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충돌
시체들이 널브러져 있는 호화로운 방에서 정적이 흘렀다.
질문을 받은 나는 이걸 어떻게 대답해야 무난하게 넘어갈 수 있을까 고민했다.
“왜 대답이 없지.”
참을성도 더럽게 없네.
결국 나는 아무 말이나 뱉었다.
“저도 이름은 모릅니다.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그저 평범한 검이라.”
“그 검. 내가 사지.”
하아. 최악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나는 갈락슈르를 팔 마음이 전혀 없었다.
그렇다고 호산에게 꺼지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개 같은 존스 새끼.’
이 새끼만 아니었어도 책자만 챙기고 그냥 나간 거였는데.
일부러 검집도 천으로 감싸서 가리고 다녔는데 싸우느라 검을 뽑은 게 원인이었다.
“왜 아까부터 대답이 뜸하지.”
살기?
아니다. 살기보다는 위압에 가까운 압박감이었다.
그런 묘한 기운이 마나와 섞여서 발산되는데 식은땀이 등을 적시게 만들었다.
‘도망칠 수 있을까.’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호산이 만능인 건 아니다.
잠시 동안만이라도 시간을 벌어 도망칠 수 있다면 가면을 벗고 복장을 바꿔 입어 피할 수도 있을 텐데.
‘문제는 그럴 시간을 벌 수 있냐는 거지.’
그것보다 호산이 방금처럼 다짜고짜 검을 뽑기 전에 입부터 열었다.
“정말 죄송하지만 아버지의 유품이라 함부로 팔 수가 없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목숨보다 유품이 소중한가.”
이젠 아주 대놓고 협박을 하네.
하긴 시끄럽다고 존스를 죽여 버린 녀석인데 무서울 게 있나.
나는 결국 속으로 분노를 삼키며 갈락슈르를 넘기기로 했다.
아무리 귀한 아이템이라고 해도 목숨보다 소중하지는 않았으니까.
‘네임드급 검이야 널리고 널렸다. 다른 걸 찾으면 되겠지.’
물론 널리고 널린 네임드급 검들의 대부분은 지금의 내가 가도 죽냐 사냐 하는 위험천만한 던전이나 마경에 있을 뿐.
사실 게임에서는 세이브 로드가 있으니 던전 공략을 실패해도 다시 도전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단 하나의 목숨으로 줄타기를 하는 중이니 우연히 얻은 갈락슈르가 너무나 아까웠다.
“팔겠습니다.”
결국 내 입에서 굴복의 뜻이 나왔고 호산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유품이라고 했으니 넉넉히 쳐서 1,000만 윌을 주겠다.”
“예?”
순간 나도 모르게 황당함이 담긴 물음이 튀어나왔다.
급히 입을 틀어막기는 했지만 지금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네임드급 검인 갈락슈르를 고작 1,000만?
1,000만이면 그리즈먼한테 주문 제작을 한 번 맡기는 것보다 쌌다.
“불만인가.”
“아닙니다.”
그래. 강제로 가져가는 것보다 1,000만이라도 어디냐.
하지만 지금 내 속은 그 어느 때보다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
직접 당한 부조리인 탓에 거의 황제에게 향하는 분노와 버금갔다.
‘반드시 강해져서 갈락슈르부터 되찾는다.’
나는 냉정해지려 애써 마음을 가라앉히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게 갈락슈르를 호산에게 건네려 할 때였다.
“올라가! 빨리 올라가!”
밑에서부터 소란스러운 소음이 들리더니 병장기를 든 사내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아무래도 조금 전에 도망친 여인들이 아래층에 소식을 전한 모양이었다.
“존스 님!”
“이 새끼! 네가 죽였냐!”
올라온 이들이 내게 무기를 겨누며 말했다.
복잡해지는 상황 속에서 호산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내가 죽였다. 별것도 아닌 일로 소란스럽군.”
하아.
정말 자기 멋대로 행동하는 빌런다웠다.
그 덕분에 위로 올라온 존스의 수하들은 어리둥절한 모습이 되어 나와 호산을 번갈아 보다가 이내 살기를 드러냈다.
