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4화. 황제 >
로들렌의 2학년 트리오가 처음으로 참가하게 되는 춘계 토너먼트.
당연히 그 일정은 물론이고 무슨 일이 일어나는 지까지 모두 파악하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아는 한 황제가 참여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채캉!
“으랴압!”
기합을 넣으며 검을 휘두르는 상대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내 신경은 온통 이곳 어딘가에 있을 황제에게 몰려있었다.
귀빈석에도 보이지 않는데 어디에서 염탐하고 있는지 모르겠네.
“이게 내 검법 오의다!”
퍼억!
“어억!”
포기하지 않고 달려드는 상대방을 그냥 날려버렸다.
상대는 기사학부 졸업반으로 알고 있는데 원래 같았으면 비비안에게 죽었을 엑스트라라 별 감흥이 없었다.
“스, 승자! 홍코너 아드리아스 크롬웰!”
작년의 결승전과는 다르게 싱겁게 마무리가 된 토너먼트를 뒤로 하고 사회자의 진행에 따라 다시 선수 대기실로 돌아왔다.
이제 곧 있으면 시상식과 함께 황제가 모습을 드러내겠지.
“수고했어. 우승 축하해.”
“감사합니다.”
미리 대기하고 있던 비비안이 내게 손을 흔들었다.
그녀는 내게 기권했지만 3, 4위전에서는 상대를 압살하며 3등의 자리를 차지했다.
“크읍. 좋은 승부였다.”
뒤늦게 치료를 받고 온 마호메드라는 이름의 엑스트라가 불편한 몸으로 자리에 앉았다.
이런 녀석이 준우승이라니 운이 정말 좋았네.
대진운이 나빴던 디에네는 8강에서 나를 만나 진 탓에 관중석에서 구경하고 있겠지.
“수상자들은 무장을 전부 해제하고 나올 준비하세요. 곧 시상식 시작합니다.”
“알겠습니다!”
언제 끙끙거렸냐는 듯 마호메드가 기운차게 대답했다.
로들렌 아카데미 토너먼트 준우승이면 다시없을 가문의 영광이긴 하지.
“아드리아스.”
“예.”
“긴장했어?”
나는 손을 들어 얼굴을 만져보았다.
티가 났나?
“괜찮아. 아무 문제없어.”
비비안이 마치 최면을 걸 듯 내게 말했다.
그녀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괜찮습니다. 고마워요.”
“응. 아드리아스는 괜찮아.”
이내 진행자가 잔뜩 긴장한 기색으로 우리를 불렀다.
방금 전까지 멀쩡한 모습이었는데 표정이 굳은 걸 보면 저 진행자도 황제가 있다는 걸 이제야 들은 모양이다.
밖으로 나오자 경기장에는 단상이 마련되어 있었다.
귀빈석까지 연결이 된 길고 높은 단상이었는데 수많은 학생들이 아직도 자리를 뜨지 않고 시상식을 지켜보고 있었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제 59회 춘계 토너먼트의 시상식을 시작하겠습니다!”
사회자의 말에 맞춰 관중들의 호응이 이어졌다.
황제는 아직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가운데 우리가 단상에 서자 교장인 데오스가 상패와 트로피 따위를 든 직원들과 함께 나타났다.
“유구한 역사의 로들렌 아카데미 춘계 토너먼트가 그 대단원의 막을 내렸습니다······.”
황제가 기다리고 있음에도 고집스러운 연설이 시작되었다.
오히려 평상시보다 길게 말하는 게 어색했는데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마 황제 때문이겠지.
“······오늘은 특별한 분이 직접 오셨습니다. 바로 이 아카데미는 물론이고 제국의 주인이자 통치자이신 황제 폐하이십니다.”
“황제?”
“폐하께서 행차하셨다고?”
갑작스런 데오스의 말에 주변이 소란스러워졌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황제로 보이는 자가 등장했다.
“황제 폐하께서 오셨습니다!”
“진짜 폐하시잖아?”
모두가 한쪽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숙였다.
감히 황제를 똑바로 쳐다볼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일어나라.”
조용하지만 모두가 들릴만한 목소리.
그 기저에 깔린 절대자의 위엄이 은은했다.
사람들이 몸을 일으키자 자리에 앉으라는 시늉을 한 황제가 다시 입을 열었다.
“오늘은 기쁜 날이군. 수상하게 된 이들 모두 축하하네.”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이미 마호메드의 입은 헤벌쭉 벌어져 있었다.
