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입학식
그리즈먼의 갑작스러운 물음에 당황한 벤자민은 그저 나를 올려다봤다.
나도 저 질문의 의미를 알 수가 없어 오히려 되물었다.
“뭐 하는 녀석이라니요?”
“내가 14살 때 이 일을 시작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지금까지 만나 왔다. 하지만 이 녀석과 같은 느낌은 처음이야.”
“느낌?”
“그래! 느낌! 말로 표현하기는 힘들지만 마치 검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것 같군.”
그리즈먼의 말에 속으로 경악을 삼켰다.
확실히 그는 보통의 대장장이가 아니었다.
나도 게임에서 플레이를 해 봤기에 상태창을 보고 그의 특성을 알 수 있었던 건데 단지 손을 만져 봤다는 것 하나만으로 유추해 낼 줄이야.
“검을 사러 왔다고?”
“예. 그렇습니다.”
“이런 녀석에게 평범한 검을 줄 수는 없지. 따라와라.”
대장간이 있는 방향으로 이끄는 그리즈먼을 일단은 따라갔다.
설마 히든 피스인가.
벤자민을 플레이 했을 때는 아카데미와 전혀 연관이 없었기에 그리즈먼과 연관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애초에 그에게는 루벤스가 있으니 게임 속에서는 눈치 한 번 안 보고 마검을 휘두르고 다녔지.
단지 의외인 점은 루이스를 플레이 했을 때는 이런 일이 없었다는 것이다.
‘검사로서의 재능은 루이스보다 벤자민이 뛰어나서 그런 건가.’
대신 루이스에게는 마나의 재능이 있으니 따지고 보면 쌤쌤인 것 같기도 하고.
그리즈먼은 대장간 내부에서도 깊숙한 구석으로 우리를 데리고 갔다.
그가 간 곳은 어느 창고 비슷한 공간이었는데 온갖 자물쇠로 잠겨져 있었다.
‘게임에서 항상 궁금했던 장소였는데 여기서 보게 될 줄이야.’
자물쇠를 하나하나 풀어내고 마침내 마법으로 처리된 마지막 자물쇠까지 열자 그 안쪽이 공개되었다.
“내 증조할아버지 때부터 모아 온 물건들이다. 가보나 마찬가지지!”
안타깝게도 안으로는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대신 그는 검을 한 자루 들고 나왔는데 검집에서 꺼내자 새하얀 검신이 인상적이었다.
“이건 내 할아버지께서 빚어낸 작품이다.”
그리즈먼이 벤자민에게 검을 건넸다.
벤자민은 넋이 나간 눈빛으로 조심스레 검을 받았다.
“이름은 ‘하얀 악몽’, 알지는 모르겠지만 백강철이라는 금속으로 만들었지. 폼멜과 일체형으로 만들어 낸 역작이다.”
백강철에다가 일체형이라니.
돈을 얼마나 쏟아부은 검인 거냐.
내가 알기로 같은 무게의 황금보다 두세 배는 비싸다고 알고 있었다.
그런 검을 지금 벤자민에게 건넨 거니 강매를 하고 있는 건가?
‘물론 돈이 있다고 팔 물건도 아니겠지만.’
검을 자세히 보자 아이템 표시가 바로 나왔다.
[하얀 악몽]
[마나 전도율 110%]
‘엄청 좋네. 명검인데?’
비록 네임드급 아이템에는 못 미치지만 평범한 검치고는 사용된 소재 때문인지 엄청난 성능을 자랑했다.
마나 전도율이 80%를 넘는 걸 찾기가 힘든데 이건 무려 110%니 설명이 따로 필요 없었다.
‘내 갈락슈르도 73%밖에 되지 않지. 물론 봉인을 풀기 전이지만.’
73%도 명검 축에 속하니 정말 말 다 했지.
하얀 악몽을 든 벤자민은 홀린 듯 검을 살피다 가볍게 휘둘렀다.
가벼운 휘두름에도 깊이가 느껴져 역시 검에 대한 재능은 남다르구나 싶었다.
