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화. 세계수
“으왕!”
“주겨어어어!”
도착한 곳은 마을과 숲의 경계선이었다.
마을의 경계선으로 아슬아슬하게 맞닿은 엘프들과 그런 엘프들을 향해 환인족들이 으르렁대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엘프 고기는 맛없다!”
“우리 마을에는 왜 왔어!”
허리까지밖에 오지 않는 환인들이 북적대며 시비를 걸고 있었지만 질서 정연하게 늘어선 엘프들은 재질을 알 수 없는 안면 투구를 착용한 채 말이 없었다.
유일하게 얼굴을 드러내는 한 엘프가 그런 그들 앞에 서 있었는데 그도 환인족들의 말에 일절의 반응도 없었다.
“뭐라도 말해라!”
“우리 집에 왜 왔어!”
“엉! 메르쿠르다! 메르쿠르가 왔다!”
나와 메르쿠르의 등장에 모든 시선들이 순식간에 몰렸다.
“메르쿠르! 메르쿠르! 엘프들이 쳐들어왔어!”
“엘프는 맛없어! 내쫓아야 해!”
“주겨!”
귀여운 외모와는 다르게 광신도처럼 입에 거품을 물고 소리 지르는 환인족들을 보자 고개가 저어지는 가운데 가장 앞에 나와 있던 엘프가 말했다.
“메르쿠르, 오랜만입니다.”
세이르 모라 제 프라실리아, 바람의 두 번째 별이라는 호칭으로도 불리는 남자.
이곳, 대수림 엘프들이 조직한 바람 기사단의 단장이기도 했다.
‘저 새끼가 그 녀석이군.’
그리고 메인 스토리의 한 축을 담당하게 되는 빌런으로 내게 기억되는 엘프였다.
“세이르, 오늘은 어떤 바람이 불어서 불쑥 찾아온 게지? 미리 약속해 놓은 것은 없을 텐데.”
“갑작스러운 방문은 사과드리지요.”
“그래서 용건이 뭔가?”
그의 기계 같은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최근 인간 두 명과 뱀파이어 하나가 이 마을에 방문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대수림의 자경 단원으로서 확인을 위해 왔습니다.”
“자경 단원? 그건 네 녀석들의 영역에서나 통용되는 말이지. 감히 내 앞에서 그런 오만방자한 말을 꺼내?”
메르쿠르가 이전에는 본 적 없던 불쾌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쏘아붙였다.
이런 걸 보면 엘프와 환인족의 사이가 썩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사실 대수림 어디를 가든 사이가 좋은 녀석들은 없다.
그나마 수인들끼리는 서로 연합을 하며 가끔 도움을 주고받지만 타 종족의 경우는 예외였다.
그중에서도 특히나 엘프는 다른 종족에게 배타적인 걸로 유명했다.
‘숲의 귀족.’
엘프를 지칭하는 데는 이보다 좋은 단어가 없을 거다.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귀족이라는 호칭이 어울리는 녀석들이 엘프였다.
“제 말을 곡해하셨군요. 지금 중요한 이야기는 이 대수림에 외부인이 침입했다는 사실입니다.”
“누구 마음대로 내 손님들에게 함부로 말하느냐. 그리고 언제부터 네놈들이 이런 일을 신경 썼다고 이제 와서 참견이지? 썩 물러가지 않으면 나도 더 이상 참지 않겠다.”
메르쿠르가 송곳니를 드러내며 지팡이에서 검을 꺼냈다.
그러나 그런 위협에도 세이르는 아무렇지도 않게 본인의 할 말을 했다.
“그쪽이 이번에 이 땅에 침입한 인간인 모양이군. 나머지는 어디 있지?”
나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모릅니다.”
실제로 어디 있는지 몰랐다.
내가 항상 막시민과 이자벨이 어디에 있는지 확인해야 할 것도 아니니 어떻게 알겠나.
어제 저녁을 함께 먹고 오늘은 본 적이 없었다.
“메르쿠르, 뱀파이어는 위험한 존재입니다. 부디 현명하게 행동하시길 바랍니다.”
“건방진 녀석. 세이르, 네가 언제부터 내게 충고를 할 위치에 섰는지 모르겠구나.”
세이르는 그 말을 끝으로 몸을 돌렸다.
마치 대충 살피러 왔다는 듯한 그 행동에 내가 슬며시 입을 열었다.