무려 황제에게 직접 받는 시상식인 만큼 기쁘겠지.
하지만 그와 달리 나는 내심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황제가 굳이 북부 원정이라는 바쁜 일정에 자리를 비우고 이곳에 온 이유를 모르겠으니까.
어쩌면 나 때문일 수도 있으니 속이 얹히는 기분이다.
“3위. 비비안 벨로칸, 앞으로 나오십시오.”
사회자가 호명하자 비비안이 먼저 황제의 앞으로 걸어갔다.
고개를 내리깔고 얼굴을 마주치지 않으며 움직이는 게 의외로 예법은 충실하다.
“비비안 벨로칸. 나이첼 왕국 출신이라고?”
“그렇습니다.”
비비안의 존대는 처음 들어보는데 아무리 비비안이어도 황제 앞에서는 예의를 차리네.
“이 먼 타국까지 와서 고생이 많다. 그대와 같은 인재도 가능하면 제국의 품으로 데려오고 싶군.”
“황은이 망극합니다.”
기계처럼 대답한 비비안은 절도 있게 상패와 트로피를 받고 다시 내려왔다.
다음으로 마호메드의 차례였는데 녀석은 후들거리는 다리를 진정시키지 못했다.
“마호메드 카자미. 카자미 공이 아주 자랑스러운 아들을 두었군.”
“화!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몇 살 때부터 검을 쥐었지?”
“4살이옵니다!”
“고생했군.”
직접 다가가 마호메드의 어깨를 두드려준 황제가 그에게 상패와 트로피를 건네고 부상으로 보검을 건넸다.
“이건 내가 특별히 주는 선물이네.”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부디 계속 정진하여 제국의 대들보가 되어 주었으면 하는군.”
“반드시 그리하겠습니다!”
드디어 마호메드가 물러나고 내 차례가 왔다.
사회자의 호명이 들려오고 나는 고개를 내리깐 채 황제의 10보 앞까지 왔다.
“다섯 걸음.”
황제의 발 치만 확인되는 나에게 황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섯 걸음을 허용하지.”
“폐하.”
황제의 호위가 조용히 말리는 듯했지만 황제가 다시 입을 열었다.
“어서 오거라. 기다리게 할 셈이냐?”
나는 어쩔 수 없이 다섯 걸음을 더 다가갔다.
그럴수록 내 고개는 더 직각이 될 수밖에 없었다.
“고개를 들라.”
이내 또 다른 명이 떨어지고 나는 그의 말에 따라 고개를 들었다.
“사내대장부구나.”
황제.
그는 비록 오러 마스터나 워록이 아닌 평범한 사람이었지만 절대 평범하지 않았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 것일까, 그에게는 남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위엄 어린 분위기가 주변에 넘실대고 있었다.
아무것도 몰랐을 때는 그저 카리스마 넘치는 인물로 알고 있었는데 하필이면 그가 흑막이라는 걸 눈치 채 버렸다.
이제는 가장 성가신 적중에 하나가 되어버린 황제.
그와 눈을 마주쳤다.
“케인도 지금 자네의 모습을 보고 자랑스러워하겠군.”
도발하는 건가?
아쉽게도 그런 도발에는 넘어가지 않는다.
조금 더 노력하도록.
“황은이 망극합니다, 폐하. 선대 백작도 하늘에서 기뻐할 겁니다.”
“그렇지. 케인만큼 내게 충직한 신하가 없었는데 말이야. 자네는 졸업을 하고 따로 약속된 일이 있나?”
“없습니다.”
“그렇다면 짐의 기사가 되는 것은 어떤가?”
꽤 매서운 공격이었다.
황제의 말에 모두들 숨을 들이키며 내 대답을 기다리는 것이 느껴졌다.
아마 사람들은 이걸 엄청난 기회라고 여기고 있겠지.
당연한 말이지만 그가 진짜로 나를 사용할 생각으로 말하는 건 아닐 거다.
대답을 잘못한 순간 나를 순식간에 옭아맬 함정임이 분명했다.
“애석한 말이지만 전 이제야 졸업반이 되었습니다. 로들렌 아카데미를 졸업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닌지라 확답을 할 수 없습니다.”
“토너먼트 우승자가 그리 약한 소리를 하는 건가?”
“운이 좋았습니다.”
“혹시, 짐의 기사가 되는 것이 싫은 건가?”
연속적인 공격에 주변에서 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나왔다.
이건 그대로 두면 말이 좀 나오겠는데?
“폐하. 사실대로 말하자면 선대로부터 부탁을 하나 받았습니다.”
