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홀링턴 영지
카일러를 처리한 지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개인적으로 머리 아프고 복잡한 일들뿐이어서 딱히 떠올리고 싶지는 않았다.
‘그레이스를 직접적으로 죽인 게 디에네라서 다행이지. 만약 나나 비비안이 죽였으면 엄청 고달팠겠어.’
표현을 순화해서 생각하고 있었지만 고작 고달프기만 하겠는가.
아마 정치적인 문제로 훨씬 난리가 났을 거다.
디에네의 경우 그나마 가문 덕분에 일이 크게 번지지 않은 거지.
“거의 다 왔네.”
열차 창밖의 풍경을 보며 말했다.
지금 내가 향하고 있는 곳은 에버라스트 상단 본점.
새로 만든 포션들의 특허 출원이 연말과 연초가 겹쳐 늦어졌었는데 이제야 계약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마침 아카데미도 이번 사건으로 한 주 동안 휴강을 한 탓에 시간이 널널하던 참이었다.
‘진화 때문에 조금 어질어질한데 딱히 문제는 없겠지. 애초에 지금이 아니면 시간도 애매하니까 어쩔 수 없이 나와야 했지만.’
카일러와의 전투 이후 경험치가 쌓였는지 ‘흑마법 사령 계열 재능’의 진화 성공률이 대폭 올랐다. 그동안에도 30%를 넘겨 몇 번씩 눈에 띄었었는데 이번 일을 계기로 90%를 넘겨 과감하게 진화를 선택했다.
곧바로 한 건 아니고 아카데미에 복귀 이후 이런저런 조사를 모두 끝마친 이후에 진화를 해서 아직 완료가 되기까지 약간의 시간이 남아 있었다.
푸슉.
마침내 도착한 열차에서 내려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미 한 번 와 본 곳이라 새삼스레 둘러볼 필요는 없지만 루시아를 플레이 했을 때의 기억이 떠올라 나도 모르게 반응이 되었다.
곧바로 주변 마차 역에서 마차를 타고 홀링턴 성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루시아도 이번 휴강으로 본가에 내려온 걸로 알고 있는데 운이 좋으면 만날 수도 있겠네.
홀링턴 영지는 크지 않았기에 마차는 금방 홀링턴 성에 도착했다.
아무래도 돈으로 구입한 영지다 보니 크기가 크거나 무언가 특색이 있는 영지는 아니었다.
‘물론 숨겨진 뭔가가 있기는 하지. 루시아를 플레이 했을 때 그 덕을 톡톡히 봤었고.’
루시아가 플레이어블이라 그런지 별 볼 일 없는 이 영지에도 기연이 숨겨져 있었다.
게임의 스토리를 바꾸게 될 정도로 영향력 있는 건 아니지만 꽤 도움이 되는 아이템.
‘아이템이라기보다 재료라고 하는 게 맞겠지.’
마도구의 제작재료, 그중에서도 특급 재료가 숨어 있었다.
무려 네임드급 아이템을 만들 수 있는 주재료였는데 루시아와 상성도 잘 맞는 아이템이라 항상 챙겨 가고는 했었다.
‘네임드급 마법사 아이템이라고 하니까 여명의 포효가 생각나네.’
그레이스를 죽이고 여명의 포효는 주인을 잃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바로 떠나 미처 확인을 못 했는데 놀랍게도 그 자리에서 곧바로 여명의 포효가 주인을 골랐다고 한다.
‘네임드급 아이템이 한번 주인을 고르면 그 주인이 죽기 전까지 선택을 바꿀 수 없지.’
놀랍게도 그 주인은 디에네였다.
안 그래도 그레이스 왕자를 직접 죽인 디에네였는데 여명의 포효에게까지 주인으로 선택되자 메이른 왕국이 난리가 났던 것은 말하지 않아도 눈에 선했다.
정말 알븐가가 아니었다면 디에네는 메이른 왕국에서 보낸 살수로 인해 쥐도 새도 모르게 암살을 당했을 수도 있었다.
‘어쩌면 진짜로 살수를 고용했을 수도 있겠는데?’
그만큼 비정한 게 정치의 세계.
걸리지만 않는다면 아무리 지위가 높은 사람이라도 쑤시고 보는 게 이 바닥이었다.
그래도 딱히 걱정은 되지 않는 게, 무려 그 디에네다.
지금의 성장 속도를 보면 나를 제외한 어떤 플레이어블 캐릭터도 그녀를 따라갈 수 없을 정도. 게다가 여명의 포효라는 네임드 아이템을 장착했으니 그 능력은 암살자 수십이 와도 두렵지 않을 거다.
