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화. 엘프의 도시, 라스틸리아
대수림의 면적은 정확히 측정되지 않았지만 내가 게임에서 겪어 본 바로는 제국의 두 배 정도 되는 크기가 아닐까 싶었다.
로들렌 제국이 대륙에서 가장 큰 국가임을 생각한다면 큰 것처럼 보일 테지만 그 안에서 살아가는 수많은 종족들을 생각하면 그리 큰 것만도 아니었다.
‘절경이네.’
우리는 엘프들의 탈 것 중 하나인 그리핀을 타고 도착했는데 라스틸리아의 바람 기사단이 말 대신에 타고 다니는 동물이었다.
아이미르를 따라 들어온 대수림 엘프들의 도시, 라스틸리아는 비록 도시라 불리지만 그 크기는 자그마한 왕국과 비견될 정도였다.
물론 영토의 대부분이 숲으로 구성되어 있었지만 지금 내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이전에는 단 한 번도 마주하지 못한 모습이었다.
“라스틸리아의 방문하신 걸 환영합니다.”
아이미르가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티를 내려고 한 건 아니었는데 아무래도 내가 감탄하는 기색이 전해진 모양이다.
“감사합니다.”
“인간들의 도시와는 많이 다르죠?”
“예. 놀랍군요.”
나는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환인족들의 마을은 마치 동화 속에나 나올 법한 아기자기한 풍경이었다면 이곳은 웅장함과 신비로움이 느껴지는 확실한 ‘도시’였다.
무엇보다도 시선을 잡아 끄는 거대한, 아니 거대하다는 말로도 표현이 부족한 나무 한 그루가 전율을 느끼게 했다.
그것은 엘프들이 섬기는 신이 그들에게 선물했다고 전해지는 나무.
‘세계수’였다.
“아이미르, 어서 가시죠.”
아이미르의 호위가 재촉했다.
그는 주변을 경계하며 말했는데 사방에서 느껴지는 따가운 시선 때문인 듯했다.
“인간?”
“인간이 왔어.”
“누구지?”
라스틸리아는 외부인을 출입을 철저히 통제하는 장소였다.
들어올 때도 그냥 막 들어올 수 있는 것이 아닌 마법진으로 만들어진 결계를 통과해야 하기에 물리적으로는 입장이 불가능했다.
“일단은 빨리 들어가야 할 것 같네요.”
“알겠습니다.”
나도 괜히 분란을 일으키고 싶지는 않았기에 도시를 구경하던 걸 멈추고 빠른 걸음으로 일행들을 뒤쫓았다.
그리핀에서 내린 장소가 마침 대사제의 거처에서 먼 곳이 아니었기에 조금만 걸어가자 도착할 수 있었다.
‘나 혼자만 온 게 조금 거슬리네.’
라스틸리아의 엘프들에게는 왕이란 개념이 없었다.
여러 가문의 장로들과 엘프들이 섬기는 신의 사제들이 의견을 조율하는 형식으로 도시의 운영이 이루어지는데 그중에서도 대사제는 세계수를 통해 직접 신과 소통하는 막강한 위치의 인물이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들이 섬기는 신은 실존했었던 고대의 신이다.
똑똑.
“헤그리우 님, 아이미르입니다. 손님을 모시고 왔습니다.”
대사제의 거처는 생각보다 조촐했다.
화려하고 웅장한 라스틸리아의 안쪽 구석의 연못이 딸려 있는 작은 오두막집이었다.
누군가가 문 앞을 지키고 있는 것도 아니고 따로 하인을 두고 있는 것도 아닌 듯했다.
끼익.
“어서 오려무나. 아! 그쪽이 씨앗을 품으신 분이시군요. 먼 곳까지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전 라스틸리아의 사제이자 숲의 첫 번째 숨결, 헤그리우라고 합니다.”
“아드리아스 크롬웰이라고 합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씨앗을 품었다는 이야기에 살짝 놀랐지만 무덤덤하게 넘어갔다.
아무래도 진짜로 신과 소통이 가능한 모양이네.
가벼운 인사를 마치고 그녀의 오두막집에 들어서자 전형적인 가정집의 내부였다.
라스틸리아의 대사제치고는 너무나 검소하게 생활하는 모습이었다.
