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3화. 전후처리 >
보르기옌을 제외한 모든 전장은 소강상태였다.
사실 소강상태라고 하기도 애매한 게 모여 있는 병력으로 들이닥치기만 하면 이길 수 있을 정도로 전력의 차가 많이 나고 있었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귀족들이 문제였다.
유리한 상황이 되자 너도 나도 최대한 병력을 아낄 생각에 선뜻 나서질 않았다.
“덕분에 우리가 모조리 쓸어먹을 수 있게 됐다.”
전후처리를 끝마치고 영주성을 차지한 미누스가 술을 따라 마시며 웃었다.
“일단 보르기옌을 지킨 걸로 꽤 큰 전공을 세웠지만 네가 원하는 수준은 아니겠지.”
“말을 아끼겠습니다.”
“하하! 나한테는 그냥 솔직하게 말해도 돼.”
옆에 있던 클루소에게도 직접 술을 따라준 미누스가 은근하게 말했다.
“크롬웰을 되찾기를 원하잖아? 안 그래?”
“당연히 원합니다. 하지만 너무 욕심내지 않고 천천히 가려고 할 뿐이죠.”
“아니. 넌 조금 더 욕심을 내도 돼. 크롬웰이 남부 지역이던가? 정확히는 남서부겠군. 마침 우리와도 거리가 가까우니 나쁘지 않아.”
모르는 사람들이 옆에서 볼 때는 내가 영지를 원해서 뛰어다닌다고 생각하겠지.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도록 유도한 것도 있었고.
하지만 내 진짜 목적은 그저 플레이어블의 생존과 이후에 연계될 멸망급 시나리오를 사전에 막는 것이었다.
영지를 받으면 뭐하나.
멸망급 시나리오를 막지 못하면 다 필요 없는 건데.
“메이튼 습격과 이번 보르기옌 수성전. 이 두 가지만 해도 영지 하나 정도는 확정이야. 특히 메이튼을 막지 못했으면 전쟁이 이리 쉽게 풀리지 않았을 테니까 폐하께서도 영지를 주는 것에 대해 뭐라 하지 못할 정도의 전공이니까 자신감을 가져라.”
“예, 감사합니다.”
내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자 함께 있던 대너드가 물었다.
“내일쯤 도착한다는 클라우디아의 지원과 다시 되돌아가시는 거겠지요?”
“그럴 것 같습니다.”
“그러지 말고 저희와 함께하는 건 어떻습니까?”
대너드의 물음에 미누스도 괜찮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 아드리아스 크롬웰, 너도 우리랑 같이 가는 게 좋겠는데?”
“죄송하지만 클라우디아에 아직 용무가 남아있습니다.”
“그래? 아쉽군.”
쿨하게 포기하는 미누스를 보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억지로라도 나를 데려가려고 했으면 충분히 가능할 정도의 권력자가 그였으니까.
“그보다 클라우디아에 남아있다는 용무가 궁금한데 말 해 줄 수 있는 거냐?”
“별 것 아닙니다. 누군가를 만나기로 약속해서요.”
“고작 그런 일로 나와 같이 못 가준다는 게 조금 괘씸하지만······그럴 수 있지.”
그는 웃어넘기며 계속해서 술을 들이 부었다.
점차 술기운이 무르익어가자 나는 양해를 구하고 자연스레 자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모하임 측의 사람들은 하나 같이 술고래뿐이어서 주량이 어마어마했다.
“크롬웰 각하.”
밖으로 나오는 나를 누군가가 기다렸다는 듯이 불러 세웠다.
태양의 기사단 3조장이자 오러 마스터인 레이튼 클락이 복도에 선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레이튼 경. 이런 곳에 계실 줄은 몰랐군요.”
“잠깐 바람을 쐬러 나가다 크롬웰 각하께서 마침 나오시는 모습을 봤습니다. 안 그래도 각하와 이야기를 좀 나누고 싶었는데 잘 됐군요.”
당연한 말이지만 태양 기사단은 황제 직속의 기사단으로서 수족의 일부를 담당한다.
그런 만큼 지금의 내 언행이 황제에게 전해질 것은 당연한 일.
피오네가 대놓고 황제에게 보고를 한다고 하지만 그녀는 자신에게 유리한 내용으로 정보를 숨긴 채 보고를 올릴 타입이라면 레이튼은 그 반대.
“저는 언제나 환영입니다. 레이튼 경과 같은 오러 마스터 검사와의 대화라니 오히려 제가 먼저 권했어야 하는데 실례였군요.”
“아닙니다. 말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좀 걸으실까요?”
“좋습니다.”
영주성 앞에는 넓은 정원이 있었다.
나는 레이튼의 옆을 걸으며 그가 무슨 말을 할지 기다렸다.
“각하께서 보여주신 메이튼에서의 활약은 정말 경이로웠습니다. 이번 보르기옌 수성을 경험하며 전쟁이 보통 일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 번 느꼈는데 각하께서는 그리 손쉽게 해결하시니 오러 마스터라 불리는 저로서는 부끄러울 따름이더군요.”
