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7화. 무결(無缺) >
로들렌 아카데미 측과 불칸 아카데미가 마주보고 기싸움을 했다.
그런 그들 사이에는 세레나와 백한기가 자리하고 있었다.
“갑자기 싸우자는 건 어느 곳의 예의인지 모르겠군요.”
“겁나?”
입가만 드러난 백한기가 스산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 백한기를 향해 로들렌의 학생들이 투기를 드러냈다.
최고의 아카데미를 재학 중이라는 자부심이 있는 그들로서는 감히 자신들을 상대로 싸움을 거는 백한기가 건방져보였다.
“불칸 아카데미의 백한기라고 하셨나요? 제가 할 말은 이것뿐입니다.”
세레나가 가소롭다는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주제를 아세요.”
“나도 너, 같은 잔챙이는 상대, 하고 싶지 않아.”
혀를 찬 백한기는 손가락을 들어 위를 가리켰다.
“난 괴물이라는 아, 드리아스 크롬웰을 노리고 있다. 너는 그저 그를 향한 징, 검다리일 뿐.”
“당신 따위가 선배님을?”
그저 무시하려고 했던 세레나는 자신도 모르게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자신을 위해 아낌없이 베푸는 아드리아스에게 괜한 피해가 가지 않았으면 하는 그녀의 속내가 자연스레 행동으로 나왔다.
“아드리아스, 크롬웰을 이기고 내가 동세대 최, 강임을 증명할 거다.”
“무시하고 지나가려했더니 터무니없는 분이셨군요. 굳이 선배님에게 갈 필요도 없이 제가 상대해드리겠습니다.”
세레나의 말에 식당 내의 분위기가 달아올랐다.
학생들은 자처해서 참관인을 구하러 나갔고 이내 그들은 자리를 옮겨 대련을 위한 장소로 향했다.
“토너먼트 기간에는 자중하라고 했건만.”
“죄송합니다, 교수님.”
참관인 자격으로 온 크레이슨 교수가 고지식한 말을 했지만 이내 손을 들었다.
저 손이 내려가는 순간 대련의 시작임을 눈치 챈 구경꾼들은 긴장한 기색으로 그 모습을 바라봤다.
“불칸 아카데미의 백한기? 어찌됐든 서로 적당한 선에서 대련을 했으면 좋겠네.”
“금방 끝, 나.”
전날에 세레나의 실력을 대충 엿본 백한기는 절대로 자신이 진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빨리 끝내고 곧바로 아드리아스를 찾아갈 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이었다.
연무장은 금세 사람들로 가득 찼다.
무려 타 아카데미 학생과의 대련은 같은 소속끼리 싸우는 토너먼트보다 훨씬 자극적이었기에 소문은 빨랐고, 관심은 커졌다.
그리고 그곳에는 로들렌에 초대되었던 타 아카데미의 학생들도 구경을 왔다.
신창의 아들 로베르토부터 에어코스의 졸업반인 백금의 그라시아, 밀레니엄 아카데미 작년 토너먼트 우승자 호넨, 학원 육도의 모든 세력을 최초로 규합했다고 알려진 수수께끼의 노아까지.
“우습게보면 아무것도 못하고 끝날 겁니다.”
“빨, 리 시작이나 하자.”
갑자기 모여든 사람들로 인해 부담스러울 법도 했지만 연무장의 한가운데에 선 둘은 전혀 아무렇지도 않게 준비를 끝마쳤다.
“준비는 끝났나?”
“네.”
“시작, 해.”
이내 크레이슨의 손이 내려가며 대련이 시작됐다.
휘익-캉!
시작되자마자 먼저 달려든 것은 백한기였다.
머리카락이 휘날리며 드러난 그의 눈동자는 동그란 모양이 아닌 기묘한 생김새를 했는데 그것이 오히려 위압감 있었다.
“역, 시······약해.”
검을 마주 댄 백한기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세레나는 자신도 모르게 익숙했던 검술로 그를 밀어내려 했지만 백한기의 힘은 그녀의 상상 이상이었다.
‘뭐야, 이 힘?’
