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화. 협박, 거래 그리고 오해 >
“원죄? 그게 뭐지?”
나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그녀를 향해 도리어 되물었다.
설마 피오네가 원죄의 존재를 알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지만 일단은 태연하게 대응했다.
“모를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이미 저희 쪽에서 반쯤은 확신하고 있으니까요.”
“정말로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군. 원죄가 뭐지?”
“아드리아스 크롬웰. 당신이 갑자기 그렇게 강해진 이유, 그건 아무리 생각해도 원죄의 존재 밖에 설명이 되질 않아요.”
“내가 강해진 건 특이체질 때문이다. 그리고 제대로 선배라고 불러라, 피오네.”
일부러 뜬금없는 부분을 지적했다.
이래야지 조금이라도 덜 의심을 사지 않을까 싶어서 말한 건데 아무래도 그녀는 제대로 작정한 모양이었다.
“원래는 천천히 접근하려고 했지만 전쟁 때문에 가문의 사정이 급해졌어요. 그래서 당신과 거래를 하려고 합니다.”
이미 내게 원죄가 있다고 가정하고 말하는 그녀를 보자 시치미를 떼는 게 별 의미가 없음을 알았다.
실제로 내게 원죄가 있든 없든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거래?”
“이번 전쟁 참여하실 건가요?”
“네가 뭘 원하는지 모르겠군. 일단 나서긴 할 거다.”
“그럼 제가 당신의 담당자가 되게 해주세요.”
조금 전에 데오스가 담당자 배정에 관해 이야기를 했었는데 그와 관련된 이야기인가?
그런데 담당자가 되고, 안 되고는 둘째 치고 왜 원하는 거지?
“만약 그렇게 해주신다면 황궁에 보고를 올리지 않을게요.”
“무슨 보고를 올린다는 건지 모르겠군.”
“당신이 흑마법사라는 사실과 원죄를 가지고 있다는 보고요.”
원죄는 그렇다 치고 내가 흑마법사인 것도 유추해낸 건가?
아니면 확실한 정보가 있는 건가?
전혀 의외의 인물에게서 골머리를 앓게 생겼다.
물론 난 그 사실을 부정할 거지만 그녀가 동네방네 떠들고 다니면 일이 커지게 되겠지.
그렇다고 여기서 저 거래에 응하면 내가 흑마법사라는 걸 시인하는 꼴이다.
앞으로 저 녀석은 그 사실을 두고두고 우려먹을 가능성이 높았다.
“제발 부탁드려요. 그냥 저를 데리고 다니시기만 하면 돼요.”
“날 흑마법사라고 모함하는 널 전쟁통에 데리고 다니라고?”
“알았어요. 그럼 저도 제 약점을 말할게요. 그러면 공평한 거래겠죠?”
피오네는 숨을 고르며 주변을 다시 확인하더니 조그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르디 가문은 흑마법사 집회와 거래하고 있어요. 그중에서도 특히 페이드의 파벌과 꽤 연이 닿아있죠.”
이건 좀 놀라운 정보다.
확실히 이 정보가 세간에 알려진다면 아르디 후작가는 몰락의 길을 걷겠지.
하지만 그렇기에 그녀가 내 정체를 아는 것에 대해 신빙성이 생겼다.
이로서 서로가 서로의 약점을 쥐고 있는 셈.
“어때요? 이 정도면 제 말을 믿을 만한가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들으라고? 그리고 다시 말하지만 난 원죄라는 게 뭔지도 모르고 흑마법사도 아니다.”
“예, 예. 알겠어요. 아닌 거 알겠으니까 일단 거래를 하자고요.”
그녀는 다가오는 열차를 가리키며 말했다.
“일단 선배님 방으로 가요. 거기서 더 자세히 얘기하죠. 어때요?”
“무슨 더 자세한 이야기? 난 더 할 얘기 없다.”
열차가 도착하고 나는 그대로 올라탔다.
피오네는 살기어린 표정으로 열차에 타지 않은 채 나를 노려보더니 말했다.
“전 당신을 감시하기 위해 이 아카데미에 입학한 거예요. 원래는 예정에 없던 일이죠. 당신이 이런 식으로 비협조적인 모습을 보인다면 전 정말 황궁에 보고를 올릴 수밖에 없습니다. 아르디 가문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 방법 밖에 없거든요.”
조금 전과 달리 어색했던 모습이 사라지고 진심이 담겨 있었다.
알고 있는 정보가 사실이든 아니든 진짜로 보고를 올리겠다는 의지가 엿보였다.
“하아. 타라.”
결국 내가 한발 물러서는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왜 그렇게까지 나와 함께 하려는지 몰라도 그녀가 방금 한 말이 사실이라면 정말 골치 아파진다.
그리고 그녀의 말에 신빙성이 있는 게, 지금까지 게임 속에서는 단 한번도 그녀가 로들렌 아카데미에 입학했던 적이 없기 때문이다.
아마 나를 감시하기 위해 입학했다는 그녀의 말은 사실일 듯싶었다.
“잘 생각하셨어요.”
