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화. 두려움 >
주말은 금방 지나갔다.
아이비는 먼저 말했던 대로 조금 더 노아의 곁에 붙어있기로 했기에 살렘에게는 미리 당부를 해두었다.
흑마법사를 극도로 혐오하는 그녀가 살렘의 정체를 알게 된 순간 어찌 변할지는 나조차 예상할 수 없었기에 조심했다.
모른과 루나는 우리와 비슷한 시간에 같이 떠났다.
아무래도 이번 전쟁으로 인해 집회 측도 바쁜 모양이었는데 무슨 일을 꾸미는지 묻자 모른은 그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보일 뿐이었다.
“귀여웠어.”
돌아가는 열차에서 비비안이 루나가 사준 옷핀을 만지며 말했다.
열차를 타기 전에 둘이서 시장을 둘러보더니 커플 옷핀을 사왔다.
고작 이틀 만에 비비안과 저만큼 친해질 수 있다는 점에서 루나의 친화력이 무서웠다.
“이거 봐봐.”
“예. 예쁘네요.”
루나와 비비안을 보면 아무 걱정 없이 사는 듯해서 조금 부러웠다.
물론 각자의 고민거리가 있겠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이보다 더 평화로울 수가 없었다.
“비비안.”
“응.”
“전쟁이 생각보다 심각해지고 있어요. 아마 아카데미에도 영향이 있을 텐데 비비안은 나서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내 말에 잠시 동안 나를 바라본 비비안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약속할 수 없어.”
“비비안.”
“아드리아스도 나서지 않는다고 약속하면 나도 나서지 않을게.”
비비안이 반대로 제안하니까 그녀의 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나도 내 마음대로 행동하는데 그녀를 강제할 수는 없겠지.
그래도 솔직한 마음으로는 그녀가 이번 전쟁에서는 한 발 물러섰으면 하는 마음이다.
전쟁이란 예상치 못한 변수의 연속.
게임 속에서도 어이없게 죽은 경우가 수두룩했다.
‘에이미한테도 메테네의 별빛을 주었으니 일단 안전장치는 마련했다.’
사용법을 알려주고 어떤 용도인지도 설명했으니 알아서 잘 사용할 거다.
그 전에 막시민이나 이자벨, 그리고 살렘이 지켜주긴 할 테지만.
“도착했어.”
혼자 생각을 하기도 하며 비비안과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아카데미에 도착했다.
그리고 왠지 어수선한 아카데미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쟤네······.”
비비안이 어딘가를 보며 중얼거렸다.
그쪽으로 시선을 옮기자 아직도 떠나지 않고 있는 타 아카데미의 학생들이 보였다.
분명 어제쯤에는 복귀했어야 할 애들이 왜 아직도 남아있는 거지?
“아드리아스 학생, 비비안 학생.”
우리의 신원을 확인했던 교문의 직원이 우리를 다시 불렀다.
“데오스 교장님께서 찾고 계십니다.”
“지금 바로입니까?”
“네. 오시면 바로 연락을 하게끔 하셔서 지금 바로 가시면 될 것 같습니다.”
“알겠습니다.”
뻔하다면 뻔한 이야기지만 아무래도 전쟁 때문일 것 같았다.
그래도 비비안까지 같이 부를 줄은 몰랐는데.
일단 비비안과 함께 곧바로 행정동으로 향했다.
아카데미 교문에서 가장 가까운 곳이 행정동이었기에 우리는 걸어서 도착할 수 있었다.
“복귀하자마자 불러 죄송합니다. 피곤하실 테지만 사안이 사안인지라······.”
데오스가 미안한 미소를 지으며 우리를 환영했다.
그는 자리에 앉은 우리에게 차를 내주며 말을 꺼냈다.
“황제 폐하께서 출국 금지령을 내리셨습니다.”
“전쟁 때문인가요.”
“이유에는 미사여구가 많았지만 아무래도 그리 보입니다.”
“타 아카데미 학생들이 왜 남아있나 했더니 그 때문이었군요.”
게임에서도 출국 금지령이 내려졌는지는 모른다.
나와는 상관이 없는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상관이 있게 되었다.
일단은 아카데미 내에 유명 네임드 캐릭터가 될 인물들이 자리하게 되었으니까.
“남아있는 걸 보셨군요. 황궁에서는 그들의 안전을 위해 출국을 금지했다고는 하지만 아무래도 진짜 의중은 타국의 인물들을 붙잡아놓고 힘을 보태게 할 셈인 것 같습니다.”
“상황이 그렇게 안 좋습니까?”
“저도 아직 모릅니다. 아마 전선에 나가있는 이들만 상황을 정확히 알고 있겠죠.”