“엘프가 굳이 타 종족의 영역 경계까지 찾아와서 무력시위라…….”
내 말을 들었음이 분명하지만 세이르는 반응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나 애초에 그가 들으라고 하는 말이 아니었기에 나는 혼잣말을 하듯 계속 중얼거렸다.
“고작 세 명의 외부인이 왔다는 것만으로는 말이 안 되고, 엘프의 영역에 이상이 생긴 건가?”
탁.
세이르의 움직임이 멈췄다.
그와 동시에 그가 데리고 온 기사단의 시선이 내게 몰렸다.
“예를 들면…… 세계수라던가?”
“인간, 입을 함부로 놀리면 죽는 수가 있다.”
“아, 들렸습니까? 혼자 추리해 본다고 중얼거린 건데.”
내가 철면피를 깔고 말하자 안 그래도 무표정했던 세이르의 얼굴에 균열이 갔다.
“네가 지금 있는 곳이 환인족의 영역이 아니었으면 내게 수십 번도 더 죽었을 거다.”
“어떻게 사람이 수십 번 죽습니까? 그리 예민한 걸 보니 엘프들에게 정말 문제가 생긴 것 같지 않습니까.”
“닥쳐라.”
세이르는 더 이상 나를 상대하지 않겠다는 듯 뒤돌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너구리들이 환호성을 터트렸다.
“하하! 인간한테 지는 엘프!”
“역시 맛있는 인간은 달라! 맛없는 엘프 따위 별것도 아니야!”
지금 기뻐할 때가 아닌데.
나는 어떻게든 여기서 엘프들에게 관여할 수 있는 건더기를 남겨 놓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세이르가 아닌 저 기사단에 속해 있는 누군가를 자극해야만 했다.
“정말 아무 문제없는 게 맞겠죠? 혹시 압니까, 저와 같은 인간이 어쩌면 도움을 줄 수 있을지?”
“저 인간의 말은 무시해라. 우린 이만 철수한다.”
“하긴 인간한테 도움을 받을 정도로 급한 문제면 진즉에 타 종족에 도움을 요청했겠죠. 별로 심각한 일은 아닌 모양이니 다행입니다. 저희는 곧 대수림에서 물러날 예정이니 안심하십시오.”
도발과 어필을 최대한 곁들여서 말해 본다고 했지만 너무나 많은 정보를 말하게 되면 도리어 의심할 수가 있으니 이 정도가 최선이었다.
이래도 반응이 없다면 일단 이번 기회는 보내고 다른 기회를 찾는 수밖에…….
“잠깐만요.”
바람 기사단의 누군가가 앞으로 나왔다.
그러자 세이르가 결국 인상을 구기며 손짓했다.
“아이미르, 지금 네 신분은 바람의 기사다. 나서지 말고 물러나도록.”
“죄송합니다, 단장님. 하지만 전 바람의 기사 이전에 엘프입니다. 지금은 고리타분한 굴레와 전통을 따지며 명예를 생각할 때가 아니에요.”
투구를 벗은 기사는 여자였다.
말아 올렸던 머리카락이 투구를 벗자 금빛 폭포처럼 쏟아졌다.
“아이미르! 그런 건 당신이 결정할 문제가 아닙니다. 장로들과 사제들이 결정할 문제지요.”
“전 차기 대사제 후보로서 충분히 이 문제를 거론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대로 두다가는 아무 해결책도 내지 못할 거라는 건 단장님께서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이 숲의 일족인 저희들의 방식인 겁니다.”
자기들끼리 싸우네.
어쨌든 내가 예상했던 인물이 있던 게 다행이었다.
이 시기에도 아이미르가 바람의 기사였는지는 확신이 없었지만 잘된 거지, 뭐.
“문제? 정말 무슨 문제라도 있는 겐가?”
잠시 지켜만 보고 있던 메르쿠르가 물었다.
그러자 세이르는 듣지 못한 척 무시했고 얼굴을 드러낸 여엘프는 곤란한 듯 입을 다물었다.
“우리가 비록 그대들과 사이가 좋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엘프들의 문제는, 특히 세계수와 관련된 일은 별개의 이야기지. 이 대수림을 지탱하고 있는 것이 세계수인 만큼 만약 세계수에 문제가 생기면 우리도 무사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지사.”
메르쿠르가 지팡이로 땅을 두드렸다.
