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부서지는 세계
그것은 마치 살아 있는 듯했다.
윤기가 흐르는 붉은 비늘과 당장이라도 움직일 것 같은 근육들.
하지만 어째서인지 그 눈은 초점을 잃은 채 그저 멍했다.
“살아…… 있는 건가?”
그 압도적인 위용에 잠시 바라만 보고 있다가 천천히 다가갔다.
이게 크리브마허인가? 왜 여기 있는 거지?
항상 공격적이던 검은 연기들도 나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크리브마허의 몸체에 달라붙어 있었다.
그것은 마치 드래곤을 공격하려는 엄청난 악의.
마치 죽어서도 원망하는 것 같은 검은 연기들의 감정이 느껴졌다.
‘엄청난 마력.’
아무래도 살아 있는 모양인데.
그렇지 않고서는 이 마력의 농도가 말이 되지 않았다.
마나 재능으로 보는 이 공간 안은 그야말로 마나로 가득 차서 제대로 뭔가를 보기가 힘들 정도였다.
‘역시 드래곤 하트인가.’
게임 속에서도 문헌으로만 접해 본 전설의 아이템.
드래곤의 심장, 드래곤 하트.
전해져 오는 말에 따르면 그 어떤 마법적 기술로도 따라 하지 못한다는 마나의 집약체이자 엔진이라 들었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인 것은 마나 재능으로 보이는 드래곤 하트가 가동 중이라는 사실이었다.
‘가만히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뭔가를 하고 있어.’
도대체 뭘 하길래 저 엄청난 마력이 필요한 거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순간 나는 어렴풋이 이 던전의 핵에 대해 떠올렸다.
설마 그럴 리는 없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어쩌면이라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아무리 드래곤 하트라고 해도 이런 반영구적인 회귀를 만들어 낼 수 있을 리가…….’
하지만 저 모습을 보면 연관은 있지 않을까?
잠시 생각을 할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바깥의 상황은 그렇게 여유롭지 못했다.
―고오오오!
뚫린 벽으로부터 몰려오는 검은 연기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얼마나 많은지 검은 파도가 몰아치는 듯한 풍경에 무언가를 생각할 틈도 없었다.
아무래도 크리브마허가 검은 연기들을 끌어들이는 모양이었다.
‘아무것도 못하고 회귀하게 생겼다.’
드래곤 하트는 분명 보물이라고 할 수 있겠지.
그래도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조금 아깝지만 나는 검을 뽑아 들고 그대로 크리브마허를 향해 돌진했다.
저 드래곤 하트를 부순다면, 무슨 변화가 있지 않을까?
물욕조차 잊을 정도로 이곳에서의 탈출이 절실했다.
그렇게 검은 오러를 두른 갈락슈르가 크리브마허에게 닿는 순간.
콰드드득!
제대로 준비도 못하고 급하게 휘둘렀던 탓일까.
엄청난 반발력과 함께 갈락슈르는 드래곤의 비늘을 뚫지 못했다.
그리고 곧이어 몰려오는 검은 파도에 나는 그대로 휩쓸리고 말았다.
* * *
“돌려줘!”
“싫은데? 뺏어 보든지!”
이제는 노이로제처럼 느껴지는 아이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정신을 차렸다.
악몽을 꾼 탓에 속이 조금 메스꺼웠지만 지금은 그런 걸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루나를 찾아야 해.’
하다못해 에반이라도.
이제는 에반도 너무나 오랫동안 함께한 덕분에 동질감이 느껴졌다.
덕분에 더 이상 그가 적처럼 느껴지지 않고 동료로 느껴지기까지 할 정도였다.
무작정 달렸다.
신전 앞에서 만나기로 한 회차였지만 그 전에 만나서 내가 겪은 일을 말해 줘야 했다.
“루나! 에반!”
무작정 둘의 이름을 외치고 다녔다.
주변에서 미친놈 보듯 나를 쳐다봤지만 뭐, 어쩌라고.
그렇게 한참을 외치며 루나가 있던 방향으로 달리자 저 멀리 허공을 날고 있는 루나가 보였다.
“친구.”
처음과는 달리 조금 텐션이 떨어진 루나가 나를 보며 표정에 물음표를 띄웠다.
“왜 그래?”
“드래곤을 찾았습니다.”
내 말을 들은 루나는 잠시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한 듯 가만히 나를 바라보다 이내 점점 눈이 커졌다.
“드래고온!”
“예, 드래곤이요.”
루나가 활기를 되찾았다.
