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5화. 저택으로 >
주말이 되자마자 곧바로 웰튼 영지로 향했다.
노아의 일이 아니었어도 갑자기 몰려든 손님들의 소식을 들었기에 어차피 한 번 들렀어야했는데 조금 일이 복잡하게 됐다.
“그러고 보니 집에 친구를 데리고 가는 건 처음이군요.”
내 옆에는 지금 노아와 비비안, 그리고 아이비가 있었다.
그리고 노아와 아이비로 인해 만들어진 냉랭한 분위기 속에서 비비안과 단 둘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여동생이 있다고 했지.”
“예. 에이미라고 해요. 올해 19살로 저랑 4살 터울이죠.”
“4살?”
비비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드리아스, 지금 23살?”
“예.”
“왜?”
로들렌에 입학하는 시기는 따로 정해져있는 게 아니지만 최소가 18살이었다.
이왕이면 모두 나이를 딱 맞춰서 입학하기에 지금의 졸업반은 대부분 22살.
나는 1년 늦게 입학한 셈이지.
“1년 늦게 입학했습니다. 사실 아카데미에 올 생각이 없었거든요.”
“나중에라도 입학해서 다행이야.”
“예,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때 조용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아이비가 끼어들었다.
“너네 둘 다 졸업반인데 졸업하고 뭐 할지는 정해놨어?”
“글쎄요.”
말은 애매하게 했지만 사실 생각해둔 게 있었다.
내가 정확히 원하는 대로 될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자리 자체는 내가 만들어낼 수 있을 거다.
지금의 나는 어디서든 러브콜을 보내는 특급 인재였으니까.
내 애매한 대답을 들은 아이비가 고개를 돌려 비비안을 보자 그녀는 즉답했다.
“난 기사가 될 거야.”
“흐음? 의왼데?”
아이비의 생각이 나와 일치했다.
비비안이 기사라?
물론 실력으로 따지면 이미 현역 기사들 정도는 발라먹고도 남을 정도지만 대인 관계에 서툰 그녀가 기사단 생활을 잘 해낼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생각해둔 곳은 있어?”
“응.”
“어디?”
“······비밀.”
비비안이 수줍게 고개를 숙이며 웅얼거렸다.
확실히 비밀로 해두어야 나중에 말이 안 나오긴 하지.
대처는 잘하네.
“하긴 너 정도면 이미 물밑 작업이 끝나긴 했겠다. 대우는 좋은 곳이야?”
“응. 엄청.”
“오, 그래? 그럼 혹시 가문으로 돌아간다거나?”
“그건 아니야.”
비비안의 얽힌 일화를 모르는 아이비이니 저렇게 물을 수 있는 거겠지.
그리고 솔직한 말로 가문의 기사보다 제국의 어느 유명한 기사단에 들어가는 게 훨씬 좋을 거다.
변두리 왕국의 일개 가문 기사보다는 제국의 유명 기사단이 나은 게 사실이다.
“그리고 아직 허락 못 받았어.”
“뭐? 너 정도 실력인데 허락을 안 해줬다고?”
“물어보지도 않았어.”
“아, 그런 거냐? 그럼 괜찮겠지. 누가 너를 거절해? 내가 볼 때는 네 실력이면 어디든 입단 가능해.”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어느새 열차는 웰튼 영지에 도착했다.
아이비가 함께하는 만큼 조금 조심스러웠지만 크게 걱정되지는 않았다.
이미 외부 활동을 버젓이 하고 있는 만큼 아이비에게 정체가 들킬 일이었으면 진즉에 들켰어야할 사람들이니까.
“작네.”
주위를 둘러본 노아가 조용히 말했다.
그녀의 말대로 웰튼 영지는 조그마한 시골 영지였기에 별 건 없었다.
우리는 그대로 마차를 잡아 내 저택으로 향했다.
“노아는 치료를 위해 조금 있어야 한다지만 아이비 조교님은 언제까지 머무르실 생각이십니까?”
