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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 특성으로 최강 네크로맨서-178화 (178/415)

178화. 새로운 신탁

검사에게 있어서 팔이라 함은 그저 무기를 들고 휘두르는 용도가 아니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한쪽 팔이 없으면 몸의 균형이 맞지 않아 검사로서의 생명은 거의 끝이라고 볼 수도 있는 일.

하물며 후겐의 경우 쌍검을 사용하는 검사였다.

‘죽으라는 말보다 심한데?’

앞으로 수백 년은 더 살아갈 수도 있는 엘프 검사에게 팔 한쪽을 뜯어 가는 것은 끔찍한 형벌이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장로님이 흥분하셔서 잘못을 저질렀다지만 그건…….”

주변에서도 격한 반응이 튀어나왔다.

그러나 정작 이야기를 들은 후겐은 덤덤했다.

그는 잠시 고민하는 듯 보이다가 호이르에게 눈짓했다.

그러더니…….

“흐읍.”

사악!

툭…….

순식간에 자신의 왼팔을 잘랐다.

“허억!”

“자, 장로님!”

그의 과감한 결단에 모두들 놀랐다.

나도 놀랄 정도였다.

호이르는 그런 후겐을 보더니 눈빛이 흔들리며 급히 다가가 지혈을 도왔다.

“도대체 왜 그랬나?”

“모두를 살리려면 이게 최선이었습니다.”

“모두를 살려?”

그러더니 이내 막시민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의 눈빛은 혼란스러운 듯 흔들리고 있었지만 이내 차분히 가라앉았다.

엄청난 평정심이었다.

“아무래도 후겐의 지인인 듯하군. 그것보다 아드리아스 크롬웰, 이번 일은 우리의 잘못이 맞으니 사과부터 하지.”

그는 후겐의 지혈을 도와주던 걸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허리를 숙여 보였다.

갑자기 저자세로 나오니 저게 과연 막시민 때문인지 정말로 사과를 하고 싶었던 건지 모르겠네.

어차피 나도 엘프와 척을 지기 싫은 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일부러 조용히 있었다.

막시민이 온 김에 뜯어낼 수 있는 건 뜯어내야지.

“나이가 꽤 있어 보이는 만큼 주제 파악을 잘하는군.”

내가 생각한 바를 막시민이 알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를 대신해서 말을 꺼냈다.

그리고는 여전히 팔을 지혈 중인 후겐에게 말했다.

“말했다시피 네 팔을 자르는 게 기본 조건이다. 협상 대상은 너도 알겠지만 이곳에 있는 엘프 전체. 살리고 싶다면 너도 그럴듯한 조건을 걸어야 할 거다.”

대놓고 협박하는 막시민을 보며 후겐과 호이르의 안색이 굳었다.

그에 호이르가 무슨 말인가 하려고 하자 후겐이 애써 막았다.

“원로님, 제가 해결하겠습니다.”

“……저자가 그 정도로 강하다는 말인가? 아니면 자네의 고집인가?”

“못난 모습을 보여 드려 죄송합니다.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멀쩡한 상태에서도 그를 감당하기 힘들었을 겁니다.”

“허어…….”

후겐의 말에 호이르가 뜻 모를 탄성을 토해 냈다.

그런 호이르를 뒤로하고 고통 때문인지 식은땀을 흘리는 후겐이 앞으로 나섰다.

“원하는 걸 말해라.”

“말하면 네가 들어줄 수 있나?”

“이래 봬도 장로 신분이다. 높으면 높았지 결코 낮지 않은 신분이지.”

막시민의 무력에 굴복해 자신의 팔을 단숨에 내주었던 것과 별개로 할 말을 하는 후겐이 조금 아이러니하게 느껴졌다.

후겐의 말을 들은 막시민은 잠시 주변을 쓱 훑어보더니 이내 마지막으로 내게 시선을 돌렸다.

“원하는 대로 해라.”

그는 마치 자신의 역할은 여기까지라는 듯 팔짱을 끼며 뒤로 물러섰다.

……개멋있네.

일단은 막시민의 호의를 받아 두기로 했다.