호리호리한 체구와는 달리 엄청난 괴력을 발휘하는 백한기에게 그대로 밀린 세레나는 급하게 물러나려 했지만 상대는 어중이떠중이가 아니었다.
“도망치는 거, 냐?”
여유가 남았는지 말을 하며 계속 몰아붙이는 그의 검은 패도(覇道)였다.
모든 것을 무력으로 뚫고 지나가는 압도적인 힘.
그를 기반으로 한 검술에서 언뜻 과거의 세레나가 엿보였다.
“그냥 끝내, 자.”
압도적인 괴력.
하지만 단순해 보이는 그의 검술도 나름의 복잡한 무리가 섞여있었다.
그렇기에 세레나는 기회를 엿보며 수세에 몰릴 수밖에 없었다.
“세, 세레나가 밀린다.”
“저 녀석, 불칸의 귀신이라고 했었나?”
“실제로 보니 정말 이름값을 하는 녀석이네.”
주변의 웅성거림은 이미 세레나의 패배를 확정하고 있었다.
그만큼이나 둘 간의 대련은 압도적인 차이를 보였다.
‘너무 자만했다.’
세레나는 자신의 실수를 인정했다.
그러나 그와 별개로 상대에게 질 생각은 전혀 없었다.
콰아아앙---!
폭음과 함께 세레나의 몸이 뒤로 날아갔다.
백한기의 검은 롱소드.
롱소드에서 나온 파괴력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힘이었다.
“특, 별함이 없어. 그냥 평범한 검사. 왜 아, 드리아스 크롬웰이 너를 높게 평가한 건지 모르겠네. 아, 드리아스 크롬웰도 그만큼 별 볼일 없는 녀, 석인가?”
“아까 전에도 느꼈지만 당신은 예의가 없군요.”
“너 같이 약한 놈이 예, 의를 말해도 의미가 없다. 힘으로 증명해야지.”
힘으로 증명한다.
그건 그녀의 가문에서도 누누이 강조해왔던 가훈이었다.
그렇기에 그녀도 백한기의 말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남은 건 증명하면 될 뿐.
“하아.”
예상치 못한 힘으로 놀랐지만 그녀는 침착을 되찾았다.
다행히 상대가 방심한 탓에 시간을 내주고 있었고 자신은 해결책을 생각할 수 있었다.
‘역시 그것 밖에 없어.’
고작 하루, 그것도 전날에 배웠을 뿐인 검법.
아드리아스가 말하길 ‘무결’이라고 말한 오만하기 짝이 없는 이름을 가진 검.
고작 하루 익힌 걸로 뭘하냐고 할 수도 있었지만 그녀는 아드리아스를 믿었다.
그리고 그런 아드리아스가 믿는 자신을 믿었다.
‘기회는 단 한 번.’
한 번에 통하지 않으면 만만치 않은 상대라 두 번은 시도하지 못할 거다.
하지만 그녀는 이 한 번이 절대 실패하지 않을 거라 믿었다.
자신을 향한 강한 확신.
무려 아드리아스가 전해준 그녀의 가능성.
“그냥 기, 권할 생각은······.”
백한기가 다시 입을 연 순간 세레나의 눈이 번뜩였다.
그의 움직임이, 몸짓이, 근육의 운동이, 호흡의 들숨과 날숨, 그 모든 게.
손에 닿을 듯 선명해지고 극한의 집중 상태에서 휘둘러진 검은 전날에 배웠던 ‘무결’을 그대로 재현했다.
찌이익---
공기의 결이 갈라지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비록 어설픈 검놀림이었지만 그녀의 의도가 충분히 이루어졌다는 증거.
뒤늦게 백한기가 마주 검을 휘둘렀지만 충분히 힘을 전달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곧바로 눈앞에 드러났다.
서걱-
조용했다.
하지만 이 대련을 지켜보는 모든 이들이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한 소음.
“헉!”
“거, 검이······.”
후웅-
푹!
반쯤 부러진 검신이 튕겨져 날아가 바닥에 박혔다.