어쨌든 이번 일로 인해 알븐 가문은 꽤 큰 보상을 메이른 왕국에게 보상해 주었다고 한다. 아무리 그레이스가 흑마법과 관련된 포션을 먹었다고 해도 왕자라는 지위가 우습게 볼 건 아니었고, 거기에 더해 여명의 포효까지 뜯겼으니 당연한 처사였다.
‘나야 디에네가 강해질수록 좋지. 거기다 케슈른의 걸림돌도 사라졌으니 오히려 잘됐다.’
뭐, 이런 일과 별개로 제국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메이른 왕국에 대고 화를 내고 있었다.
감히 타국에서 난동을 부렸다는 구실, 거기다 더불어 왕국의 왕자가 흑마법과 관련되었다는 구실은 정치적으로 공격하기 딱 좋았으니까.
다그닥― 히힝!
“손님. 도착했습니다.”
이곳이 바로 에버라스트 상단의 본점이자 홀링턴 자작의 본가인 홀링턴 성.
이름만 성일 뿐 생긴 건 목제 방벽으로 둘러싸인 저택이었다.
그래도 이 일대가 모두 홀링턴 영지에 속하는 것이니 보이는 게 전부는 아니었다.
이미 약속이 되어 있었기에 입구를 통과하는 것은 금방이었다.
나는 사용인의 안내를 받아 건물로 들어섰다.
“아! 크롬웰 각하!”
안내를 받고 들어가는 도중에 집사인 알프레드를 만났다.
이미 저번 계약 당시에 만난 적이 있기에 구면이었다.
“알프레드. 오랜만입니다.”
“예. 그간 평안하셨습니까. 각하.”
인사를 하면서도 묘하게 내 눈치를 살피는 것이 이상했다.
무슨 일이 있는 건가?
“무슨 일 있습니까?”
“정말 죄송합니다. 각하. 저희 주인님께서도 각하와 약속이 되어 있는 걸 알고 준비까지 하고 계셨는데 갑작스레 들이닥친 손님이 계셔서 그, 무시할 수가 없는 분인지라 먼저 자리를 하고 계십니다.”
이건 조금 괘씸하군.
딱히 내가 권위를 내세우는 게 아니라 당연히 먼저 약속을 잡은 입장에서 바람을 맞으면 기분이 나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말하는 걸 보니 나보다 높은 직위의 귀족이거나 그에 준하는 사람일 게 분명해 그냥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차라리 잘됐네. 루시아나 보러 갈까?’
어차피 이 건물 어딘가에 있을 테니 루시아나 만나고 와야겠다.
굳이 만나서 할 말은 없었지만 이왕 온 거 인사라도 해야지.
“그렇다면 혹시 루시아와 만날 수 있을까요?”
“아! 루시아 아가씨께 바로 말을 전하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는데.”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나와 알프레드가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계단에서 홀 쪽을 향해 내려오고 있는 잠옷 차림의 루시아가 보였다.
‘곰돌이가 그려진 잠옷이라…….’
쓸데없는 감상을 느끼며 인사를 건넸다.
“거의 일주일 만이네. 잘 지냈어?”
“네. 정말 따분해서 죽어 버리고 싶은 것만 빼면 잘 지냈어요.”
……그거 잘 지낸 거 맞지?
아무래도 그녀의 의지로 본가에 내려온 게 아닌 모양이다.
하긴 직접적으로 사건에 휘말렸으니 그녀의 부모로서는 집으로 불러들이고 싶을 거다. 하마터면 죽을 뻔했으니.
“대충 무슨 이야기인지 들었어요. 아무래도 중요한 손님인 거 같아서 아버지도 당황한 눈치이시던데 제가 대신 사과드릴게요.”
“너랑 나 사이에 무슨 사과야.”
“무슨 사이인데요?”
루시아가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며 물었다.
이것 봐라?
오늘따라 왜 이렇게 까칠해 보이냐.
“선후배 사이지. 알면서 물어? 됐으니까 일단 자리 좀 옮기자. 나 손님인데 이대로 세워 둘 거야?”
내 능청스러운 말에 루시아는 몸을 휙 돌리더니 말했다.
“따라와요.”
그런 나와 루시아를 조마조마한 눈초리로 보고 있는 알프레드가 불쌍하게 느껴질 따름이었다. 루시아가 평소에도 저런다는 걸 알면 불안해서 못 사시겠군.
루시아를 따라 계단을 걸어 올라갔다.
그녀를 따라간 곳은 다름 아닌 개인 연구실이었다.
‘지금 보니까 자다 나온 게 아니라 이런 옷차림으로 연구실에서 먹고 자고 했나 보네.’
연구실은 지저분했다.