금세 표정이 변하며 싱글벙글 미소 짓는 피오네를 보자 현대에서 첩보 역할을 수행했던 몇몇 인원들이 떠올랐다.
수준으로 따지면 현대의 인물들이 기술적으로 훨씬 정교하고 뛰어났지만 저 가면을 쓴 표정이 그들을 떠올리게 하는 건 사실이었다.
“문 닫힌다. 빨리 타기나 해.”
전혀 예상치 못한 문제가 생겼지만 머리를 싸매기보단 어떻게 하면 별 문제없이 해결할까를 고민했다.
아무래도 그녀를 데리고 전장에 나서야 하는 건 기정사실인 것 같았고······.
‘흑마법사인 걸 이미 들켰으니 숨길 필요도 없나.’
내가 자신 있게 전쟁에 나설 수 있는 이유는 오직 네크로맨서라는 사실 때문이다.
이미 그랑디스 왕국에서 오크와의 전쟁을 경험해보았기에 그 강함은 충분히 실감했다.
다른 이들과 달리 피오네는 이미 알고 있으니 숨기지 않아도 상관은 없지만······.
“역시 꺼림칙하네.”
“뭐가요?”
“너.”
나는 한숨을 내쉬며 다시 생각에 잠겼다.
잠시 후 열차가 기숙사 근처의 역으로 도착하고 나와 피오네는 함께 기숙사로 들어왔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성별에 따른 기숙사는 철저히 분리되어 있었고, 학생들은 항상 편법과 잔머리로 이러한 문제를 해결했다.
“아, 선배님은 마법사셨죠?”
나는 깔끔하게 마법을 이용해 그녀의 기척을 없앴다.
그리고 원래였으면 기숙사에 등록이 되지 않은 사람이 들어오면 울렸어야할 알람 마법도 가볍게 무력화시켰다.
그리고 방에 들어오자 피오네는 자연스럽게 침대에 엉덩이를 붙였다.
“예상했던 대로 깔끔하네요. 선배님 이미지랑 딱 맞는 방이에요.”
“피오네. 일단 네가 내 담당자가 되는 건 허락해주는 방향으로 생각하고 있어. 성가시지만 네 가문이 위급해보이니 이번 한번은 도와주지.”
“어머. 친절하셔라.”
“그렇게 비꼬지 마라. 네가 부탁하는 입장이란 건 잊지 않았겠지?”
“선배님도 정체가 들킬까봐 초조해서 그런 건 아니시죠? 사실 조금 전에도 선배님을 만나지 못했으면 그냥 바로 보고를 올릴 생각이었어요. 어쩌면 선배님의 운이 더 좋은 걸 수도 있는데요?”
“다시 말하지만 난 네가 말하는 게 뭔지 모른다.”
“마음대로 시치미 떼세요. 어차피 페이드한테 다 들은 이야기니까.”
페이드, 이 새끼.
내가 모른의 파벌을 삼켜서 성장하는 걸 견제하는 건가?
솔직히 말하면 집회에서 헤이겔과 더불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인물이라 그 속내를 모르겠다.
하지만 확실한 건 그가 내 정보를 팔았다는 것.
집회 가입자의 정보를 외부에 알리는 것은 집회의 금기 중 하나였다.
“됐다. 페이드인지 뭔지도 난 잘 모르겠고, 이유나 들어보자.”
“무슨 이유요?”
“왜 네가 날 그렇게 따라나서려는 지를 알아야할 거 아니야. 가문 이야기는 또 뭐고.”
“간단해요. 선배님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사실 이 전쟁이 조금 밀리는 상황이거든요. 그리고 북부에 위치한 제 가문은 곧 선봉에 서게 돼요.”
그녀는 거기까지 말하고 목이 마르다는 말을 해왔다.
뻔뻔한 그녀의 말에 대충 물을 떠다주자 그녀는 목을 축이고 말을 이었다.
“아버지께서 전언이 왔어요. 생각보다 야만족은 강하고 이대로라면 우리 가문은 그대로 갈려나갈 거라는 내용이었죠. 이를 막기 위해서는 황제 폐하께 거래를 제안해야 했어요.”
“황제 폐하께 거래를?”
“예. 사실 제 생각이었어요. 제가 떠올린 계획이죠.”
당돌한 녀석.
황제가 어떤 놈인지 몰라서 이렇게 당당한 걸까.
아마 황제가 흑마법사들과 거래를 하고 있다는 사실도 모를 것 같은데.
“선배님은 생각보다 황제 폐하께서 큰 관심을 가지고 계세요. 아마 원죄 때문이겠죠. 하지만 아직 원죄의 작동 원리나 알려진 정보가 없다보니 조심하고 있을 뿐이에요. 만약 선배님이 죽으면 원죄도 같이 사라지는 구조라면 큰일이니까요.”
말을 들어보면 황제도 이미 나한테 원죄가 있다는 걸 기정사실화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안 그래도 해결해야 할 일이 태산인데 황제까지 신경을 쓰이게 만드네.
내가 대답 없이 듣고만 있자 피오네가 계속해서 말했다.
“그래서 이번에 선배님을 데리고 흥정을 하려고요.”
“흥정?”
