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화. 막시민의 확인
뜻하지 않은 손님에서 귀중한 사람들로 업그레이드가 된 나와 막시민은 잠시 귀빈실로 모셔졌다.
엘프들은 회의를 진행해야 한다며 급하게 사라졌는데 덕분에 나도 숨 돌릴 틈이 생겼다.
“혼자 오신 거예요?”
“음.”
그는 창가에 기대선 채 고개를 끄덕였다.
바깥 풍경을 구경하는 그는 마치 조금이라도 더 라스틸리아의 모습을 눈에 새기겠다는 기세였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이번에는 막시민이 먼저 물어 왔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하려면 내가 미래의 정보를 알고 있다는 사실도 알려야 하기에 대충 둘러대기로 했다.
“세계수의 뿌리에 기생충이 있었습니다. 왜 굳이 그걸 제가 처리할 때까지 신탁도 내리지 않고 놓아둔 건지 모르겠지만 잘 해결했습니다. 도중에 엘프 하나가 절 방해하려다가 오히려 죽었고요.”
“신의 뜻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신탁을 굳이 지금 내렸다는 건 네가 대수림에 방문함으로써 신의 생각이 바뀌었다는 걸로 봐야 한다. 네가 오지 않았으면 저대로 세계수가 죽게 놔두는 게 신의 뜻이었다는 이야기겠지.”
“이해하기 어렵군요.”
“이해하려고 하지 마라.”
막시민의 시선은 어느새 저 멀리서 아직까지도 빛 가루를 뿌리고 있는 세계수로 향했다.
“그보다 내가 듣고 싶은 대답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어떤 대답을 원하십니까.”
“고작 며칠 있었다고 그렇게까지 달라지면 누구든 물어보지 않겠나.”
아, 그걸 물어본 거였구나.
사실상 진화 특성으로 강해진 것이기에 이것도 설명할 수는 없었다.
“곤란한 질문이었나. 대답하지 않아도 상관없다.”
그는 내가 뭐라 답하기도 전에 먼저 말을 꺼냈다.
그리고는 이내 손짓했다.
“따라와라.”
갑작스레 그가 방을 걸어 나가며 따라오라는 말을 하자 이유는 모르겠지만 일단 따라나섰다.
그를 따라 도착한 곳은 귀빈실 옆에 있던 공터였다.
건물 내에서 일하는 엘프들이 종종 눈에 띄었는데 그곳에서 막시민이 검을 뽑아 들었다.
갑자기?
라는 의문이 들었지만 이내 의도를 대충 파악하고 물었다.
“대련입니까.”
“대련? 그렇다고 해 두지.”
속내를 알 수 없는 말에 조금 난감했지만 내색 없이 검을 뽑았다.
어차피 막시민에게는 모든 걸 쏟아부어도 이길 확률이 없으니 초반부터 전력을 다하기로 했다.
‘엘프 최강의 검사라는 후겐에게도 초반에는 어느 정도 버텼다.’
과연 막시민에게는?
깡!
강렬한 쇳소리가 울려 퍼지며 지나가던 엘프들의 시선이 우리에게 집중되었다.
이왕 전력을 다하기로 마음먹은 김에 나는 후겐에게는 사용하지 못했던 영혼 각인을 일깨웠다.
―크라하!
오랜만에 들려오는 알-구르드의 목소리가 내게 용기를 주었다.
실제로 육체의 능력이 단번에 상승해 갑작스레 빨라졌다.
휘익― 쾅!
그러나 그런 내 움직임에도 막시민은 제자리에서 내 공격을 받아 내고 있었다.
‘미쳤다.’
이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막시민의 작은 움직임 하나하나가 머릿속에 입력되었다.
천재가 된 내 검술 재능은 그의 일견 평범해 보이는 움직임들이 얼마나 아득한 수준의 행동들인지 파악이 가능했다.
‘틈을 만들어 보고 싶다.’
그런 막시민을 한 발자국이라도 움직이게 만들고 싶었다.
나는 마나의 파동과 무아검을 새로 배운 초월자의 검법에 더하며 가속했다.
그러자 지금까지 겪어 본 적 없는 엄청난 빠르기에 제어가 힘들 정도였다.
후드드득.
내가 움직일 때마다 땅이 갈라지며 돌 부스러기가 흩날렸다.
그리고 그 모든 일들이 마치 시간이 느려진 것처럼 느껴졌다.
마침내 내 검은 차마 반응도 못하는 듯한 막시민에게 휘둘러졌다.
“빠르군.”
……!
느려진 체감 시간 사이에서 막시민의 말이 똑똑히 들렸다.
물리적으로 가능한 일인가 하는 뜬금없는 생각과 동시에 드디어 그가 움직였다.
끼기기긱!
갈락슈르가 상대의 검에 가로막혀 듣기 싫은 소음을 냈다.
담겨 있던 속도와 힘을 생각하면 굉음이 터져도 이상하지 않았는데 단순히 쇠가 긁히는 소리만 났다.
그러나 나는 포기하지 않고 검술을 계속 이어 나갔다.
‘결을 따라서…….’