“이 마을도, 다른 종족들의 영역도, 자네들이 관리하고 있는 세계수의 덕택이라는 걸 내 모르지 않네. 허심탄회하게 얘기해 보게.”
“메르쿠르, 당신의 말대로 세계수를 관리하고 있는 건 우리 엘프들의 몫입니다. 타 종족이 신경 쓸 게 못 됩니다.”
“허! 정말로 세계수에 문제가 생긴 건가? 그보다 내가 한 말은 듣지도 않는군, 고얀 녀석.”
세이르는 당연히 협조해 주지 않겠지.
이 문제를 만들고 있는 게 그 누구도 아닌 저 녀석과 저 녀석이 속한 조직이니까.
지금 공략해야 할 대상은 세이르가 아니라 아이미르였다.
그녀는 본인이 말한 것처럼 차기 대사제 후보이자 대수림의 두 개밖에 없는 하이엘프 가문의 장녀였으니까.
탁!
“세계수에 문제가 생겼다고?”
그러나 이 모든 고민을 한 번에 날릴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느새 온 건지 태연하게 나타난 막시민이 보기 드물게 흥미가 동한 얼굴로 말했다.
“저도 지금까지 살면서 세계수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요.”
그런 그의 옆에는 이자벨이 함께 있었다.
“뱀파이어…….”
세이르가 눈매를 좁히며 이자벨을 경계했다.
사실 외모로 따지면 뱀파이어나 엘프나 인간의 기준에서는 아득하게 뛰어난 미를 가진 존재들로 비슷해 보였다.
단지 한쪽은 귀가 길고 한쪽은 송곳니가 길다는 차이점이 있을 뿐이지.
하지만 서로가 서로를 보면 단번에 종족의 구별이 되는 모양이었다.
“통성명부터 할까요? 저는 이자벨 루시펠. 루시펠 가문의 직계랍니다.”
이자벨의 이름을 들은 세이르가 애써 표정을 관리하는 게 보였다.
생각해 보면 엘프의 에피소드를 계획한 조직 내부에도 뱀파이어가 있으니 뱀파이어가 아예 연관이 없는 건 아니었다.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이자벨을 확인하러 온 걸 수도 있지.’
세이르로서는 뱀파이어를 경계하는 게 당연할 수도 있단 이야기였다.
“루시펠 가문.”
아이미르도 이자벨의 말을 되뇌며 긴장한 기색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대사제 후보라면 팔라렘 가문의 딸인가요? 도움이 필요하면 말해요. 여기까지 온 김에 세계수도 구경할 겸 도움을 드리도록 하죠.”
“세계수는 구경거리가 아니에요.”
“전 직계 뱀파이어입니다. 게다가 아는 것도 많죠. 혹시 알아요? 저나 여기 있는 사람들이 당신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
이자벨의 조곤조곤한 말에 아이미르는 고민에 빠진 듯 생각에 잠겼다.
그러나 세이르는 더 들어 볼 것도 없다는 듯이 외쳤다.
“너무 지체했군. 복귀한다!”
“어이.”
후웅!
순간 바람이 휘몰아치며 지나가려는 엘프들을 막았다.
“어딜 그냥 가려고.”
막시민이 무뚝뚝하지만 살기가 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대답은 하고 가야지.”
그러고 보니 지금 엘프들은 막시민을 못 알아보는 눈치였다.
저번에는 대수림을 자유롭게 지나다닐 수 있게 협상을 끝냈다고 말했는데 정작 가장 큰 세력인 엘프들과는 마주친 적이 없던 건가.
“여기서 결정할 수는 없어요. 하지만 제가 돌아가서 이야기를 나눠 보고 경과를 알려 드리겠습니다.”
아이미르가 나서자 막시민은 이자벨에게 시선을 던졌다.
이자벨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저희는 여기서 조금 더 머무를 테니 언제든 도움이 필요하면 이리로 와요.”
“네, 감사합니다.”
이내 엘프들이 질서 정연하게 사라지자 그 모습을 지켜보던 환인족들이 눈치 없이 소리쳤다.
“우리가 엘프를 무찔렀다!”
“우리는 강하다! 우리는 맛있다!”
“맛있다!…… 맛있다?”
입에 거품을 물고 열광의 함성을 지르는 모습을 뒤로하고 메르쿠르가 얼굴을 쓸어내렸다.
“허어. 정말로 세계수에 문제가 생긴 것이면 보통 큰일이 아니군. 근데 자네는 어찌 그 사실을 안 건가?”