“케인에게서?”
황제의 눈이 게슴츠레 떠졌다.
반응이 좀 오는데?
“그렇습니다. 그를 위해서라도 어딘가에 속해있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부탁이 대체 뭐지?”
“저희 가문이 소유했던 크롬웰 영지를 다시 되찾아오라는 부탁이었습니다.”
내 말을 예상치 못했는지 잠시 황제가 침묵을 지켰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인 그는 이내 말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군. 선대와의 약속을 지키는 건 중요하니······.”
아마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엄청 두들기고 있을 거다.
방금 내 말로 인해 크롬웰 영지에 뭔가가 숨겨져 있다는 인상을 받았을 테니까.
그와 동시에 내게는 아직 원죄가 없음을 간접적으로 알린 셈이기도 했다.
크롬웰 영지는 엄연히 황제직할령인 만큼 내가 방문했다면 이미 기록이 남았을 테고 최근에 난 단 한 번도 크롬웰에 방문한 적이 없었다.
아마 돌아가자마자 크롬웰을 샅샅이 뒤져보라고 하지 않을까?
“우승자라 이야기가 길어졌다. 앞으로도 우리 로들렌을 위해 힘 써주길 바라지.”
“그리하겠습니다.”
황제는 상패와 트로피, 그리고 부상으로 꽤 통 큰 선물을 주고 물러났다.
통 큰 선물이란 다름 아닌 네임드급 아이템이었다.
[메테네의 별빛]
[1년에 1번 ‘메테네의 별빛’을 소환 가능]
[착용자는 항시 독에 중독되지 않음]
[수면 효율이 2배 상승]
네임드급 아이템 치고는 조금 별 볼일 없어보였지만 저 액티브 능력이 사기였다.
[메테네의 별빛 : 착용자가 만나본 대상 중 소환에 응할 의사가 있는 대상을 자신의 곁으로 소환한다.]
마나만 소모해서 공간의 개념을 지워버릴 수 있는 개사기 스킬이었다.
비록 1년에 1번뿐이라는 제약은 있었지만 정말 위급할 때는 이보다 좋은 물건은 없겠지.
마침 집에 갈 생각이었는데 에이미한테 줄만한 좋은 선물이 생겼다.
“타 왕국에서도 온 것 같은데 부디 즐겁게 즐기다 갔으면 좋겠군.”
황제는 그 말을 끝으로 호위와 시중을 받으며 사라졌다.
결국 정확한 목적이 뭔지는 몰랐지만 그와 마주쳤다는데 의의를 두자.
의외로 꽤 해볼만하다는 생각이 드는데?
‘어차피 시간이 지날수록 국가 하나가 감당하기 벅찬 시나리오가 진행된다. 제국의 힘도 그때 많이 약화되지.’
생각해보면 그 모든 일들에 황제가 엮여있을 수도 있겠다.
그럼 본인의 손으로 제국의 힘을 약화시키는 거네.
역시 황제도 제정신이 아닌 놈이다.
**
콰직!
누군가의 머리였던 것이 단숨에 터져 나갔다.
그 머리를 밟고 선 남자는 온몸에 문신을 두르고 헐벗은 전사.
“이겼다!”
그 남자가 도끼를 들고 힘차게 소리치자 주변에 있던 그와 비슷한 행색의 전사들이 함께 소리쳤다.
“승리다!”
“으하하하!”
그들이 있는 곳은 험준한 지형의 요새.
그리고 살아 움직이는 자들은 오직 대륙 사람들이 야만인이라 부르는 이들뿐이었다.
북부의 최종 관문이자 통곡의 협곡이라 불리며 외부의 침입을 절대적으로 막아왔던 최후의 요새가 허무하게 무너진 모습이었다.
이제야 모병이 끝난 제국으로서는 놀랄 상황.
문제는 요새가 뚫리기까지 고작해야 며칠밖에 걸리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고맙다.”
요새를 뚫은 선봉장, 카냐크가 누군가를 향해 말했다.
검은 로브를 뒤집어 쓰고 거대한 고깔모자로 얼굴을 덮은 인물.
누가 봐도 흑마법사였다.
“제국은 저희의 적이기도 합니다. 고마워하실 필요 없습니다.”
“흐흐. 그렇지. 그럼 앞으로도 계속 힘을 합치자고.”
카냐크의 말에 고깔을 뒤집어쓴 제스터가 말했다.
“그럼요. 모든 건 우리의 계획대로.”
< 194화. 황제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