생각해 보면 애초에 은혜를 베푼 것도 나고, 손해를 본 것도 나니, 내가 받아야 할 보상이긴 했다.

그나저나 조금 전의 전투로 몸이 조금 망가져 말을 듣지 않네.

서 있는 것도 힘겨울 정도로 여기저기가 쑤시는 가운데, 갑자기 땅이 흔들렸다.

꾸드드득.

“세계수가 또 움직인다!”

누군가의 외침과 함께 위를 올려다보자 하늘에서 빛 가루가 뿌려지고 있었다.

“이건…….”

“이게 대체…….”

마치 이 가루를 알고 있는 듯한 반응들이었다.

마치 감동을 받은 듯 눈물까지 흘리는 엘프도 있었는데 갑작스러운 일에 머리가 따라가지를 못하고 있었다.

사아아.

“뭐야, 이건.”

빛 가루가 몸에 닿자 겉으로 드러난 상처가 순식간에 나았다.

그뿐 아니라 지쳤던 몸에서도 활력이 넘치기 시작했다.

[가호 ‘신살의 씨앗’이 신의 흔적을 모았습니다.]

[2개의 흔적을 더 모으면 변화가 일어납니다.]

오? 여기서 갑자기?

“이게 신이 남긴 힘인가. 귀쟁이들이 숭배할 만하군.”

막시민의 말대로 이건 마법을 넘어선 기적과도 같은 힘이었다.

지금까지 조금 신비롭기만 할 뿐 자기 몸에 달라붙은 기생충도 처리하지 못하는 멍청한 나무로 생각했는데 그 판단을 정정할 정도의 효과와 풍경이었다.

“세계수의 축복이다!”

“얼마 만이지? 거의 100년 만의 축복 아닌가?”

“축제를 열어야 해!”

이 새끼들이 지금 대가리에 나사가 빠졌나.

아직 나랑 하던 이야기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뭔 소리들을 하는 거야.

세계수도 그렇고 엘프들도 그렇고 뭔가 하나씩 부족해 보였다.

첫인상과 다르다고 해야 하나.

“정말…… 정말 저 인간 덕분인가?”

“그렇겠지. 그는 무려 열매를 받았다고.”

“도대체 세계수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저 인간이 대체 뭘 했기에…….”

이내 사고의 흐름이 내게 도달한 엘프들이 전부 나를 쳐다보았다.

그 부담스러운 시선 끝에는 호이르 또한 존재했다.

“이것도 전부 그대 덕분이겠지.”

호이르가 내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근데 저거 지금 울고 있는 거야?

“정말 고맙네. 그대는 세계수의 은인이자 라스틸리아의 엘프들의 구세주. 그 말이 틀리지 않았어.”

“이게 눈물을 흘릴 정도로 대단한 일입니까?”

“그럼, 대단하고말고. 마지막으로 세계수가 축복을 내렸던 게 벌써 126년 전이네. 우리들에게조차 긴 시간이지. 그전에는 13년을 주기로 축복을 내려 왔던 게 이유도 모른 채 끊긴 지가 오래였어.”

그때쯤에 폭식의 새끼들이 기생하기 시작한 건가?

어쨌든 세계수 덕분에 분위기가 많이 이완되었다.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세계수의 빛 가루가 흩날리고 그 가루들은 라스틸리아 전체로 퍼져 나갈 만큼 많은 양이었다.

잠시 멍하니 그 광경을 보고 있자 후겐이 움직였다.

그는 뚜벅뚜벅 내게 걸어오더니 이내 무릎을 꿇었다.

“라스틸리아에 있는 모두가 이 광경을 보고 있겠군.”

무릎을 꿇고 한다는 소리가 뜬금없는데.

“인간, 네가 옳았구나. 늦었지만 사과하겠다.”

“분하지 않으십니까?”

나는 상처가 전부 아문 그의 팔을 눈짓했다.

그러자 그는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다 내가 자초한 일. 후회는 남을지언정 책임을 회피할 수는 없다. 어찌 됐든 그대의 목숨을 앗아 가려 한 사실은 변하지 않으니.”

“하고 싶은 거 다 해 놓고 그딴 말을 하면 내 속이 풀릴 줄 알았냐.”

