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화. 전투 그리고 설득
엘프들은 대체로 성별을 가리지 않고 장발이었다.
그러나 내 앞에 선 후겐은 장발들 사이에서도 눈에 띄는 대머리였다.
단발 엘프는 드물지만 가끔 보았어도 대머리는 후겐이 처음이었지.
게임에서도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네가 포람을 쓰러트린 건가.”
차가운 표정의 후겐이 내 눈을 마주 보며 물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미처 반응할 새도 없이 그의 발차기가 날아왔다.
퍼엉!
마치 북을 울리는 듯한 소리와 함께 걷어차였다.
전투 재능으로 인한 본능에 가까운 막기가 아니었으면 배가 터졌을 거다.
“장로님! 멈추세요!”
아이미르가 곧장 중재를 시도했다.
하지만 후겐은 멈출 생각이 없는지 내게 느긋하게 다가왔다.
“인간 주제에 건방지군.”
조금 위험하군.
나는 갈락슈르를 고쳐 잡았다.
빈말이 아니라 잠시라도 집중이 흐트러지면 죽을 수도 있었다.
“내가 누군지는 알고 검을 드는 건가?”
“그럼 그냥 죽어 주라는 말입니까.”
“역시 건방져.”
투웅!
후겐이 바닥을 박차자 마치 땅이 밀려나는 듯한 착시가 일어났다.
그리고는 순식간에 내 앞에…….
콰앙!
분명 검으로 빗겨 막았음에도 대포알이 터지는 소리가 났다.
아마 후겐만의 독특한 검술 때문이겠지.
‘정령 검술.’
엘프들만의 종족 특성, 정령술.
인간 중에는 극히 희소하게 나오곤 하는 특기가 엘프들에게는 패시브였다.
후겐은 가장 대표적인 4대 원소를 모두 다루는 엘프였다.
조금 전의 움직임은 땅의 정령과 바람의 정령을 이용한 공격이겠지.
“제법.”
후겐이 희미하게 감탄한 기색을 내비쳤다.
하지만 나로서는 이미 그가 정령을 이용한 검술을 사용한다는 것을 짐작하고 있었기에 대처가 가능했을 뿐이다.
“후우.”
심호흡을 하고 집중했다.
어차피 후겐이 나를 죽이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난 지금 라스틸리아에 초대받은 손님의 신분.
후겐쯤 되는 인물이 그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그렇다면 힘껏 부딪혀도 죽지는 않겠지.
‘오러 마스터와의 대련 기회가 흔한 것도 아니니까.’
이번에는 내가 먼저 움직였다.
스윽.
유령 같은 움직임.
스승님의 무아검에 적힌 보법이나 신법은 조금 더 자연에 동화되는 느낌이었지만 점차 내 방식으로 변해 버렸다.
“음?”
후겐이 의문성을 흘리며 내 공격을 가볍게 피했다.
그러나 내 검은 집요하게 그를 노리며 따라갔다.
성질 변환.
유연하게.
캉!
드디어 처음으로 검을 뽑아 든 후겐이 나와 검을 맞대었다.
후겐이 검을 떼려 했지만 내 검은 휘감아 드는 뱀처럼 그에게 얽혀 들었다.
“잔재주군.”
그의 검이 내 검의 움직임을 역으로 휘감았다.
그러자 강한 반발력과 함께 맞대었던 검이 떨어져 나갔다.
그러나 미리 예상하고 있던 나는 다시 한 번 무아검의 성질 변환을 이용해 이번에는 쾌속으로 달라붙었다.
‘근접전.’
최근 강자와 맞붙을 일이 많아진 나는 고민 끝에 전생에 익혔던 격투술을 떠올렸다.
이곳에서 검술과 몸을 활용하는 법을 배우며 깨달은 것은 현대의 격투술이 전혀 부족하지 않다는 점이다.
비록 마나를 사용하느라 전생과는 비교도 안 될 동작들과 움직임이 가능해진 만큼 변형이 필요했지만…….
‘잡았다.’
갑작스레 내가 손을 사용할 줄은 몰랐는지 후겐은 소매 쪽 옷깃을 잡혔다.
한 손에 검을 들고 있는 만큼 조금 불편했지만 나는 잡은 소매를 당기며 그의 균형을 무너트렸다.
쫘아악!
힘을 버티지 못한 소매가 찢어졌지만 내가 의도한 대로 후겐이 잠시 흔들리며 그의 검이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러나 내 공격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애초에 옷소매 따위를 당기는 걸 격투술이라고 부르면 부끄럽지.
나는 이어서 왼손으로는 상대의 몸을 잡으려 했고, 오른손으로는 검을 휘둘렀다.
투닥!
팟!
눈 깜빡할 새에 여러 번의 손속이 오가며 치열한 근접전이 펼쳐졌다.
