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화. 집회의 창시자
막시민을 찾는 건 쉬운 일이었다.
워낙에 이목이 쏠리는 인물이기도 했고, 이자벨이 깨어난 이후에는 대놓고 여러 도시에서 모습을 드러냈기에 금방 위치를 파악할 수 있었다.
나는 용병 길드에 들러 미리 막시민에게 편지를 보내 놓고 그와 만날 준비를 했다.
용병 길드 측에서는 내 의뢰를 받고 싶지 않아했지만 내가 막시민과 인연이 있는 아드리아스 크롬웰이라는 것을 알자 비싼 값을 받고 의뢰를 수락했다.
막시민이 아카데미에 방문했던 일은 그만큼이나 유명해져 있었다.
“이번에는 좀 진득하게 있을 줄 알았더니.”
간단하게 짐을 챙기고 있는 나를 보며 에이미가 한숨을 내쉬었다.
바쁜 와중에도 내가 갈 곳이 있다고 하자 곧바로 찾아왔다.
“너도 상단 일로 바쁜 만큼 나도 나름 바쁘게 살고 있다.”
“바쁘게 사는 건 아카데미에서만 하면 되지 않아? 굳이 방학인데 그럴 필요가 있어?”
“그럼.”
이미 미래를 알고 있는데 어떻게 쉬고 있냐.
난 반드시 미래를 구하고 예전처럼 백수같이 지낼 거다.
“어차피 졸업반 진급도 확정이라며?”
“졸업반 진급이 확정인 거지 졸업이 확정인 건 아니니까.”
딱히 더 챙길 것도 없네.
중요한 건 어차피 언데드들에게 맡겨 놨다.
에이미는 여전히 뚱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녀의 심정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아니라 가볍게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금방 갔다 올게.”
“흥. 그래 봤자 또 개학 시기에 맞춰서 아슬아슬하게 돌아올 거잖아.”
“그럴 수도?”
“다 필요 없고, 적어도 어디로 가는지 정도는 말해 줄 수 없어?”
“미안.”
안 그래도 걱정하고 있는 에이미한테 막시민을 만나러 간다고는 말하지 못하겠다.
그의 악명은 제국 내에서 우는 아이도 그치게 할 정도였으니까.
그렇게 작별 인사를 나누고 역으로 나왔다.
에이미의 곁에 살렘이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안심인지 모르겠다.
지금 시기에 그를 일 대 일로 이길 수 있는 강자는 한 손에 꼽을 테니.
‘대화를 별로 못했네.’
살렘은 예상외로 바빴다.
솔직히 왜 바쁜지는 알 수 없었지만 상단 업무로 정신이 없는 에이미보다 마주치기가 힘들 정도였다.
아무래도 새로 익힌 기원인 ‘조화’를 연구하느라 그런 모양인데 나에게도 몇 번 자문을 구하고는 두문불출했다.
참고로 그에게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미리 말을 해 두었다.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면 살렘만큼 의지하기 좋은 존재는 없으니.
“오랜만.”
4일간의 열차 여행과 함께 이전에 와 본 적이 있는 곳에 도착했다.
설마 막시민이 여기 있을 줄은 몰랐네.
마침 내가 구하고자 하는 물건도 이곳에서 가까운 장소였다.
‘루나는 잘 지내려나.’
내가 도착한 곳은 바야트라 대수림과 붙어 있는 그랑디스 왕국이었다.
그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변장을 하지 않을 거라는 점 정도.
편지를 미리 보내 놨으니 아마 미리 와 있을 거라 생각하고 걸음을 옮겼다.
약속 장소는 게임 속에서도 매번 방문하던 여관.
지금은 루나와의 추억이 깃든 장소였다.
딸랑!
“어서 오쇼.”
주인장의 호탕한 인사가 들려왔다.
저번에 방문했을 때는 루나를 알아보고 잔뜩 쫄아 있었는데 사실은 이런 사람이었군.
“혼자 오셨수?”
“예. 그것보다 혹시 여기 막시민 크로넬이 와 있습니까?”
쨍그랑!
순간 유리가 깨지는 소리와 함께 여관 내부가 정적에 휩싸였다.
시끌벅적했던 게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급변한 분위기에 오히려 내가 당황스러웠다.
막시민이 악명을 떨치는 곳은 분명 로들렌 제국.
