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루시아 에버라스트 그리고 진심
잠시 정적이 흘렀다.
이내 연구실에 들어온 인물이 웃음을 터트렸다.
“푸하하. 야. 아드리아스. 너 표정이 그게 뭐냐? 꼭 못 볼 사람을 봤다는 표정이다? 그래도 저번처럼 못 알아보지는 않으니까, 합격!”
“정말 살렘이었군요.”
모습을 바꾼 탓에 또 못 알아볼 뻔했다.
그나저나 살렘이 어떻게 여기에 있는 거지?
설마 에버라스트 상단주와 먼저 이야기 중이던 상대가……?
“살렘이라니……. 설마 살렘 예디디아?”
그때 내 뒤에서 작은 말소리가 흘러나왔다.
루시아가 있다는 것도 잊고 실수해 버렸네.
내 뒤에 있던 루시아는 고개를 빼꼼 내밀어 살렘을 살폈다.
“그래. 내가 살렘 예디디아다. 네가 윌리엄의 딸이냐? 얘기는 몇 번 들었는데 확실히 예쁘게 생겼네.”
살렘은 자신의 정체가 들켰음에도 당당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두려운 것 하나 없는 세계관 최강자 중 하나다웠다.
그때 연구실의 바깥에서 누군가가 달려오는 소리와 함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겐달님!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아무래도 하겐달이라는 가명을 쓰는 모양이었다.
살렘은 다시 문밖으로 나가더니 뛰어오고 있는 듯한 홀링턴 자작에게 고개를 돌려 말했다.
“미안하다. 윌리엄. 내 정체를 이미 들켜 버렸어. 굳이 하겐달이라고 안 불러도 돼.”
윌리엄하고 이미 서로 아는 사이였군.
이건 루시아를 플레이 해 봤으면서도 몰랐던 사실이다.
“아이고. 헉헉.”
뒤늦게 연구실로 도착한 홀링턴 자작이 당황스러운 눈길로 살렘과 연구실 안쪽에 있는 우리를 번갈아 보았다. 그리고 끝내는 원망스러운 눈초리로 살렘을 보았다.
“분명 조용히 가신다고 약속까지 하셨으면서…….”
“하하. 미안하다. 아드리아스가 와 있다는 소리에 신이 나서 참을 수가 없었거든.”
“각하와 아시는 사이십니까?”
“그럼! 아주 각별한 사이지. 그렇지 않아, 아드리아스?”
이걸 뭐라고 대답해야 하나.
살렘은 굳이 따지자면 정사 중간의 인물이지만 엄연히 현상 수배가 된 제국의 범죄자. 홀링턴 자작과의 사이도 보통이 아닌 것 같아 크게 걱정은 되지 않았지만 굳이 긍정하기에는 여러모로 걸렸다.
“제 생명의 은인이시긴 합니다.”
딱 여기까지가 좋겠다.
너무 친해 보이면 조금 위험하지. 실제로 그리 친한 것도 아니고.
“뭐? 우리가 겨우 그 정도 사이냐?”
오늘따라 루시아부터 시작해서 왜 이렇게 관계에 집착하는 거야.
물론 농담이겠지만.
예정에 없던 살렘의 출현에 조금은 당황스러웠지만 내게 호의를 가지고 있는 인물이기에 두려움보다는 반가움이 컸다. 특히나 그가 가르쳐 준 마나의 파동은 아직까지도 요긴하게 사용하고 있기에 고마운 감정도 들었다.
“근데 여기서 뭐 하고 있었던 거냐? 뭐야, 둘이 사귀어?”
“연구를 하고 있었습니다.”
살렘의 말에 내 대답에도 불구하고 홀링턴 자작이 성난 눈초리로 나와 루시아를 흘겨보았다. 홀링턴 자작의 성격으로 보아 나중에라도 루시아와 맺어지게 될 남자는 꽤 고생할 듯싶었다.
“내가 청춘을 누리는 둘 사이를 방해해 버렸군. 윌리엄. 우리는 나가서 늙다리들끼리 맥주나 한잔 하자고.”
“예, 예? 그, 저는 크롬웰 각하와 약속이…….”
“어허. 그렇게 눈치가 없으면 딸한테 미움받는다?”
“그, 그럴 리가…….”
둘이서 아주 콩트를 하고 있네.
내가 어이없는 눈으로 보고 있자 루시아가 끼어들었다.
“정말 살렘 예디디아 님이 맞다고요? 진리를 쫓는 악마?”
“그래. 왜? 믿기지가 않아?”
살렘이 귀엽다는 듯 묻자 루시아는 당돌하게 말했다.
“네.”
“어쩌라고.”
“네?”
“네가 안 믿으면 뭐 어쩔 건데. 내가 증명해 줘야 돼?”