그 급격한 변화를 실시간으로 지켜보니 다시 예전의 감정이 되살아나는 기분이었다.
“에반을 찾아야 합니다.”
이미 내 힘만으로는 드래곤의 비늘을 뚫기 힘들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에반이라면 나보다는 가능성이 높겠지.
우리는 곧바로 에반을 찾아 나섰고 금방 그를 찾을 수 있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에반도 여간 힘들었던 게 아니었는지 표정에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뒤이은 내 설명에 조금 전 루나가 그랬던 것처럼 눈빛이 또렷해졌다.
“그게 사실입니까?”
“같이 가시죠.”
드래곤을 발견한 이상 우리의 안중에 베리엘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러나 신전에 도착한 우리는 전혀 뜻밖의 광경을 목격할 수 있었다.
“베리엘?”
베리엘.
그가 밖으로 나와 있었다.
그러나 언제든 자살을 할 준비가 된 모습이었는데 그는 우리를 보며 광기 어린 조소를 흘렸다.
“그렇게 우르르 몰려와서는 뭘 하려는 거냐.”
“확실히 켕기는 것이 있는 모양이군요.”
에반은 도리어 그런 베리엘의 변화를 보며 반색했다.
확실히 지금까지와는 다른 그의 모습에 드디어 이 장소를 탈출할 단서가 눈앞으로 다가온 듯하겠지.
“왜냐! 도대체 왜 이곳에 들어와서 내 도시를 망치려는 거냐! 레, 레테께서 용서치 않을 것이야! 신의 벌이 두렵지 않은 것이냐!”
“저는 카시온 성국의 성기사로서 신의 존재를 항상 믿어 왔습니다.”
베리엘의 괴성에 사제들이 신전에서 나와 구경을 하기 시작했다.
그런 모습에 아랑곳하지 않은 에반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저는 신이란 자비로운 존재라고 생각해 왔죠.”
“저번에도 말했지만 감히 인간의 잣대로 판단한 네 우둔함을 탓해라!”
“솔직히 말하자면 아직도 당신이 말하는 레테가 진짜 신인지는 의문입니다. 하지만 직접 이 공간을 겪어 보니 신이 아니면 도대체 누가 이런 곳을 만들 수 있는지 답이 나오지 않더군요.”
에반이 검을 뽑았다.
그와 맞춰 루나가 강림을 사용했고 나도 전투 준비를 마쳤다.
“당신의 말이 어느 정도는 맞습니다. 처음부터 신을 제멋대로 재단한 제 불찰이지요. 덕분에 한 가지 교훈을 얻었습니다. 그 교훈으로 말미암아 저는 이제 신을 부정할 겁니다. 신이 완벽한 존재라 생각하며 섬겨 왔던 것이 제 신념. 하지만 완벽한 존재가 아님을 알았으니 이제부터 제가 따를 것은 오직 빛뿐입니다.”
“하하하하! 완벽의 정의란 무엇이지? 고작 너 따위가 완벽을 논한다고? 레테께서는 완벽하시다! 이 세상 그 어떤 신보다도 완벽하시지! 그런데 한낱 인간 따위에 불과한 네가 감히 레테를 부정해?”
베리엘이 기묘한 생김새의 물건을 품 안에서 꺼냈다.
손바닥 크기의 작은 조각상이었는데 그 형태나 모양이 너무 기괴했다.
마치 괴물의 태아를 조각한 듯한 검붉은 색상의 조각상.
‘고동!’
미칠 듯한 고동이 느껴졌다.
지금까지 겪어 왔던 그 어떤 네임드 아이템보다 강렬한 힘이었다.
그리고 이는 루나와 에반도 느낀 모양인지 심각한 표정으로 긴장감을 끌어올렸다.
“따를 것이 오직 빛뿐이라고? 멍청하고 아둔하구나! 빛은 그저 물질일 뿐이다. 고작 그런 것을 섬기겠다는 걸 보아하니 네놈도 내가 계몽해야겠다!”
미친놈 둘의 대화군.
신이 뭐든 빛이 뭐든 지금 상황에서 무슨 의미야.
내게 신이란 그저 절대자에 가까운 객체에 불과했고 빛은 그저 전자기파일 뿐.
“에반, 저와 루나가 저자를 맡겠습니다. 신전 안에 존재하는 드래곤 하트를 깨 주세요.”
“알았다.”
우리의 대화를 들은 베리엘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아니, 실제로 찢어져 피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봤구나! 그렇게는 안 된다!”
