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6화. 검술 지도 그리고 포근한 밤 >
“농담이라면 지나친데.”
“농담이 아니에요.”
생글생글 웃으며 말하는 피오네가 왠지 얄밉게 보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를 놀리는 것처럼만 보였기에 신입생치고는 깡다구가 있구나 싶었다.
“피오네 아르디.”
나는 그녀의 이름을 조용히, 하지만 강하게 불렀다.
내 부름에 살짝 몸을 떤 피오네는 이내 뻔뻔하게 미소 지었다.
“부르셨어요?”
“넌 나가 있어라. 여기서부터는 너한테 보여줄 수 없어.”
“와도 된다고 하셨잖아요?”
“그래. 왔으니까 이제 가라.”
“예에? 하지만······.”
“두 말 하지 않는다. 나가라.”
내 완강한 말에 피오네는 결국 고개를 푹 숙이며 처량하게 밖으로 나갔다.
그래도 고집을 부리지는 않아서 다행이네.
굳이 나를 보고 싶어 한다기에 나도 얼굴만 확인하려 했을 뿐이라 저런 농담을 하지 않았어도 내쫓았을 거다.
이내 시선을 돌려 루이스와 세레나를 보자 묘하게 굳어있는 둘을 확인할 수 있었다.
피오네를 쫓아내서 놀란 건가?
“오늘은 세레나의 검을 봐주려고 부른 거다. 시간 낭비라고 생각하면 그냥 나가도 된다. 세레나.”
“네!”
“그때 이후로 얼마나 달라졌는지 보자. 검 뽑아.”
“······네.”
자신감 없는 그녀의 목소리에서 이미 뻔히 결과가 보였다.
그래도 일단은 정확한 실력을 알아야하니 검을 섞어보기로 했다.
“덤벼라.”
“선배님. 이거 진검인데요?”
“상관없어. 덤벼.”
내 단호한 말에 그녀는 루이스와 비비안의 눈치를 잠시 살피더니 이내 내게 달려들었다.
캉!
힘이 약하네.
이전과 같은 폭발적인 힘이 보이지 않았다.
물론 그러지 말라고 충고한 건 나였지만 일단은 조금 더 지켜볼까.
“저번처럼 마나를 사용해. 이러면 너만 더 힘들어져.”
“하지만······.”
“세레나. 네가 나한테 생채기 하나라도 내면 뭐든 들어줄게. 어때?”
내 말에 살짝 기분이 상한 듯 미간을 좁힌 세레나는 이내 마나를 활성화시키며 움직였다.
그러자 순식간에 변한 유려한 공격들에 나는 잠시 감탄을 하며 검을 막았다.
확실히 플레이어블은 플레이어블이다.
내 눈에는 아직도 조금 어설프지만 그 짧은 시간 안에 방향을 잡은 느낌이었다.
팅-!
“됐어. 그만해도 돼.”
“아, 아직 조금 더······.”
“네 수준을 알아보려고 한 거니까 여기까지야.”
“아······.”
마치 꼬리가 축 처진 강아지 같은 모습으로 울상을 짓는 세레나를 웃는 낯으로 보며 이내 검을 들었다.
“일단 내가 이번에 새로 배워온 걸 한 번 보여줄게. 잘 봐봐. 루이스, 비비안도 봐주세요.”
내 말에 셋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저렇게까지 진지해질 수 있는 걸 보면 어지간히 나를 믿는 눈치라 부담이 컸지만 그 기대를 충족시킬 자신이 있었다.
지금부터 내가 보여줄 건 무려 초월자(진)의 검법이었으니까.
‘무결(無結).’
한참을 생각해내서 간신히 떠올린 검법의 이름이었다.
원래 이름이 어떻게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미 검법의 형식도 내 나름의 해석이 들어가 원본과는 꽤 달라졌기에 이름쯤은 상관없지 않나 싶었다.
후웅-
세계수에서 수련할 때처럼 가볍게 시작했다.
처음에는 마나를 담지 않고 순수한 형태만.
찌이익---
그러나 그 형태만으로도 내 검에 닿은 공기가 베이기 시작했다.
결을 베는 검.
그것은 공기의 결마저 자연스레 읽어내고 베었다.
“이게 대체······.”
나를 바라보는 이들의 눈에서 경악의 흔적을 읽어낼 수 있었다.
공기가 찢겨져 나가는 게 오감으로 느껴질 수 있을 정도로 선명했는데 놀라지 않고는 베길 수 없겠지.
이내 내 움직임은 점차 격해졌다.
물론 전체적인 검법 자체가 자연스러움과 부드러움을 강조했기에 웅장한 느낌은 없었지만 점점 속도가 빨라졌다.
우우웅---
이내 마나마저 깃들자 주변으로 검에 베인 공기들이 진공상태가 되어 주위의 공기를 끌어당겼다.