“둘 다 죽여!”
올라온 이들은 다양했다.
마법사도 있고 검사, 창술사는 물론 흔히 찾아보기 힘든 무기들도 꼬나들고 있었다.
“버러지들이 죽고 싶어서 환장했군.”
호산이 검을 휘둘렀다.
갈색의 마나가 검에 감기며 검기 다발이 검풍처럼 휘몰아쳤다.
퍼버벅!
푸화악.
“으억.”
“컥.”
단 일수에 서너 명이 죽어 나갔지만 존스의 부하들은 굴하지 않았다.
애초에 음지의 인물들인 만큼 상대가 오러 마스터쯤 되는 이가 아닌 이상 쉽게 굽히지 않았다.
퍼엉! 화르륵.
휘익― 콰아앙!
온갖 마법이 날아오고 화살이나 암기 따위가 쏟아져 나왔다.
그들은 호산을 제일 위험한 인물로 본 모양인지 나보다는 그에게 신경이 쏠려 있었다.
‘그것보다 이거…….’
호산이 피해 낸 마법들이 바닥에 처박혔다.
그 파괴력으로 건물 전체가 흔들리는 게 느껴졌다.
곧이어 우리가 서 있는 바닥에 작은 실금들이 가기 시작했다.
콰직.
자그마한 소리.
하지만 그 소리는 이내 거대한 굉음으로 변했다.
쿠―웅!
콰드드득!
바닥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몸이 추락하는 걸 느끼며 상황은 더욱 악화되어 갔다.
‘아니지. 오히려 지금이 기회다.’
콰르르!
이내 밑으로 추락한 몸을 추스르려 할 때 고함이 들려왔다.
“쉬지 말고 공격해!”
바닥이 무너져 정신이 없는 와중에 수많은 살기가 감지되었다.
나는 재빨리 물러나며 공격을 피했지만 공격의 종류는 너무도 다양했다.
화르륵! 펑!
휘익― 팍!
검과 창이 내가 있던 자리에 찍히는 건 물론이고 온갖 마법과 화살, 투척병기가 날아왔다.
피한다고 피했음에도 여기저기에 상처가 생겼다.
한껏 전투 재능을 끌어올린 나는 감각만으로 어떻게든 나머지 공격들을 피해 내고 소란스러운 장내를 빠져나가려 했다.
그때 먼지가 피어올라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건물 잔해의 한가운데에서 엄청난 마나의 기운이 느껴졌다.
‘위험!’
나는 본능적으로 몸을 뒤로 젖혔다.
파앙―!
공기가 터지는 소음이 울려 퍼지고, 이내 젖힌 내 몸 위로 마나로 이루어진 검기가 스치고 지나가는 걸 느꼈다.
젖힌 그대로 뒤로 넘어진 나는 고개만 들어 앞쪽의 상황을 보았다.
‘미친놈. 진짜.’
그곳에는 검귀 호산이 한 손에 갈색빛의 마나를 두른 검을 든 채 운 좋게 살아남은 상대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쨌든 잘됐다.
지금 이 기회에 도망쳐야 했다.
다행히 호산은 자신을 공격한 이들을 신경 쓰고 있었고 적들도 내가 아닌 호산에게 시선이 몰려 있었다.
나는 최대한 기척을 죽이고 그 상태로 무너진 건물 잔해에서 빠져나와 밖으로 향했다.
‘일단 환락가부터 빠져나가야 돼. 그 후의 일은 그때 가서 처리한다.’
환락가 거리로 나오자 환락가에 있던 사람들이 전부 소란이 벌어진 경매장 건물을 구경하는 게 느껴졌다.
그들 틈을 비집고 최대한 호산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움직였다.
그 와중에도 나는 품속에 집어넣은 책자를 확인했다.
다행히 책자는 어디 한 군데 잘못된 곳 없이 멀쩡했다.
[레드 드래곤 크리브마허의 무덤]
‘용의 무덤?’