흑마법사에 대한 편견도 옅은 그랑디스 왕국인 만큼 막시민의 이름이 나왔다고 이 정도로 놀랄 일인가 싶었다.
잠시 조용해진 주변을 둘러본 나는 재차 물었다.
“막시민 크로넬, 여기 없습니까?”
“크흠, 손님의 이름을 일일이 외우고 다니는 건 아니라서…….”
애써 말을 돌리는 걸 보면 막시민이 여기에 있는 게 맞는 것 같은데.
설마 막시민을 모를 리는 없을 거고, 내가 너무 대놓고 물어봤나.
일단은 방을 잡고 조금 기다려 볼까 싶던 찰나에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이, 꼬맹이.”
침묵이 가라앉았던 터라 더욱 선명하게 들려오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자 용병처럼 보이는 사내가 밥을 먹던 중이었는지 탁자 앞에 앉아 내게 손짓하고 있었다.
“뭣도 모르는 애송이 같은데 막시민 크로넬이라고? 막시민 크로넬이 어디 동네 개 이름이냐?”
괜히 시비가 걸렸네.
확실히 막시민의 이름은 어그로가 끌리는 것 같다.
나는 그 말을 무시하고 여관 주인에게 돈을 건넸다.
“식사 포함 숙박 3일.”
“커험, 그…….”
뭔가 말문이 막힌 듯 멈칫거리던 주인장은 내가 건넨 돈을 받고 방 열쇠를 건넸다.
“괜히 여기서 사고 치지 마소.”
“노력해 보겠습니다.”
밥을 먼저 먹을까 싶었지만 이미 어그로를 잔뜩 끌은 상태라 방에서 쉬었다가 내려오기로 했다.
“어이! 무시하냐!”
무언가가 날아오는 게 느껴져 가볍게 잡았다.
조금 전까지 무언가를 먹었던 흔적이 있는 포크였다.
“어쭈.”
포크를 던진 사내는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내게 걸어왔다.
그런 그에게 동료들로 보이는 용병들이 소리쳤다.
“파라스! 적당히 하고 와라!”
“요즘에는 뭣도 아닌 새끼들이 나대는 게 많아진 것 같단 말이야. 막시민? 하! 골 때리는 애새끼네.”
“꼬맹이니까 뭘 좀 모를 수도 있지, 흐흐.”
마침내 내 앞까지 다가온 파라스라는 용병을 향해 여관 주인이 인상을 구겼다.
“가게 물건 함부로 망가트리면 바로 쫓아낼 거다.”
“흥. 이딴 애송이 교육시키는 데 그럴 일 없수다.”
생각해 보면 이런 시비는 처음인가.
그동안 아카데미 생활이 길었던 덕분에 온실 속의 화초처럼 자랐군.
“꼬맹아, 쫄았냐? 그런 담으로 어떻게 막시민 크로넬을 입에 담았대?”
귀찮다기보다 외려 신선하다고 해야 하나.
나는 천천히 내 존재감을 개방했다.
우웅.
영혼 각인을 통해 얻은 만인지적의 기세.
엄청난 위압감이 여관을 뒤덮었다.
“어, 어?”
내 앞에 선 파라스는 어느새 오줌을 지리며 온몸을 떨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자신의 반응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몸의 반응을 뇌의 이해가 따라잡지 못한 상황.
‘약하네.’
굳이 더 괴롭힐 필요는 없어 보였다.
나는 그대로 무시하고 방이 있는 2층으로 올라가려 했다.
또각.
구두 소리와 함께 짙은 혈 향이 코끝을 건드리기 전까지는.
“오셨군요.”
그녀가 언제부터 존재했는지 눈치도 못 챘었다.
소름이 일며 나도 모르게 갈락슈르에 손이 올라가려다 멈췄다.
“이자벨.”
직계 뱀파이어.
그 힘은 초인과 대등하거나 상회하는 수준.
그러나 실제로 겪어 보니 조금 충격적이었다.
뒤를 돌아 확인한 그녀의 외모는 여전했다.
몇백 년을 가까이 살아가는 존재답게 인간의 기준을 벗어난 초월적인 외모.
특이한 걸로 따지면 루나의 외모도 특이했지만 이자벨의 외모는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는 미(美)를 가져다 놓은 듯했다.
“강렬한 기운에 확인해 볼 겸 나와 봤는데 마침 아드리아스 님을 뵙네요. 막시민은 잠시 자리를 비웠으니 일단 저와 같이 방에서 기다리시죠.”