“글쎄. 왜? 불편해?”
“아닙니다. 저랑 비비안은 주말만 있다가 바로 돌아가야 해서 물어본 겁니다.”
“일단 연차는 써놨어.”
“확인했습니다.”
입단속을 단단히 해둬야겠군.
마침내 도착한 저택은 이전보다 훨씬 넓어져있었다.
들어가며 주변에 물어보니 주변으로 땅을 더 매입해서 늘린 모양이었다.
전쟁세를 내느라 당장은 돈이 부족했을 텐데 용케 돈이 남았나보다.
“어서 오세요.”
미리 연락을 해서 내가 오는 걸 알고 있던 에이미가 반갑게 맞이했다.
그녀는 한 명, 한 명 눈을 마주치더니 내게 음흉하게 웃어보였다.
“좀 하네?”
“뭘?”
알 수 없는 말을 한 에이미는 이내 조신하게 고개를 숙여보였다.
“아드리아스 크롬웰의 여동생인 에이미 크롬웰이라고 합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아이비 클레어. 로들렌 아카데미 조교수 직에 있는 지인이에요. 반가워요, 아가씨.”
성격 좋은 아이비가 먼저 나서서 인사를 받았고 노아는 그저 멍하니 서있었다.
그리고 비비안이 꾸물거리며 고개를 숙였다.
“비비안 벨로칸. 아드리아스 친구······.”
“모두들 환영해요. 일단 방을 안내해 드릴 테니 짐부터 푸시죠.”
에이미가 나서며 손님들을 안내했다.
나는 그 사이 슬쩍 빠져나와 살렘부터 찾았다.
“어머.”
그러나 먼저 마주친 건 이자벨로 보이는 여인이었다.
“오셨어요?”
“이자벨. 무사히 도착하셨군요.”
막시민은 없는 건가.
주변을 살짝 훑자 눈치를 챈 이자벨이 먼저 말해줬다.
“지금은 나가고 없어요. 아드리아스님이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인사만 하고 가라니까 그냥 나가버렸네요.”
“지내시는데 불편함은 없습니까?”
“네. 오히려 요즘에 상단 일을 도와주면서 재미가 들렸어요. 덕분에 하루하루 재미나게 지내고 있어요.”
“부디 여동생을 잘 부탁드립니다.”
“당연한 말씀을. 저희는 이제 한 배를 탔잖아요?”
이자벨의 입으로 저 얘기를 직접 들으니 실감이 난다.
막시민과 이자벨, 이 둘은 나와 같은 편이구나.
하지만 방심할 수는 없었다.
앞으로 나올 시나리오 보스들은 오러 마스터 하나 만으로는 도저히 이길 수 없는 괴물들이 즐비해 있었으니까.
그게 가능했으면 애초에 게임 자체가 파티 플레이 권장이 아니었겠지.
이자벨과 헤어지며 살렘의 위치를 전해 듣고 곧바로 그가 있는 장소에 도착했다.
저택 부지 한 구석에 있는 그 만의 골방이었는데 마침 반가운 인물들도 있었다.
“친구!”
루나로 보이는 흐릿한 인상의 소녀가 반갑게 소리쳤다.
그와 함께 모른이 털털한 웃음을 흘렸다.
“허허. 왔느냐? 고생 많았구나.”
“오랜만에 뵙습니다.”
이렇게 보니까 우리 저택에 모인 인물들만으로 웬만한 공작 가문과 비등한 힘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국의 공작 가문이 가진 힘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미친 전력.
“왔냐.”
마침 살렘이 안쪽에서 걸어 나왔다.
나는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이며 그에게 말했다.
“저번에 서신을 보냈었는데 일단 대답을 듣기 전에 먼저 데려와 버렸습니다.”
“생체실험을 당했다고? 골치 아픈 문제를 들고 와서 배 째라는 네 태도는 이미 익숙해졌다. 그래서 그 애는 어디 있는데?”
