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미치광이
지끈지끈한 머리를 부여잡고 일어난 에반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자신이 회귀했음을 깨달은 그는 자조 섞인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오러 마스터가 되고서도 무력함을 느끼는 건 그때 이후로 처음이군.”
그의 눈빛이 잠시 아련해졌다.
유난히 비가 많이 오던 그날.
예상치 못한 재앙을 만나 고전했고 뜻밖의 구원을 받았다.
그 사건 이후로 부단히도 실력을 갈고 왔건만.
‘악몽을 꾸게 하다니 사악하기 짝이 없는 연기야. 이교도의 악마 숭배와 관련이 있는 걸까.’
물리력이 통하지 않는 검은 연기들에 휩싸여 제대로 저항하지 못했다.
덕분에 그날의 악몽을 다시 경험하기까지 했으니 최악의 기분이었다.
대신 한 가지 알아낸 사실이 있다면 그 검은 연기들이 빛에 취약하다는 것.
처음에도 느꼈던 일이지만 이전 회차로 확실해졌다.
이미 빛에 취약하다는 점에서부터 그 검은 연기가 사악한 것이라 단정 지은 에반은 이내 이곳에 함께 들어온 흑마법사들을 떠올렸다.
‘도시 중앙에 있는 영주성으로 향했었는데 마주치지 못한 걸 보면 다른 곳으로 정보를 알아내러 간 거겠지?’
영주성에는 이 도시가 반복되는 이유에 대한 정보가 없었다.
그저 답답한 소리를 해 대는 영주만 있었을 뿐.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이라면 화룡 원정대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그를 통해 이 도시가 먼 과거에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고대 시대에 와 있다는 사실이 실감 나지 않았지만 이 신비로운 힘을 보면 고개가 끄덕여졌다.
‘화룡이라……. 고대 문헌은 여러 가지 알고 있는 게 많지만 하필이면 이름을 몰라서야.’
카시온 성국의 성기사로서 수많은 지식을 쌓아 왔다.
화룡의 이름만 알아낸다면 그동안 읽어 온 문헌의 지식을 통해 이 사건의 전말이나 시대상이 파악될 확률이 높았는데 하필이면 이들은 화룡의 이름이나 정보를 알고 있는 게 전혀 없었다.
그저 화룡이 근처에 둥지를 틀었기에 이를 신전의 고위 사제가 토벌해야 한다고 주장했음을 토로하기만 할 뿐이었다.
‘협력이 필요해.’
갈수록 심상치 않은 일이라는 것을 체감하고 있는 만큼 정보의 공유가 절실했다.
자신이 이렇게까지 무력해질 줄은 몰랐지만 지금은 자존심을 세울 때가 아니었다.
‘다시 그 악몽을 꾸게 된다면…….’
차라리 죽거나 도시 밖으로 나가 회귀를 하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목표를 정한 에반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해가 지기 전에 루나와 베리 샌더스를 만나 방법을 강구해야 했다.
* * *
3회차.
2회차에서 알아낸 정보는 신전이 수상하다는 것뿐, 정확한 정보는 구하지 못했다.
우리와 따로 행동하는 에반은 과연 어떤 정보를 찾았을지 궁금했다.
‘설마 벌써 빠져나가지는 않았겠지?’
그것도 그것대로 나쁘지만은 않은 소식이었다.
적어도 혼자의 힘만으로도 벗어날 수 있다는 반증이었으니.
‘물론 에반이 평범한 인물은 아니지만.’
이쪽도 만만치 않게 비범한 조합이니 걱정되지 않았다.
그리고 애초에 에반이 빠져나갔을 확률은 낮았고.
“친구!”
“예, 루나.”
“나 신전에서 봤어! 이상한 사람!”
루나가 한껏 심각한 표정을 지었지만 오히려 우스꽝스러웠다.
어린아이가 어른의 흉내를 내는 것 같은 그 모습에 애써 올라가는 입꼬리를 가라앉히고 물었다.
“이상한 사람?”
생각해 보니 나도 얼핏 무언가를 봤던 것 같은데.
정신이 없었던 탓에 확실하게 보지는 못했지만 루나가 사람을 봤다는 걸 보면 내가 제대로 본 게 맞는 모양이었다.
“응! 죽은 게 아니었어! 사람이었어!”
“아.”
맞다.
루나는 영혼하고 사람을 구별할 수 있었지?
“우리 말고 또 누가 있다는 거네요?”
“응! 검은 로브를 입은 할아버지였어. 날 보고 엄청 놀라던데?”