사근사근 말하는 태도가 마치 귀부인과 같았다.
행동 하나하나에 기품이 넘친다고 해야 할까.
디에네의 기품이 당당함이라면 이자벨의 기품은 부드러움이었다.
“알겠습니다.”
거절할 이유도 없으니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자벨이 앞장서고 내가 뒤따라 나서자 여관의 시선들이 집중되어 뒤통수가 따끔거릴 정도였다.
“저, 정말로 막시민을 찾아온 사람이었단 말이야?”
“도대체 누구지?”
수군대는 말소리를 뒤로하고 방에 들어오자 이자벨이 방에 비치된 의자에 앉으며 자연스레 말을 꺼냈다.
“오랜만이에요. 그동안 잘 지내셨나요?”
“예.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저보다는 이자벨의 상태가 궁금하군요. 4달 정도 지난 걸로 아는데 이상은 없던가요?”
내 물음에 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까지 큰 문제는 없어요.”
“큰 문제가 없다는 건 작은 문제는 있었다는 것처럼 들리는군요.”
“아무래도 아드리아스 님께서 말씀하신 게 맞나 봐요. 완전히 저주가 풀린 건 아닌지 날이 갈수록 졸음이 많아지고 있어요.”
역시 임시방편에 불과했던 건가.
그래도 내 예상보다는 훨씬 오래 버틴 느낌이다.
막말로 1시간 동안 지속되는 효과였으면 있으나 마나 했으니까
‘어쩌면 막시민이 나를 납치하고 이자벨을 깨우는 도구 취급했을 수도 있겠네.’
그녀를 만나면 다시 신살의 씨앗이 반응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잠잠했다.
아직은 아니라는 건지, 아니면 처음 한 번 깨운 게 끝이었던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도 한 번 눈을 뜬 이상 전처럼 쉽게 잠이 들지는 않을 거예요. 그러기 위해서 지금 막시민과 여행 중인 거기도 하고…….”
“바야트라 대수림은 제가 신을 봤다는 장소 때문에 온 겁니까?”
“맞아요. 그리고 겸사겸사 다른 것도 발견하면 좋겠다는 생각이었죠.”
용병 길드에서 손쉽게 구해 낼 수 있었던 막시민과 이자벨의 위치는 다름 아닌 바야트라 대수림.
사실 바야트라 요새나 엔데버 요새가 더 가까웠지만 혹시라도 내 모습을 기억하고 눈치채는 사람이 있을까 봐 이곳에서 만나기로 편지를 보냈었다.
“4달 동안 대수림에만 있던 건 아니고 잠시 고향에도 다녀왔어요.”
“고향이라면…….”
“여러분들이 마경이라 부르는 혹한의 땅이죠.”
로들렌 제국의 북쪽으로 야만족들이 사는 북부 설경 대지가 있다면 저 멀리 대륙 북동쪽에는 혹한의 땅이라 불리는 마경이 있었다.
뱀파이어들은 기온 변화에 영향이 전무하다 표현해도 될 만큼 강인한 종족.
괜히 인간들과 섞여 분쟁을 만들기보다는 스스로 추위의 땅에 들어가 본인들만의 영역을 구축했다.
“이야기를 계속하자면 그곳에서 뜻밖의 인연을 만났어요. 아드리아스 님도 아시는 인물이죠.”
“제가 아는 인물이라면 안젤라 말씀이십니까.”
안젤라 루시펠.
카론 디플렌에게 붙잡혀 원래였으면 언데드의 재료가 되어 무참히 사라졌을 인물.
나는 이전에 있었던 이자벨과의 첫 대면에서 그녀에 대한 정보를 얻은 적이 있었다.
‘인간과 뱀파이어 사이의 혼혈.’
놀랄 일은 아니었다.
그런 경우가 종종 있음은 알고 있고 그런 인물 중 인간 사회에서 멀쩡히 활동하는 네임드 캐릭터도 알고 있으니까.
어쨌든 안젤라가 왜 카론에게 붙잡혔는지도 이로 인해 알 수 있었다.
‘인간과 뱀파이어 사이의 혼혈은 약점이 생겨 버린다.’
뱀파이어의 특징은 강인한 육체와 혈 마법을 사용한다는 것.
그러나 인간과의 혼혈은 이 두 가지 특징 중에 하나가 사라져 버린다.