챙길 때는 존스의 부름으로 인해 확인하지 못한 아이템 표시였는데 지금 보니 드래곤 레어가 아니라 용의 무덤이었다.
특이하게도 이 게임의 용들은 다른 매체에서 등장하는 용과 달리 레어에서 죽음을 맞이하지 않고 따로 자신이 정해 둔 장소에서 죽었다.
그리고 그러한 장소의 대부분은 사람의 발길이 닿을 수 없는 곳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죽기 전에는 자신의 레어를 부수고 죽으러 가지. 그래서 레어가 희귀한 거고.’
무덤이나 레어나 둘 다 찾기 힘든 장소였다.
하지만 굳이 따지자면 레어를 더 선호할 수밖에 없었다.
가끔 불의의 사고나 사건으로 죽은 용들은 레어를 없애지 못하고 죽는데 그렇게 발견된 레어에는 값비싼 보물들이 숨겨져 있었다.
‘잠깐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드래곤의 무덤?
그렇다면 그곳에는 드래곤의 시체가 있다는 말이다.
시체하면 뭐다?
‘네크로맨서지.’
미쳤다. 미쳤어.
무조건 살아남아서 이곳을 조사해야 했다.
본 드래곤이라니 상상만 해도 침이 넘어간다.
그렇게 무작정 환락가를 벗어나는 데 성공한 나는 환락가에 가기 전에 대실해 둔 방으로 돌아와 가면을 벗은 뒤 옷을 갈아입고 짐을 챙겼다.
혹시 모르니 갈락슈르도 확장 가방에 넣어 놓고 대장간에서 산 300만 윌짜리 검을 허리춤에 찼다.
‘어찌어찌 위기는 넘겼네.’
아직 방심하기는 일렀다.
우선은 지금이라도 열차를 타고 뮤리엘을 떠야 했다.
나는 주변의 기척을 최대한 살피며 결국 수도로 돌아가는 열차에 탑승할 수 있었다.
분명 이쯤 되면 안심이 될 법도 하지만 내 직감은 여전히 불안한 감각을 내보내고 있었다.
‘뭐지? 분명 이 정도면 괜찮을 텐데…….’
그리고 그런 내 불길한 예감은 맞아떨어졌다.
쿵!
열차를 탄 지 5분도 채 되지 않았을 때, 앞쪽의 열차 칸 천장에서 무언가가 떨어져 내린 듯한 소음이 났다.
그리고 난 저러한 소음의 원인이 무언지 이미 겪어 보았다.
설마…….
따라온 건 아니지?
콰가가각.
앞쪽의 열차 칸 천장에서 검이 불쑥 튀어나오더니 구멍을 만들어 냈다.
그리고 나는 그 모습을 보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 뒤 칸으로 뛰었다.
‘이건 정말 예상하지 못했는데.’
분명 가면을 벗어서 외형도 바뀌고 차고 있는 검도 바뀌어서 못 알아볼 텐데.
그러고 보면 게임에서도 항상 언제 어디에 있든 들이닥치고는 했다.
그때는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무작위 이벤트가 발생했구나 하며 넘어갔는데 이제 보니까 따로 추적과 관련된 능력이 있는 게 분명했다.
쇄애애액―!
머리털이 쭈뼛 서는 기분과 함께 달리는 도중에 몸을 옆으로 틀었다.
그러자 뒤에서부터 날아온 날카로운 기운이 내 옆을 스치고 지나가 열차의 끝 칸을 개박살 냈다.
콰---앙!
“이 미친 새끼.”
검귀가 차분하다고?
그 말 취소한다.
역시 괜히 빌런이라고 불리는 게 아니었다.
나는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없음을 깨닫고 호산의 공격으로 뻥 뚫린 열차의 끝 칸에서 몸을 던졌다.
마나로 신체를 활성화한 덕분에 무사히 착지할 수 있었지만 문제는 그 이후였다.
“순순히 검만 주면 죽일 생각은 없었는데 아쉽게 됐군.”
어느새 따라온 호산이 스산한 살기를 드러냈다.