그리고 그 검의 주인은 멍한 모습으로 가만히 서있는 백한기의 것이었다.
“이, 이겼다! 세레나가 이겼다!”
“와, 조마조마했다. 저것도 다 계산한 거겠지? 역시 세레나야.”
“그래도 그렇지 검을 통째로 잘라버린다고? 잘 몰랐는데 그새 실력이 오른 건가?”
순식간에 결판이 나버린 대련에 환호성이 튀어나왔다.
그리고 참관인 자격의 크레이슨이 곧바로 승부를 발표했다.
“로들렌 아카데미 세레나 에레스티얼 승!”
“와아아!”
학생들이 세레나의 주위로 몰려들었다.
그러나 세레나는 곧바로 비틀거리며 주저앉아 버렸다.
“하아, 하아······.”
지금의 그녀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버거운 검법.
고작 하루를 배웠음에도 이렇게 사용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재능의 소유자임을 증명하는 일이었지만 반동으로 탈진이 밀려왔다.
“다들 비켜! 세레나, 내가 부축해줄게. 치료소로 가자.”
“아니, 난 괜찮······.”
“네가 싫다고 해도 데려갈 거야. 다들 길 비켜!”
“나도 같이 가주지.”
크레이슨이 세레나를 데리고 함께 사라지자 남은 이들은 여전히 연무장에 남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마침 타 아카데미의 학생들도 전부 와있었기에 그들의 면면을 살피려는 로들렌 학생들도 있었다.
“백한기.”
굴라드가 부러진 검신을 주워드는 백한기에게 다가갔다.
백한기는 고개를 숙인 채 말없이 부러진 검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상심하지 마라. ‘눈’을 썼으면 결과는 달라졌을 거다.”
“······그런 변명은 오히려 추잡해.”
드디어 입을 연 백한기는 전처럼 말을 더듬지 않았다.
“방심한 건 사실이지만 진 것도 사실. 실전이었으면 난 이미 죽은 목숨이다.”
“그래.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그런 점이 너를 더 강하게 만드는 거고.”
“······예의를 갖춰야겠군.”
검신에서 시선을 뗀 백한기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그의 눈에서는 자연스럽지 않은 인위적인 빛이 일렁이고 있었다.
“이 눈을 사용했어도 그 검을 막을 수 있었을까 의문이야. 실력을 숨겼던 건가? 재미있었어. 역시 로들렌 아카데미.”
짝짝짝짝-
그때 누군가가 박수를 치며 다가왔다.
백한기가 돌아보자 그곳에는 웃통을 깐 근육질의 남자가 박수를 치고 있었다.
“훌륭하다! 멋진 대련이었어.”
“누, 구?”
눈에서 빛을 잃은 백한기가 다시 말을 더듬었다.
상대는 그런 백한기의 물음에 웃으며 답했다.
“밀레니엄 아카데미의 호넨이라고 한다. 올해로 5학년, 졸업반이지.”
상대의 체형과 손의 모양 등을 파악한 굴라드가 입을 열었다.
“무투의 호넨. 작년 밀레니엄 토너먼트의 우승자.”
“하하! 쑥스럽군! 나를 아는 건가? 싸인은 지금 적어줄 게 없어서 나중에 해주지.”
“필, 요 없어.”
백한기가 차갑게 내뱉고 그대로 등을 돌렸다.
그러다 곧바로 몸을 돌려 경계하는 자세를 취했다.
“호오! 역시 강하군! 바로 눈치 챈 건가?”
“뭐, 하는 짓?”
살기를 드러내는 백한기를 보며 호넨은 계속해서 웃기만 할 뿐이었다.
뒤에서 공격하려던 사람치고는 너무나 뻔뻔한 태도였다.
그런 그들의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던 다른 이들이 있었다.
“다 잡종들뿐이군.”
오만한 태도로 말한 에어코스 아카데미의 그라시아가 이내 몸을 돌려 자신의 추종자들을 데리고 떠났다.
그리고 한편에는 작은 체구의 후드를 뒤집어 쓴 누군가가 이 상황을 무미건조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노아님. 다음 일정은?”
