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7화. 북쪽으로 >
‘도대체 어떻게? 아니, 왜?’
피오네는 함께 걷고 있으면서도 동떨어진 기분을 느꼈다.
옆에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인물이 대륙 10인의 1인이자 얼마 전 큰 파문을 일으켰던 에반이라는 게 믿기지가 않았다.
일방적으로 말을 하고 있는 건 아드리아스 크롬웰이었다.
그는 전쟁 이후 지금까지 있었던 일과 현재의 목표를 설명한 참이었다.
“역시. 주군께서는 빛이십니다.”
“그리 거창한 건 아닙니다. 이것도 다 제 이득을 위해서 움직이는 것뿐이지.”
“주군의 대의가 세상을 이롭게 만드는 방향이라면, 그건 충분히 숭고한 가치를 지녔습니다. 그렇게 스스로를 낮출 필요도 없습니다.”
에반이 아드리아스를 따르는 것도 이상했고, 저 이상한 호칭도 희한했다.
빛? 왕? 주군?
초인들의 정신세계는 조금 특이하다는 것을 그녀도 알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에반은 미쳐도 단단히 미친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미친 에반이 아드리아스 크롬웰을 주군으로 따르고 있는 건가?
‘크롬웰에 붙기를 잘했어.’
아무리 봐도 크롬웰은 날아오를 일 밖에 없었다.
이번 일만 무사히 끝난다면, 대륙 10인의 한 명인 에반이 존재하는 크롬웰 가문을 무시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을 거다.
무엇보다 아드리아스 크롬웰이라는 존재가 살아있는 한, 크롬웰은 전성기를 뛰어넘는 힘을 가질 수도 있었다.
“두 분은 어떻게 알게 되신 사이인가요?”
“음? 하하. 생각해보면 첫 인상이 좋지는 않았군요. 적으로 만났었습니다.”
“적?”
피오네는 금방 납득했다.
에반이 아드리아스의 정체를 알고 있다면 성국의 기사였던 그가 흑마법사를 그냥 놔뒀을 리는 없으니까.
궁금한 건 적이었던 관계가 어떻게 이런 식으로 변할 수 있는 것인가였다.
“피오네. 넌 지금 나올 마을에서부터 따로 행동해라.”
“예? 벌써요?”
“너도 봐서 알겠지만 이 전쟁을 멈추길 원치 않는 사람들이 있다. 에반이 합류했다고는 해도 적들은 기상천외한 마법을 사용하는 흑마법사들이야. 잠깐의 방심이 곧 고통스런 죽음으로 이어지겠지.”
“그렇다면 오히려 따로 다니는 게 위험하지 않을까요?”
“적들이 노리는 건 나야. 나와 같이 있지 않는다면 굳이 아르디 후작가를 건드릴 간 큰 놈은 없겠지.”
동네북처럼 보여도 그녀는 제국 후작가의 영애였다.
후작가의 힘은 자그마한 왕국의 왕가와 비견될 정도.
그래도 여전히 납득하지 못한 표정의 피오네를 향해 아드리아스가 단호히 말했다.
“이미 우리는 한 배를 탔어. 내가 널 배신하거나 따로 뭔가를 꾸미는 일은 없을 거니까 안전하게 떨어져 있는 게 나아. 네가 죽으면 나도 골치 아파지거든.”
“······알겠어요.”
피오네는 문득 자괴감이 들었다.
객관적으로 지금의 그녀가 아드리아스와 함께 해도 도움을 줄 방법은 없었다.
그저 뒤에서 조용히 정보공작을 하는 것만이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
“피오네.”
“예.”
“나도 이렇게 갑자기 적이 올 줄은 몰랐어. 알았다면 아마 더 일찍 너를 떼어놓았을 거야. 그리고 그건 말했듯이 그게 나한테도 도움이 되기 때문이고.”
“제가 방해가 된다는 말씀이시죠?”
“헛소리하지 마. 네가 죽으면 정보는 누가 보내지? 넌 네가 해야 할 일이 있어. 그냥 단순히 방해가 돼서 놓고 간다고 생각했다면 실망이다.”
아드리아스의 말에 피오네는 괜히 머쓱하게 시선을 돌렸다.
그의 말이 맞았다.
그녀에게는 그녀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었다.
잠시 동안 자괴감을 느꼈던 게 창피해졌다.
“알아들었어요.”
에반 때문일까?
갑자기 아드리아스가 대단해보이고 그가 하는 일이 굉장히 중요해보였다.