기괴한 모습의 베리엘이 마나를 터트렸다.
그러자 그의 손에 들려 있던 조각상이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
―@#$!%^[email protected]#
인간의 언어나 문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기묘한 소리가 나오고…….
이내 조각상이라 생각했던 그것은 점차 몸집을 부풀리더니 기괴한 형태의 괴물이 되었다.
‘이건 아이템이야, 몬스터야?’
이런 기괴한 기믹은 나도 처음 봤다.
확실한 건 그 특이한 출현 방법만큼이나 공략법도 까다로울 것 같았다.
‘생긴 것도 더럽게 세 보이고.’
하지만 나름 희망적이었다.
기약 없이 회귀만 반복하던 것에 비한다면 저런 괴물과 수십 번도 더 싸워 줄 수 있었다.
―%[email protected]&[email protected]#
그것의 소리는 마치 주문을 외듯 기괴했다.
그리고 그것은 실제로 주문이라도 된 것처럼 점차 하늘이 검게 변하기 시작했다.
“심상치 않군요. 먼저 가 보겠습니다.”
에반이 자리를 박차고 신전을 향해 뛰어갔다.
정확한 장소는 몰라도 신전 안에 있다는 것을 알았으니 건물 자체를 부숴 버리면 되는 일.
오러 마스터인 만큼 칼질 한 방으로 드래곤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근데 왜 막지 않지?’
의외인 것은 그런 에반을 보면서도 베리엘은 딱히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분명 뭔가 위기감을 느껴서 이전과 다른 행동을 취한 게 아니었나?
그러나 답은 얼마 있지 않아 나왔다.
콰아아앙―!
강렬한 마나의 파동.
그것은 도저히 인간의 힘이라고 볼 수 없는 거대한 폭력이었다.
“우와아…….”
“어떻게?”
루나의 감탄을 들으며 신전이 무너져 내리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거대한 동체의 레드 드래곤이 여전히 흐릿한 초점을 한 채 마나를 온몸에 두르고 있었다.
‘설마 저것도 베리엘의 힘인가?’
자세히 보니 어느새 검은 연기들이 드래곤의 몸에 붙어 있는 것이 보였다.
마치 검은 연기가 크리브마허를 조종하는 것처럼 보였는데 그건 곧 사실로 드러났다.
“네놈들은 영원히 악몽이나 꾸도록 해라! 이것이 바로 레테의 자비다!”
마치 밤이 된 듯 검게 칠해진 하늘.
그리고 주변에 있던 사제들은 태양 빛이 사라지자 자연스레 검은 연기로 변해 베리엘의 말을 따르듯 움직였다.
무슨 원리인지 모르겠지만 일단은 눈앞의 적부터 쓰러트려야 할 시간.
우우웅.
내 정예 언데드들이 아공간을 넘어서 이 땅에 현현했다.
내 양옆으로 니켈과 티무르, 그리고 거대한 루도가 내 뒤에서 나타났고 미리내는 발랄하게 주변을 날아다녔다.
―%[email protected]@!!
달그락!
조각상에서 이족 보행을 하는 털 많은 짐승처럼 변한 괴물이 니켈에게 꽂혔다.
니켈도 마치 무언가를 느낀 것처럼 그 괴물에게 적대감을 드러냈다.
“이건 놀랍네.”
“이브.”
루나도 심상치 않음을 느꼈는지 처음부터 전력을 꺼냈다.
루나의 몸을 차지한 이브 밀레니엄은 주변을 둘러보며 미소 짓더니 내게 말했다.
“아무래도 난 이쪽을 막아야겠는데?”
그녀가 가리킨 방향에는 엄청난 수의 검은 연기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확실히 저것들을 피하며 싸우는 건 말이 안 된다.
어쩌면 지금 상황에서 가장 성가신 적은 저 검은 연기들일 수도 있겠네.
“부탁합니다.”
“아무렴, 이 정도는 해야 체면이 서지.”
말은 내게 하고 있었지만 그녀의 시선은 저 멀리 크리브마허와 싸우고 있는 에반에게 향했다. 그 눈빛에 담긴 감정이 복잡해 보였다.
‘내가 모르는 뭔가가 더 있나?’
약간의 호기심이 고개를 들었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다.
이미 내 언데드들은 3m쯤 되어 보이는 괴물에게 달려가고 있었다.
‘다 부숴 버려.’
언데드들에게 마음껏 날뛰라는 명령을 내리고 검을 들었다.
저 괴물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내 앞길을 막을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