한마디로 인질로 쓰겠다는 말인데 다른 나라의 힘이 필요하지는 않았을 거다.
실제로 전쟁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알고 있는 내게는 다른 의도보다는 제국의 영향력을 과시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통곡의 협곡을 함락당한 일은 온 사방에 알려졌을 거다.
제국으로서는 치욕과도 같은 일.
그 창피를 괜한 곳에 화풀이하는 느낌이랄까.
“지금부터는 학생 여러분과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는 이야기입니다.”
“말씀하세요.”
“제국 측에서 전국 징집령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아카데미도 그 대상에 포함되었습니다. 다만 학생들에 한해서는 강제가 아닌 모병을 택해서 결정을 내려야 할 상황입니다.”
“모병이라는 건 대가가 있는 거겠죠?”
“그렇습니다. 우선은 학점이 기본적으로 주어질 겁니다. 이번 전쟁에 참여한 학생들은 진급 누락 없이 진급이 가능하게 됩니다. 졸업반 학생들의 경우 추가 점수가 부여되고요. 아카데미 측에서 제공하는 건 이 정도 뿐이고 국가에서 제공하는 대가는 따로 태블릿으로 전송해드리겠습니다.”
그는 잠시 숨을 고르며 차를 마셨다.
여기까지는 내가 알고 있던 게임 속 내용과 같았는데 굳이 나와 비비안을 교장실로 부른 걸 보면 아마 참여를 독려하기 위함이지 않을까 싶었다.
“황궁에서 제게 직접 당부가 내려왔습니다. 이번 토너먼트에서 좋은 성적을 차지하신 학생 분들의 참여를 독려하라는 당부였습니다. 특히 이번에 우승하신 아드리아스 학생이나 3위를 차지한 비비안 학생에 한해서는 만약 이번 전쟁에 참여하시면 따로 편의를 위한 담당자를 배정하고 지휘관급 직급과 함께 보수도 높게 쳐주겠다고 합니다.”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네. 물어보셔도 됩니다.”
“용병 자격으로 혼자 참여해도 됩니까?”
내 질문에 데오스는 예상치 못했다는 듯 말을 멈췄다.
옆에 있던 비비안도 그런 나를 묘한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굳이 그렇게 하시는 이유가 있을까요? 황궁의 모병에 참가하면 일반 용병으로 참가하는 것보다 훨씬 좋은 환경에서 참여하실 수 있을 겁니다. 아마 안전도 최대한 보장받는 편한 전장에서 지휘만 맡으실 수도 있고요.”
“제가 있을 전장을 자유롭게 선택하고 싶습니다. 누군가의 지휘를 받으면 아무래도 그런 움직임은 힘드니까요.”
데오스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은 물어보겠습니다만 반대하지는 않을 겁니다. 일단 참가하는 것만으로도 황궁의 입장에서는 감사하게 여길 테니까요.”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오히려 전장에 나서지 않아도 되는데 귀족으로서의 책임을 지는 모습이 감명 깊군요. 혹시 가문의 이름으로 나서실 생각인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아직 구체적인 계획은 없습니다만 아마 개인의 자격으로 나설 것 같습니다. 가문이라고 해봤자 저밖에 없거든요.”
“확인했습니다. 그럼 황궁에는 그렇게 보고를 올리겠습니다.”
“하나만 더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말씀하시죠.”
“타 아카데미 학생들에게도 권유하실 겁니까?”
“이미 말은 해두었습니다. 전공에 따른 제국의 보상이 있으니 그리 나쁠 것도 없고, 솔직히 야만족들과의 전투는 전쟁이라고 부르기에도 과하니 오히려 경험을 쌓는다고 생각하면 저들의 입장에서도 좋은 기회이지요.”
역시 아직도 심각하게 여기고 있지 않았다.
이게 대중적인 생각이고 아마 지금쯤 황궁이나 최전선에서는 골머리를 앓고 있겠지.
북부 야만인들은 예상 외로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들은 혹독한 환경 속에서 자라온 태생이 전사인 사람들.
게다가 몇몇 족장들은 무려 오러 마스터였다.
아직은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이것도 곧 널리 퍼지게 될 정보들이었다.
“대답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니요. 별 거 아닌 정보였습니다.”
비비안은 대답을 보류했다.
조금 더 고민해보고 답한다는 그녀의 말에 데오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3일 뒤까지 답을 해주시면 됩니다. 3일 뒤에 클로슈 전하께서 이끄는 제 1군단에서 파견하는 모병관이 올 테니 그때까지만 정하시면 문제없어요.”
“응.”
비비안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고민하는 듯 초점이 바닥을 향해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그냥 그녀가 거절했으면 싶었지만 일단 보류한 것만으로도 어디냐 싶었다.