“욕을 하고 싶으면 실컷 하게. 어떤 모욕을 줘도 상관없네. 나는 은인을 죽이려 한 몹쓸 놈이니.”

오히려 이런 식으로 나오니까 더 마음에 안 든다.

차라리 끝까지 나쁜 놈으로 있든가.

나는 그를 무시하고 호이르를 향해 말했다.

“라스틸리아로 돌아가서 마저 이야기를 마무리하죠.”

“그대가 그리하길 원한다면 그렇게 하지.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듣고 싶기도 하고 말일세.”

그의 시선이 내 길어진 머리카락에 닿았다.

확실히 생각지도 못한 일이 세계수 안에서 일어났었지.

“내 모든 권한을 사용해서라도 자네에게 충분한 보상을 약속하지. 과연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만.”

흩날리는 빛 가루들 사이로 호이르의 말이 아련하게 울려 퍼졌다.

* * *

모두와 함께 돌아온 라스틸리아는 축제 분위기였다.

예상대로 세계수의 축복은 이곳까지 퍼졌는데 모두들 거리로 나와 악기를 연주하며 춤을 추고 있었다.

속 편해 보이는 그 모습들에 내가 했던 고생이 대비가 되어 배알이 뒤틀렸지만 굳이 티를 내지는 않았다.

‘나도 대인배는 못 되는군.’

구태여 되고 싶은 마음도 없었지만 괜히 쓴웃음이 나왔다.

“어? 세계수 원정대다!”

“이야! 해냈군요! 여러분들 덕분에 축복이 다시 내려지는 것 맞지요?”

“정말 감사합니다!”

우리를 발견한 엘프들이 환호를 토해 내며 다가왔다.

하지만 환대를 받는 이들은 모두 머리를 긁적이거나 시선을 땅으로 회피하며 기뻐하지 못했다.

“반응들이 왜 그래?”

“어? 후겐 장로님? 어디 다치셨습니까?”

후겐은 두꺼운 망토로 목 위를 제외한 전신을 가리고 있었기에 한쪽 팔이 잘린 게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세계수의 축복으로도 가리지 못한 그의 창백한 안색은 확연히 티가 났다.

“모두들 지쳤으니 일단 물러나게. 장로 회의를 거친 후 축복과 관련된 일은 모두에게 공표를 할 테니 지금은 즐기고 있게나.”

호이르가 적절하게 나서며 엘프들을 물렸다.

그렇게 길이 터지고 다시 앞으로 나아갈 때 저 멀리서 그리핀을 타고 내려오는 엘프가 보였다.

“아! 후겐 장로님, 호이르 원로님!”

“무슨 일이지?”

급하게 온 듯한 그 엘프는 우리를 둘러보며 이내 내게 시선을 힐끔힐끔 주었다.

또 뭔 일인데.

“조금 전, 신전에 신탁이 내려졌습니다.”

“신탁이?”

신탁이라는 말에 주위가 술렁였다.

“신탁이 또?”

“세계수의 축복과 연관이 있는 거겠지?”

“저 인간이 대수림에 들어오고 나서 사건이 끝이질 않는구먼.”

“근데 옆에 있는 저 녀석도 인간이야? 언제 초대됐지?”

엘프들의 수군거림을 들으며 우리는 곧바로 행선지를 틀었다.

그렇게 찾아가게 된 곳은 라스틸리아의 타피오 신전.

그곳의 입구에는 이미 나이가 꽤 있어 보이는 엘프들이 여럿 모여 있었다.

“마침 잘 왔습니다. 오랜만입니다, 호이르.”

“모두들 반갑군. 그보다 신탁은?”

모두들 겉으로 보기에는 젊어 보였지만 숨길 수 없는 관록과 연륜이 몸짓이나 표정에서 드러났다.

마치 오래된 나무를 보는 느낌이랄까.

호이르나 헤그리우는 이미 겉으로도 늙어서 어색함이 없었지만 외형만은 젊은이들이 저러니 뭔가 어색했다.

“신탁의 내용은 우리도 아직 전해 듣지 못했네. 대사제께서 신탁의 후유증으로 열병을 앓고 계셔서 아마 몇 시간 뒤에나 들을 수 있겠지.”