그와 반대로 사라진 특징 대신 살아남은 나머지 하나의 특징은 평범한 뱀파이어보다 강력해지지만 공수가 완벽한 뱀파이어에게 둘 중 하나가 없다는 건 큰 결점이었다.
“저번에도 말했다시피 안젤라는 제 동생이에요. 인간의 기준으로 따지면 나이 차이가 꽤 큰 자매죠.”
“예. 그 이야기를 듣고 놀랐었습니다. 그 말은 안젤라도 직계라는 뜻이니까요.”
사실 이전까지 안젤라의 존재는 내게 의미가 없었다.
그 당시에는 그저 하루하루 살아가기도 벅차고 적응하기에도 한계였으니까.
하지만 여유가 조금 생긴 지금은 머릿속으로 계산기가 두드려지고 있었다.
죄악의 행방을 살펴야 하는 내게 안젤라는 루시펠 가문이 보유하고 있는 죄악을 확인하기 위한 좋은 패였다.
“안젤라를 우연히 만나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어요. 마지막으로 봤을 때는 갓난아기였는데 어느새 그렇게 컸을 줄이야……. 참고로 아드리아스 님의 이야기도 했어요. 굉장히 좋아하던데요?”
“그렇습니까.”
그녀가 내 목을 물었을 때는 짐작하지 못했지만 이자벨이 찜해 놨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어렴풋이 이해하고 있었다.
따지고 보면 나는 그녀의 생명의 은인이니 고마운 감정이 있겠지.
아마 은혜를 갚기 위해 찜을 했다는 의미가 아닐까?
“그리고 안젤라가 아드리아스 님과 있었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는데…… 아드리아스 님은 사실 흑마법사라죠?”
“…….”
“그렇게 놀라실 필요 없어요. 흑마법사라고 저희들의 태도가 변하지는 않을 거니까. 오히려 친근하게 느껴지는 걸요.”
안젤라…….
쓸데없는 소리까지 해 버렸군.
“그리고 아드리아스 님이 흑마법사인 덕분에 저희가 선물할 것도 생겼거든요.”
“그 뒤는 내가 말하지.”
갑자기 들려오는 삭막한 목소리에 내심 놀랐지만 티를 내지 않으며 고개를 돌렸다.
“막시민, 와 계신지도 몰랐습니다.”
“방금 왔으니까.”
그는 이전과 다를 바가 없는 무뚝뚝한 모습으로 벽에 등을 기대고 서 있었다.
그나저나 선물이라니 무슨 선물을 말하는 거지.
“아드리아스 크롬웰. 최근 여러 소식들을 접하다 보니 네가 집회에 가입한 사실도 알게 됐다.”
“소식이 빠르군요.”
조금 식은땀이 흐르는데.
너무 쉽게 내 신상 정보를 뜯긴 기분이었다.
“40년을 돌아다니며 적도 많이 만들었지만 대부분은 좋은 거래 상대가 되었다. 그런 내가 마음만 먹으면 이 정도의 정보는 아무것도 아니니 너무 크게 신경 쓰지 마라.”
당연히 그렇겠지.
누가 천외천이라 불리는 막시민과 적이 되고 싶겠나.
대부분은 좋은 관계를 맺으려고 노력하겠지.
“모른과 루나가 네 이름의 파벌을 만들고 있다는 소식도 들었다.”
“조금 불편해지는군요.”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나 말고는 이러한 정보를 캘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거니 안심해라. 나도 제국과는 사이가 좋지 않은 몸. 너를 곤란하게 만들 생각은 없어.”
“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
결국 내가 묻자 막시민의 입가가 호선을 그렸다.
“내게 그런 식으로 말할 수 있는 것도 너밖에 없겠지. 본론을 말하마. 아드리아스 크롬웰, 너는 집회를 만든 최초의 10인이 누군지 알고 있나?”
“집회의 창시자…….”
“모르는 모양이군. 어쨌든 그중 하나의 흔적을 우연히 발견했다. 대수림에 있지.”
그저 세레나의 검법을 구할 겸 검술 교습을 받기 위해 온 거였는데 갑작스러운 이야기에 머리가 빙글빙글 돌았다.
“집회를 창시한 10인의 마법사 중 하나이자 역사를 개변한 워록.”
막시민의 목소리가 깊게 가라앉았다.
“불변의 하룬겔, 그의 흔적을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