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드래곤
“회귀…….”
아직 이 던전의 상황이 익숙지 않았던 탓에 베리엘의 행동을 예상하지 못했다.
설마 자살을 할 줄이야.
“그래도 단초는 잡은 것 같군요. 수고하셨습니다.”
언제 당황했냐는 듯 에반이 아무렇지도 않게 우리에게 인사를 건네 왔다.
어떻게 알고 찾아 왔는지는 몰라도 탈출하지 못한 모양이네.
그는 끔찍한 몰골로 죽은 베리엘을 잠시 훑더니 신전 내부를 둘러보았다.
‘그것보다…….’
베리엘이 죽기 직전에 내뱉었던 말이 신경 쓰였다.
이 모든 게 그로부터 비롯되었다는 말, 그리고 이 도시를 절대 포기하지 않겠다는 다짐.
그 말은 그가 이 던전과 연관되어 있다는 증거가 되었지만 또 다른 의문도 생기게 했다.
‘인간 혼자의 힘으로 이런 던전을 만들었다고? 말도 안 된다.’
다른 무엇도 아닌 시간과 관련된 힘이다.
이 넓은 공간을, 그것도 수백, 수천 년 가까이 지속할 수 있는 근원에는 분명 우리가 모르는 무언가가 숨겨져 있을 게 확실했다.
“영혼이 없어.”
루나가 베리엘의 시신을 들춰 보며 말했다.
그 말을 통해 영혼은 회귀와 함께 움직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결국 우리도 회귀를 해야겠네.’
베리엘을 잡아서 정확한 단서를 구해야 했다.
“저, 저놈들이!”
“베리엘 사제님!”
뒤늦게 들어온 신전의 경비병들이 경악에 찬 말을 내뱉었다.
긴장된 대치 상황이 펼쳐졌다.
“결국 저 베리엘이라는 자가 단서를 가지고 있는 거군요.”
에반이 묘한 소리를 중얼거리더니 검을 들었다.
그 모습에 경비병들이 무기를 굳게 움켜쥘 때.
푸욱!
에반은 가볍게 자신의 심장을 찔렀다.
“다음 회차에서 봅시다.”
아무렇지도 않게 미소 지으며 말한 에반의 입가로 피가 흘렀다.
그리고 이내 선 채로 절명했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나는 물론이고 신전의 경비병들도 당황했다.
‘아무리 그래도 너무 극단적인 거 아니야?’
역시 초인 중에서 멀쩡한 사람은 드물다더니.
에반도 어지간히 미친 모양이다.
“친구.”
루나가 내게 손을 뻗었다.
무슨 의도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그녀의 손을 잡자 마법이 발동했다.
“나가자!”
몸이 허공에 떠올랐다.
경비병들은 이 일련의 사건을 그저 멍하니 지켜보기만 했다.
신전의 뚫린 벽을 통해 탈출한 우리는 이대로 도시의 밖을 향해 날았다.
너무 급한 움직임일 수 있지만 에반의 말대로 베리엘이 죽은 이상 이번 회차에서 얻어 낼 수 있는 건 더 이상 없을 것 같았다.
‘이미 충분하지. 베리엘이 이 던전의 핵일 수도 있는 거고……. 생각보다 쉽게 해결했네.’
다음 회차에서는 바로 신전에서 만나기로 루나와 약속을 하고 도시 밖, 안개 속으로 발을 디뎠다.
“돌려줘!”
“싫은데? 뺏어 보든지!”
벌써 4번째 듣는 아이들의 목소리.
그 아련한 소음을 들으며 루나와 저번 회차에서 약속했던 대로 곧장 신전을 향해 달려갔다.
‘이게 제일 편한 회귀 방법이네.’
그동안 죽거나 검은 연기에 휩싸이는 방식으로 회귀를 했었는데 이번 건 마음에 든다.
그렇게 전속력으로 신전에 도착했을 때, 내가 가장 가까운 위치였는지 제일 먼저 도착했음을 알 수 있었다.
“누구십니까?”
문지기가 급하게 달려온 나를 보고 경계하는 기색을 띠었다.
이대로 루나를 기다릴까 아니면 먼저 들어가야 하나.
그런 생각을 하던 중 문득, 소름이 돋았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불길한 예감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이곳은 아무나 함부로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파앙―!
마나를 두르고 그대로 신전을 향해 뛰어 들어갔다.
문지기를 그대로 지나치고 신전의 문을 몸으로 부순 채 들어간 내부에는 놀란 사제들의 눈동자가 전부 나를 향해 있었다.