“역시 내가 제대로 봤군. 그동안 마음에 드는 사람이 없어서 주인을 찾지 못했던 검인데 이제 우리 할아버지께서도 편히 쉴 수 있겠어.”
“이런 걸 제가 받아도 될까요?”
“그럼. 명검에는 모두 주인이 있는 법. 솔직히 말하면 네 재능에 비해 검이 모자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하얀 악몽이 아무리 좋아도 마검 루벤스에 비하면 조족지혈이긴 하다.
루벤스는 마나 전도율도 높지만 착용자의 마나를 증폭시키고 신체 능력까지 올려 주는 개사기급 아이템이었으니.
“감사합니다.”
“그래. 나도 그 녀석이 주인을 찾아 기쁘다. 다음에 시간이 나면 다시 한 번 들르거라. 내 욕심이긴 하지만 다음번에는 내가 직접 만든 검을 쥐여 주고 싶군.”
훈훈하네.
근데 나한테는 뭐 없나?
아쉽게도 그게 전부였는지 그리즈먼은 용무가 끝났다며 손을 휘저었다.
그렇게 밖으로 나오자 카운터를 보고 있던 조수가 벤자민이 든 하얀 악몽을 보며 손을 내밀었다.
“5,500만 윌입니다.”
“컥.”
그냥 주는 거 아니었어?
주인 찾았다고 좋아할 때는 언제고.
물론 생각했던 금액보다 훨씬 싸기는 했다.
5,500만이면 재료비도 충당되지 않겠지.
‘일단은 12개월 할부로…….’
역시 아무리 생각해도 강매가 맞았다.
* * *
봄이라고 불리기에는 아직 쌀쌀했지만 아카데미의 분위기는 그 어느 때보다 들떠 있었다.
오늘은 드디어 파릇파릇한 신입생들이 들어오는 날이었다.
‘벤자민은 잘하고 있겠지.’
모나스 아카데미는 전날에 이미 입학식을 마쳤다.
멀리서 확인한 벤자민은 내가 곁에 없어도 특유의 어른스러운 분위기로 잘 있는 것 같았다.
비록 등에 멘 루벤스와 허리춤에 찬 하얀 악몽으로 눈에 띄는 모습이긴 했지만 전과 같이 예민한 모습은 보이지 않아 다행이었다.
“야. 너 그거 들었냐? 이번에 모나스 아카데미 역대 수석 기록들을 갈아 치운 녀석이 들어온다던데?”
“당연히 들었지.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근데 그것도 기사학부 얘기잖아.”
“그렇긴 해. 우리랑 크게 상관은 없지. 그래도 대단한 건 대단한 거잖아.”
신입생들이 모이게 될 대강당에 미리 도착한 나는 생각보다 많은 구경꾼들에 놀랐다.
입학식의 참여 여부는 자율이라 이번이 처음으로 참석한 건데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몰리는지는 몰랐다.
‘그나저나 다 루이스 이야기를 하는군.’
루이스는 입학 때부터 떠들썩한 캐릭터였다.
말 그대로 주인공이 어울리는 캐릭터.
실제로 이 세상에 단 하나의 플레이어블 캐릭터를 선택하라고 하면 단연코 루이스가 그 자리를 차지할 정도였다.
‘나랑은 정반대.’
마치 대척점에 선 기분이었다.
물론 나 혼자만의 망상일 뿐, 루이스는 내 존재조차 모르고 있겠지.
드디어 대강당에 신입생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입학식인 만큼 기사학부와 마법학부 신입생들이 함께 들어왔는데 그들의 표정에서 묘한 긴장감을 읽을 수 있었다.
‘군기가 바짝 들었는데.’
실제로 마법학부와 달리 기사학부는 선후배 간에 묘한 군기 문화가 있었다.
게임 속에서는 그딴 거 신경 안 쓰고 내 멋대로 행동했지만 현실이 된 만큼 플레이어블 녀석들에게 어느 정도 영향이 미칠 듯했다.
“신입생 대표는 앞으로 나와 주세요.”
드디어 루이스의 모습을 확인하는 건가.