지위를 따지고 보면 카시온 성국의 대주교보다 높거나 교황과 비슷한 위치인데 말이다.
“차를 내오겠습니다.”
“헤그리우 님, 제가 내오겠습니다!”
아이미르가 급하게 자신이 나서려 했으나 헤그리우는 주름진 미소를 보이며 손을 저었다.
“지금은 너도 내 손님이니 내가 대접하게 해 다오.”
“알겠습니다.”
여유롭군.
내가 알고 있는 정보를 토대로 추측해 보면 세계수의 타락은 이미 꽤나 진행이 되었을 거라 생각했다.
그 사정을 지금 엘프들이 아는지 모르겠지만 지금까지 쭉 둘러보며 느낀 것은 이들이 생각보다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닌가 싶었다.
“이 먼 곳까지 굳이 불러오게 만들어 죄송합니다. 세계수에서 멀리 떨어질 수 없는 몸이라 부득이하게 초대를 했군요.”
차를 내온 헤그리우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지나치게 예의 바른 그녀의 모습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덕분에 라스틸리아를 두 눈으로 볼 수 있게 되어 기쁠 따름입니다.”
“좋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저를 굳이 초대한 이유를 들을 수 있겠습니까?”
신탁을 받았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내가 궁금한 건 신탁의 내용.
엘프가 섬기는 신은 내가 알기로 ‘타피오’라 불리는 고대 신이었다.
‘레테처럼 이 공간에 묶여 있는 건가?’
고대의 신들은 자취를 감춘 지 오래였다.
그러나 타피오의 신물인 세계수가 멀쩡히 살아 있고 신탁까지 내려오는 걸 보면 레테의 경우처럼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사실 게임에서는 고대 신화시대 따위는 몰라도 충분히 게임의 클리어가 가능했기에 관심이 많이 없었다. 지금에서야 이 일련의 일들이 고대와 관련이 있다는 걸 눈치챘지만 그때는 그저 히든 피스를 위한 설정쯤으로 여겼었다.
“아이미르에게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저희들에게 문제가 생겼음을 파악하고 도움을 주겠다는 분들이 있다고 말이죠. 솔직히 말하면 저희들은 도움이 필요 없습니다. 예상하신 대로 작은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외부인의 도움을 받을 정도로 커다란 문제는 아니지요.”
“그런데 어째서 절?”
“거의 200년 만에 신탁이 내려왔습니다. 씨앗을 품은 자가 대수림에 방문했으니 그를 세계수로 인도하라는 지시였죠.”
가려웠던 곳을 시원하게 긁어 주는 신탁이네.
저 말대로라면 나는 세계수에 직접 방문해 볼 기회가 생긴 거나 마찬가지였다.
“씨앗을 품은 자가 저인 건 어떻게 확인하신 겁니까? 외부인은 저 말고도 두 명이 더 있었는데.”
“그건 제가 눈치챘어요.”
이야기를 듣고 있던 아이미르가 끼어들었다.
“전 팔라렘 가문에서만 희소한 확률로 계승되는 감각을 가졌어요. 그 감각으로 아드리아스 님께서 헤그리우 님이 말씀하신 분이라는 걸 알았죠.”
아, 그런 거였군.
그래서 막시민과 이자벨도 함께 확인하기 위해 메르쿠르의 집으로 불렀던 건가.
아이미르의 특성은 이미 게임에서부터 알고 있었다.
그녀의 특성은 따로 이름이 없고 단순히 직감이라 불렸다.
대신 그 직감이 통하는 대상은 오로지 엘프나 인간과 같은 지성이 있는 종족과 개체들뿐이었다.
‘만약 모든 상황에 직감이 통했으면 세계수가 타락하고 있다는 것도 깨달았어야겠지.’
이들의 태도를 보면 세계수가 타락하고 있다는 건 모르는 모양인데.
신탁도 웃긴 게 왜 세계수가 타락하고 있음을 알리지 않고 나를 데려오라고만 한 건지 모르겠다.
레테를 겪어 보며 느낀 거지만 신의 의지나 뜻은 평범한 인간인 나로서는 가늠할 수가 없었다.
“그럼 지금 바로 세계수를 보러 가는 건가요?”
“음…….”
시간도, 여유도 없겠다.