마치 공간이 비틀린 듯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마지막 춤사위로 오러가 터져 나오며 끝맺었다.
“끝. 어때?”
내 물음에 셋은 반응 없이 멍했다.
특히 비비안의 경우 초점마저 잃은 채 깊은 생각에 빠진 듯 보였다.
“아! 대, 대단합니다.”
뒤늦게 루이스가 박수를 치며 말했다.
그리고 세레나도 이어서 고개를 격하게 끄덕였다.
“아드리아스 선배님은 어떻게 그런 검을 부릴 수 있는지, 정말 부러워요.”
“뭐가 부러워. 이제 너도 배울 건데.”
“네?”
“지금부터 가르쳐줄 거야. 검 다시 뽑아. 루이스, 일단은 세레나한테 가르쳐줄 건데 너도 옆에서 보고 배우려면 배워.”
내 말에 둘은 다시 멍한 표정이 되어 대답이 없었다.
검법을 그냥 알려주겠다는 말에 놀란 건 이해가 가지만 내 시간은 귀했다.
“뭐야. 싫어? 싫으면 말고.”
“아, 아니에요! 좋아요! 제발 가르쳐주세요!”
세레나가 발작하듯 소리쳤다.
그 모습에 살짝 웃음이 나온 나는 곧바로 그녀를 지도하기 시작했다.
“이 검은 형태도 중요하지만 의도가 가장 중요해. 의도에 따른 마나의 흐름도 네가 조절해야 하고 가끔은 마나를 역으로 돌려야 할 때도······.”
직접 몸을 움직여 천천히 ‘무결’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옆에서 루이스가 엉거주춤 따라하자 결국 둘 다 한 번에 가르쳤다.
나는 둘에게 더 어울리는 형태로 일부러 변환시켰다.
애초에 원본을 모르는 상황이라 각자에게 맞는 방법으로 바꿔주는 게 맞다고 생각했고, 검술 천재인 나는 그게 가능했다.
“하아, 하아.”
“흐읍, 후우.”
아무래도 오늘은 여기까지인가 보다.
그래도 플레이어블들이라 그런지 순식간에 형태는 가닥을 잡은 상태였다.
“수고했다. 오늘은 여기까지.”
“가, 감사합니다.”
얼떨떨한 기색의 루이스가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그리고 세레나는······울어?
“흑, 흐흑······.”
“세레나?”
“고마워요. 전, 아직도 왜 선배가 저희를, 왜? 모르겠어요. 이렇게까지 해주시는 이유를.”
말이 두서가 없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저번에 말하지 않았나? 한 번 봐주기로 한 이상 끝까지 책임진다고.”
“검법, 흑, 그래도 검법까지 알려주는 사람이 어딨어요, 우으.”
“울든가 말을 하든가 둘 중 하나만 해라. 그리고 아직 안 끝났어. 이거 한 번 지도 받았다고 다 익힌 거야? 앞으로도 계속 배울 거면 적어도 자 정도는 되고 울어.”
“저, 저도, 흐, 선배님처럼 강해질 수 있을까요?”
“어. 당연하지.”
나는 루이스를 향해 눈짓했다.
그러자 루이스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세레나의 어깨를 감쌌다.
“오늘은 감사했습니다. 그럼 이만 편히 쉬십시오.”
“그래. 태블릿으로 따로 연락할 테니까 그때까지 쉬어라.”
“예.”
루이스가 세레나를 끌고 나가자 이내 개인 단련실에는 나와 비비안만 남았다.
놀랍게도 비비안은 아직까지 정신을 못 차린 상태였다.
‘깨달음······이겠지?’
사실 비비안에게도 ‘무결’을 알려줄 생각이었지만 예상치 못한 그녀의 명상으로 계획이 어긋났다.
하지만 오히려 좋을 수도 있는 상황에 나는 그녀를 기다려주기로 했다.
“비비안.”
멍한 상태로 앉아있는 그녀의 얼굴을 보자 계속해서 시선이 끌렸다.
원래도 예쁘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조금 느낌이 달랐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보게 된다고 해야 할까.
그렇게 그녀와 마주 보고 앉아 멍을 때렸다.
그녀가 언제 일어날지는 몰랐지만 조금이라도 더 그 모습을 눈에 담고 싶었다.
생각해보면 그녀는 항상 내 편이었던 것 같다.
무리한 부탁도 서슴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들어주던 그녀를 떠올리면 왠지 미안해지고, 그녀가 이전에 있던 흑마법 포션 사건으로 피투성이가 되었을 때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팠다.
“항상 고마워요.”
나도 모르게 그렇게 말하며 손을 뻗었다.
조금은 차게 느껴지는 비비안의 볼이 만져질 때.
“꿈?”
비비안이 입을 열었다.
“으억.”