나는 강당으로 올라가는 갈색 머리의 청년을 보았다.
훤칠한 이목구비에 전투에 적합한 체형 그리고 푸른빛의 눈동자가 인상적인 남자였다.
‘다른 플레이어블도 그렇지만 쟤도 실제로 보니까 진짜 잘생겼네.’
루이스를 보게 되자 1년 동안 그를 플레이 했던 추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강제로 전역하게 된 군대로 인해 아무 준비가 되어 있지 않던 그리고 죽은 전우들의 빚을 아직 갚지 못했다는 심경으로 혼란스러울 때였다.
어쩌면 현실 도피라고 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나는 루이스를 플레이 하며 또 다른 세상을 자유롭게 누빌 수 있었다.
게임에서는 군대와 같이 퀘스트라는 명목의 임무도 주어지니 내게 있어서는 또 하나의 현실이나 마찬가지였다.
‘감회가 남다르지.’
나에게 루이스는 주인공 이상의 존재감이었다.
그런 루이스가 앞에 나와서 선서를 하고 있는 모습이 어쩐지 익숙하면서도 어색했다.
게임은 정확히 개학식부터 시작이 된다.
그러니 아직까지는 내가 모르던 과거.
“……이와 같이 신입생 일동은 로들렌의 명예를 드높일 것을 선사하는 바입니다.”
짝짝짝짝.
신입생 대표로 뽑힌 루이스의 선서가 끝나고 그가 강당에서 내려갔다.
그때 내 시선을 느꼈는지 우연히 나와 시선이 마주쳤다.
내가 선 방향은 마법학부 학생들만 모여 있는 곳.
굳이 여기에 시선을 주다니 의외였다.
‘넌 내가 어떻게든 키워 주마.’
입가에 미소가 짙게 드리워졌다.
드디어 진짜 시작이라는 기분이 물씬 느껴졌다.
* * *
기사학부의 무료 기숙사인 단풍 기숙사의 옆에는 학생들을 위한 단련장이 존재했다.
몸을 움직여서 훈련을 해야 하는 만큼 어마어마한 넓이를 자랑하는 단련장에는 몇몇의 학생들이 수련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단련장으로 누군가가 막 도착했다.
‘여기가 단련장…….’
루이스는 이제 자신이 5년간 지내게 될 장소를 확인하던 차였다.
이미 오후 동안 기사학부 부지 이곳저곳을 안내받고 들러 보았지만, 막상 기숙사 옆에 붙어 있는 단련장은 가깝다는 이유로 소개받지 못했었다.
강의동 근처에 위치한 연무장과는 다르게 본격적인 운동기구들이 비치되어 있는 게 좋았다.
그리고 그것들은 하나 같이 값이 나가 보이는 제품들이었다.
‘역시 로들렌 아카데미.’
온 김에 잠깐 몸이나 풀고 가야겠다는 생각을 하던 중에 낯익은 얼굴이 눈에 띄었다.
루이스는 반가운 마음에 곧바로 상체를 단련하고 있는 여학생에게 다가갔다.
날렵한 몸매가 돋보이는 여학생은 금빛 단발을 땀에 적신 채 운동을 하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무척이나 건강미 넘쳤다.
“세레나. 입학 첫날부터 열심이네?”
루이스의 인사말에 세라나가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
“루이스? 너도 여전하네. 이런 날에는 좀 쉬어라. 그래야 내가 따라잡지.”
“하하. 미안. 너 같이 뒤를 바짝 쫓아오는 애가 있으니까 나도 쉬지를 못하겠네.”
한 차례 웃음을 터트린 그들은 모나스 아카데미 시절부터 함께 해 온 라이벌이자 동료였다.
수석 루이스, 차석 크리스 그리고 그 뒤를 바짝 추격하는 세레나까지 3강 구도의 모나스 아카데미 신성들.
루이스와 세레나가 건강한 라이벌 관계였다면 크리스는 그렇지 않았다.
제국의 오러 마스터로 명성이 높은 유노르 후작의 아들인 크리스는 귀족 우월주의를 바탕으로 항상 평민인 루이스와 맞부딪히는 사이였다.