막시민의 검, 배신 처형자를 베어 버린다!
“음?”
막시민도 이상한 낌새를 느꼈는지 자연스레 맞대었던 검을 뗐다.
억지로 다시 붙어 보려고 했지만 어림도 없는 움직임이었다.
“이상한 걸 익혔군.”
이상하다는 말과는 별개로 막시민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그리고는…….
콰아아아아앙―――――!
예의 폭력적인 오러가 눈앞에서 터져 나왔다.
나는 상대의 오러를 막기 위해 급히 검을 휘둘렀다.
‘보인다. 막아 낼 수 있어.’
터져 나오는 오러의 결이 보였다.
알-구르드의 영혼 각인까지 사용한 탓에 펌핑된 육체 능력이 고스란히 재능에도 영향을 주었다.
후웅.
몸이 본능적으로 움직이며 초월자의 검법을 그려 냈다.
그와 함께 막시민의 오러가 베이기 시작했다.
‘된다!’
수라한조차 꼼짝없이 당했던 그 오러를 막아 내다니!
물론 이게 내가 수라한보다 강하다는 의미는 아니었지만 마음이 들떠 왔다.
“성장은 빠르지만 아직 멀었군.”
기뻐하던 찰나 어느새 등 뒤에서부터 목소리가 들려왔다.
급하게 뒤를 돌아보려 했지만 큰 충격이 뒤통수를 울려 왔다.
콰앙!
뇌가 흔들리는 충격과 함께 바닥에 처박혔다.
도대체 어느새?
“일어나라.”
덤덤하게 말하는 막시민의 목소리를 들으며 간신히 몸을 추슬렀다.
아직도 머리가 울렸지만 일어나는 데에는 문제가 없었다.
“그것도 데슈른이 알려 준 건가?”
그가 일어나는 나를 보며 내 검을 눈짓했다.
“못 보던 검술을 쓰는군.”
“스승님이 가르쳐 준 건 아닙니다.”
“그럴 것 같았다. 데슈른이 사용할 법한 검술 같지는 않았으니까. 여자가 만든 것 같군.”
나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던 참이었다.
세심하고 균형 있는 검법.
만든 이의 성격이나 특징이 눈에 보일 듯 선명했기에 여자일 것 같았다.
무엇보다도 여자의 몸 구조에 어울리는 움직임이 종종 있었기에 든 판단이었다.
아무래도 남자와 여자의 몸은 달랐기에 고급 검법일수록 이러한 차이가 두드러진다.
“수준으로 따지면 나랑 비슷하겠어. 오랜만에 조금 놀랐다. 나와 비슷한 수준의 검사는 근래에 보기 드물었으니.”
“비슷한 수준…….”
원죄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 검법의 주인은 초월자, 우리가 흔히 말하는 신이다.
그런데 막시민은 자신이 그런 신과 비슷한 수준이라고 하니 이걸 대단하다고 해야 할지…….
‘신이 되기 전에 만든 검법이니까 엄연히 따지면 신이 만든 건 아니지만…….’
역시 이 사람은 괴물이었다.
내가 잠시 질린 표정으로 그를 보고 있자 막시민은 자신의 검을 등허리에 차며 손을 저었다.
“더 이상 걱정할 필요 없겠군. 나는 이만 가겠다.”
“어딜 가요?”
“이자벨한테. 자리를 너무 오래 비웠군.”
그는 그 말을 끝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말린다고 들을 사람도 아니었기에 말리지 못하고 그저 보고 있다가 문득 그가 한 말이 떠올랐다.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갑자기 웬 대련인가 했더니 내 수준을 알고 싶었던 건가.
하지만 그와 부딪혀 보니 다시 한 번 깨달았다.
‘난 아직 약하다.’
자만하기에는 내 자신이 너무나 부족했다.
운 좋게 방심한 세이르를 죽이기도 하고 잠시나마 후겐의 뒤통수를 칠 수도 있었지만 여전히 멀었음을 느꼈다.
아직 난 오러 마스터도 되지 못한 상태.
게임 속에서 플레이어블 캐릭터들이 초인의 반열에 들어선 후에야 멸망급 에피소드가 진행되기 시작한다. 그걸 생각하면 본격적인 게임은 오러 마스터나 워록이 되고 난 이후에나 비벼 볼 만했다.
“저…… 소, 손님.”
“음?”
그렇게 생각에 잠겨 있던 내게 엘프 하나가 다가왔다.
“회의장에서 모셔 오라는 전언이 왔습니다.”
그의 눈이 공터에 일어난 참혹한 파괴의 흔적을 흘깃거리는 게 꽤나 인상적이었다.
그나저나 회의가 끝난 건가? 이제 내 차례?
“알겠습니다. 바로 가죠.”
“네. 저를 따라오시면 됩니다.”
엘프의 뒤를 따르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아직 조급할 필요는 없었다.
난 이미 지금 시점에서는 넘치도록 강하니까.
‘하지만…….’
단순히 그것만으로 멸망을 막아 낼 수 있을까?
그리고 이 세상은 현실인 만큼 한 번 죽으면 끝이다.