이거. 냄새가 난다.
아무래도 수수께끼와 연관된 열쇠를 찾은 듯했다.
“신전에 다시 가 보죠.”
이번에는 신전으로 가는 길도 알고 있고 곧바로 출발하는 거니 시간도 충분했다.
뭔가를 알아내기에는 충분한 시간.
어쩌면 이 던전을 클리어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히든 던전인 만큼 말처럼 쉽지는 않겠지만.’
곧바로 어두침침한 골목을 빠져나와 신전으로 향했다.
나가는 길에 들어오면서 보았던 아이들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내색하지 않으려 애썼다.
“불쌍해.”
갑작스러운 루나의 말에 잠시 망설이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자기들이 죽은지도 모르고 여기서 영원히 배회하고 있어.”
루나가 내 옷깃을 살며시 잡았다.
“우리가 구해 줄 수 있겠지?”
“노력해 보죠.”
던전만 깬다면.
아마 저들도 영면에 들 수 있을 거다.
빈민가의 아이들이라 유독 불쌍해 보이는 건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어쩌면 이미 크리브마허에게 죽어 사라졌을 그들의 부모보다 더 안타깝다고 볼 수 있겠지.
‘던전을 깨는 걸로 해결이 됐으면 좋겠다.’
만약 던전이 클리어 돼도 저들이 방황한다면 그것까지 신경 써 줄 수는 없었다.
난 성인군자가 아니니까.
그렇게 루나와 함께 이미 몇 번 지나쳤던 공터를 스쳐 가고, 긴 상가 골목을 지나…….
금세 거무튀튀한 레테의 신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어디서 오셨습니까?”
이전에 보았던 문지기 역할의 사제가 우리를 보고 물었다.
그의 시선이 루나에게 향하는 걸 본 내가 곧바로 닉스의 사제라고 대답하려던 순간.
“잠깐.”
다른 사제가 급하게 신전 밖으로 나와 말했다.
“베리엘 사제님께서 오늘은 손님을 받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죄송하지만 내일 방문해 주실 수 있습니까?”
전과 다른 흐름에 확실해졌다.
신전 안에 있는 인물, 저 베리엘이라는 사제는 우리와 같이 회귀를 하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아졌다.
“달라졌어!”
루나도 놀란 듯이 외치며 나를 바라봤다.
그리고 언제든 준비가 되었다는 모습으로 투지를 불태웠다.
‘뚫고 지나간다.’
내가 검을 뽑자 루나도 금세 강령술을 준비했다.
“지금 뭐 하시는……!”
내 행동에 놀란 사제 둘이 급하게 호신용 무기와 지팡이를 꺼내 들었다.
“미안합니다.”
어차피 회귀를 하게 되면 의미도 없는 사과였지만 재빠르게 그들에게 다가가 검을 휘둘렀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공격이었을까.
상식과는 어긋난 내 행동에 두 명의 사제는 그대로 상하가 분리되어 쓰러졌다.
피를 흘리지 않는 이들이었기에 조금 손속이 과했지만 어차피 죽은 자들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크게 신경 쓰지는 않았다.
휘잉―!
마침 강림을 끝낸 루나가 나를 지나치고 그대로 신전에 들어갔다.
급하게 그녀의 뒤를 쫓자 안에 있던 사람들이 혼비백산하여 달아나는 것이 보였다.
“루나, 그 살아 있다는 사람을 찾죠.”
“응.”
루나의 눈이 기묘한 빛으로 빛나며 다시 쏜살같이 안쪽으로 뛰어갔고, 나는 도망치는 사람 하나를 붙잡아 물었다.
“여기 베리엘이라는 사제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고, 고위 사제님?”
고위 사제라…….
설마 그 베리엘이라는 사람이 화룡 원정대를 구성한 사람인가.
“해치지 않으니 대답해 주십시오. 그 베리엘이라는 사제가 화룡 원정대를 파견한 겁니까?”
“화룡 원정대. 예, 예. 맞아요. 그렇습니다.”
점점 퍼즐이 들어맞는 느낌이었다.
그렇다면 화룡 원정대와 이 회귀가 관련된 건가?
그거로는 아직 부족한데.
콰앙―!
그때 안쪽에서 폭음이 터져 나왔다.
농밀한 마나의 기운에 나는 곧바로 소음이 난 곳으로 뛰어갔다.
“루나.”
다행히 루나는 멀쩡해 보였다.
그리고 그런 루나의 앞에는 이전 회차에서 보았던 검은 로브의 늙은 사제가 서 있었다.