‘베리엘은 이미 회귀를 알고 자살까지 한 인물!’
안일했다.
제발 내 짐작이 틀렸기를…….
나는 멈추지 않고 그대로 이전 회차에서 베리엘을 발견했던 장소로 들어갔다.
“그르륵…….”
그곳에는 이미 피거품을 문 베리엘이 나를 보며 비웃고 있었다.
애써 다가가 보았지만 이미 그는 죽음을 맞이했다.
“하하.”
나도 모르게 실소가 흘러나왔다.
이 미친놈.
바로 또 죽어 버릴 줄이야.
‘이렇게 되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다시 회귀를 반복한다 하더라도 베리엘이 계속해서 죽어 버린다면…….
상상도 하기 싫은 가정이 머릿속을 휘저었다.
이 영원히 반복되는 공간에서, 베리엘처럼 계속해서 남아 있어야 한다는 말인가.
‘베리엘도 계속 죽는 데에는 정신적인 한계가 있을 거다.’
그래야만 했다.
하지만 그때까지 과연 내 정신이 버텨 줄 수 있을까.
이미 베리엘은 정상이라고 보기 힘든 미치광이.
그런 미치광이를 상대로 이 회귀 싸움에서 이길 가능성이 얼마나 있을까.
콰앙―!
신전 한쪽이 부서지며 검을 든 에반이 나타났다.
그는 내부의 모습을 보더니 단숨에 상황을 눈치챈 듯 이마를 찌푸렸다.
“이거, 외통수군요.”
에반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한 모양이다.
이렇게 된다면 결국은 서로의 정신력 싸움이 되겠지.
베리엘이라고 무한히 죽음을 택할 수는 없을 테니.
“베리 샌더스, 아무래도 이건 끈기의 싸움이 될 것 같습니다.”
에반은 그렇게 말하더니 가볍게 자신의 심장을 찔렀다.
미친놈 대 미친놈의 대결인가.
그냥 도시 밖으로 나가면 되는 건데 저럴 필요가 있나?
“전 앞으로 10번 정도는 회귀를 미리 진행할 것 같습니다. 알아서 판단하고 행동하십시오. 루나에게도 이 사실을 알려 주시고요.”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걸 보면 정말 오러 마스터는 아무나 되는 게 아닌 모양이었다.
그렇게 에반이 죽고 얼마 지나지 않아 부서진 신전의 틈에서 루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뭐야! 내가 제일 늦었어!”
“루나, 일이 조금 복잡하게 됐습니다.”
나는 방금 있었던 일을 간략하게 설명해 주었다.
루나는 에반이 일단 10번 정도 그냥 회귀를 할 거란 말에는 고민을 하는 기색을 보이더니 내게 물었다.
“친구는 어떻게 하고 싶어?”
지금 당장 떠오르는 방법은 없다.
오히려 결단이 빠른 에반이 부러울 정도.
“난 자신 있어.”
루나가 아무렇지도 않게 말해 왔다.
“근데 친구가 걱정돼. 버틸 수 있겠어?”
루나의 걱정에 웃음이 나왔다.
그래, 모 아니면 도지.
“그럼 저희도 가볍게 10번 정도 회귀를 해 볼까요.”
“응, 도시 밖으로 10번만 나가면 되는 거잖아!”
따지고 보면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하는 베리엘보다 훨씬 상황이 좋았다.
적어도 우리에게는 도시 밖으로 나간다는 선택지가 있었으니까.
‘10번으로 안 되면 20번. 20번으로 안 되면 30번.’
까짓것 100번도 넘게 회귀해 주지.
누가 이기나 해보자.
* * *
회귀 14회차.
여전히 베리엘은 죽음을 멈추지 않았다.
회귀 30회차.
이 미친놈은 이미 가루처럼 되어 버린 정신 덕분인지 끝없이 죽음을 반복했다.
회귀 55회차.
단순히 도시 밖으로 나가는 일이지만 슬슬 시간 개념이 무너지고 있었다.
80회차라는 것도 헷갈리지 않고 센 건 순전히 루나와 함께였기에 가능했다.
회귀 87회차.
에반이 잠시 휴식을 원했다.
처음으로 그가 인간답게 느껴지는 회차였다.
회귀 100회차.
100번을 반복하니 점차 절망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베리엘은 끈질기게 도망쳤고, 우리는 점점 이 공간에서 영원을 보내야 하는 건 아닌가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회귀 100회차, 101, 102, 103…….