당장이라도 세계수로 달려가 문제를 두 눈으로 파악하고 싶었지만 헤그리우는 침음을 흘렸다.
“일단 아드리아스 님을 먼저 모셔 오게 하기는 했지만 회의가 진행 중인 상태입니다.”
헤그리우를 대신해서 아이미르가 말했다.
“회의라면?”
“신탁의 내용은 이 도시의 장로들에게도 전해졌습니다. 지금 그로 인해 장로 회의가 열려 며칠째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에요.”
“제가 세계수에 가는 것에 관한 회의라는 말씀이십니까?”
“네. 아무래도 외부인, 그것도 타 종족을 세계수로 인도하는 것은 보통 문제가 아니니까요.”
아니, 정작 큰일 날 문제는 내팽개치고 내가 세계수에 가냐 마냐로 회의를 하고 있다고?
이 양반들 아주 거하게 삽질 중이시구먼. 왜 미래에 그 꼴이 났는지 알겠다.
참고로 타락한 세계수의 메인 스토리가 시작된 시점에는 이미 라스틸리아가 멸망한 이후다.
타락한 세계수로 인해 순식간에 멸망한 터라 소리 소문도 없었지.
“아드리아스 님을 초대하는 데 걸린 나흘이라는 시간도 이 때문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아드리아스 님을 초대하는 것도 격렬한 반대에 시달렸거든요.”
“일단은 제 권한으로 밀어붙여 아드리아스 님을 초대하는 데까지는 성공했지만 신탁을 이룰 가능성은 희박합니다. 저희 엘프들은 굉장히 폐쇄적이라 상황이 긍정적이지는 않아요.”
아이미르와 헤그리우가 차례대로 말했다.
그럼 굳이 왜 초대했냐고 할 수도 있었지만 시작이 반이라고 했다.
이미 라스틸리아까지 들어온 이상 끝장을 봐야지.
메인 스토리 하나를 거저먹을 수 있는 데다 잘만 풀리면 엘프들의 호의를 살 수도 있다.
무엇보다도 세계수를 구하면 얻게 될 보상들이 만만치가 않았다.
‘타락한 세계수 에피소드를 해결하면 타락한 세계수의 장비 세트와 각종 희귀 재료, 거기다 업적 달성 보상까지 줬지.’
내가 더 들뜨는 이유는 타락한 세계수보다 그냥 세계수가 훨씬 스펙이 뛰어나다는 거다.
타락한 세계수의 장비 세트도 지금 시점에서는 어마어마한 아이템들이었는데 그보다 뛰어난 아이템을 얻을 수도 있다?
못 먹어도 고다.
“제가 여기서 얼마나 머무를 수 있을까요?”
“아! 그건 걱정 없어요. 이미 초대를 받으신 이상 아드리아스 님은 라스틸리아의 손님이세요. 원하는 만큼 머무르다 가셔도 좋습니다.”
아이미르가 말하다가 돌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드리아스 님?”
“예. 말씀하세요.”
“음…… 아니에요.”
직감으로 무언가를 읽어 낸 건가?
읽어 내도 딱히 상관없었다.
내가 꾸미는 일은 엘프들을 구원하게 될 일이니까 전혀 악의가 없었으니.
“그럼 조금 신세를 지도록 하겠습니다.”
* * *
대사제 헤그리우와의 이야기를 간단히 마치고 일단은 내가 묵게 될 숙소로 향했다.
막시민과 이자벨이 환인족의 마을에서 기다리고 있는 건 알지만 세계수가 우선이니 미안하지만 여기서 며칠 지내야 할 것 같았다.
“그자가 이번에 초대받은 인간인가.”
헤그리우의 집에서 나와 아이미르를 따라 걸음을 옮기던 도중 누군가가 앞을 가로막았다.
“포람, 여기는 어쩐 일이시죠?”
“자격이 있는지 확인하러 왔다.”
포람이라면 세이르와 더불어 세계수를 몰래 타락시키고 있는 빌런이었다.
이미 정체를 눈치챈 나는 그가 절대 좋은 뜻으로 내게 왔다는 게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물러나세요. 의도가 불순한 게 느껴집니다.”
아이미르도 직감을 가지고 있는 만큼 금방 상대의 의도를 읽은 듯했다.