실제로 중요한 일이 맞았지만 그동안은 실감이 나지 않았었다.
그러나 집회의 실력자이자 대륙의 암흑가에 이름을 떨치고 있는 페이드가 모습을 드러내고, 대륙 10인이라 불리는 오러 마스터인 에반이 등장하자 제대로 실감하고 있는 중이었다.
‘에반 경은 전쟁이랑 연관이 없는 것 같지만······.’
만약 에반이 오러 비기를 사용하지 않았으면 그가 에반이라는 사실조차 믿지 못했을 거다.
그만큼 대륙 10인이라는 칭호는 대단한 것이었기에.
“마을이다.”
아드리아스의 말대로 저 앞에 마을이 보이기 시작했다.
피오네는 묘한 아쉬움을 느끼며 앞장섰다.
“그럼 저는 이만 물러날게요.”
“이왕이면 여기서는 오래 머무르지 말고 도시 쪽으로 가는 게 더 안전할 거야.”
“예, 알고 있어요. 그리고 임무도 잊지 않을게요.”
“이번 일이 끝나면 내가 반드시 가문 대 가문으로 보답하지.”
피오네는 고개를 끄덕이며 마을로 향했다.
그리고 아드리아스와 에반은 계속해서 북쪽을 향해 걸었다.
“혼자네.”
혼자 남게 된 피오네는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지금의 아드리아스 크롬웰한테 에반이라는 날개까지 달리면 볼 만하겠어. 게다가 모하임 가의 혼약 제의도 거절했음에도 우호를 유지할 정도로 그 능력의 뛰어남이 입증됐지.’
사실 페이드의 수하들에게 습격을 받기 전까지는 내심 후회를 하고 있었다.
아드리아스의 거래는 들켰다간 자칫 황궁의 진노를 사게 될 수도 있는 일.
그렇기에 일단 아드리아스와 헤어진 후에 간을 좀 보려했었지만 생각이 바뀌었다.
“이왕 결정했으면 화끈하게 밀어줘야겠지.”
그녀는 지금쯤 전장에 있을 지도 모르는 자신의 아버지에게 보낼 서신을 고민했다.
**
“세력을 만들고 계시다고요?”
“그렇습니다.”
에반은 아무렇지도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작은 모래성이라도 만들었다는 듯이 평온한 말투였다.
“정확히 무슨 세력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빛은 어둠 속에서 더욱 빛나는 법이지만 왕께서 직접 들어갈 필요는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직접 그 어둠이 되기로 했죠. 만약 처리하기 힘든 일이 있으시다면 저와 제가 만든 세력을 사용하시면 됩니다.”
“설마 그래서 페이드와 다퉜던 겁니까?”
“그렇습니다, 주군. 사실 다툰 것도 아니고 일방적으로 제가 쫓은 거지만요. 녀석이 계속해서 도망쳤고 그렇게 쫓다보니 우연히 주군을 만나 뵙게 되었습니다.”
이거 완전 터무니없는 양반이네.
페이드를 잡겠다는 건 한 마디로 제국의 암흑가를 접수하겠다는 소리잖아.
천하의 대륙 10인 중 1인이 하는 소리라 헛소리 같지 않다는 게 아이러니였지만.
“페이드는 집회의 힘으로 대륙 곳곳에 손아귀를 뻗고 있습니다. 저는 고작해야 제국 내부에서만 놀고 있죠. 물론 곧 잡아먹을 먹잇감이긴 합니다만.”
“정말 놀랐습니다.”
“하하! 사실 놀래켜드리려고 준비한 게 맞습니다. 원래는 제국의 암흑가를 전부 접수한 뒤에 멋있게 나타나려고 했지요.”
뿌듯해하는 에반의 표정을 보자 그가 원래 내가 알던 에반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히든 던전에서 보았던 그 카리스마나 신을 향한 광기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조금 달라지신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까? 아마 제가 변한 건 주군의 존재 때문일 겁니다. 주군께서 계시다는 것을 몰랐다면 아마 계속 성국의 개로 살았겠죠.”
그는 조용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신은 존재합니다. 저도 그 장소에 있었으니 확실하죠. 그러나 신을 만남으로서 오히려 제 신앙심이 무너졌습니다. 제게는 이제 빛 밖에 없습니다. 바로 주군이시죠.”
“그게 에반에게 편하다면 딱히 상관은 없습니다. 원하신다면 정식으로 기사 서임을 해드릴 수도 있습니다.”