점차 늘어 가는 회귀 횟수에 어느 순간부터 세는 것조차 잊었다.
베리엘의 광기는 우리의 상상 이상이었고…….
우리는 그 광기에 점점 잠식되고 있었다.
* * *
몇 회차인지 모를 이전 회차에서 베리엘의 시신을 보고 다시 회귀를 했다.
시간으로 따진다면 얼마나 회귀를 반복했는지 계산조차 되지 않았다.
단순 계산으로 거의 3년에 가까운 시간을 회귀하지는 않았을까.
아니다. 그 이상일 수도 있겠으나 같은 시간, 같은 공간을 반복하다 보니 이것조차 내 착각일 수도 있다.
어쩌면 훨씬 긴 세월을 이 안에서 보냈을 수도 있고, 어쩌면 생각보다 짧은 시간일 수도 있다.
‘이게 몇 회차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 회귀 횟수를 떠올리려 했지만 떠오르지 않았다.
에반과 루나조차 몇 회차인지 모르고 있을 정도로 수많은 회귀.
그와 비례하여 모두의 마음이 점차 바스러지고 있었다.
‘이제 도시 밖으로 나가는 것도, 신전으로 가서 베리엘의 시신을 확인하는 것도 지겹다.’
모든 걸 내려놓고 싶었다.
어차피 아무것도 변하지 않으니…….
‘방법을 바꿔야 해.’
포기하는 것보다 그게 더 생산성 있는 일이겠지.
애써 움직이지 않는 다리를 움직였다.
생각해 보면 너무 베리엘에게만 집착을 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에도 생각했던 거지만 이런 던전을 고작 인간 하나의 힘으로 만들 수는 없었다.
‘히든 던전은 대부분 고대 유적과 관련돼 있다. 그 말은 곧 고대 시대에만 있었던 무언가와 연결되어 있다는 뜻이겠지.’
고대 시대.
드래곤과 거인이 살아 있고 신들이 존재했던 시대.
그중에서도 이곳은 드래곤과 신이 연관되었을 확률이 높았다.
‘드래곤이라고 해도 이건 말이 안 되지. 아마 신이 연관되어 있을 거다.’
그렇게 생각하는 게 베리엘과 연관 지어도 옳았다.
베리엘은 이 도시의 수호신이라 불리는 레테의 사제.
그렇다면 레테의 힘이 작용한다고 보는 게 맞겠지.
‘이대로 간다면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다.’
이 상황을 조금이라도 바꾸기 위해 방법을 달리해야 했다.
자세히 생각해 보면 이 던전의 모든 것은 결국 신과 연관되어 있다.
베리엘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고 신전을 조사하기로 했다.
루나와 에반은 아마 바로 회귀를 하러 갔을 수도 있으나 어차피 내가 이번 회차에서 뭘 하든 상관없을 거다.
에반도 말로는 계속 회귀를 반복한 것 같지만 상태를 보면 꽤 시간을 보낸 듯했다. 아마 못 참고 이것저것 혼자 조사해 본 거겠지.
루나는 아마 이번 회차를 그냥 넘길 확률이 높았다.
이 다음번 회귀에서 만나기로 약속했으니.
만약 회귀 횟수를 헷갈리지 않는다면 다음 회차에서 만나게 되겠지.
그러니 우선은 혼자서 신전으로 향했다.
“누구십니까?”
여전히 똑같은 말로 반겨 주는 문지기를 무시하고 신전으로 걸어갔다.
이제는 너무 반복되다 보니 상대해 주기도 귀찮았다.
“멈추십시오! 더 이상 함부로 다가오면 무력을 행사하겠습니다!”
앞을 막는 문지기를 가볍게 밀쳐 냈다.
가볍지만 마나가 담겨 있었기에 그대로 신전의 기둥에 처박힌 문지기를 무시하고 문을 열었다.
어차피 죽은 자들.
게다가 회귀를 하면 없던 일이 되니 이들을 죽이는 데에는 아무런 가책을 느끼지 못했다.
나를 보며 놀라는 사제들을 뒤로하고 우선은 온 김에 베리엘을 보러 갔다.
이미 죽었을 것을 알고 있지만 굳이 확인하지 않을 이유도 없었다.
“그륵…….”
역시나 피 끓는 소리를 내며 나를 비웃고 있는 베리엘이 있었다.
나는 그런 베리엘에게 도리어 미소 지어 주고 말했다.
