진 일이야.”
“납치?”
“그래. 그러니까 납치됐던 아이를 되돌려주면 끝이다.”
내 말에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은 피오네가 고개를 저었다.
“설령 정말로 이 모든 게 납치 때문에 일어났다고 하더라도 다시 되돌려준다고 전쟁이 끝날 거라 생각하시는 거예요? 선배님이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하지는 않으셨을 텐데?”
“난 패가 많아. 네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여러 가지 수를 가지고 있어. 그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피오네의 말대로 난 바보가 아니다.
이미 격해진 전쟁이 단순하게 끝날 거라 생각하면 큰 오산이었다.
하지만 끝낼 자신이 있으니 내가 직접 움직이는 거 아니겠어?
“그러면 그 아이는 지금 선배님의 수중에······.”
“쉿!”
나는 급하게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피오네도 다급하게 멈추며 주변을 경계했다.
이미 저번에 있던 일로 한 번 호되게 당했던 그녀라 바로 대응하는 모습을 보였다.
“적?”
“모르겠다.”
누군가가 있는 건 맞는데 분위기를 보니 야만족들은 아니었다.
그보다 더 음침하고, 끈적이는 느낌.
그리고 그런 느낌은 대개 흑마법사일 확률이 높았다.
“왜 너랑 다니면 이렇게 습격을 받는지 모르겠다.”
“동감이에요.”
피오네는 고개를 끄덕이며 검을 뽑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도망치지 못해요.”
“그래. 네 몸은 네가 간수해라.”
둘이서 대화를 나누고 있자 드디어 초대하지 않은 손님들이 슬금슬금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본 피오네가 눈살을 찌푸렸다.
“용병?”
“······.”
피오네의 말대로 나타난 이들의 행색은 용병의 그것이었다.
하지만 보통의 용병들과 다르게 과묵하게 우리를 바라만 볼 뿐이었다.
“이런. 아르디의 여식도 함께 있는 건가.”
그런 그들 틈으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내 모습을 드러낸 이는 내 예상대로 흑마법사였다.
“누구냐! 누군데 날 알고 있는 거지?”
“모를 수가 없지. 네가 갓난아이였을 때부터 봐왔으니까.”
그 말에서 무언가를 짐작한 듯 피오네가 마른침을 삼켰다.
“페이드?”
“페이드님이 직접 나설 일은 아니지. 안타깝지만 너도 이 현장에 있는 만큼 죽음을 면치는 못하겠구나.”
“왜 우리를 노리는 거지? 여기를 지나가는 건 어떻게 알고······.”
“곧 죽을 자가 질문도 많군. 우리는 암흑가를 지배하는 자들. 우리가 알 수 없는 건 없다.”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는 말이었다.
우리가 여기를 지날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의미도 되고, 또한 내 계획을 알고 있으니 죽인다는 의미도 되는 건가.
“골라스.”
내가 흑마법사를 호명하자 그가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오오? 내 이름을 아는 건가?”
“그리고 마이클 히단, 잭 힐, 발란까지 왔군. 나 하나 잡는 것치고는 호화스러운 명단인데.”
“넌 너무 까불었다, 이 녀석아. 그러게 적당히 했어야지.”
“전쟁에 꽤 많은 투자를 한 모양이군.”
내 말에 골라스의 얼굴이 살짝 상기되었다.
정말로 맞는 모양인데.
“하긴 뒷돈을 가장 많이 챙기는 게 너희 쪽 파벌이니 내가 메이튼을 막아낸 일이 마음에 들지 않았겠지.”
“네가 지금 꾸미고 있는 일을 모두 모른다고 생각하나?”
“알 바 없다.”
스릉-
갈락슈르가 새하얀 몸체를 드러냈다.
“내가 뭘 꾸미든 내 앞을 막는 건 치워내면 그만이야.”
“하! 네가 우리를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냐?”
확실히 적들은 빌런 올스타 멤버라고 해도 될 정도로 악명 높은 이들 뿐이었다.
내가 이름을 모르는 녀석이 단 하나도 없으니 말 다했지.
“게다가 이들만 있는 게 아니야. 이 산은 이미 포위됐다.”
“그거 참 개 같은 소식이군.”
아무래도 고생을 좀 하겠는데.
뚫지 못할 것 같지는 않았다.
언데드까지 쓰면 어떻게든 다 해치울 수 있겠지.
‘전력을 드러내는 것 같아 되도록이면 그러고 싶지는 않지만······.’
선빵필승.
우선은 방심한 적 몇 명 정도는 처리하고 시작할 생각이었다.
스슥-
용병들이 거리를 벌리며 우리를 둥글게 감쌌다.
저 멀리서는 누군가가 화살을 겨누고 있는 것도 느껴졌다.
“선배님.”
“걱정하지 마.”
나는 말하는 동시에 검을 휘둘렀다.
갑작스런 공격에 상대도 살짝 멈칫거렸지만 악명 높은 녀석답게 내 검을 막았다.
아니, 막을 뻔했다.
스각!
푸화아악-
피가 솟구치며 한 명이 무너졌다.
갈락슈르의 예리함과 무결의 힘으로 검까지 갈라내고 상대를 참살한 나는 즉시 다른 녀석에게 공격을 가했다.
“그렇게는 안 되지.”
검은 촉수들이 땅 밑에서 기어 나왔다.
하지만 나도 마법사.
상대의 마법을 내 마법으로 파훼쯤은 할 수 있었다.
콰드드득!
땅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움직이며 촉수들을 짓뭉갰다.
그 사이 적 중에서 가장 강할 것 같은 발란을 향해 검을 뿌렸다.
쇄애액-
검은 오러가 섞인 검풍이 몰아쳤다.
발란은 거대한 몸을 움직이며 내 검풍을 거칠게 맞받아쳤다.
‘생각했던 것보다 단단하네.’
발란이 끄떡없는 걸 보자 조금 거슬렸다.
결국 언데드를 사용해야 하나.
“페이드님?”
그때 골라스의 떨리는 음성이 들려왔다.
페이드가 왔다고?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이 새끼가 어디서 블러핑을······.
두근!
심장의 고동이 강하게 느껴지며 전투 재능이 경종을 울렸다.
그저 속임수일 줄 알았던 골라스의 외침은 그 고동 앞에서 현실이 되었다.
“스스스스.”
이상한 소리를 내며 천천히 다가오는 반질반질한 가면의 인물.
페이드가 직접 찾아왔다.
< 215화. 좁혀오는 위기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