나를 도대체 어떻게 알아보고 쫓아온 걸까.
그러나 지금은 무의미한 물음이었다.
‘발악이라도 해 보는 수밖에.’
이미 한 번 도망쳤던 이상 자비 없는 호산이 나를 살려 둘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천천히 검을 뽑아 들었다.
언데드들은 물론, 나태를 사용하는 한이 있더라도 살아남아야 한다.
* * *
해가 지고 밤이 깊게 내려앉은 시간.
디에네는 오랜만에 자신이 좋아하는 잡지를 정독하고 있었다.
‘월간 빛나는 기사들.’
마침 이번 달 신간이 나온 터라 아침부터 지금까지 이 시간만을 기다려 왔다.
항상 모든 일과를 마친 후에 자신의 취미를 즐기는 게 습관이 된 그녀였다.
이번 달의 잡지에는 그녀가 예상했던 대로 올해 새로 로들렌에 입학하게 된 신입생, 루이스 아트만에 대한 글이 빽빽했다.
‘나쁘지 않았어.’
그녀도 소문의 후배가 궁금해서 직접 입학식에 참여했었다.
소문대로 루이스는 강직한 모습의 전형적인 기사의 모습이었다.
외모조차 그녀의 취향이었던 터라 한동안 그의 대한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해질 정도였다.
‘아니지. 그래도 내게는 그분이 있어.’
가면의 검사.
비록 이름도, 얼굴도 모르지만 그날의 기억은 평생토록 잊지 못할 강렬함을 선사했다.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될 날이 오기를 바라고는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이대로 신비함만 남긴 채 동심처럼 남아 있기를 바라는 모순이 그녀의 마음속에 자리해 있었다.
“음…….”
상상을 멈추고 잡지를 계속해서 읽었다.
언제나와 같은 유명한 기사들의 일화들과 자잘한 에피소드들 그리고 음유시인의 시들이 수록되어 있었다.
점점 끝을 보이는 잡지에 아쉬운 마음을 다잡으며 페이지를 넘기자 뜻밖의 내용이 적혀 있음을 확인했다.
‘로들렌으로 떠난 모나스의 신성들의 뒤를 이을 강력한 천재의 등장?’
뭔가 조잡해 보이는 기사였지만 그 뒤로 따라붙는 이름으로 인해 자신도 모르게 빠져들었다.
‘에버라스트 포션으로 그 이름을 알린 아드리아스 크롬웰이 직접 추천한 인재.’
아드리아스가 추천했다고?
글의 내용은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소년이 모나스 아카데미에 입학을 했다고 나와 있었다.
그 재능이 마치 루이스 아트만과 비견된다고 적혀 있었는데 과연 사실인지는 둘째 치고 그런 인재를 아드리아스가 추천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가 힘들었다.
‘아니. 이제는 나도 인정해야겠지.’
그동안은 애써 그를 무시해 왔지만 저번 기말 평가를 기점으로 인식이 바뀌었다.
어쩌면 진즉 버렸어야 할 생각을 치기 어린 마음에 버리지 못했던 던 것 같다.
아드리아스. 그는 이제 충분히 훌륭한 인재였다.
물론 자신에게 비하면 아직까지는 비루하기 짝이 없었지만 그렇다고 무시 받을 정도의 사내가 아님을 인정해야지.
아드리아스가 추천한 인재라는 벤자민 아니키우스를 사진으로 보자 조금 고개가 갸웃해졌다.
생긴 것만 봐서는 검조차 휘두르기 힘들어 보이는 마른 소년이었다.
‘그래도…….’
누구랑은 다르게 잘생기기라도 하네.
마침 생각해 보니 월요일에 있을 토너먼트 대전 상대가 아드리아스였음을 떠올렸다.
워낙 긴장이 없던 터라 상대조차 잊고 있었다.
“만나면 물어봐야지.”
벤자민 아니키우스. 솔직히 루이스에 비견된다고 하니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아드리아스가 추천한 인재라면 그와 친분이 있을 터.
이 기회를 살려 한번 만나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하는 디에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