깜짝 놀란 나는 괴상한 소리를 내며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급격하게 밀려드는 쪽팔림에 애써 시선을 돌렸다.
“아드리아스?”
“예? 예. 일어나셨습니까.”
“방금······.”
“볼에 먼지 같은 게 묻어있어서요. 이제 없습니다.”
나는 다시 포커페이스를 장착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그녀의 눈을 마주보며 거짓말을 했다.
나도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는 상황이라 할 말이 뚜렷하게 없었다.
“응.”
비비안은 고개를 끄덕이고 이내 바닥을 손으로 훑더니 자신의 볼에 발랐다.
“먼지 묻었어.”
“······예?”
“먼지. 묻었어.”
뭐하자는 거지?
내가 반응을 못하고 있자 이내 그녀가 내게 볼을 들이밀었다.
“먼지.”
“예에······.”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이내 의도를 알아차리고 그녀의 볼을 닦아주었다.
보들보들한 볼 살이 손에 닿자 기분이 묘했다.
이게 뭐하는 짓일까 싶을 때쯤 비비안이 얼굴을 붉히며 물러났다.
화난 건 아니지? 내가 너무 늦게 닦아 준 건가?
“아드리아스.”
“예. 말씀하세요.”
“나도 고마워.”
“별 말씀을요.”
“아드리아스는······내가 지켜줄 거니까.”
“예?”
거의 들리지도 않게 속삭인 그녀의 마지막 말은 허공에 흩어졌다.
아무래도 화가 난 게 맞는 모양이라 생각하며 일단 자리에서 일어났다.
“루이스와 세레나에게 검술 지도를 해주기로 했습니다. 방금 보여준 검법을 알려주려고요. 비비안은 혹시 어떠세요?”
“좋아. 나도 할래.”
덤덤하게 말하는 비비안을 보면 정말로 하고 싶어서 한다는 건지 헷갈렸지만 일단 알았다고 말해두었다.
“데려다줄게.”
단련실에서 나오자 비비안이 내 옆을 따라왔다.
뭔가 반대로 된 것 같지만 그리 싫지만은 않아서 고개를 끄덕였다.
날씨가 점차 풀리는 게 포근한 밤이었다.
**
세레나의 머릿속은 온통 전날에 아드리아스에게 배운 검법 생각뿐이었다.
어찌나 생각했는지 전날에는 잠도 못잘 정도였다.
‘오늘은 토너먼트가 쉬는 날이라 다행이지.’
격일로 진행되는 토너먼트 덕분에 오늘은 쉬는 날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토너먼트도 때려 치고 수련만 하고 싶었지만 그러기에는 그녀의 책임감이 너무 컸다.
콩콩콩!
“세레나! 안에 있어?”
“으응?”
“밥 먹으러 가자.”
단련실 밖에서 들려오는 친구의 부름에 시간을 확인하자 어느새 점심 시간이었다.
밤을 새가며 수련을 한 덕분에 마침 배가 고팠던 참이라 그녀는 곧바로 대답했다.
“응. 나갈게.”
땀 냄새가 조금 신경 쓰였지만 일단 나가고 보았다.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그녀의 친구들은 그런 세레나의 몰골을 보고 놀라며 물었다.
“너, 밤 샌 건 아니지?”
“응? 아하하. 그렇게 됐네.”
“너무 무리하면 오히려 안 좋아. 적당히 할 줄 알아야한다고 설교하던 게 누군지 잊지는 않았지?”
“내가 그랬지. 알았어, 무리 안 할게. 걱정해줘서 고마워.”
수다를 떨며 식당까지 향한 그들은 이내 금세 식사를 마치고 일어났다.
식사를 하는 도중에도 혼자 생각에 빠진 세레나를 걱정스레 바라보던 그녀의 친구, 마야는 그녀에게 슬쩍 말을 걸었다.
“너, 괜찮아? 무슨 일 있는 거야?”
“아니. 오히려 너무 잘 풀려서 정신이 없는 거야.”
“그러면 다행이네. 그래도 혹시 고민 있으면 바로 말해줘.”
“응. 고마워.”
그때 식당 한쪽이 소란스러워졌다.
세레나의 친구들이 확인하자 처음 보는 무리의 사람들이 그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저 교복은······.”
“불칸 아카데미다.”
불칸 아카데미의 문양이 박힌 복장을 착용한 이들은 이내 세레나의 앞까지 다가왔다.
갑작스런 상황에 모두들 당황할 때, 새하얀 머리가 눈가를 덮은 남자가 앞으로 나왔다.
“세, 레나?”
“누구시죠?”
“난 불칸의 귀신, 백, 한기.”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그의 눈동자가 기묘한 모양을 하고 있었다.
“너와 싸우고 싶다.”
< 186화. 검술 지도 그리고 포근한 밤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