“몰랐습니다. 그냥 찔러본 건데 운이 좋았습니다.”
“그게 정말인가?”
“대수림에 그동안 방문한 외부인이 없었겠습니까. 제가 듣기로 막시민과 이자벨이 얼마 전에도 이곳을 방문했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때는 이런 행동을 한 적이 없던 엘프들이 갑자기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해 본 것뿐이죠.”
사실 이미 다 알고 있는 이야기다.
세계수는 지금 타락하고 있었다.
뿌리에서부터 시작된 감염은 이내 세계수가 완전히 타락할 때까지 손을 쓰지도 않았고 결국 이와 관련된 메인 에피소드는 완전히 타락한 세계수가 대수림을 집어삼키며 시작된다.
사실 이미 타락이 된 상태에서 메인 에피소드가 진행이 되기에 언제부터 문제가 발생하는지는 알 수 없었는데 이쯤에서 이미 징조가 보였던 모양이다.
다만 고리타분한 엘프들은 주변에 도움을 구하지 않은 채 결국 세계수가 타락할 동안 방치를 하는 거고.
‘아이미르가 가서 설득한다고 될까?’
솔직히 회의적이었다.
그렇다고 무작정 엘프들의 영역에 발을 들이미는 건 자살 행위나 마찬가지였기에 내가 당장 손 쓸 방법도 없었다.
“아무래도 수인 연합에 정식으로 회의 안건을 올려야겠네.”
“엘프들이 과연 타 종족의 도움을 받을지 의문이군요.”
“하아. 미안하지만 자네를 지도해 주는 건 며칠 미뤄야겠네.”
“알겠습니다.”
하룬겔의 무덤부터 엘프까지.
예상치 못했던 일들이 내 주변을 감싸고 있었다.
* * *
엘프들이 환인족의 마을에 방문한 지 4일이 지났다.
솔직히 기대하는 마음이 없었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나흘이나 지난 지금은 완전히 체념하고 있었다.
‘엘프들이 그리 쉽게 도움을 받거나 주는 종족이었으면 그 꼴도 일어나지 않았겠지.’
메르쿠르도 다른 수인 종족과 연락을 주고받느라 바쁜 가운데 나만 한가했다.
사실 하룬겔의 무덤을 멀찍이라도 보러 가고 싶었는데 메르쿠르가 무조건 자신의 동행하에 가야한다는 조건을 걸었기에 그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결국 나는 포션을 만드는 기계가 되어 나흘 동안 너구리들에게 봉사를 하고 있었다.
“오오오! 힘이 넘친다!”
받은 포션을 곧바로 먹은 너구리 하나가 털이 삐쭉삐쭉 선 채 기합을 질렀다.
불쌍하게도 저 녀석이 내게 받은 포션은 저주 면역 포션이었다.
“메르쿠르다!”
“메르쿠르가 또 인간을 뺏으러 왔다!”
“인간을 사수해라! 포션을 보장하라!”
고개를 돌리자 메르쿠르가 내게 오고 있었다.
“어쩐 일로?”
“엘프들이 왔다. 자네를 찾고 있네.”
엘프들이 왔다고?
엘프들이 다시 온 것도 놀라운데 나를 찾고 있다는 말에 무슨 소리인가 싶었다.
일단은 메르쿠르를 따라 그의 집으로 향했다.
“다시 뵙네요.”
메르쿠르의 나무 집에는 저번에 보았던 아이미르가 호위로 보이는 엘프들과 함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인사가 늦었네요. 카리리긴의 딸, 팔라렘의 15대손인 아이미르 카리리긴 제 팔라렘이라고 합니다.”
“아드리아스 크롬웰입니다.”
마침 막시민과 이자벨도 자리에 함께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서 나는 설마 엘프들이 미쳐서 도움을 받기로 한 건가 의문이 들었다.
“오늘 제가 이렇게 온 건 다름이 아니라 우리 라스틸리아에 당신을 초대하기 위함입니다.”
“도움을 받기로 결정한 건가요?”
이거 설정 오류 아니야?
아무리 생각해도 엘프들이 갑자기 도움을 받을 이유가…….
“아닙니다. 저희가 초대하는 분은 아드리아스 크롬웰 님, 단 한 분입니다.”
“……예?”
“라스틸리아의 대사제께서 신탁을 받고 당신을 뵙고자 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