“그럼 이제 가보겠습니다.”
“피곤하실 텐데 제가 너무 오래 붙잡아두었군요. 이 늙은이와 대화하느라 수고하셨습니다.”
방을 나서며 마나를 몸 주변으로 둘렀다.
언제 정령을 붙여놓을지 모르니 데오스를 만나고 나면 항상 하는 일.
그가 정령을 대놓고 사용하게 되는 일은 꽤나 이후의 일이었지만 방심해서 나쁠 건 없지.
기숙사로 향하기 위해 아카데미 순환 열차역으로 왔다.
비비안은 이곳까지 걸으며 계속 생각하는 듯하더니 갑자기 내 이름을 불러왔다.
“아드리아스.”
“예.”
“아드리아스는 왜 전쟁에 나서려는 거야?”
“제 이득을 위해서죠.”
이번에도 그럴지는 모르겠지만 황제는 북부와의 전쟁에서 항상 두둑한 보상을 준비했었다.
그것이 물건이 되었든 돈이 되었든 로들렌 캐릭터를 플레이할 때면 전쟁에 참가할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그리고 병사를 동원한 영주들에게는 무려 황제의 직할령까지 수여했다.
많은 평민들이 작위를 받아 귀족이 되었고 영주로서 참전한 이들은 승격이 되었다.
“내가······도와줄 수 있을까?”
비비안이 곤란한 말을 해왔다.
이번 전쟁에서 내가 계획하고 있는 건 네크로맨서로서의 힘도 사용할 생각이었기에 혼자서 움직일 생각이었다.
아무리 비비안이 내게 헌신적이어도 내가 흑마법사인 걸 알게 되면······.
‘아······.’
두렵다는 감정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죽음 앞에서도 초연할 자신이 있는 나였다.
하지만 마음을 준 사람들에게 거부당할 거라 생각되자 상상도 못한 두려움이 몰려왔다.
“안 돼?”
“죄송합니다.”
나는 딱 잘라 말했다.
그러자 비비안의 표정이 눈에 띄게 시무룩해졌다.
그 모습이 안타까웠지만 그녀에게 흑마법사인 것을 들키는 것보다는 훨씬 이득이었다.
“비비안도 잘 판단하세요. 전쟁은 장난이 아닙니다. 방금 전에 데오스 교장은 별 것 아닌 것처럼 말했지만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요. 이미 절대로 뚫리지 않는다고 호언장담했던 통곡의 협곡도 고작 며칠 만에 함락됐습니다.”
“······응.”
그녀는 여전히 쓸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런 그녀의 표정에 기분이 좋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그녀를 데리고 함께 전장에 임할 수는 없었다.
“들어갈게.”
“예. 주말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이내 열차가 도착하고 비비안이 올라탔다.
나는 반대편에서 타야했기에 그녀에게 손을 흔들어주며 작별인사를 했다.
비비안을 보내고 반대 방향으로 가는 열차를 타기 위해 건너편으로 가자 그곳에는 의외의 인물이 서있었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피오네라고 했던가?”
아르디 후작가의 영애.
워낙 인상적인 인사를 남겼기에 기억이 안날수가 없었다.
그 당시에는 별 생각 없이 넘어갔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이상한 여인이 아닐 수가 없었다.
“예. 기억해주시는군요?”
“기억을 못할 수가 없지.”
“헤헤. 다행이다.”
나는 습관적으로 그녀의 호흡과 안면 근육의 움직임을 읽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모르겠지만 나는 곧바로 그녀의 어색함을 눈치 챌 수 있었다.
뭔가를 숨기고 있나?
“기숙사에 가시는 건가요?”
“어.”
“저도 마침 마법학부 쪽에 볼일이 있어서 가려고 했는데 같이 가면 되겠네요.”
“내리는 역이 다를 텐데?”
“전 선배님이 저를 안내해주실 거라 믿는데요?”
당돌했지만 뭔지는 몰라도 수상한 느낌이 물씬 풍겼기에 곧바로 거절했다.
“미안하지만 주말동안 외출을 하고 와서 피곤해. 다음번에 기회가 되면 그때 해주지.”
“흐음······.”
내 거절에 그녀는 갑자기 주위를 둘러보더니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고 내게 가까이 다가섰다.
나는 혹시나 싶어서 그녀의 행동을 유심히 살피며 언제든 반격을 할 수 있게 준비했다.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모두 의심스러운 후배였다.
“아드리아스 선배······.”
그녀는 내게 가까이 다가와 조그마한 목소리로 나직하게 속삭였다.
“원죄. 가지고 계시죠?”
그리고 뜻밖의 단어를 입 밖으로 내뱉었다.
< 198화. 두려움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