“예. 제가 전장에 나서는 선배를 따라나서서 황제 폐하의 감시자가 되는 거죠. 이를 조건으로 가문을 선봉에서 빼달라고 부탁할 거예요.”
“겨우 그걸로 거래가 될 거라고 생각해?”
“역시 선배님은 모르시는군요. 당신이 가진 가치를.”
그녀가 음흉하게 웃어보였다.
하긴 당연하다면 당연한 이야기겠지.
나는 황제가 바라는 신들의 세계를 여는 최종 열쇠인 ‘원죄’를 지닌 자.
원죄가 없으면 다른 모든 죄악들도 의미가 없어진다.
“어쨌든 이게 다에요.”
“뭔 소린지는 잘 모르겠지만 결국 나를 감시하는 대가로 아르디 가문이 무사하다는 얘기냐?”
“예, 맞아요.”
“알았다. 대신 한 가지 이야기해둘게 있어.”
“뭔데요?”
“전장에서는 네 스스로 네 몸을 챙겨라.”
“당연하죠. 그 정도도 모를까 봐요?”
“아니, 넌 몰라.”
나는 진지하게 그녀의 눈을 마주보고 말했다.
“전쟁은, 진짜 괴물이다.”
**
새 학기가 시작되었음에도 아카데미의 분위기는 흉흉했다.
드디어 퍼지기 시작한 전선의 상황은 생각보다 치열했고, 수많은 이들의 전사 소식이 봄바람 대신 퍼져나갔다.
그리고 마침내 아카데미에도 모병관이 도착했다.
“로들렌을 위해 나서주신 학생 여러분들께 대단히 감사드립니다.”
모병관인 제 3 근위기사단장 에우디 카롬페 백작이 인사를 했다.
오러 마스터로도 유명한 그가 직접 왔다는 사실에 모병에 응했던 많은 학생들이 전의에 불타올랐다.
“실화냐. 에우디 단장님이 직접 왔잖아!”
“우리 잘만하면 단장님의 눈에 들어서 근위기사로 입단할 수도 있는 거 아니야?”
그 모습을 지켜보던 디에네는 한숨을 내쉬었다.
“얘네 들은 지금 우리가 아카데미 실습이라도 나가는지 아는 거야?”
“침울해 있는 것보다는 낫잖아.”
유리히가 쓴웃음을 지으며 어울려주었다.
그런 그들 옆으로는 비비안과 루시아가 있었다.
“언니, 정말 괜찮겠어요?”
“응.”
“우리는 지금만 잠깐 같이 있고 각자 가문의 휘하로 배정이 될 거예요. 근데 언니는······.”
“괜찮아. 좋은 경험이라고 생각해.”
비비안이 묵묵히 대답했다.
그런 그들의 대화를 들은 디에네도 살짝 걱정스러운 모습으로 말했다.
“비비안. 괜히 초를 치는 것 같아서 미안한데 우리 아버지께서 말씀하시기를 전장의 상황이 좋지는 않데. 차라리 나랑 같이 가는 건 어때?”
“고마워. 그래도 괜찮아.”
비비안은 흐릿하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 모습에서 꺾을 수 없는 고집을 읽은 일행들은 그저 한숨만 내쉬었다.
“이럴 때 그 괴물 선배는 어디 간 거야.”
루시아는 아직까지도 집결 장소에 모습을 보이지 않는 아드리아스를 찾았다.
이미 그가 참전한다는 이야기는 들었기에 시간이 지났음에도 보이지 않는 그의 모습에 괜히 속이 타들어갔다.
“어? 저기 아드리아스 아니야?”
그때 유리히가 어딘가를 보며 손짓했다.
그녀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고 그들은 아드리아스가 누군가와 함께 있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쟤는 누군데 아드리아스 옆에 있어?”
멀리 있어서 들리지는 않았지만 아드리아스 옆에서 한 기사학부 여학생이 재잘대고 있었다.
아드리아스는 대답 없이 그저 듣고만 있었지만 누가 보아도 둘이 함께 하는 것처럼 보였다.
“아드리아스 크롬웰.”
마침 에우디가 그를 발견하고 이름을 불렀다.
호명이 된 아드리아스는 뚜벅뚜벅 걸어오더니 살짝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자네도 이번 전쟁에 참가한다고 들었는데, 내가 전해듣기로는 따로 참여한다지?”
“예. 그렇게 됐습니다.”
“그쪽 아가씨가 크롬웰 백작을 담당하게 될 피오네 아르디인가?”
“그렇습니다.”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디에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담당? 쟤 혼자만 간다고 하지 않았어?”
“그러게.”
갑자기 스산한 공기가 주변으로 퍼졌다.
말을 하던 유리히는 몸을 흠칫 떨며 양팔을 비볐다.
“뭐지? 갑자기 싸한데?”
“저, 비비안 언니?”
스산한 기운의 정체를 눈치 챈 루시아가 조심스레 비비안을 불렀다.
그러나 비비안은 미동조차 없이 어느 한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차갑게 굳은 그녀의 시선은 정확히 아드리아스와 피오네에게 향해 있었다.
< 199화. 협박, 거래 그리고 오해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