“레이튼 경께서 이곳에 계시지 않았다면 보르기옌은 모하임 공작가가 당도하기도 전에 무너졌을 겁니다. 본인을 낮추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닙니다. 저는 진심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각하께서는 메이튼이 습격 받을 거라는 사실을 미리 알고 계셨던 겁니까? 정말 기가 막힌 수로 막아낸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저라고 알았겠습니까. 그냥 운 좋게 얻어 걸렸을 뿐입니다.”
내게 시선을 맞추는 레이튼의 표정은 고요했다.
아무 의도도 없는, 마치 순수하게 궁금해서 물어보는 듯한 그 태도에 나도 어색하게 웃어 보이며 대답했다.
“운이 좋았던 일로 주변에서 칭찬만 해주니 부끄러울 따름이군요.”
“운도 실력이라고 생각합니다. 각하께서는 정말 대단한 일을 하신 게 맞고요. 메이튼의 전략적 중요성을 생각하면 당연한 말입니다. 그리고 그런 영웅이 위험에 빠졌다고 들었을 때는 정말 놀랐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군요. 무사하셔서 다행이었습니다.”
“클라우디아로 향하는 길에 그런 위험이 있을 거라고는 예상도 못했죠.”
“피오네 경께서 적의 오러 마스터가 각하를 습격했다는 말을 전했을 때는 사실 이미 늦었구나 싶었습니다. 물론 최대한 빨리 가기는 했습니다만 오러 마스터를 상대로는 대부분 얼마 버티지 못하니 말이죠.”
“다행히 오러 마스터가 아니었습니다. 오러 마스터였으면 이렇게 만나는 일도 없었겠네요.”
일단은 자연스럽게 넘겨봤지만 믿을지 안 믿을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믿을 수밖에 없을 거다.
아직 아카데미를 재학 중인 학생이 오러 마스터를 죽일 수 있을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 할테니까.
“다른 도움은 없이 혼자서 그 위기 상황을 벗어나신 겁니까?”
“예. 우두머리가 방심한 틈을 타 공격해서 큰 부상을 입힌 뒤에 도망쳤습니다. 다행히 쫓아오지는 않더군요.”
이미 죽은 자들의 시신은 내가 전부 챙겼기에 증거도 없었다.
굳이 알아내려면 루나의 강령술이나 엄청난 수준의 정령술사로 흔적을 읽는 수밖에 없는데 그럴 리는 없었다.
“어쨌든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딱히 뭔가를 의심하는 눈초리는 아니었다.
말 그대로 순수하게 궁금해서 하는 것 같은 질문들.
물론 굳이 나를 찾아와서 이러는 걸 보면 위에서 미리 언질을 받은 모양인데 나와 황제의 사이를 모르는 눈치였다.
“제가 너무 오래 붙잡아두었군요. 멀리서 오셔서 전투에도 참여해 피곤하실 텐데 이만 물러나 보겠습니다.”
“아닙니다. 레이튼 경과의 대화는 언제나 환영입니다. 다음에 시간이 된다면 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 보고 싶군요.”
“기억해두겠습니다.”
레이튼과의 대화가 일단락되고 나는 천천히 방으로 돌아왔다.
영주성 내의 귀빈실을 사용하게 된 덕분에 주변은 한산했다.
방이 별채 별로 띄엄띄엄 배치가 된 덕분이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주변으로 마나 디텍트를 한 번 돌린 후에 언데드 하나를 소환했다.
-객!
썩은 성대로 울음소리조차 제대로 내지 못하는 좀비 개구리였다.
“아, 아. 들리십니까?”
-객! 잘 들리네.
개구리가 말을 했다.
정확히는 소리를 전달해왔다.
-자네는 무사한가?
상대의 정체는 모른.
이 좀비 개구리도 모른이 내게 건네준 연락 수단이었다.
이게 참 편리한 게, 소환해제를 시킬 수 있기에 증거를 남길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거기다 상대와 짝이 맞는 좀비 개구리만 있다면 다른 통신 아티팩트와 달리 거리와 상관없이 연락이 가능했다.
대신 관리하려면 무조건 네크로맨서가 필요했기에 아무나 가질 수는 없는 아이템.
“예, 여기는 아무 문제없습니다. 혹시 어디쯤 오셨습니까?”
-이틀이면 될 것 같네. 근데 한 가지 문제가 있어.
모른의 말에 나도 모르게 인상이 찌푸려졌다.
그가 문제라고 할 정도면 절대 가벼운 일은 아닐 거라는 게 느껴졌다.
“문제라니요?”
-들려온 정보에 의하면 아무래도 황제가 눈치를 챈 것 같다. 달그림자들이 움직였다는 첩보가 전해졌어.
달그림자.
여타 황가 직속의 기사단들과는 다르게 비밀리에 만들어진 부대.
그러나 아는 사람은 이미 다 알고 있는 이름이었다.