누군가가 대표로 말해 주었다.

자세히 보니 리그니르였네.

전체 회의를 주도하는 의장으로 엘프 메인 퀘스트에서 자주 마주치는 NPC였다.

의장의 직책이라 그런지 생각보다 유연한 사고를 지닌 엘프 중 하나로 인간에게 꽤 우호적이었다.

그런 그의 시선이 아까 전부터 줄곧 내게 향해 있었다.

“그대가 이번 원정에 참가한 인간인가. 그대 덕분인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신탁이 잘못된 게 아니었다면 아마 이 세계수의 축복은…….”

리그니르는 말을 잠시 끌더니 흐뭇하게 웃었다.

“자네 덕분이겠지.”

“예. 제 덕분입니다.”

그리고 나는 겸손 없이 그냥 말했다.

그에게는 빈말이 필요 없었다.

‘아이미르의 할아버지. 직감이 고도로 발달된 아이미르의 진화 버전이지.’

그의 직감은 거의 독심술의 경지에 들어섰으니까.

오히려 그런 능력을 가지고도 인간에게 호의적일 수 있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다.

인간인 내가 이런 말을 하기는 조금 그렇지만 속마음을 다 읽을 수 있다면 절대로 좋아질 수 없는 게 인간이었으니까.

근데 생각해 보면 그런 능력을 가지고도 배신자들을 눈치채지 못했다는 게 오히려 놀랍다.

게임에서는 설정 오류라고 생각할 정도로 징그러운 수준의 독심술이었는데.

“아드리아스 크롬웰. 날 알고 있군?”

“예.”

내가 순순히 말하자 리그니르가 미소 지었다.

“판단이 빠르군. 그 판단으로 지금까지의 역경을 헤쳐 온 건가.”

분명 인간에게 호의적인 엘프였지만 더 이상 그와 대화를 하기는 싫었기에 묵비권을 행사했다.

굳이 말을 나눠야 하는 것도 아니고.

“영리하군.”

그렇게 칭찬해도 아무것도 안 나온다.

그때 신전 내부에서 사제의 복장을 한 엘프 하나가 나왔다.

“대사제께서 깨어나셨습니다. 모두 입장 부탁드립니다.”

“벌써? 빠르군.”

“잠시만. 아무리 그래도 이 인간들은 잠시 기다리게 해야 하지 않나? 신탁이 그들과 관련 있지 않는 한 신전에 들이기에는…….”

누군가가 나와 막시민을 가리키며 말하자 모두들 고민하는 표정으로 곤란해했다.

그러나 아무 필요도 없는 고민이었다.

“나온다.”

막시민이 나직이 말했다.

그러자 그의 말대로 이전에 봤던 적이 있는 대사제가 부축을 받으며 나왔다.

“대사제님. 굳이 무리하지 말고 안에서 말씀하셨어도 됐는데…….”

“아닙니다. 중요한 손님들도 오셨으니 제가 나서야지요.”

중요한 손님이라는 말과 함께 우리 쪽을 보는 걸 보면 아무래도 헤그리우가 말하는 중요한 손님은 우리겠지?

“신탁을 전달하겠습니다.”

그녀는 한 번 호흡을 가다듬더니 말했다.

“숲에 들어온 손님들을 대접하라. 앞으로의 축복은 그들의 방문과 함께 이어질 것이다.”

짧은 내용이었다.

하지만 단순해서 알아듣기는 쉬웠다.

근데…….

“잠시만. 마지막 문장의 의미를 알 수 있습니까?”

누군가가 내가 품은 의문을 똑같이 떠올렸는지 곧바로 물었다.

그러자 헤그리우는 이마에 묻은 식은땀을 닦아 내며 말했다.

“말 그대로입니다. 앞으로 있을 13년 주기의 축복은 이제 손님들의 방문이 없으면 없다고 하십니다.”

그 말은 우리가 없으면 이제 세계수의 축복도 없다는 거?

내 생각에 쐐기를 박듯 헤그리우가 말을 이었다.

“이제 저들은 우리 엘프가 지켜야 할 귀중한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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