“지금 데려오겠습니다.”
굳이 살렘에게 보여주려는 이유는 다름 아닌 ‘조화’ 때문이었다.
한참 조화에 대해 연구하고 있는 살렘이라면 노아의 불균형도 고칠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살렘 본인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었다.
“대신 정체는 밝히시면 안돼요.”
“내가 알아서 한다, 이놈아. 건방지긴.”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내 옆을 따라붙는 루나와 함께 다시 본관으로 돌아왔다.
마장에게서 도착했을 장비들도 보고 싶기는 했지만 일단은 노아부터 해결하고 봐야지.
“친구.”
“예, 루나.”
“나 여기서는 나루라고 불러! 나루!”
“예, 나루.”
“집회 소식 들었어?”
집회?
전혀 들은 바가 없기에 본관을 향해 걷다가 잠시 멈췄다.
마침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기에 그녀에게 물었다.
“어떤 소식 말씀이십니까?”
“분노가 곧 우리 차례야.”
“아.”
신경 쓰지 못했던 분노가 있었다.
이미 집회의 손에 들어간 건 사실이기에 잠시 접어두고 있었지.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사실대로 말하면 분노를 다시 북부에 넘겨주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는 건 내가 잘 안다.
이미 엮인 게 너무 많았기에 단순히 다시 넘겨준다고 일이 끝나지는 않는다.
게다가 분노가 다시 넘어간다고 분노가 아니게 되는 것도 아니지.
분노로 태어난 그 아이의 운명인 것이다.
‘운명.’
하지만 이왕이면 그 운명을 조금 벗어나게 해주고 싶기는 하다.
그게 내 이득에 어울리는 일이기도 하고.
“정확히 언제인지는 아시나요?”
“지금 집회도 바빠. 우리는 아닌데 다른 애들은 전쟁으로 장난치느라 정신이 없어!”
예상은 했지만 북부 전쟁은 집회도 엮여있었다.
혼란을 틈 타 어떻게든 이득을 보려는 거겠지.
“그래서 아마도 전쟁이 끝나면 오지 않을까?”
“그건 너무 늦군요. 혹시 지금은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
“으음. 아마 에이카 임프?”
“하필이면 그 마녀입니까.”
조금 골치가 아프게 됐다.
전쟁 도중에 판을 엎으려면 분노가 우리 손에 있는 게 제일 좋은데 하필이면 에이카 임프가 데리고 있다니.
저번에 한 번 만난 적이 있지만 여러모로 꺼림칙한 사람이었다.
그 강함은 물론이고 뒤에서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상대.
자칫하다가는 주변 사람들마저 피해를 입을 수 있었다.
“분노를 가지고 싶어?”
“전쟁 중에 데리고 있으면 쓸 만한 상황을 만들 수 있을 것 같거든요.”
“내가 데려올게.”
루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마치 주머니 속에 넣어둔 사탕을 꺼낸다는 식으로 가볍게 말했다.
아무리 루나여도 너무 가볍게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닌가 싶었는데 솔직히 잘 모르겠다.
조금 모자라 보이는 언행을 하지만 그녀는 엄연히 워록급 흑마법사.
평범한 이들로서는 꿈도 꾸지 못하는 경지의 마법사였다.
“위험합니다.”
“혼자 안할게!”
방실방실 웃으며 말하는 그녀를 보자 오색빛의 눈동자가 떠오른다.
그녀를 조금 믿어볼까 하며 일단은 주의를 주었다.
“제가 루나를 말릴 권한은 없습니다만 부디 위험에 처할 만한 일은 안했으면 합니다. 저에게는 분노보다 당신이 더 소중해요.”
“응!”
정말 알아들은 건가?
헷갈리게 만드네.
어찌됐든 이 일에 관해서는 조금 더 생각을 해봐야겠다.