“이, 이, 이, 이건 마, 말도 안 돼!”
그는 혼란스러운 눈으로 나와 루나를 보며 소리쳤다.
그리고는 검은색의 손바닥 크기만 한 지팡이를 덜덜 떨며 흔들었다.
“니, 니, 닉스의 사제가 왜 여기에! 너, 너, 넌 누구야!”
그의 지팡이 끝에 모이는 마력이 심상치 않았다.
루나도 감지한 모양인지 곧바로 자리에서 피했다.
“안 돼! 내 도시를 건드리지 마!”
콰아아앙―!
터져 나오는 마력의 폭풍이 신전 건물의 한 면을 통째로 소멸시켰다.
예상했던 것보다 괴물 같은 능력에 온몸이 긴장되었다.
“멈춰 보세요. 당신이 베리엘입니까?”
“여, 여, 여기는 레테께서 보살피는 도시다! 다, 당장 물러가라, 이 악귀들아!”
말이 안 통하는군.
나는 루나에게 눈짓을 한 뒤 곧바로 베리엘에게 달려들었다.
“레, 레테께서 네 녀석들을 용서치 않을 것이야. 레, 레테께서……!”
순식간에 다가간 내가 검을 휘둘러 보았지만 알 수 없는 막에 막혀 튕겨져 나갔다.
그러나 곧바로 따라붙은 루나가 거대한 낫을 휘두르자 막은 부드럽게 갈려 나갔다.
“니, 닉스의 사제!”
미친 건가.
적어도 정상인 같지는 않았다.
하긴 계속해 하루가 반복되는 공간에서 지금까지 살아왔으면 미칠 만도 하다.
이곳의 시간과 바깥의 시간 개념이 정확히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몰라도, 이 베리엘은 고대 시대 때부터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시대에 이르기까지 회귀를 반복한 것일 테니.
마력 자체는 강렬했지만 반응이 영 시원치 않았기에 쉽게 제압에 성공했다.
“어떻게, 어떻게 외부인이 이곳에…….”
“베리엘. 베리엘이 맞습니까?”
“나, 난 아무 잘못 없어! 아니! 오히려 나 때문에 저들이 살아 있는 거라고!”
횡설수설하는 베리엘의 모습에 나와 루나는 곤란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봤다.
일단은 참고 계속 말을 걸어 봐야겠지.
“베리엘, 당신도 이 도시가 계속해서 반복된다는 걸 아는 모양인데 당신이 한 짓입니까?”
“내가? 내가 무슨 힘으로! 이건 그저 레테께서 내리신 은총이다! 경배하라! 레테께서는 우리에게 영원한 삶을 주셨도다! 아하하하하!”
미친 사람처럼 웃는 베리엘의 웃음소리를 뚫고 누군가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미쳤군요.”
“에반.”
어느새 나타난 에반이 부서진 신전 벽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럼 그 검은 연기들이 다 신의 작품이라는 말씀이십니까?”
“검은 연기? 하하하! 그것은 인간이 축복받을 때 나타나는 가장 진화된 모습이야! 고작 검은 연기 따위가 아니라고!”
“……미쳤군요.”
미쳤다고 말하는 에반의 표정이 왜인지 모르게 경직되어 있었다.
“신께서 그런 사악한 것들을 만들었을 리 없습니다. 신은 곧 빛, 빛을 두려워하는 것들이 감히 신에게서 비롯됐다는 겁니까.”
“빛? 빛이라고? 어느 교리를 믿는지는 몰라도 편협하군! 신들께서는 다양성을 추구한다. 네놈 따위가 함부로 재단할 수 있는 분들이 아니라고!”
열변을 토하는 베리엘의 얼굴이 점차 냉정해져 갔다.
내가 볼 때는 별 의미도 없는 믿음과 말들이었으나 하필이면 성국의 성기사와 실제로 있던 신을 믿는 사제의 대화라 애매하군.
“에반, 지금은 일단 이 도시를 벗어날 방법을…….”
“닉스의 사제여.”
내 말의 허리를 끊은 베리엘이 루나를 강렬하게 바라봤다.
“이 모든 건 내 잘못에서 비롯되었다. 하지만 결코 후회하지 않아. 나는 이 도시를 포기하지 않을 거다.”
갑자기 제정신처럼 돌아와 멀쩡히 말을 한 베리엘은 이내 루나를 향해 미소를 지어 주며…….
펑!
터졌다.
“이게 무슨…….”
에반의 당혹성이 신전 내부를 울렸다.
베리엘은 그렇게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