“영광입니다, 왕이시여!”
이게 웬 굴러 들어온 호박이냐.
아예 목줄을 단단히 잡아둬야지.
근데 내가 의도치 않았던 인물들이 점점 내 주위를 채우는 것 같았다.
막상 신경 쓰고 있는 플레이어블들은 다 그대로인 것 같은데······.
‘좋은 게 좋은 거지.’
에반과 대충 이야기를 마쳤으니 나는 다시 티무르에게 집중했다.
이쪽이 페이드로 인해 잠시 소란스러웠다면 그쪽은 현재진행형으로 숨 가쁜 상황이었다.
“괜찮겠지.”
“뭐라고 하셨습니까?”
“아닙니다. 혼잣말이에요.”
원래였으면 니켈을 무슈의 곁에 붙여주는 건데 니켈은 이미 다른 일을 하고 있었다.
네크로맨서이기에 가능한 복합 계획.
아직 니켈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됐다.
가장 중요한 건 무슈가 무사히 통곡의 협곡까지 가는 건데······.
‘티무르.’
**
파앙---!
주먹에서 폭발이 터져 나왔다.
그와 함께 검은 갑주를 입은 기사가 저 멀리 튕겨져 나갔다.
“저건 또 뭐야?”
습격을 감행한 흑의 기사들이 당황하고 털 하나 없는 고양잇과 맹수의 수인이 다시 자세를 가다듬었다.
-크헝!
그리고 바로 옆에서는 거대한 낫이 춤을 추고 있었다.
“놀아보자!”
이색적인 외모를 지닌 소녀가 검은 갑옷의 기사들을 상대로 이리저리 휘젓고 다녔다.
“하하하하! 고작 이 정도? 더 힘내!”
“설마 루나 펜드래곤? 저 마녀부터 죽여라.”
대장격인 검은 기사가 외쳤다.
그러나 그의 명령은 제대로 실행될 수 없었다.
“밥값을 할 때군.”
어느새 조용히 내려앉은 한 사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그 한 번의 움직임으로 검은 갑옷의 기사들은 전부 몸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전신을 짓누르는 마나의 기운.
실력이 뛰어날수록 그 사내의 기운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재미없어! 시시해!”
오팔의 눈을 한 소녀, 루나가 투덜댔다.
남자의 기운이 적과 아군을 가리지 않았음에도 자유로운 그 모습에 기운을 발산하던 남자가 이채를 띄었다.
“아드리아스가 부른 녀석답군.”
“응? 응! 아드리아스는 내 친구야!”
전혀 위기감이 느껴지지 않는 그 모습에 결국 티무르의 옆에서 조용히 있던 무슈가 입을 열었다.
“멋있어······.”
모두가 각자의 생각에 빠진 가운데 태클을 걸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오직 티무르만이 우직하게 무슈를 호위하며 서있을 뿐.
기사가 간신히 입을 열어 물었다.
“네 녀석은······뭐냐?”
“알 바 없다.”
서걱-
막시민이 무심히 검을 휘두르자 입을 열었던 이는 그대로 절명했다.
나머지 인원들이 그 찰나의 시간에 마비되었던 몸을 풀었지만 막시민과 루나를 막을 수 있는 이는 단 하나도 없었다.
툭, 투둑-
곧 열 명 정도 되는 소속을 알 수 없는 기사들이 전부 쓰러지고 막시민이 중얼거렸다.
“달그림자들이군. 수색꾼들이다. 아마 진짜는 아직 안 왔겠지.”
이미 제국에게 쫓겨본 기억이 있는 그는 죽은 이들을 차갑게 내려다보았다.
아직 오러 마스터가 되기 전이었기에 생사를 넘나들었던 그때의 기억은 영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다.
“그럼 더 강한 애들이 오는 거야? 좋아!”
루나가 기쁨의 함성을 지르자 무슈가 감탄했다.
“정말 대단해. 우리 부족의 대전사들 같아.”
“대전사? 강해? 싸워보고 싶어.”
“돌아가면 내가 부탁해볼게.”
어느새 죽이 잘 맞는 둘을 티무르가 옆에서 조용히 지켜보고, 그런 티무르의 시선은 아드리아스에게 전달되었다.
[레버넌트 버서커(전설)의 진화 가능성 39%]
[진화를 할 경우 6가지의 분기가 존재합니다.]
[진화를 하시겠습니까?]
< 217화. 북쪽으로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