살렘 특유의 껄렁이는 말투가 나오자 루시아는 잠시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
그 모습에 결국 내가 나섰다.
“살렘. 그나저나 여기는 웬일이에요. 이러고 있어도 되는 거예요?”
“누가 날 알아보겠어. 볼일은 끝났는데 오랜만에 속세로 내려왔으니 유흥도 즐겨 줘야지. 어이, 윌리엄. 빨리 맥주 집으로 가자고.”
“그, 그게…….”
홀링턴 자작이 나를 곁눈질하며 곤란하다는 눈빛을 보내왔다.
나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흔들었다.
“전 괜찮습니다. 루시아랑 연구하던 것도 있으니 마저 하고 있겠습니다. 계약은 조금 미뤄져도 상관없어요.”
“감사합니다. 각하.”
그렇게 한바탕 소란이 끝나고 살렘이 홀링턴 자작을 끌고 나갔다. 저 막무가내인 성격은 아마 죽을 때까지 변하지 않을 거다.
“어디까지 했지?”
“선배. 방금 그 사람 정말 살렘 예디디아예요? 아직도 안 믿기는데.”
“믿지 말라면 믿지 마. 그리고 가까이 해 봤자 좋을 거 없어.”
웬일인지 루시아가 살렘에게 관심을 많이 가지네.
웬만한 일에는 반응도 안 하는 그녀가 이런 반응을 보이니 신기하다.
“그럼 이어서 해 볼까.”
* * *
이어서 하기는 개뿔.
한 번 집중이 끊기자 도통 진도가 나가질 않았다.
결국 나와 루시아는 분위기를 환기할 겸 밖으로 나왔다.
“루시아.”
“네.”
“근데 이 연구 목적이 예전에 네가 말한 그 치료제랑 연관이 있는 거야?”
성 앞에 위치한 야트막한 언덕에서 풀밭을 베개 삼아 누워 물었다.
이미 게임을 해 봤기에 이유를 알고 있었지만 그녀에게 직접 전해 들었던 적은 없었기에 이번 기회에 물어보았다.
“네.”
“그 치료제가 뭔데. 어디다 쓰려고? 그걸 알아야 내가 확실하게 목표를 잡고 도와줄 수 있지 않을까?”
“알고 싶어요?”
“어.”
루시아는 햇빛이 포근한지 거의 감긴 눈으로 배시시 웃었다.
“싫어요.”
“뭐야. 왜?”
“이거 알면 선배도 절 싫어하게 될걸요?”
순간 그녀의 표정이 씁쓸해지며 애달픈 미소에 잠겼다.
그러나 순식간에 스쳐 간 표정이라 내가 착각한 건가 싶을 정도였다.
‘착각일 리가 없지.’
괜히 루시아가 안쓰러워졌다.
혼자만 품고 있는 그녀의 병을 이해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이 세상에서 오직 그녀만이 걸린 희귀 난치병인 만큼 그녀가 지닌 고독한 감정은 타인에게 함부로 접근을 허용하지 않는 방어기제를 만들었을 거다.
“루시아.”
“왜요. 또. 그렇게 분위기 잡으면 제가 말해 줄 것 같아요?”
“난, 최근 들어 힘든 일도 많았지만 행복했어. 날 기다려 주는 가족이 있고, 아카데미에는 너와 비비안 그리고 이런저런 인연으로 맺어진 사람들이 있으니까. 예전에는 절대 상상하지 못했던 삶이었어.”
김진환이었을 때는 오로지 임무와 목표 달성만을 위했던 삶.
웬만한 감정은 모두 거세당한 채 그저 기계처럼 작전에 투입될 뿐이었다.
그러나 이곳에 오고 알았다.
나는 기계가 아니라는 걸.
분명 제대로 감정을 가지고 살아가는 한 명의 인간이라는 것을.
비록 이 세상의 비밀과 미래를 알고 있기에 어깨가 무거웠지만 그와 별개로 하루하루가 즐겁게 느껴졌다.
나를 위한 향상심도, 최근 들어 새로운 일에 도전해 보고 있다는 에이미의 편지도, 게임과는 달리 진짜로 살아 숨 쉬는 플레이어블 캐릭터들과의 관계도, 모두 믿기지 않을 정도로 감사하고 소중했다.
“그러니까 그 모든 게 내겐 소중해. 잃고 싶지 않더라고. 그래서 더 발버둥 치게 되고. 내게 있어서 너무나 소중한 이 일상들을 지키려고 매일 땀에 절어 살아도 그것조차 즐겁다고 느끼고 있어.”
루시아는 침묵을 지키며 조용히 내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졸린 듯 감긴 눈이었지만 그녀가 깨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널 싫어하게 될 일은 절대 없어. 장담해. 이 세상 모든 게 널 배신하더라도 나는 널 혼자 두지 않을 거야. 아, 이건 너무 갔나?”