내가 집요할 정도로 달라붙자 후겐도 결국 어울려 주기로 한 모양인지 더 이상 물러서지 않고 맞섰다.
어느 순간부터 말없이 그저 몸만 움직였지만 머릿속은 계속되는 수 싸움에 과부하가 걸릴 것만 같았다.
우득!
“음…….”
그리고 결국에는 내가 먼저 해냈다.
후앙!
바람이 몰아치며 시야를 가린 사이 저 멀리 뒤로 물러난 후겐이 빠져 버린 어깨를 끼워 맞추는 게 보였다.
“재미있는 기술이군. 대륙 남쪽에 사는 인간들의 기술과 비슷한데 그곳에서 온 건가?”
“아닙니다. 제가 만든 기술입니다.”
“네가 만들었다고?”
비록 그의 어깨를 뽑을 수 있었지만 그건 그가 내게 어울려 주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애초에 그의 특기인 정령을 사용하며 검만 휘둘렀으면 다가서지도 못했겠지.
‘아니지. 오러 비기를 썼으면 훨씬 전에 끝났을 거야.’
그는 더 이상 나와 싸울 마음이 없는지 검을 집어넣었다.
이제 끝난 건가 싶던 나는 이어서 나온 그의 말에 살짝 놀랐다.
“데슈른의 제자인가?”
“그렇습니다.”
후겐이 데슈른을 알고 있는 건 그다지 놀랍지 않았다.
데슈른이 돌아다니는 장소가 인간보다는 인외의 존재들에게 더 가까운 곳이니 당연한 이야기지.
“제자는 들이지 않을 거라더니 세월이 야속하군.”
스승님의 이야기인가.
그러고 보니 게임 속에서도 데슈른이 제자를 만든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는 신비인 같은 느낌의 NPC라 만나고 싶다고 해서 만나기도 어렵고 만나도 딱히 뭔가를 얻어 낼 수 있는 인물은 아니었다.
“괜찮으신가요?”
싸움이 끝났음을 안 아이미르가 조심스레 내게 다가와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어느새 사라진 포람을 찾았다.
“저를 습격한 사람들은?”
“일단은 치료를 하러 갔지만 곧 저희 측에서 조사를 할 거예요. 제가 아드리아스 님을 변호할 테니 큰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솔직히 라스틸리아가 아닌 다른 장소에서 만났다면 곧바로 죽였을 텐데 조금 아쉽다.
그가 죽는다고 세계수의 타락이 없어지는 건 아니지만 귀찮은 일은 줄어들 테니까.
“바람의 여섯 번째 별.”
“네, 장로님.”
“이 녀석은 내가 데려가겠다.”
후겐의 말에 아이미르는 물론이고 나도 조금 당황했다.
“어차피 어디에서 머무르든 상관없지 않나?”
“그, 렇습니다만…….”
아이미르가 내게 불안한 눈빛을 보내왔다.
그런데 나라고 별수가 있나.
딱히 상관없기도 하고.
“알겠습니다. 댁에 머무르죠.”
“내 이름은 후겐 코르달 베 크락시아다. 이름이 번거로우면 그냥 장로라고 불러라.”
그는 쿨하게 자기 할 말만 하더니 그대로 어디론가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오히려 급해진 아이미르가 내게 말했다.
“일단 오늘은 실례가 많았습니다. 내일 제가 다시 찾아뵐 테니 그때까지 푹 쉬세요.”
“예. 내일 뵙겠습니다.”
대화가 끝났음에도 여전히 자리를 뜨지 못하고 걱정스레 바라보는 아이미르를 뒤로 하고 후겐을 쫓았다.
그가 무슨 이유로 나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가는지는 몰라도 나쁜 의도로 느껴지지는 않았다.
후겐의 뒤를 따라 도착한 곳은 마치 메르쿠르의 집을 연상시키는 큰 나무였다.
단지 차이점이라면 나무 내부에 집을 만든 것이 아닌 길게 뻗은 나뭇가지 위에 집이 지어져 있었다.
‘어떻게 올라가냐.’
나무를 타야 하나 고민하는 순간 후겐이 말했다.
“저항하지 마라.”
그의 말이 끝나는 동시에 무언가가 내 몸을 감쌌다.
후겐의 조언대로 저항하지 않자 이내 몸이 떠오르더니 하늘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정령입니까?”
내가 물었지만 후겐은 아무 말 없이 그저 어딘가를 바라봤다.
세계수가 있는 방향이었다.
“장로님,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귀찮게 하는군. 데슈른한테도 그리 귀찮게 굴었나?”
“예. 스승님은 항상 질문에 답해 주셨습니다.”
“나는 네 스승이 아니다.”
“그래도 묻겠습니다. 혹시 세계수에 이상이 생긴 겁니까?”
올라가는 동안 미동도 없던 후겐에게 변화가 생겼다.