-아무래도 내가 분노를 데리고 들어온 게 어디서 새어나간 모양이야.
“집회겠군요.”
-아무래도 그런 것 같구나.
누가 밀고했는지는 알 수 없어도 황궁의 정보력만으로 알아내지는 못했을 거다.
아마 타 파벌 중 한 곳에서 우리를 엿 먹이려고 한 거겠지.
-걱정은 하지 말거라. 고작 그런 황제의 개들에게 당하지는 않으니. 문제라면 자네가 분노를 데리고 갈 때겠군. 괜찮겠느냐?
이번 계획은 무조건 내가 직접 분노를 데리고 가야했다.
미래를 알고 있는 나만이 가능한 일이었다.
“저 밖에 할 수 없습니다.”
-허허. 무슨 일을 꾸미는지는 몰라도 자신감이 보기 좋군. 나조차도 할 수 없는 일인 게지?
“모른뿐만 아니라 저를 제외한 그 누구도 힘들 겁니다.”
멸망급 시나리오의 사전 차단.
아예 시나리오 자체를 없는 일로 만드는 건 미래를 알고 계획을 세운 나 밖에 못하겠지.
이번 시나리오뿐만 아니라 웬만한 멸망급 시나리오는 전부 사전에 차단할 생각이었다.
모두 막을 수 있을 거라는 오만한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저 난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할 뿐.
“그럼 이틀 뒤에 뵙겠습니다.”
-자네에게 분노를 건네주고 나도 나름 도움을 주도록 하겠네. 달그림자는 드러나선 안 되는 조직인 만큼 노부가 건드려도 제국 측에서 공론화시키지 못할 것이야. 허허.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래. 끊게나.
통신이 끝났다.
좀비 개구리를 소환 해제시킨 나는 그대로 침대에 걸터앉았다.
어쩌면 이번 계획은 얻는 것 하나 없이 위험부담만 큰 일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포기할 수 없는 건 역시 멸망급 시나리오의 존재 때문.
‘이미 이득은 충분하다.’
생각해보면 이미 어마어마한 전공을 쌓고 있었다.
속이 시커멓지만 어쨌든 모하임의 모든 전공은 우리 크롬웰 가문의 차지.
게다가 상단의 보급 관련 일로도 보이지 않는 전공을 챙기고 있었다.
아마 전쟁이 끝나고 이견이 없다면 작은 영지 하나쯤은 수여 받겠지.
내 작위가 백작인 만큼 말이 나올 일도 없었다.
똑똑.
한참을 침대에 앉아 생각에 잠겨있자 누군가가 문을 두드려왔다.
이미 밤이 꽤 늦은 시간이었기에 조금 의문이 들었지만 이내 바깥에서 느껴지는 익숙한 인기척에 그 주인이 누군지 눈치 챘다.
“들어오세요.”
끼익-
문이 천천히 열리며 잠옷차림의 비비안이 들어왔다.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인 그녀는 어쩐 일인지 평소보다 더 차가워 보였다.
“비비안, 무슨 일이세요?”
“······.”
그녀는 방에 들어온 채 말없이 서있었다.
그 모습이 왠지 공포영화의 한 장면처럼 느껴져 일단 자리에서 일어나 넓은 방 한가운데에 있는 테이블로 향했다.
“이쪽에 앉으세요.”
“응.”
드디어 입을 연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내가 앉은 테이블 쪽으로 다가왔다.
무슨 일로 왔는지는 일단 미뤄두고, 그녀가 무사한 모습을 보자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치신 곳은 없죠? 어디 부상이라던가?”
“없어.”
그녀는 무뚝뚝하게 대답하더니 고개를 도리질했다.
그리고 문득 멈춰서는 나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무슨 일 있으세요?”
“아드리아스.”
“예, 말씀하세요.”
“혹시 숨기는 거 있어?”
뜬금없는 말에 고개가 자연스레 모로 기울었다.
내가 비비안한테 숨기긴 뭘 숨겨?
“숨겨요? 뭐를요?”
“오늘 어떤 언데드 검사가 나를 구해줬어.”
그녀가 저 말을 꺼낸 순간 등허리가 싸해졌다.
왠지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지만 애써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흑마법사들끼리 내전이라도 일어난 걸까요?”
“난 빛나는 재능을 가지고 있어.”
갑자기 영문 모를 말이 튀어나와 말이 끊겨버렸다.
그 말이 지금 왜 나와.
“아드리아스도 알고 있지?”
“예. 비비안은 빛나는 재능을 가지고 계시죠.”
“그래서 난 알 수 있어. 그 언데드 검사가 휘둘렀던 검이 아드리아스랑 느낌이 비슷하다는 걸.”
“그렇습니까? 그거 참 신기하네요. 저도 한 번 만나보고 싶습니다.”
“아드리아스.”
그녀가 또박또박 내 이름을 불렀다.
“숨기는 거, 없어?”
그리고 다시 한 번 물음을 던져왔다.
< 213화. 전후처리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