쓸데없이 분위기가 무거워진 것 같아 장난스레 웃어 보였다.
루시아는 여전히 잠든 척을 하며 대답이 없었지만 상관없었다.
그저 내 진심을 알아줬으면 해서 일방적으로 말했을 뿐이니까.
다그닥, 다그닥.
“크롬웰 각하!”
어느새 꽤 시간이 흘렀는지 성으로 돌아오는 홀링턴 자작의 마차가 보였다.
나는 손을 흔들어 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루시아. 너도 나한테는 소중한 사람이야. 그것만 알고 있어 줘.”
* * *
아드리아스 크롬웰은 계약을 마치자마자 떠났다.
성에 위치한 자신의 방에서 떠나가는 아드리아스의 뒷모습을 보던 루시아는 그가 해 주었던 말들을 떠올렸다.
‘날 혼자 두지 않는다고…….’
괜히 얼굴이 화끈해졌다.
저런 말을 어떻게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말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진심으로 느껴져 마음에 와닿았다.
이전의 아드리아스가 어떤 삶을 살아왔기에 저렇게까지 말하는지 모르겠지만 그의 말들은 꽤나 큰 위로가 되어 주었다.
‘생각해 보니까 아드리아스 선배에 대해 알고 있는 게 없네.’
크롬웰 백작이라는 것과 여동생이 하나 있다는 것을 제외하면 아무것도 아는 게 없었다. 그동안은 별로 관심 없었는데 이번 일로 문득 궁금해졌다.
그가 어떻게 살아왔고, 어릴 때는 어땠는지, 어쩌다 그 젊은 나이에 백작이 되었는가까지.
‘과자는 별로 안 좋아하는 거 같았는데 먹는 건 뭘 좋아하지? 고기를 좋아하려나?’
아드리아스의 궁금증 터져 나오자 밑도 끝도 없이 생각이 이어졌다.
그렇게 한참을 그에 대한 생각을 하던 루시아는 하인이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깨어났다.
“루시아 아가씨. 주인님께서 식당에서 식사를 같이 하자고 하시는데 어찌 전할까요?”
항상 연구실이나 자신의 방에서 밥을 먹던 루시아는 오랜만에 식당으로 내려가기로 했다.
아버지라면 크롬웰 가문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있지 않을까?
그렇게 내려가겠다는 대답을 하고 식당으로 내려온 루시아는 뜻밖의 손님을 보았다.
‘살렘 예디디아.’
아직도 떠나지 않았던 건가?
살렘은 저녁까지 얻어먹을 생각인지 그녀의 아버지와 함께 자리에 앉아 있었다.
“루시아. 나올 거라 생각하지 못해서 미리 말을 못 했구나. 하겐달 님이 같이 식사를 하시기로 했는데 괜찮겠느냐?”
“네. 상관없어요.”
이미 정체가 드러났음에도 하겐달이라 부르는 자신의 아버지를 보고 자신의 자리로 걸어가 앉았다.
루시아는 내심 잘됐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드리아스와 꽤 연관이 있어 보이는 살렘에게 그와 있었던 일이나 그에 대해 물어볼 생각이었다.
“루시아 에버라스트.”
그러나 그녀가 먼저 질문을 던지기 전에 살렘이 먼저 입을 열었다.
“들어 보니까 마법에 재능이 좀 있다고 하던데. 정말이야?”
“그냥 그래요.”
대답이 두루뭉술했지만 그녀는 실제로 마법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녀가 마법을 익히게 된 경위 자체가 자신의 치료제를 연구하기 위해서였기에 마법은 부수적인 요소였다.
“널 보니까 내 제자였던 녀석이 떠오르네.”
“제자요?”
“어. 지금은 기어오르다 못해 도망친 녀석이지만.”
살렘은 말을 하던 도중 자신의 팔을 들어 마법으로 무언가를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그것은 파랗게 빛나는 별처럼 보이는 무언가였다.
“아아.”
루시아가 홀린 듯 그 마법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고 홀링턴 자작은 그저 이게 무슨 일인가 싶은 표정으로 지켜보고만 있었다.
“이게 뭔지 알겠어?”
“마나요.”
단숨에 대답하는 루시아를 보며 살렘이 미소 짓더니 손 위로 만들어 낸 별을 공처럼 던졌다가 받았다.
“아! 위, 위험…….”
“너, 이게 뭔지 정말 아는 모양이구나?”
불안해하는 루시아와 달리 살렘은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으며 루시아를 보았다.
그리고는 만들어 낸 별을 잡아 으스러트리고는 얼굴을 들이밀었다.
“루시아 에버라스트. 내 제자나 한번 해 보지 않을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