그는 성가시다는 눈초리로 나를 돌아보더니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집에 가서 말해 주마.”
나뭇가지에 도착하는 건 금방이었다.
이런 이동 방식은 아마 엘프가 아니면 꿈도 못 꾸겠다.
남녀노소 모두가 정령사이니 가능한 방법이네.
집은 조촐했다.
대사제인 헤그리우의 집도 그랬지만 어째 높으신 양반들이 다들 검소하게 살고 있네.
“자리에 앉아라, 할 말이 있으니.”
자그마한 집에 앉을 곳이라고는 식탁으로 보이는 탁자의 의자뿐이었기에 그곳에 앉았다.
그러자 후겐은 본인이 직접 차를 내리기 시작했다.
“엘프들은 모두 차를 좋아하나 보군요.”
역시나 대답은 없었다.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 차를 주전자에 담아 온 후겐이 맞은편에 앉았다.
“마시려면 마셔라.”
본인의 찻잔에만 차를 따른 후겐이 퉁명스레 말했다.
나는 사양하지 않고 내 잔에도 차를 따랐다.
이 차는 라스틸리아에서만 나오는 차로 알고 있는데 그것도 타락한 세계수 시나리오가 시작되면 더 이상 구할 수 없게 되는 찻잎이었다.
‘인간들 사이에서는 비싼 정도가 아니라 아예 매물이 없지.’
아마 후작 이상의 고위 귀족 정도는 되어야 어쩌다 한 번씩 입에 대 볼 수 있지 않을까.
적어도 나는 대사제의 집에서 처음 마셔 봤다.
이것도 가능하다면 조금 챙겨 가야지.
그렇게 잠시 차를 마시고 있자 후겐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실력에 대한 자신감인가. 대전사도 되지 못한 주제에 겁대가리가 없군.”
“대전사라면 오러 마스터 말씀이십니까?”
“그래. 너 정도쯤 되면 내가 오러 마스터라는 건 알고 있었을 텐데 어째서 그렇게 덤빈 거냐.”
당연히 너인 걸 알고 있었으니까 그랬지.
크락시아 가문의 원로이자 장로의 지위를 가진 엘프가 신탁으로 초대된 인간을 함부로 죽일 수 있겠냐는 계산하에 움직인 거니까.
“붙어 보고 싶었습니다. 엘프 오러 마스터는 처음 봤거든요.”
“미친놈이군.”
그는 한마디로 일축하더니 다시 차를 마셨다.
그리고는 다시 한마디를 더 했다.
“제 명에 못 살고 죽을 놈.”
“그건 아닙니다. 전 원 없이 누리다가 갈 거거든요.”
이번에도 내 말을 무시한 후겐은 고개를 돌려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나도 따라서 시선을 돌리자 역시나 그곳에는 세계수가 보였다.
그것은 너무나 커다래서 나무의 기둥만이 마치 갈색의 벽처럼 시야에 담겼다.
“재작년에 새순이 돋았어야 했다.”
“확실히 애매한 문제군요.”
분명 큰 문제이지만 아주 심각한 문제라고 하기에도 애매한 일이었다.
그래서 엘프들의 반응이 이상했던 거군.
“지금 너를 두고 장로들 사이에서 말이 많다. 고대부터 이어져 온 수없이 긴 역사 동안 인간에게 세계수를 허락한 적은 없으니까.”
“장로님께서는 신탁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신탁을 머리로는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인간이 세계수에 발을 들인다고 생각하면 구역질이 나올 것만 같군.”
그 정도냐.
하지만 내가 이들의 정서를 탓할 수는 없겠지.
왜 신탁까지 내려졌는데도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지는 대충 알겠다.
세계수의 문제가 생각보다 심각하지 않다고 여기고 있는 게 가장 큰 원인이겠지.
“장로님, 만약에 세계수의 문제가 생각보다 심각하다면 어떻습니까?”
“새순이 돋아야 할 시기가 지난 건 확실히 평범한 문제가 아니지. 하지만 그게 인간을 들여야 할 정도로 큰 문제는…….”
“세계수가 죽어 가고 있는 중이라도 말입니까.”
순간 예리한 살기가 목을 훑고 지나갔다.
전신을 짓누르는 살기가 아닌 차분하게 정제된 느낌이었기에 더 무서웠다.
“데슈른의 제자야, 말을 조심해라.”
“왜 굳이 신탁까지 내려졌을까 생각해 보지는 않으셨습니까. 시간이 흘러 자연스럽게 해결될 일이었으면 굳이 제가 여기까지 왔겠냐는 말입니다.”
“하고 싶은 말이 뭐지.”
“제가 세계수에 가야 합니다.”
나는 점점 강해지는 살기도 무시하고 소신껏 말했다.
“제가 가야만 라스틸리아가 살아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