“불순? 나는 그저 우리 엘프들의 땅이 더럽고 추악한 인간의 발에 오염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을 뿐이다.”
스릉!
다짜고짜 검을 뽑은 포람이 살기를 드러냈다.
“메릴! 후이케!”
아이미르가 다급하게 호위들의 이름을 외쳤으나 나는 그 이름들을 듣고 인상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그냥 엑스트라 쩌리들일 줄 알고 신경도 쓰지 않고 있던 아이미르의 호위들이었는데 이름을 듣는 순간 누구인지 파악할 수 있었다.
‘꼬였군. 내가 세계수를 만나러 갈 수도 있으니까 급해진 건가. 하긴 신탁까지 내려온 마당에 일이 틀어질 수도 있다고 생각했겠네.’
메릴, 후이케.
둘 다 세이르의 입김이 들어간 한 패였다.
내가 알기로 이 둘은 세계수의 타락에 대해서는 모르지만 극성 엘프 우월 주의자들이었기에 세이르의 감언이설에 넘어간 자들이었다.
게임에서도 매번 느낀 거지만 아이미르의 직감은 2% 부족했다.
후웅!
쇄애액!
나와 아이미르를 둘러싼 호위 두 명이 먼저 나서기 전에 내가 먼저 검을 휘둘렀다.
검은 검기가 검풍에 실리며 포람을 공격했다.
콰앙―!
“크윽.”
내 갑작스러운 공격을 예상치 못했는지 포람은 먼저 검을 뽑아 놓고 굉장한 손해를 보며 뒤로 물러났다.
그와 동시에 우물쭈물하던 메릴과 후이케가 검을 뽑아 들고 나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아드리아스 님? 메릴? 후이케? 다들 뭐 하시는 거예요?”
묻기 전에 직감으로 알아서 눈치 좀 채라.
나는 순식간에 메릴의 검을 박살 내고 후이케에게 돌진했다.
내 실력을 얕본 건지 후이케는 당황한 모습으로 검을 휘두르다 허공에 칼질을 하며 순식간에 내게 뒤를 잡혔다.
퍼억!
적당히 기절시키는 법은 모르기에 힘 조절 없이 후려쳤다.
이들을 죽이면 일이 더 커지니 죽일 수는 없었다.
쇄앵!
어느새 정신을 차리고 다가온 포람이 날카롭게 검을 휘둘렀다.
그의 실력은 내가 알기로 세이르보다 한참 아래.
바람 기사단의 단장인 세이르가 오러 마스터임을 감안해도 충분히 자신 있는 상대였다.
카가가각!
‘근데 좀 이상하다.’
내 생각보다 훨씬 쉬운데?
힘을 빼고 있는 건가?
푸슉!
“큭.”
결국 내 검에 어깨가 깊게 찔린 포람은 검을 떨어트렸다.
“말도 안 된다. 고작해야 인간이 어떻게 그런 검술을 지녔지?”
“……진심이었냐?”
내가 강해진 건가.
솔직히 너무나 손쉽게 이긴 탓에 어리둥절할 정도였다.
“포람을 간단히 제압하시다니…….”
아이미르마저 저런 반응을 보이는 걸 보면 아무래도 내가 강해진 게 맞나 보다.
아니면 내가 포람의 실력을 너무 위로 봤었을 수도…….
“아드리아스 님,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부디 그의 목숨은 살려 주세요. 이 일의 경위는 제가 조사해서 제대로 보상해 드리겠습니다.”
이미 그녀의 직감으로 포람이 처음부터 좋지 않은 의도로 다가왔다는 걸 알기에 공격은 내가 먼저 했어도 이해해 주는 모양이었다.
애초에 내가 엘프들의 홈그라운드에서 먼저 시비를 걸 정도로 미친놈은 아니니 당연한 이야기지.
“무슨 일이냐.”
그때 소란이 들렸는지 여기저기서 엘프들이 모여들었다.
그리고 그들 중에는 전혀 예상치 못한 인물도 있었다.
“후겐 장로님!”
아이미르가 그의 이름을 외쳤다.
후겐 코르달 베 크락시아.
오러 마스터 엘프이자 설정상 엘프 최강의 검사.
그가 나를 마주 본 채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