“이제 너한테 신경 쓰지 않을 거니까 안심해라. 어차피 너 따위의 힘으로 이 공간을 유지하지 못한다는 건 알고 있으니까. 분명 여기 어딘가에 뭔가가 숨겨져 있겠지? 난 그걸 찾을 거다.”
일부러 뭔가를 아는 것처럼 베리엘에게 말했다.
조금의 반응이라도 보인다면 좋겠는데.
“…….”
하지만 이미 늦은 모양인지 그는 절명한 상태였다.
단지 그 표정이 마치 뭔가 놀란 듯했는데 내 말로 인한 반응인지 아니면 그냥 죽을 때의 표정이 저런 건지 확인이 되지 않았다.
‘어차피 내 생각은 변함없어.’
고작 베리엘 혼자 이 공간을 유지할 수 있을 리 없다.
던전의 핵이 분명 어딘가에 있을 거다.
그리고 그 핵의 위치는 아마 이 신전 내부가 유력했다.
반드시 그래야만 했다.
그렇지 않다면…… 아마 난 미쳐 버리겠지.
“꺄악!”
베리엘이 죽은 방 안에 들어온 사제가 비명을 질렀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검을 휘둘러 비명을 지른 상대를 베어 넘기고 밖으로 나왔다.
세는 것조차 잊을 만큼 많은 회귀는 내 감정을 마모시켰다.
게다가 어차피 되돌아간다는 생각이 머리 한구석을 차지했기에 손속에 거침이 없었다.
“침입자다! 막아라!”
이 시대의 사람들이 약한 건지, 아니면 내가 강한 건지.
이들 중 나를 막을 수 있는 인물은 베리엘을 제외하고는 없었다.
베리엘도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니 사실상 없다고 봐도 무관했다.
‘강한 사람들은 전부 화룡 원정대에 참가했겠지.’
대전사급 기사들이 있다고 말한 걸 보면 이 시대의 오러 마스터는 대전사라 불리는 게 아닐까 싶었다.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무려 드래곤을 상대하는 데 오러 마스터가 없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니.
“크억!”
“마, 막아라! 신전을 지켜라!”
거침없는 손속으로 모두를 베어 내자 이내 신전 내부는 피를 흘리지 않는 기괴한 시체들이 바닥에 늘어지게 되었다.
드디어 조용해진 신전 내부를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걸어 다니며 뒤지기 시작했다.
‘왜 굳이 베리엘에게 집착했는지 모르겠네.’
어쩌면 베리엘의 전략일 수도 있겠다.
일부러 자신에게 이목이 쏠리게 만들었을 수도 있지.
잘 생각해 보면 고작 베리엘 하나로 인해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다는 건 말도 안 되는 건데 말이야.
‘이런 생각도 게임을 해 봤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거긴 하지.’
던전 핵이라는 것도 나니까 떠올릴 수 있는 물건이긴 하다.
에반이나 루나에게는 히든 던전이라는 개념이 없을 테니.
애초에 히든 던전은커녕 일반 던전의 개념도 모를 확률이 높았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신전을 수색하자 시간이 꽤 빨리 지나갔다.
몇몇 사제들이 밖에서 지원을 불렀는지 도시의 병사들을 몇 번 상대해 주며 신전의 수색을 계속하자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생각보다 넓군.’
겉보기에는 몰랐는데 신전은 꽤 넓었다.
중간에 온 병사들만 아니었으면 금방 수색을 마쳤을 텐데…….
―고오오.
아무래도 늦은 모양이었다.
검은 연기들이 내는 특유의 소리를 들으며 일단 이번 회차는 여기까지겠구나 싶어 마음의 준비를 했다.
‘차라리 죽을까. 악몽을 꾸기는 싫은데.’
이제 와서 도시 밖으로 나가는 건 늦은 것 같고.
그렇게 고민을 하던 중에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고오오오.
신전 안에서 죽은 사제들이 검은 연기가 되어 갑자기 어디론가 향하기 시작했다.
곧바로 나를 덮칠 거라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전혀 뜬금없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연기들을 나도 모르게 뒤따랐다.
‘저건?’
검은 연기들은 신전의 어느 벽 틈새로 스며 들어갔다.
분명 뭔가가 있음이 확실한 그 상황에 나는 곧바로 검을 뽑아 벽을 부쉈다.
―고오오오어어!
“아……!”
생각도 못 한 무언가가 드러났다.
검은 연기에 휩싸인 붉은 비늘.
흐릿한 동태눈이 되어 버린 길게 찢어진 눈매.
그것은 거대한 동체의 레드 드래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