“아드리아스 크롬웰은 오늘 나오나?”
“경기 일정은 있습니다. 하지만 아마······.”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경기장에 가보자.”
후드 안에서 드러난 죽은 눈의 소녀는 나직이 한 마디 더했다.
“재밌는 검법이었어.”
**
“상대가 기권했습니다.”
벌써 5번째 기권.
이로서 나는 손 한 번 안 쓰고 본선 진출에 성공했다.
나야 시간이 생겨서 좋지만 뭔가 기분이 묘한 게 왕따를 당하는 기분이었다.
“본선 진출을 축하드립니다. 다음 경기 일정은 태블릿으로 전달하겠습니다.”
“예, 수고하세요.”
기권을 할 거면 경기 시작 전에 기권을 하지 괜히 경기장까지 왔네.
이왕 여기까지 온 거 기사학부 애들이나 보러가야겠다.
“우왁. 아, 아드리아스 선배다.”
“경기가 벌써 끝난 건 아닐 테고 아마 또 기권승이겠지? 기권으로 5연승도 아카데미 신기록 아니야?”
주변에서 술렁이는 소리가 들려와도 이제는 그러려니 하고 계속 걸었다.
안 그래도 최근에 좋은 소식이 있어서 기분이 좋았기에 딱히 시비만 걸지 않으면 이 기분을 유지하고 싶었다.
‘설마 곧바로 활용할 줄이야.’
세레나 에레스티얼.
백한기를 내가 도발하긴 했으나 그 다음날 곧바로 세레나를 찾아갈 줄은 몰랐다.
그리고 세레나는 그런 백한기를 보기 좋게 이겨냈다.
여기서 한 가지 놀란 건 백한기의 실력이었다.
아무래도 그를 직접 만나게 되는 건 몇 년이 지난, 졸업 후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지금의 백한기가 얼마나 강한지는 알지 못했다.
그런데 들리는 소문으로 세레나가 거의 지기 직전까지 몰렸었다고 하니 조금 놀라웠다.
내가 가르쳐준 무결로 상대의 검을 자르지 못했으면 지지 않았을까.
직접 봤어야했는데 아쉽다.
‘내 예상보다 훨씬 강한 건가.’
물론 미래의 대륙 10인이 될 녀석인 만큼 약할 수가 없었지만 플레이어블보다 강할 거라는 생각은 못했었다.
“음?”
그렇게 기사학부의 부지를 걷던 도중 이상한 무리를 발견했다.
신전의 사제복과 같은 차림의 묘한 복장.
그리고 그 중심에서 백금발이 눈이 부실 정도로 밝은 한 남자가 나를 보고 멈춰 섰다.
“그대는······. 설마 그대가 아드리아스 크롬웰인가.”
“누구십니까.”
정말로 누군지 몰랐다.
게임 속에서도 못 본 캐릭터.
확실한 건 타 아카데미의 학생이라는 것.
“마침 잘됐군요. 당신의 그 자자한 명성은 이곳에 오고서부터 익히 들어왔습니다.”
“그니까 누구냐고요.”
“······저를 모르는 겁니까?”
“예. 누군데요.”
그때 내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옆에 있던 따까리처럼 생긴 놈이 내게 삿대질을 했다.
“이놈! 이 분이 누군지 알고 그렇게 경거망동······.”
“아니, 그니까 누군데요? 말을 좀 해달라니까?”
이쯤 되니까 나도 답답해지네.
그니까 누구냐고?
“설마 당신, 환영식에도 오지 않은 겁니까?”
“환영식?”
“제가 이곳을 친히 방문한 기념으로 조촐한 환영식을 열었었습니다. 초대가 갔을 텐데요?”
“초대······. 아!”
그러고 보니 최근에 모르는 사람으로부터 초대가 왔었다.
요즘 따라 여러 귀족 가문에서부터 초대가 많아져 당연히 그런 건 줄 알고 무시하고 있던 참이었다.
근데······.
“내가 그쪽을 어떻게 알고 환영식을 갑니까?”
이거 웃기는 양반이네?
< 187화. 무결(無缺)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