게임에서 초인이 되고 나서도 숱하게 죽었던 캐릭터들을 생각하면 안심할 수 없음은 당연했다.
‘역시 아무리 생각해도 혼자만으로는 부족해.’
세력이 필요했다.
정확히는 강력한 캐릭터들을 포섭하고 데리고 있을 만한 기반.
집회는 당장 집어삼킬 수 없으니 일단 놔둔다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마침 좋은 기회다.’
엘프와의 협상에서 좀 얻어 내야겠다.
기반을 다질 만한 카드를.
* * *
“금방 오셨네요.”
이자벨이 책을 읽다가 어느 순간 들어서 있던 막시민을 향해 말했다.
막시민은 무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자신의 등허리에 매인 칼집을 풀어 탁자 위에 올려놓고는 의자에 앉았다.
“아드리아스 님은요?”
“용무가 남아서 조금 있다가 온다.”
“이왕 가셨던 거 같이 오시지 그랬어요.”
“그럴 필요 없는 녀석이야.”
막시민의 말에 이자벨의 두 눈에 이채가 띠었다.
그녀는 읽던 책을 그대로 덮으며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이자벨이 턱을 손으로 받치며 기대 어린 표정으로 막시민을 바라보기 시작하자 무표정했던 그의 얼굴도 풀리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 있던 거예요?”
“정확히는 나도 듣지 못했어.”
막시민은 탁자에 올려 두었던 자신의 칼집에서 칼을 꺼냈다.
그리고 그의 검인 ‘배신 처형자’에는 이전에 없었던 상처가 새겨져 있었다.
“단시간에 성장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괴물 같은 성장이었어.”
“당신이 괴물이라고 할 처지예요?”
“농담이 아니야.”
그는 검면에 난 상처를 훑으며 말했다.
“고작해야 올해 아카데미 졸업반이라는 녀석이 오러 마스터를 죽였다.”
“오러 마스터?”
이자벨이 놀라서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런 그녀의 행동에 지그시 어깨를 잡고 누른 막시민은 이어서 말했다.
“아드리아스는 오러 마스터도 아니지.”
“꼭 당신 같네요.”
“아니, 다시 말하지만 녀석은 아직 졸업도 못 한 학생이야. 난 졸업 후에 했던 일이고. 이건 꽤나 큰 차이지. 나랑은 달라.”
“아드리아스 님이 당신보다 재능이 있다는 의미인가요? 그렇게까지 느껴지지는 않았는데.”
이자벨도 자신의 능력이나 보는 눈에는 자신이 있었기에 의문을 가지고 말했다.
그리고 막시민도 그런 그녀를 부정하지 않았다.
“네 말이 맞다. 하지만 신과 관련된 힘을 가진 것도 그렇고, 녀석에게는 아직 우리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어. 너도 만나면 알게 될 거야.”
“흐응.”
흥미롭다는 듯 콧소리를 낸 이자벨이 잠시 턱을 괸 채 생각에 잠겼다.
잠시 뒤, 그녀는 눈을 감고 쉬고 있던 막시민을 불렀다.
“갑자기 생각난 게 있는데, 이러면 어떨까요?”
“음?”
그녀의 얼굴에 짓궂은 미소가 번졌다.
잠시 이자벨의 말이 이어지고 그 말을 막시민은 조용히 듣기만 했다.
마침내 그녀의 말이 끝나자 막시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자벨. 네가 그러길 원한다면.”
“그럼 그렇게 하는 걸로 해요.”
그녀의 미소가 짙어졌다.
“시간은 많으니까요.”
* * *
치이이익.
콰직!
“끄어억!”
누군가가 단말마의 비명을 내지르며 쓰러졌다.
도마뱀 수인족으로 보이는 그 인물은 이내 꿈틀거리며 살이 녹아내리더니 기괴한 모습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어어어.
순식간에 언데드가 되어 곧바로 옆에 있던 수인을 공격했다.
“도망쳐! 막을 수 없는 상대다!”
“다른 마을에 지원을 요청해야…… 커억!”
소리치던 리저드맨은 검은 창이 배에 꽂히며 그대로 절명했다.
그리고 마법을 사용한 흑마법사는 곧바로 그 리저드맨도 언데드로 만들었다.
“귀찮게 굴지 말거라.”
어느새 아드리아스를 따라 대수림 깊은 곳까지 도착한 아스란 블루였다.
살짝 길을 비껴간 덕분에 환인족의 마을 근처에 있는 다른 마을에 도착한 그는 곧바로 전력을 만들기 시작했다.
마을 자체를 던전화시키고 있는 그는 어차피 이리되었으니 여기까지 온 김에 여러 이종족들을 이용해 실험을 할 생각이었다.
그의 안중에 아드리아스 크롬웰은 그저 운 좋게 모른의 눈에 들어온 마법사일 뿐이었다.
“자, 보여 주거라. 이 주변에 다른 이종족들은 뭐가 있지?”
―그어어어.
언데드의 단편적인 기억을 뜯어낸 아스란이 미소 지었다.
“근처로군.”
그의 다음 목표는 환인족의 마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