온갖 잡동사니는 물론 식사도 이곳에서 하는지 아직 치우지 않은 식기 도구들이 눈에 띄었다. 이렇게 더러운 걸 보면 아마 개인 연구실에는 하인들이 출입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외동딸이니까 부모들도 루시아를 끔찍이 생각하지.’
그렇기 때문에 그녀의 병을 고치기 위해 더욱 필사적이었다.
덕분에 루시아의 방에는 비싸고 희귀한 약초나 마법 재료들이 먼지와 함께 뒹굴고 있었는데 그냥 발에 차이는 게 전부 고급 재료들이었다.
‘안타깝지만 루시아 혼자서는 절대로 치료제를 만들지 못할 거다.’
그녀는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 천재였다.
하지만 아무리 천재여도 특기인 분야와 그렇지 못한 분야는 나뉘는 법.
안타깝게도 그녀는 포션이나 제작 쪽에는 조금 약한 모습을 보였다.
물론 그조차도 범인들에 비하면 아득히 높은 수준의 재능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녀의 진짜 재능은 따로 있었다.
‘그 재능도 일단 병을 고치고 나서야 개화하니 우선은 치료제가 먼저다.’
이미 이 일주일 동안 계획은 다 짜 놓은 상태.
짜 놓기만 한 게 아니라 어느 정도 성과도 보이고 있었다.
최우선 과제를 그녀의 치료제로 상정했으니 그 결과는 당연했다.
‘루시아의 치료제를 만들 기회는 단 한 번뿐이니까. 신중하게 해야지.’
물론 재료를 더 구할 수 있다면야 기회는 더 생길 여지가 있었다.
하지만 쉽게 구할 수 없는 재료이고 어떤 변수가 생길지 모르니 한 번에 성공하는 게 베스트겠지.
“선배?”
“어. 미안. 잠깐 딴 생각했어.”
“비비안 선배 생각했어요?”
“뭐?”
갑작스러운 루시아의 물음에 기가 막혔다.
여기서 비비안이 왜 나와?
“왠지 그럴 것 같아서요.”
“갑자기 내가 비비안 생각을 왜 해. 너는 왜 갑자기 비비안이 생각났냐?”
그 정도로 친해진 건가?
요즘 둘이 같이 좀 어울려 다니는 것 같기는 한데 신기한 노릇이네.
‘플레이어블과 빌런이 친해지다니. 게임에서는 한 번도 보지 못한 조합이긴 하네.’
대답을 하려는 루시아를 향해 한숨을 한 번 내쉬고 고개를 저었다.
“헛소리 그만하고 지금 어디까지 했어? 저번에 중화제까지는 했었잖아.”
“아. 그니까 그게…….”
그 후로 한 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연구를 진행했다.
나는 그녀의 연구 목적을 모르는 척하며 도왔는데 굳이 왜 감추는지는 모르겠다.
‘약점이라고 생각하나?’
뭐, 상관없었다.
어차피 루시아의 치료는 내가 어떻게 해서든, 반드시 해낼 거니까.
그렇게 정신없이 연구를 하다 보니 어느새 이곳에 온 목적마저 잊고 연구에 몰두했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연구실로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아. 이야기가 다 끝났나 보네.’
기척을 느끼고 나서야 내가 이곳에 온 이유를 다시 상기했다.
아무래도 나를 부르러 온 하인이겠지.
“똑똑.”
근데 뭔가 이상했다.
연구실 문 앞에 선 자는 돌연 입으로 의성어를 내며 연구실 문을 두드려 왔다.
그 장난스러운 목소리에 문을 두드린 인물이 하인은 절대 아님을 직감했다.
‘만에 하나…….’
언제나 경계를 늦추지 않는 나는 어리둥절한 눈으로 문 쪽을 바라보는 루시아를 내 등 뒤로 숨겼다.
“선배?”
“잠시만.”
나는 갈락슈르에 손을 얹고 문을 향해 물었다.
“누구십니까.”
“똑똑! 들어가도 될까요?”
“누구시냐고 물었습니다.”
나는 갈락슈르를 뽑았다.
내 뒤편에 있는 루시아가 자그맣게 긴장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들어갈게요.”
상대는 그대로 문을 열어젖혔다.
나는 상대의 정체를 확인하며 고개를 갸웃했다.
“누구신데 함부로 들어오십니…….”
나는 말을 하다말고 그대로 멈췄다.
모습은 바뀌었지만 마나 재능이 생긴 나는 볼 수 있었다.
상대의 몸에 빼곡하게 그려 넣어진 수십 개의 마법진을.
마법진을 몸에 새긴 자들은 몇 있어도 저렇게 많이 새긴 자는 단 한 명.
“살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