당장 시간이 나지 않기도 하고 이제 곧 복잡해지는 전쟁의 상황으로 대대적인 징집이 이루어질 터.
기회는 그 혼란에서 생겨날 것이다.
“노아.”
본관에 도착한 난 저택을 안내받고 있는 일행을 발견했다.
나는 그 중 노아에게 손짓하며 말했다.
“갑시다.”
“벌써?”
아이비가 조금은 불안한 눈초리로 내게 물었다.
그녀가 저택에 따라오는 조건으로 노아의 치료과정은 공유하지 않기로 했다.
이건 노아가 그녀에게 직접 말한 거라 걱정은 없었다.
“시간이 많은 것도 아니니까 빨리 해야죠.”
“······그래.”
아이비가 새삼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노아를 바라봤지만 노아는 별 반응 없이 내 뒤를 따라나섰다.
매정한 녀석 같으니.
“흐음!”
루나가 다가오는 노아를 요리조리 살펴보며 혼자 콧소리를 내었다.
그리고는 뭔가를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치료를 한다는 사람이 저 꼬마애는 아니지?”
여전히 미심쩍은 표정으로 지켜보던 아이비가 말했다.
“아닙니다.”
“나 꼬마 아니야!”
의외의 구석에서 발끈하는 루나를 뒤로 하고 비비안과 아이비를 향해 말했다.
“금방 다시 올 테니까 조금 쉬고 계세요.”
“응.”
“알았다.”
그런 그들을 뒤로 하고 함께 있던 에이미에게 잘 부탁한다는 말을 하려던 순간, 급한 표정의 직원 하나가 달려왔다.
“헉, 헉! 사, 사장님!”
“무슨 일이에요?”
“아! 크, 크롬웰 각하! 각하를 뵙습니다!”
횡설수설하는 직원은 내가 있다는 걸 눈치 채고 에이미의 말에 대답도 못한 채 내 반응을 기다렸다.
“급한 일인 것 같은데 말씀부터 하시죠.”
내가 말하자 그는 그제야 고개를 들며 안절부절 못했다.
“아아, 그것이······.”
그는 나와 에이미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더니 이내 내게 말했다.
“방금 들려온 속보입니다. 통곡의 협곡이 적들의 손에 넘어갔다고 합니다!”
“통곡의 협곡?”
반문한 이는 아이비였다.
그리고 이내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잠시만. 설마 내가 알고 있는 그 통곡의 협곡?”
“북부 최후의 보루라 불리는 그 요새가 맞습니다! 방금 들려온 바로는 살아남은 자가 단 한 명도 없다고 합니다.”
“말도 안 돼!”
아이비가 소리치고 에이미도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나는 이미 예상하고 있던 일이기에 에이미에게 말했다.
“에이미, 미리 준비했던 건?”
“어, 어? 준비?”
잠깐 당황한 그녀가 이내 내가 말한 준비의 의미를 깨닫고 표정을 굳혔다.
그동안 내가 전쟁 준비를 다른 곳보다 빡세게 준비해두라는 의미가 여기 있었지.
이제 크롬웰 상단은 날개를 피게 될 거다.
“하라고 해서 해두기는 했었는데······. 설마 다 예상한 거야?”
“그럴 리가.”
나는 거기까지 말하고 몸을 돌렸다.
“잘 대처할 거라 믿어.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노아, 가시죠.”
“아니, 지금 그게 문제······.”
아이비가 말을 하다 멈췄다.
자신의 동생의 일인 만큼 전쟁도 중요하지만 이쪽 일도 중요하지.
이제 이 요새 함락을 계기로 대륙은 점차 혼란의 소용돌이에 빠지게 될 거다.
이건 그저 전초에 지나지 않는 일.
앞으로 생길 멸망급 시나리오에 비하면 놀랄 일도 아니지.
‘지금부터 정신을 차리면 돼.’
모두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내가 당황하는 일은 없을 거다.
< 195화. 저택으로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