세레나 또한 귀족 출신이었지만 실력을 우선하는 그녀로서는 그런 크리스의 행동이 한심해 보일 뿐이었다.
그렇게 선의의 경쟁을 하며 함께 단련을 하게 된 둘은 잠시 대화를 잊은 채 운동에 빠졌다.
마침내 쉬는 시간이 되자 빠져나간 수분을 보충하며 루이스가 말을 걸었다.
“아, 맞다. 세레나.”
“왜.”
“너 혹시 아까 전에 입학식에서 마법학부 선배들 봤어?”
“아니. 왜?”
“거기에서 조금 특이한 선배를 봤거든.”
루이스는 신입생 대표 선서를 마치고 강당에서 내려올 때 시선이 마주쳤던 남자를 다시 한 번 떠올렸다.
녹빛이 섞인 짙은 검은 머리가 치렁치렁하던 사내.
솔직히 썩 좋은 인상은 아니었지만 그 눈빛과 자세, 표정은 뭔가 특이했다.
게다가 무엇보다도…….
“뭐가 특이했는데?”
“검을 차고 있었어. 처음에는 잘못 본 줄 알았는데 잘못 본 게 아니더라고.”
“검? 아! 나 그 선배 알아.”
세레나가 손뼉을 치며 말했다.
그녀는 생각을 해 보는 듯 입에 손을 얹고 있다가 말을 이었다.
“아마 아드리아스 크롬웰 선배일 거야. 검을 찬 마법학부 선배는 그 사람밖에 없으니까 아마 확실할걸.”
“아드리아스 크롬웰.”
루이스가 나지막이 그의 이름을 곱씹었다.
그런 루이스의 반응을 보며 세레나가 연이어 말했다.
“그 선배 이번에 대박 쳤잖아. 너도 들어 본 적 있을걸? 에버라스트 포션이라고.”
“들어봤지.”
“그거 만든 선배야. 근데 그 선배 소문으로는 매일 새벽에 일어나서 기사학부 학생처럼 단련한대. 물론 부풀려진 소문이겠지만 그래도 마법사가 연구를 안 하고 운동을 한다니까 웃기긴 하네.”
“세레나.”
갑자기 진지하게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루이스를 세레나가 물음표를 띄우며 말했다.
“갑자기 이름은 왜 불러?”
“그 사람 우습게 보면 안 돼.”
“뭐?”
“어쩌면 나보다 강할 수도 있어.”
너무나 뜬금없는 루이스의 말에 세레나는 피식 미소를 흘리며 그의 어깨를 쳤다.
“갑자기 뭔 헛소리야. 입학 첫날이라 기 빨렸어?”
“농담 아니야.”
루이스는 한껏 진지해진 얼굴로 말했다.
“사람 자체가 강하다는 걸 느꼈어. 그가 마법을 사용하든 다른 수를 쓰든 싸우게 된다면 이길 거라는 확신을 못 하겠더라고.”
루이스가 너무나 진지한 태도로 말하자 세레나는 질린다는 표정으로 그를 보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넌 그 버릇 좀 고쳐라. 툭 하면 싸울 생각만 하고. 아무리 학년이 높아도 마법사인 선배가 수석 입학자인 너를 뭔 수로 이겨! 됐으니까 빨리 다음 세트 들어가자.”
“음. 그래.”
운동에 집중하려 했지만 한 번 떠오르게 된 아드리아스 크롬웰의 잔상을 지우기가 어려웠다.
그 호흡과 차분한 표정 그리고 서 있던 자세까지.
극한의 상황에서도 냉정하게 검을 휘두르는 아드리아스의 환영이 루이스의 상상 속에서 아른거렸다.
‘내가 지금 뭔 말도 안 되는…….’
아드리아스 크롬웰은 마법사다.
검을 차고 다닌다고는 해도 그건 그가 조금 특이한 것일 뿐 아무 의미가 없었다.
세레나의 말대로 신경 써야 될 일이 많아 예민해진 것 같다고 느끼며 운동을 이어나갔다.